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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버지입니다

딕 호이트, 던 예거 지음 | 라이스메이커



나는 아버지입니다

딕 호이트, 던 예거 지음

라이스메이커 / 2015년 4월 / 248쪽 / 14,000원





아기야, 우리 절대 포기하지 말자

풍족하지 않은 집안에서 자란 나는 어렸을 때부터 필요한 돈은 스스로 벌며 성실히 생활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의 눈길을 완전히 빼앗은 한 여자를 만나게 되었다. 주디 라이턴.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그녀를 알고 지냈지만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야 마음을 표현했고, 그녀와 나는 커플이 되었다. 그리고 1961년 2월 18일, 나는 주디와 결혼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디는 임신을 했다. 우리는 부모가 된다는 생각에 무척 행복했다. 1962년 1월 10일, 첫아이 릭(리처드 유진 호이트 주니어)이 태어났다. 출산 예정일이 2주나 지난 뒤였다. 그런데 뜻밖의 말이 들려왔다. 출산 중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의사의 말에 따르면, 엄마의 자궁에 있을 때 무척 활동적이었던 아이가 출산 직전에 몸을 뒤집어 엉뚱한 방향으로 향한 바람에 탯줄이 목에 감겼고, 그 때문에 뇌에 산소가 공급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의사들이 감긴 탯줄을 푸는 단 몇 분 동안, 돌이킬 수 없는 뇌 손상이 일어나고 말았다.

의사가 절망적인 소식을 남기고 나간 뒤, 적막과 슬픔, 두려움이 뒤섞인 병실 안에서 우리는 서로 부둥켜안고 목 놓아 울었다. 살다 보면 누구나 크고 작은 역경에 처하겠지만 우리가 갑자기 맞닥뜨린 시련은 너무나 커서 감당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그저 검사 결과가 확실히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했다. 주디는 몸을 추스르기 위해 며칠 더 병원에 머물기로 했고, 나는 일하다가 시간이 나는 대로 병원에 갔다. 그런데 의사들은 우리에게 아기를 맡기려 하지 않았다. 검사를 더 해야 하는 마당에 아기를 맡기면 안전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의사들은 우리가 아기를 데려간다 해도 2주 후에나 가능할 거라고 말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갔다. 마냥 기다릴 수 없어 지금껏 걱정해왔던 부분과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것들에 대한 의견을 정리해 의사들에게 말했다. 그러자 의사들은 굴복했다. 아니, 그보다 포기한 것 같았다. 의사들은 릭을 집에 데리고 가라고 말했다. 1월 말, 우리는 릭을 차에 태우고 집으로 향했다.

릭이 집에 오고 처음 몇 달간 우리는 릭이 점차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곧 릭에게 아주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릭은 전혀 울지 않았다. 배가 고프거나, 소변을 누었을 때도 울지 않았다. 음식을 먹는 데에도 문제가 있었다. 우리는 하루하루 있는 힘껏 릭을 돌보았지만 제아무리 잘 먹이고 싶고, 잘 놀아주고 싶어도 한계가 있었다. 릭이 태어나고 3개월쯤 되자, 우리 부부를 지탱했던 긍정의 힘도 서서히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갈수록 릭의 상태는 나빠져, 생후 7개월 정도가 되었을 때는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우리는 릭을 메드퍼드에 있는 소아과 전문의에게 데려가 여러 차례 검사를 받았다. 생후 8개월이 되었을 무렵 공식적인 진단 결과가 나왔다. 전문의는 릭이 뇌성마비라고 했다. 그 당시는 뇌성마비 치료법에 대해 알려진 게 거의 없었다. 의사들은 조그마한 희망 한 조각이라도 붙잡으려고 애쓰는 우리에게 집에서 릭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으니, 아기를 시설에서 더 편하게 지내게 하라고 했다. 심지어 릭이 식물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도 했다. 우리는 의사가 아닌 누군가에게 상담을 받아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문득 우리의 결혼을 승낙한 목사님이 떠올랐다. 우리는 목사님께 지난 8개월 동안 겪은 일을 빠짐없이 설명했다.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자 마음이 좀 편해졌다. 목사님은 우리에게 최종 결론을 내리라고 말하지 않았다. 이 길 아니면 저 길을 택하라고 권하지도 않았다. 대신 우리 두 사람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고, 그 결정에 자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고 하면서 젊은 부부가 그것만으로도 대견하다고 우리를 칭찬해주었다. 그 뒤로는 어느 쪽을 택해야 하느냐에 대해 두 번 다시 논의하지 않았다. 주디와 나는 릭의 지지자가 되었다.

릭이 조금 더 크자 우리는 물리치료를 받도록 보스턴 소아전문병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이후 릭은 조금씩 성장하고 적응해갔다. 주디와 나는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릭에게 남동생이나 여동생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둘째 아기를 갖기로 했다. 계획한 대로 얼마 뒤 주디는 임신을 했다. 그리고 1964년 4월 17일, 우리의 둘째 아들인 로버트 스탠리 호이트가 태어났다.



