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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지음 | 고전문학


호밀밭의 파수꾼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지음





1장


내 얘기를 정말 듣고 싶다면, 아마 내가 어디서 태어났고, 엉망이었던 어린 시절이나 부모님이 나를 낳기 전 무슨 일을 했는지 같은 지루한 얘기부터 궁금할 거다. 하지만 난 그런 얘기엔 관심 없으니 생략한다. 그런 건 귀찮기도 하고, 무엇보다 부모님이 나에 대해 그런 걸 듣는다면 아주 난리 날 테니까. 그냥 크리스마스 전에 나에게 벌어진 이상한 일에 대해 얘기해 주겠다. 그 일이 있은 후 몸도 지치고 해서 여기 와서 쉬게 된 거다.

내 형 D.B.는 할리우드에 있다. 한때는 단편집도 내고 작가로 꽤 괜찮았는데, 지금은 영화 쪽 일, 다시 말해 돈을 좇는 일을 하고 있다. 난 영화라는 것 자체가 싫다. 형의 단편 중에 「비밀 금붕어」라는 게 있는데, 주인공이 자기 돈으로 산 금붕어를 아무에게도 안 보여주겠다고 고집하는 얘기다. 형이 왜 영화로 갔는지 참 아쉽다.

어쨌든 내가 얘기를 시작하고 싶은 건 펜시 프렙이라는 학교를 떠나기로 한 날부터다. 펜시 프렙은 펜실베이니아에 있는 학교로 광고를 엄청 많이 하는데, 광고에는 멋진 남자가 말 타고 뛰어오르는 사진과 함께 “1888년부터 젊은 남자들을 멋진 인재로 키워냈다”고 써있다. 하지만 그건 헛소리다. 내가 아는 멋진 인재는 손에 꼽을 정도다. 마지막 축구 경기 날, 난 팀을 응원하기보단 학교에서 제일 높은 지대인 톰슨 언덕에 서 있었다. 그곳에서 경기를 내려다볼 수 있었으니까. 사람들이 펜시 팀을 응원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난 거기에 없었다.

사실 나는 뉴욕에서 펜싱 팀 매니저로 참가하고 돌아온 참이었다. 그런데 펜싱 장비를 전부 지하철에 놓고 내리는 바람에 시합도 못 하고 팀원들이 나를 완전히 따돌렸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바로 역사 선생님 스펜서에게 작별 인사를 하러 가기 위해서였다. 내가 떠나기로 결심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학교에서 쫓겨나는 것도 이번이 네 번째다. 내 성적이 엉망이라 내년부터 오지 말라는 통보를 받았지만, 학교 분위기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돈 많은 집 아이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그런 애들이 꼭 문제를 일으킨다.

날씨는 차갑고 손발이 시렸다. 지난주에는 낙타털 코트도 도난당했다. 추위를 견디며 그 자리에서 내려다보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떠나기 전에 무언가를 느끼고 싶었다. 슬픈 작별이든 어떤 작별이든, 떠날 때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떠나는 건 별로니까. 그러다 문득 떠오른 기억이 있었다. 가을에 친구 두 명과 학교 앞에서 축구공을 던지던 날이었다. 해는 점점 지고 있었고 어두워졌지만 우리 셋은 공 던지기를 멈추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생물 선생님이 창문을 열고 우리에게 저녁 식사 하라고 소리쳤고 그때에야 비로소 멈췄다. 그 기억 덕분에 난 떠날 준비가 된 기분이 들었고, 스펜서 선생님 댁으로 뛰어갔다.

집에 도착해 초인종을 울리니 선생님의 부인이 나왔다. 그녀는 따뜻하게 맞아줬지만 내가 학교에서 쫓겨난 걸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다.



2장


스펜서 선생님 집은 작고 따뜻했지만, 들어가자마자 후회가 밀려왔다. 약병과 연고 냄새가 온 방에 가득했고, 선생님은 낡고 퀴퀴한 가운을 입고 계셨다. 그 모습이 왠지 우울하게 다가왔다. 그래도 선생님은 나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콜필드? 들어와, 얘야.” 그는 늘 수업 외에는 목소리를 높이는 분이었다.

