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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용기가 필요할 때 읽어야 할 빨간 머리 앤

루시 모드 몽고메리 지음 | 사람과나무사이


삶의 용기가 필요할 때 읽어야 할 빨간 머리 앤

루시 모드 몽고메리 지음

사람과나무사이 / 2019년 5월 / 596쪽 / 17,000원



초록 지붕 집에서 맞이한 아침




잠에서 깨어난 앤은 침대에 앉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창밖을 멀뚱히 내다보았다. 벌써 환한 대낮이었다. 상쾌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창밖으로 하얗고 깃털 같은 것들이 파란 하늘을 가로질러 흩날렸다.

앤은 순간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잊었다. 처음엔 아주 좋은 일이 있었던 듯 짜릿한 설렘이 몰려왔다. 금세 끔찍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여기는 초록 지붕 집이고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남자아이가 아니라는 이유로 나를 원하지 않았어! 하지만 어김없이 아침이 왔고 그래. 창밖에는 벚꽃이 만발했지, 앤은 침대에서 뛰쳐나와 방을 가로질러 창가로 갔다. 창문을 들어 올리는데 오랫동안 닫혀 있었는지 뻑뻑하고 삐걱거렸다. 창은 꽉 끼어서 무엇인가로 받쳐 두지 않아도 괜찮았다.

앤은 무릎을 꿇고 6월의 아침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두 눈이 찬란한 기쁨으로 반짝였다. 아, 정말 아름다워! 너무나 멋진 곳이야! 이런 곳에서 살 수 없다니! 앤은 여기서 사는 걸 상상해 보았다. 상상할 거리가 넘쳐나는 곳이었다.

밖에는 어마어마하게 큰 벚나무가 무척 가까이 있어 나뭇가지가 집에 거의 닿았고 꽃이 가득 피어나 잎은 보이지도 않았다. 집 양옆 큰 과수원의 사과나무와 벚나무도 꽃을 흐드러지게 매달았으며 풀밭은 민들레 천지였다. 아래쪽 정원에서 자줏빛 꽃을 피운 라일락의 짙은 향기가 아침 바람을 타고 창가로 밀려왔다.

정원 아래로 클로버가 뒤덮은 초록 들판이 골짜기까지 비스듬히 이어지고 시내가 흐르는 골짜기에는 하얀 자작나무 수십 그루가 서 있었다. 덤불 속에는 고사리와 이끼, 숲 속의 수많은 식물이 덤불 위로 살그머니 뻗어 올라 있을 것이다. 그 너머 언덕은 가문비나무와 전나무의 초록빛 깃털 같은 잎으로 뒤덮여 있고 그러한 풍경 사이로 반짝이는 호수 맞은편에서 보았던 작은 집의 회색 지붕 끝이 보였다.

앤은 무릎 꿇고 앉은 자세 그대로 주변의 사랑스러운 풍경을 넋 놓고 바라보다가 누군가 어깨에 손을 얹어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 작은 몽상가는 마릴라가 들어오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 옷을 갈아입어야지.” 마릴라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마릴라는 아이들에게 어떤 식으로 말해야 하는지 정말로 알지 못했다. 그래서 마음과 달리 딱딱하고 무뚝뚝한 말투가 나온 것이다. “옷을 갈아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아침을 먹어야지. 세수하고 머리를 빗어라. 창문은 열어 두고 이불은 침대 발치에 개어 놓고, 잘해 보렴.”