학교에 다니고 싶어요

릭에게 동생(롭)이 생기면서 우리는 더더욱 릭에게 신경을 써야 했다. 롭이 정상적으로 자라는 모습을 보고, 혹시라도 릭이 스스로에게 실망하지 않을까 염려되었던 것이다. 롭은 금세 집 안 곳곳을 기어 다니기 시작했는데,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릭 역시 동생처럼 돌아다닐 수 있도록 스쿠터를 고안해냈다. 스쿠터라고는 하지만, 금속 바구니에 바퀴를 달아놓은 단순한 장치에 불과했다. 또 나는 릭이 갖고 놀 수 있는 특수한 공도 만들었다. 우리는 그것을 ‘지구 공’이라고 불렀다.

특별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 많은 것이 바뀌었다. 우선 우리의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또 이웃들의 인식도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그 후 릭이 다섯 살 때 막내 러스가 태어났다. 또한 릭이 덩치가 커져서 안고 다니기가 벅차자, 우리는 휠체어를 마련했다. 그 덕에 릭은 여러 활동에 참여할 수 있게 되고, 똑바로 앉을 수 있어서 무엇이든 바로 볼 수 있었다.우리 식구는 항상 릭과 함께 있었다. 우리가 해변에 가면 릭도 해변에 갔고 낚시도 함께했다. 릭을 데리고 등산도 자주 했다. 산에 오를 때마다 나는 릭을 안고 앞장섰고 그 뒤를 주디와 롭, 러스가 따라왔다. 이제는 누가 뭐라고 하든, 우리 가족이 똘똘 뭉치면 못할 게 없었다.

한편 나와 주디는 릭을 교회 학교에 자주 데려갔다. 그러다가 신도들의 어린 자녀들이 다니는 교회 부속 유치원에 입학시켜 보통의 아이들과 같은 교육을 받게 했다. 유치원 교사들은 릭이 무척 영리하다고 말했다. 릭은 알파벳을 알았고, 어떤 물건이고 어떤 사람인지를 금방 인식했다. 이렇게 릭은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고 꿋꿋하게 열심히 유치원에 다녔고, 여섯 살에 마침내 유치원을 졸업했다. 릭이 유치원을 졸업할 무렵, 우리는 릭을 데리고 매사추세츠 주에 있는 로렌스의 장애우 학교로 갔는데, 그곳에서 작업치료사인 페이 킴벌을 만났다. 페이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릭이 발전하는 데 큰 도움을 준 스승이자 치료사였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릭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릭 스스로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심어줄 수 있도록 했다.

유치원을 졸업하는 릭을 보면서 우리 부부는 그다음 단계를 생각했다. 그것은 당연히 초등학교 입학이었다. 하지만 당황스럽게도 학교에서는 릭이 걷지도, 말하지도, 혼자서 식사하지도 못한다는 이유를 들어 입학을 허가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주디가 끝까지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자 학교 측은 릭이 다른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는 걸 허용하지 않는 대신, 일주일에 네 시간씩 공부하는 자택 통신 학습 프로그램을 제공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프로그램에 교사가 함께하지 않는 게 문제였다. 주디는 일단 학교 측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주디의 노력과 릭의 협조로 그 방식은 웬만큼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주디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기어코 정규 학교에 보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열심히 학교 관계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설득했으나, 돌아온 대답은 한겨울의 바람만큼이나 차가웠다. 결국 주디와 나는 당분간이라는 조건을 달고 릭을 장애우 학교에 등록시켰다.



‘희망의 기계’와 처음 만난 날

어떻게 하면 보통 사람들처럼 배우고, 대화하는 데에 참여시킬 수 있을까? 그런 궁리를 하기 시작한 지 2~3년이 흘렀을 때였다. 갑자기 희망이 찾아왔다. 우리는 작업치료사인 페이에게서 컴퓨터 공학 프로그램을 연구하는 이들을 소개받았다. 윌리엄 크로케티어 박사와 연구생 네댓 명이었다. 윌리엄 박사는 당시 터프츠 대학의 기계공학과 학과장이었다. 우리는 릭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한참 이야기가 이어질 때, 한 학생이 질문을 했다. “릭이 영리하다는 걸 어떻게 아시죠?” 주디는 조심스럽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릭에게 농담을 한번 해보세요.” 그러자 윌리엄 박사가 릭에게 다가가 가벼운 농담을 건넸고, 윌리엄 박사가 말을 건네자마자 릭은 머리를 뒤로 젖히고 크게 웃어댔다.