나는 가만히 침대에 앉아서 그가 준 쪽지 덕분에 찾아왔다는 걸 전했다. “굳이 그럴 필요 없으셨어요. 어차피 작별 인사는 하려고 했으니까요.” 스펜서 선생님은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지만, 곧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래서 이제 정말 떠나는 거구나?” 그가 물었다. 나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다시 한참을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고개를 끄덕일 때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느껴졌다.

“터머 박사님과 무슨 이야기를 나눴니?” 그가 물었다. 터머 박사는 “삶은 규칙에 맞춰서 해야 하는 게임”이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설명하자, 스펜서 선생님도 “삶은 게임이지, 규칙에 따라야 하는.”이라고 되풀이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잘난 사람들한테나 게임이지, 나 같은 사람한테는 그냥 아무 의미도 없는 헛소리 같았다.

“부모님께는 연락했니?” 그가 물었다. “아니요, 수요일 밤에 집에서 뵐 것 같아서요.” 내 대답에 그는 한숨을 쉬며 부모님께서 이 소식을 어떻게 받아들이실 것 같냐고 물었다. “아마 실망하실 거예요.” 내가 말했다. “벌써 네 번째 학교거든요.” 나는 이 말을 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그는 다시 한 번 끄덕이더니, 내가 학교생활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은 게 문제라고 했다.

그는 내가 역사 수업에서 시험지에 뭐라고 적었는지 다시 들춰보며, 내가 이집트 문명에 대해 썼던 낙서 같은 글을 낭독했다. “이집트는 현재에도 여전히 흥미로운 과제입니다.”라고 나는 적었고, 그걸 읽는 동안 그가 내 글을 꼼꼼히 살피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뭔가 속이 상했다. 나는 단순히 그가 나를 낙제시킨 걸 미안해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대충 적은 건데, 굳이 그걸 읽어줄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선생님이 나를 걱정하는 건 알지만, 그저 빨리 자리를 뜨고 싶었다. 선생님이 “네가 내 입장이라도 그렇게 했을 거니?”라고 물으셨을 때, 나는 “네, 저라도 그렇게 했을 거예요.”라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내가 얼마나 바보 같은지에 대한 이야기로 이야기를 돌렸다.

문득 뉴욕의 센트럴 파크에 있는 연못이 떠올랐다. 연못이 얼면 그 안에 살던 오리들은 어디로 갈까 하는 생각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동물원에 실려 갈까? 아니면 그냥 어디론가 날아가는 걸까? 그 생각을 하며 그와 대화를 이어갔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대화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했다. 그는 갑자기 나에게 “너의 미래에 대해 아무 관심도 없는 거냐?”고 물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잠시 생각하다가 “조금은요. 하지만 그리 신경 쓰지 않아요.”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가 “뒤늦게 후회하게 될 거야.”라고 말했다. 그의 말은 다가올 미래에 대한 막막함을 느끼게 했고, 그가 말하는 ‘때늦은 후회’라는 단어가 너무 무겁게 다가왔다. “아마 그렇겠죠.” 내가 대답했다.

마지막으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선생님, 저 괜찮을 거예요. 누구나 다 이런 시기를 겪잖아요. 그냥 지나가는 일일 뿐이에요. 걱정 마세요.” 스펜서 선생님은 내 말을 믿지 않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다시 한 번 핫초코라도 마시고 가라며 붙잡았지만, 나는 “아니요, 그냥 가야 해요.”라고 말하며 손을 흔들었다. 우리는 잠시 악수를 나눴고, 내가 문을 닫고 나설 때 그가 “행운을 빈다!”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 말을 듣고 싶지 않았는데도, 어쩐지 그 말이 오래도록 남았다. ‘행운을 빈다’라니, 그 말이 이렇게 쓸쓸하게 들릴 줄 몰랐다.