앤은 10분 만에 옷을 단정하게 입고 머리를 빗고 가지런히 땋아 내리고 세수를 하고는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마릴라가 시키는 걸 빠짐없이 해냈다는 생각에 뿌듯했는데 사실 이불 정리는 깜빡 잊었다. “오늘 아침에는 무척 배가 고파요!” 앤은 마릴라가 준비해 둔 의자에 살며시 앉으며 말했다. “세상이 어젯밤처럼 그렇게 스산한 황무지처럼 보이지는 않거든요. 화창한 아침이라서 정말 기뻐요! 저는 비 내리는 아침도 참 좋아하지만요. 어떤 아침이든 모두 흥미로워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하루 동안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상상의 나래를 펼칠 거리가 아주 많잖아요. 그래도 오늘은 비가 내리지 않아 다행이에요. 맑은 날에는 기분이 좋아지고 괴로움을 견디기가 더 쉬우니까요. 제겐 견대내야 할 일이 많은 것 같아요. 슬픈 이야기를 읽고 주인공처럼 슬픔을 견디며 살아가는 모습을 상상하는 건 좋아요. 그렇지만 실제로 그런 일을 겪으면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아요. 그렇죠?”

“제발 입 좀 다물어라. 어린아이가 어쩜 그렇게 말을 많이 하니?” 마릴라가 말했다. 앤은 곧바로 순순히, 그리고 완전히 입을 다물었다. 앤은 계속 침묵을 지키자 마릴라는 자연스럽지 않은 것 같아 오히려 초조해졌다. 매슈 역시 말하지 않았지만 그건 그래도 자연스러웠다. 조용한 식사가 이어졌다.

식사가 끝나자 앤은 설거지를 돕겠다고 했다. “설거지를 제대로 할 줄은 아는 거니?” 마릴라가 미덥지 않은 듯 물었다. “꽤 잘해요. 아이들 돌보는 일을 더 잘하긴 하지만요. 그 일을 아주 많이 했거든요. 여긴 제가 돌봐 줄 아이가 없어서 정말 아쉬워요.” “지금 함께 있는 아이 말고 더 많은 아이를 돌보고 싶지 않구나. 네 문제만으로도 골치가 아파. 너를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오라버니처럼 대책 없는 사람도 없을 거야.” “아저씨는 정말 좋은 분이에요. 이해심도 많고요. 제가 말을 많이 해도 싫어하시지 않았어요. 아니, 오히려 좋아하시는 것 같았어요. 저는 아저씨를 보자마자 저와 통하는 분이라고 느꼈어요.”

마릴라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좋아, 설거지를 해 보렴. 뜨거운 물을 충분히 쓰고 반드시 그릇을 잘 말려야 해. 나는 오늘 아침에 할 일이 많단다. 오후에 화이트샌즈에 가서 스펜서 부인을 만나야 하니 말이다. 설거지를 마치면 2층에 올라가서 침대를 정리하렴.” 앤은 능숙하게 설거지를 해냈다. 마릴라는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이어 앤은 침대를 정리했지만 설거지만큼 잘하지는 못했다. 깃털 이불을 요령껏 다루는 걸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대로 이불을 단정하게 해 놓자 마릴라는 앤이 있는 것이 신경 쓰여서 점심까지 밖에 나가 놀라고 말했다.



앤의 교육이 시작되다




마릴라는 다음 날 오후까지도 앤이 초록 지붕 집에서 살게 되었다고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앤은 점심 설거지를 마치자 최악의 소식이라도 들을 준비를 끝낸 듯 단단히 작정하고 마릴라에게 다가갔다. 작고 여윈 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떨고 있었다. 빨갛게 상기된 얼굴에 검은 눈동자가 다 보이도록 눈을 크게 뜨고는 두 손을 맞잡고 애원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발 커스버트 아주머니, 저를 돌려보낼 건지 아닌지 말씀해주세요. 아침 내내 참으려고 애썼지만 더는 못 견디겠어요! 너무 두려워요! 제발 말씀해 주세요.”

더 미룰 만한 핑곗거리를 찾지 못한 마릴라가 결국 입을 열었다. “그래, 이제 말해 주는 게 좋겠구나. 오라버니와 나는 널 데리고 있기로 했다. 너는 착한 아이가 되고 감사하는 마음을 보여주려고 노력해야겠지. 아니, 얘야, 왜 그러니?” 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말했다. “전 지금 울고 있어요. 왜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어요. 말할 수 없이 기뻐요! 아, 기쁘다는 말로는 부족해요. 새하얀 환희의 길과 벚꽃을 보았을 때도 기뻤어요. 하지만 지금은! 아, 기쁨 이상이에요. 너무 행복해요! 착한 아이가 되도록 노력할게요. 물론 쉽지 않겠죠. 하지만 최선을 다할게요. 그런데 제가 왜 울고 있을까요?”

마릴라가 못마땅한 듯 말했다. “너무 흥분하고 들떠서 그럴 게다. 저 의자에 앉아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렴. 너는 너무 쉽게 울고 웃는 게 탈이다. 그래, 넌 여기에서 살고 우리가 널 잘 키우려고 노력할 거야. 학교에도 가야 한단다. 방학까지 2주밖에 안 남았으니 9월에 새 학기가 시작되면 그때 가는 게 좋겠구나.” “아주머니를 어떻게 불러야 하죠? 마릴라 이모님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아니, 그냥 마릴라라고 불러라. 미스 커스버트나 커스버트 아주머니는 익숙하지 않아서 거북해.”

앤은 사과 꽃이 담긴 꽃병을 살짝 기울여 꽃봉오리에 달린 분홍 꽃받침에 살짝 입맞춤한 다음 아까보다 조금 더 오랫동안 열심히 기도문을 외웠다. “아주머니, 저도 에이번리에서 친구를 사귈 수 있을까요?” 앤이 잠시 뒤에 물었다. “어, 어떤 친구 말이니?” “단짝…. 친한 친구 있잖아요. 깊은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마음이 통하는 친구요. 저는 지금껏 그런 친구를 만날 수 있기를 꿈꿔 왔어요. 이루어질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요. 제 소중한 꿈들이 한꺼번에 실현되었으니 어쩌면 그 꿈도 이루어질지 모르겠어요. 그럴 것 같지 않으세요?”

“비탈길 과수원 집에 다이애나 배리가 살고 있는데, 네 또래일 거야. 아주 착한 아이란다. 그 아이가 집에 오면 네 친구가 될 수도 있겠구나. 지금은 카모디에 있는 숙모네 놀러 갔거든. 하지만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한다. 배리 부인은 무척 까다로운 사람이라서 착하고 얌전한 아이가 아니면 다이애나와 함께 놀지 못하게 할 거야.”

앤은 사과 꽃 틈새를 통해 마릴라를 바라보았다. 앤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다이애나는 어떤 아이예요? 머리카락이 빨갛지는 않죠? 오, 빨간색만 아니면 좋겠어요. 제 머리카락도 빨간데 단짝까지 빨간 건 정말이지 못 참을 것 같아요.” “다이애나는 아주 예쁜 아이야. 눈동자와 머리카락이 검은색이고 뺨은 발그레하단다. 게다가 착하고 똑똑한데, 예쁜 것보다 그 점이 더 훌륭하지.”

마릴라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공작부인처럼 도덕 규범을 좋아했고, 자라는 아이에게 하는 모든 말이 도덕적이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앤은 도덕 규범은 대수롭지 않게 여겨 제쳐 두고 기분 좋은 일이 일어날 가능성에만 집중했다.



기대하는 기쁨




“앤이 들어와서 바느질할 시간인데.” 마릴라는 시계를 흘끗 보고는 밖을 내다보았다. 8월의 누르스름한 오후 열기에 지쳐 만물이 꾸벅꾸벅 졸고 있는 듯했다. “허락한 시간보다 30분이나 더 다이애나와 놀고 와서는 이제 아예 장작더미에 걸터앉아서 오라버니에게 잠시도 쉬지 않고 말을 하고 있네. 일할 시간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말이야. 오라버니는 앤의 말을 한 마디라도 놓칠세라 얼빠진 바보처럼 열심히 듣고 있지. 오라버니는 뭔가에 저렇게 빠진 모습은 처음 봐. 저 애가 엉뚱한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오라버니는 더 재밌어한다니까. 앤 셜리! 당장 들어와라, 알겠니?”