3장


나는 스스로를 대단한 거짓말쟁이라 생각한다. 어디 가는 중이냐고 물으면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고, 엉뚱하게 오페라 보러 간다고 말해버리니까. 그래서 스펜서 선생님한테 체육관 가서 장비 챙긴다고 한 것도 사실은 완전 거짓말이었다. 사실 내 장비는 체육관에 있지도 않으니까. 펜시에서 내가 지낸 기숙사는 오센버거라는 사람이 기부금을 내서 그의 이름이 붙은 건물이었다. 오센버거는 시체 처리 사업으로 떼돈을 번 사람으로, 가족 장례식 비용을 싸게 해줘서 부자가 되었다. 그가 기부한 덕에 기숙사에 그의 이름이 붙었고, 그가 학교에 와서 장황한 연설을 했다. 뭐, 예수님과 얼마나 친한지, 기도하며 산다는 식의 연설이었는데 정말 지겨웠다. 중간에 마살라라는 친구가 방귀를 껴서 좀 웃기기도 했지만 말이다.

방으로 돌아오니, 난방이 잘 들어와서 따뜻하고 편안했다. 코트를 벗고 새로 산 빨간 사냥모자를 뒤로 돌려 쓰고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날 아침 뉴욕에서 산 모자인데, 이 모자가 뭔가 나한테 잘 어울리는 느낌이 들었다. ‘아프리카의 나날’이라는 책을 읽으며 조금이나마 마음을 달래고 있었는데, 바로 그때 애클리가 내 방으로 슬며시 들어왔다. 그는 내가 방에 있을 때면 언제든지 나타나곤 했다. 애클리는 거무스름하고 기운 빠진 태도를 가진 녀석이었다. 들어와서는 항상 내 책상이나 서랍 위의 물건을 건드리며 천천히 방을 돌아다녔다. 그런 그의 모습이 짜증스러웠지만, 나는 그냥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안녕’ 하고 무덤덤하게 인사했다. 애클리는 관심도 없으면서 내게 펜싱 시합 결과를 묻더니, 내가 지하철에 장비를 두고 와서 경기 자체가 없었다고 하자, “지하철에? 정말 거기다 놓고 왔단 말야?”라며 시큰둥하게 되물었다.

그러다 내 책을 툭 건드리며 제목을 묻고, 그 책이 재미있냐고 또 한 번 물어왔다. 나는 대충 “이 문장은 아주 대단해.”라고 비꼬았지만, 그는 알아듣지 못했다. 아무래도 책을 읽는 건 포기해야 할 것 같아서 그냥 책을 내려놓고 그가 내 방을 거닐며 스트라드레이터와 나의 물건을 만지작거리는 걸 지켜보았다. 스트라드레이터와 나는 룸메이트인데, 애클리는 그를 정말 싫어했다. 그가 스트라드레이터를 비난하기 시작하면 내가 “그 녀석은 그런 나쁜 애 아니야.”라고 말하려 해도, 애클리는 그의 “우월한 태도”를 참을 수 없다는 둥 계속 비꼬았다. 심지어 내가 손톱 깎는 걸 테이블 위에서 하라고 부탁해도 무시하고 바닥에 떨어뜨려서, 밤에 맨발로 다니다 그걸 밟을까 걱정했다. 그는 정말 남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타입이었다.

그때 마침 스트라드레이터가 방으로 들어왔다. 그 녀석은 늘 바쁘게 서두르는 스타일이었고, 들어오자마자 내 양 볼을 톡톡 쳐가며 “오늘 밤에 너 나갈 거야?” 하고 물었다. 그의 여유로운 태도가 좀 얄미웠지만, 어쨌든 나는 “아마도?”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내 재킷을 빌려 입겠다고 했다. 나는 “네 어깨가 너무 넓어서 늘어날까 걱정인데.”라고 했지만, 그는 대수롭지 않게 “안 늘려.”라며 재킷을 가져갔다. 그가 면도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나는 그가 꽤 매력적인 외모를 가진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거울을 보며 자신의 외모에 자신감을 보이는 녀석이었다. 그래도 이곳에선 나름 친근하게 인사하고 지냈다. 나는 스트라드레이터에게 재킷을 빌려주지 않으려는 이유를 농담 삼아 말해주며 잠깐 웃었다. 그는 곧 샤워실로 나가고, 나는 방에 남아 애클리가 스트라드레이터에 대한 불평을 계속하는 걸 들으며 이 이상한 삼각관계를 어떻게 견뎌야 할지 잠시 생각했다.

스트라드레이터가 준비를 마치고 다시 방에 들어오자 나는 그의 데이트 상대가 누구인지 물었다. 그가 “별관에서 기다려.”라고 말할 때, 이상하게도 나는 그 상대가 누군지에 대해 조금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의 데이트 상대가 과연 어떤 여자인지 상상하면서, 다시 내 빨간 사냥모자를 쓰고 생각에 잠겼다.



4장


어차피 할 일도 없던 차라 나는 스트라드레이터가 면도하는 동안 같이 욕실에 앉아 수다를 떨었다. 그 시간에 욕실에 있던 사람은 우리 둘뿐이었고, 덕분에 꽤 뜨거운 공기가 푹푹 찼다. 스트라드레이터는 중간 세면대를 쓰고 있었고 나는 옆 세면대에 앉아서 수도꼭지를 이리저리 돌리는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 그는 ‘인디아의 노래’를 휘파람으로 불었는데, 음정 하나 맞지 않고 매번 엉망이었다.

스트라드레이터도 속으로는 더럽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 겉으로는 멀쩡하게 생겼지만 면도날을 보자니 녹이 슬고, 거품과 수염 찌꺼기로 덕지덕지였다. 그는 항상 잘생긴 얼굴을 유지하고 싶어 했는데, 사실 그건 자기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이다. 부모님들이 졸업 앨범에서 사진을 보고 “이 녀석 누구야?” 하고 말할 정도의 전형적인 잘생긴 얼굴이다. 하지만 나는 그의 진짜 모습이 어떤지 알고 있었다. 스트라드레이터가 나에게 도움을 청했을 때 나는 별로 신나지 않았다. 그는 항상 부탁을 쉽게 하는 타입이다. “영어 과제 좀 써줄래?”라며 큰 소리를 쳐대길래 나는 “나 같은 퇴학생한테 과제를 부탁하는 게 좀 아이러니하지 않아?”라고 퉁명스레 대꾸했다. 그는 웃으며 그냥 대충 묘사하는 글이면 된다고 했다. 그런 부탁을 하는 도중에도 하품을 했다. 그리고는 내 글 실력을 알기 때문에 너무 잘 쓰지 말라며, 구두점 같은 것도 대충 하라는 둥 뻔뻔하게 구는 것이다.

나는 지루해져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즉석에서 탭댄스를 추기 시작했다. 마치 뮤지컬에 나오는 배우들처럼 과장되게 움직이면서 “내가 주지사의 아들이라니까”라고 외쳤다. 사실 춤을 잘 추는 건 아니지만 그냥 스트라드레이터를 웃기고 싶었다. 그는 거울로 나를 보며 웃었고, 그 모습이 꽤 흐뭇해 보였다. 스트라드레이터는 내 사냥 모자에 관심을 보였다. “뉴욕에서 샀어. 맘에 들어?”라고 물었더니, 그저 “멋있네.”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곧바로 “그 과제 꼭 써줄 거지?”라며 또 부탁했다. 나는 애써 피하며 “시간 있으면 쓰고, 없으면 말지.”라고 슬쩍 넘어갔다.