마릴라는 서쪽 창문을 신경질적으로 두드려 대는 소리에 앤은 집 안으로 부리나케 들어왔다. 두 눈은 반짝이고 뺨은 발그레 상기되었으며 땋지 않고 늘어뜨린 머리카락이 마구 휘날렸다. “마릴라 아주머니, 다음 주에 주일 학교에서 소풍을 간대요. 반짝이는 호수 바로 근처에 있는 하먼 앤드루스 아저씨네 들판으로요. 벨 아주머니와 레이철 린드 아주머니가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줄 거래요. 마릴라 아주머니, 아이스크림이요! 아, 아주머니, 저도 가도 돼요?” 앤은 숨을 헐떡이며 소리쳤다.

“앤, 시계 좀 봐라! 내가 몇 시에 들어오라고 했지?” “2시요. 하지만 소풍을 간다니 정말 멋지지 않아요, 아주머니? 제발, 저도 가게 해 주세요. 저는 소풍을 가 본 적이 없어요. 소풍 가는 걸 꿈꾸기는 했지만 한 번도 못 가 봤어요.” “그래, 내가 2시에 들어오라고 했지. 그런데 지금은 3시 15분 전이다. 왜 내 말을 듣지 않았는지 궁금하구나, 앤.”

“저, 시간을 지키려고 했어요. 정말로요. 하지만 한가로운 황야가 너무나 환상적이었어요. 그리고 매슈 아저씨에게 소풍 이야기를 해 드려야 했고요. 아저씨는 제 이야기를 정말 잘 들어 주세요. 저도 가도 돼요?” “너는 그 한가로운 어쩌고의 유혹을 뿌리치는 법부터 배워야겠구나. 내가 몇 시까지 오라고 하면 그 시간을 지키라는 말이지, 30분이나 지나서 오라는 게 아니다. 또 들어오는 도중에 멈춰 서서 말 잘 들어 주는 사람과 이야기 나눠서도 안 되고, 소풍이라면, 물론 너도 가야지. 너도 주일 학교 학생이고 다른 아이들이 다 가는 내가 왜 너만 못 가게 하겠니?” “아, 마릴라 아주머니, 정말 고마워요! 아, 아주머닌 저한테 정말 잘해 주세요. 아, 정말 고맙습니다!”

기쁨의 탄성을 연발하는 앤은 마릴라의 품으로 뛰어들어 마릴라의 창백한 뺨에 열정적으로 입을 맞추었다. 어린아이가 자진해서 마릴라의 얼굴에 입을 맞춘 건 평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깜짝 놀랄 만큼 갑작스럽게 와 닿은 달콤한 느낌에 마릴라는 다시 한 번 전율을 느꼈다. 마릴라는 앤의 충동적인 입맞춤에 속으로는 굉장히 기분이 좋았고, 그래서 더 무뚝뚝하게 말이 나왔다.

일요일에 교회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앤은 목사님이 단상에서 소풍을 간다고 말했을 때 너무 흥분해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고 마릴라에게 털어놓았다. “마릴라 아주머니, 짜릿한 전율을 느꼈어요! 그전까지는 정말로 소풍 가는 거라고 완전히 믿지 않았었나 봐요. 제 상상 속에만 있는 일이 아닐까 두렵기도 했거든요. 하지만 목사님이 단상에서 말씀하셨으니 틀림없겠죠?” “너는 뭐든 마음을 너무 쏟아서 탈이야, 앤. 앞으로 살면서 실망할 일이 많을까 봐 걱정이다.”

“아, 아주머니, 뭔가를 몹시 기대하면 그것이 이루어진 순간 얻게 되는 기쁨의 절반을 미리 느낄 수 있어요. 그걸 얻지 못할 수도 있지만 기대하는 동안 얻는 즐거움은 그 무엇도 막지 못하거든요. 린드 아주머니는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이 행복하다. 실망하지도 않을 테니까.’ 하지만 저는 실망하는 것보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게 더 나쁘다고 생각해요.”