나는 스트라드레이터에게 데이트 상대가 누구인지 재차 물었고, 그가 제인 갤러거라는 이름을 꺼내는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제인은 우리 집 근처에 살았던 소녀였다. 우리는 체크 게임을 자주 했는데, 그녀는 왕이 되면 절대 움직이지 않고 뒷줄에 나란히 늘어놓는 걸 좋아했다. 그때 그녀가 얼마나 진지하게 게임을 대했는지 기억한다. 그 말을 스트라드레이터에게 해줬지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섹시’한 이야기에만 관심 있는 녀석이라 어쩔 수 없다.

나는 제인에 대해 떠올리다 문득 그녀에게 가서 인사라도 할까 고민했지만, 막상 나서려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스트라드레이터는 나에게 “그냥 가서 인사하지 그래?”라고 무심히 말했지만, 나는 준비가 안 된 것 같았다. 스트라드레이터는 준비를 마친 후 내 코트를 빌려 입고 나가면서 내 부탁을 가볍게 받아들였다. “내가 쫓겨난 건 얘기하지 말아줘.” 그가 알겠다고 대답했지만, 진심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그가 나가고 나서 방에 홀로 남은 나는 생각에 잠겼다. 제인과 스트라드레이터가 함께 있는 상상만 해도 신경이 곤두섰고, 갑자기 마음이 몹시 어지러워졌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애클리가 샤워 커튼을 쓱 밀고 다시 들어왔는데, 이상하게도 이번만큼은 그가 반가웠다. 얄미운 녀석이라도, 스트라드레이터와 제인에 대한 생각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게 해주었으니까.



5장


펜시에서는 토요일 저녁마다 스테이크를 준다. 별로 맛있는 것도 아니고, 어찌나 딱딱한지 썰기도 힘들다. 아마 다음 날 부모님들이 오면 “어제 뭐 먹었니?”라고 물어볼 때 아이들이 “스테이크요.”라고 대답하길 바라는 거겠지. 그날의 감자는 덩어리가 가득하고 디저트로 나오는 ‘브라운 베티’는 어린아이들만 먹는다. 애클리처럼 아무거나 먹는 애들 말고는 그걸 손대는 애들이 없다.

식당을 나서니 눈이 세상에 소복이 쌓여 있었다. 눈 덮인 풍경이 너무 예뻐서 다들 눈싸움을 하며 즐거워한다. 나는 그저 그런 놀이가 귀찮았지만, 그러고 있을 수만은 없어서 친구 맬 브로사드와 함께 햄버거라도 먹으러 버스를 타고 애거스 타운에 갔다. 맬은 레슬링 팀이라 힘도 좋고 성격도 괜찮은데, 내가 애클리도 데려가자고 하니까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애클리가 토요일 밤마다 방에 틀어박혀 여드름이나 짜고 있는 게 딱해서 데리고 가고 싶었다. 애클리가 준비하는 데는 시간이 한참 걸렸다. 나는 그 시간 동안 창밖으로 손을 내밀어 눈을 한 움큼 쥐어 단단히 뭉쳤다. 던지고 싶었지만, 눈처럼 하얗고 깨끗한 걸 망가뜨리기 싫어서 결국 던지지 않았다. 버스에 올라타고 나서야 그 눈덩이를 버려야 했다. 기사 아저씨가 눈덩이를 버리라고 했는데, 나는 누구한테 던지려는 게 아니라고 말했지만 믿어주질 않았다. 사람들은 늘 내 말을 안 믿는다.

애거스 타운에 가서 햄버거를 먹고 핀볼 게임을 조금 하다가 다시 기숙사로 돌아왔다. 돌아오니 밤 9시도 안 되어 있었다. 맬은 카드놀이에 빠져 친구들하고 놀러 가버렸고, 애클리는 내 방으로 따라와서는 내 침대에 드러누워 지루하게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계속 지난여름에 자신이 만났다는 여자 이야기를 하는데, 분명 뻥이다. 매번 이야기가 다르게 나오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내가 여러 번 돌려 말해도 애클리는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결국, 스트라드레이터의 과제를 써야 한다고 핑계를 대고서야 겨우 방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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