새로운 맛을 만들어 내다




월요일과 화요일 이틀 동안 초록 지붕 집에서는 손님맞이 준비가 한창이었다. 목사님 부부에게 차를 대접하는 것은 대단히 진지하고 중요한 일이었다. 마릴라는 에이번리의 어떤 주부보다도 더 잘 대접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앤은 신이 나서 들떠 있었다. 앤은 화요일 밤에 땅거미가 질 때 다이애나와 드리아드의 물거품 옆에 있는 커다란 붉은 돌 위에 앉아 전나무 향유에 담가 둔 작은 가지로 물속에 무지개를 만들면서 목사 부부를 초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다이애나, 죽비는 다 됐어. 케이크만 구우면 돼. 케이크는 아침에 만들 거야. 베이킹파우더 비스킷은 마릴라 아주머니가 차 마시기 직전에 만들기로 했어. 목사님 부부를 초대하는 일은 엄청난 책임감이 따르는 일이야. 난 레이어 케이크 생각만 해도 초조해져. 아, 다이애나, 케이크를 제대로 못 만들면 어떡하지!” “걱정하지 마. 다 잘 될 거야. 2주 전 점심에 네가 구운 케이크를 한가로운 황야에서 먹었잖아. 완벽한 맛이었어!”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친구답게 다이애나가 격려해 주었다.

수요일 아침이 되었다. 해가 뜨자마자 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흥분해서 잠을 이루지 못한 탓이었다. 전날 아침에 샘에서 물장난을 한 탓에 심한 감기에 걸려 머리가 아팠다. 그러나 설사 폐렴에 걸렸다 해도 그날 아침 요리를 하고 싶은 앤의 욕심은 식지 않았을 터였다. 앤은 아침을 먹고 나서 케이크를 만들기 시작했다. 앤은 마침내 오븐 덮개를 닫고 나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릴라 아주머니, 이번에는 분명 아무것도 빠뜨리지 않았어요. 베이킹파우더가 안 좋으면 어떡하죠? 새 통조림에 든 걸 썼거든요. 린드 아주머니가 요즘에는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물건이 없어서 좋은 베이킹파우더를 샀다고 절대 장담할 수 없다고 했어요. 정부가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하지만 보수당 정권이 그런 일에 나설 리가 없다고 하면서요. 마릴라 아주머니, 만약 케이크가 부풀어 오르지 않으면 어떡하죠?” “다른 게 얼마든지 있잖니!” 마릴라는 대수롭지 않은 문제라는 듯 말했다.

앤이 만든 레이어 케이크가 나오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앨런 부인은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다양한 음식을 이미 먹고 난 상태라서 케이크를 사양했다. 마릴라는 앤의 실망하는 얼굴을 보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앨런 사모님, 케이크를 꼭 드셔야 해요. 앤이 사모님을 위해서 특별히 만든 케이크거든요.” “그렇다면 무조건 맛을 봐야겠군요.”

앨런 부인은 웃으면서 잘 부풀어 오른 삼각형 조각을 집어 들었다. 그런데 케이크를 한 입 먹은 앨런 부인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 조각을 다 먹었다. 마릴라는 그 표정을 보고는 얼른 케이크를 먹어 보았다. “앤 셜리! 도대체 케이크에 뭘 넣은 거니?” 마릴라가 소리쳤다. “요리법대로만 한 걸요, 마릴라 아주머니. 맛이 없나요?” 앤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맛이 없냐고? 아주 끔찍한 맛이다. 앨런 사모님, 애써 드시려고 하지 마세요. 앤, 네가 먹어 봐라. 대체 여기에 어떤 맛을 넣은 거니?” “바닐라요. 바닐라만 넣었어요. 오, 마릴라 아주머니, 틀림없이 베이킹파우더에 문제가 있을 거예요. 아무래도 그 베이킹파우더가 의심….” 케이크를 맛본 앤이 창피해서 홍당무가 된 얼굴로 말했다. “베이킹파우더 때문이라니 말도 안 돼! 가서 네가 쓴 바닐라 병을 가져와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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