윌리엄 박사 일행은 릭을 위한 연구에 바로 착수했다. 연구를 이끈 사람은 젊은 대학원생 릭 폴즈였다. 폴즈를 포함한 학생들은 장치 개발을 위해 수백 시간 연구했다. 그리하여 연구에 착수한 지 6주가 지난 날, 마침내 첫 의사소통 장치를 만들어냈다. 1970년대 초는 컴퓨터를 보유하고 있거나 컴퓨터에 대해 아는 사람이 거의 없던 시절이었는데, 폴즈 팀이 고안해낸 것은 휴대가 가능한 일종의 컴퓨터였다. 기계 작동 방법은 비교적 간단했다. 스위치를 클릭해서 모니터에 나타내고 싶은 글자나 숫자, 기호를 선택할 수 있었다. 릭의 경우에는 휠체어 옆의 컴퓨터 시스템에 연결된 금속 바를 머리로 움직여 스위치를 작동시키고 문장을 만들 수 있었다. 폴즈 팀에서는 이 새로운 기계를 ‘터프츠 쌍방향 의사소통 장치’라고 불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우리 가족에게 희망을 주었기 때문에 ‘희망의 기계’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 뒤 폴즈 팀은 기능을 개선하여 두 번째, 세 번째 신제품을 내놓았는데, 세 번째로 개발된 희망의 기계는 앞선 장치들에 비해 월등히 개선된 것이어서, 알파벳을 직접 조합해 단어도 만들 수 있었다.

우리에게 일어난 변화는 참으로 놀랄 정도였다. 모든 일이 컴퓨터 하나에서 비롯되었다. 마침내 저희끼리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된 아들 녀석들은 형이 얼마나 재치 있는지 알게 되어 기쁘다고 말했다. 가장 큰 기쁨은 릭이 이제 학교에 다닐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는 점이었다. 주디는 장애우의 공립학교 입학을 법제화하기 위해 지역 학교 관계자들과 손잡고 시작한 캠페인을 매사추세츠 주 전역으로 확대했다. 그러는 한편, 주 의회를 자주 방문해서 장애우의 처우 개선을 위해 정치인들과 열띤 토론을 벌였다. 주디의 눈물겨운 노력은 서서히 주위 사람들을 하나둘씩 감동시키기 시작했다. 결국 성과가 나타났다. 1972년 7월 12일, 매사추세츠 주지사는 일명 제766조로 더 잘 알려진 비틀리데일리 법안에 서명했다. ‘특수교육 개혁법 제766조’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물론 이 법이 탄생하기까지는 주디의 노력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장애우를 키우는 매사추세츠 주 전역의 가족들 노력도 뒷받침되었다. 그리고 1975년, 릭이 드디어 공립학교에 입학했다.



아빠와 아들의 달리기가 시작되다

릭은 중학교에 진학할 무렵, 딱 한 가지만 빼고는 모든 면에서 동급생들과 대등하게 적응해갔다. 딱 한 가지란 굳이 설명할 것도 없이 체육이었다. 체육 시간에 릭은 도우미가 미는 휠체어를 타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체육 시간이 끝날 때까지 책을 읽거나 숙제를 했다. 어느 날 체육 선생님인 스티브 사토리 씨가 주디에게 전화를 걸어 아이가 수업을 빼먹는다고 전하면서, 아이가 무단결석하게 놔두면 안 된다고 훈계했다. 주디는 릭이 체육 수업을 빼먹을 수밖에 없는 사정을 설명했다. 그런데 사토리 선생님의 말은 뜻밖이었다. “몸이 불편한 게 결석의 핑계가 될 수는 없어요.” 결국 릭의 도우미가 도서관이 아닌 체육관을 향해 휠체어를 밀고 가야 했다. 그리고 의외의 상황이 펼쳐졌다. 사토리 선생님은 릭을 위해 새로운 수업 방식을 고안해냈는데, 바로 릭이 참가한 가운데 아이들이 운동을 즐기는 방식이었다. 이후 사토리 선생님과 릭을 금세 친해졌다.

어느 날 오후, 사토리 선생님이 전화를 해 자신이 지도하는 웨스트필드 주립대학 농구 팀 경기에 릭을 데려가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우리가 가도 좋다고 허락하자 릭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 사건은 우리의 삶을 크게 흔들었다. 릭과 나의 관계를 완전히 다른 차원의 것으로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날 저녁, 농구 경기가 끝나고 사토리 선생님이 릭을 집에 데려다주면서, 릭의 외출이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성공적이었다며 정기적으로 릭을 데리고 다니고 싶다고 말했다. 그동안 릭은 머리로 금속 바를 움직이면서 컴퓨터의 모니터에 집중하고 있었다. 내게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릭에게 다가가서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릭은 ‘두기’라는 사람을 위한 자선 달리기 대회에 관해 쓰고 있었다. 나는 사토리 선생님께 두기가 누구냐고 물었다.

두기는 ‘지미 바나코스’라는 사람의 애칭으로, 웨스트필드 주립대학에서 육상 및 라크로스 선수로 유명했다. 그런데 1977년 어느 봄날, 경기 도중 다른 선수와 부딪쳐 목 아래의 몸이 마비되어 졸지에 장애우가 되었다. 릭은 농구 경기가 열리는 체육관에서 지미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했다. 사토리 선생님이 릭의 휠체어를 밀고 체육관에 들어섰을 때 지미를 위한 달리기 대회의 포스터를 보았던 것이다. 포스터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지미를 위해 달립시다!” 지미의 병원비에 보태기 위해 대학에서 마련하는 8킬로미터 자선 달리기 대회는 일주일 뒤 토요일에 열릴 예정이었다.

릭이 어떻게 해서든 그 행사에 참가하고 싶어 한다는 걸 눈치 챘을 때, 마침 릭이 타이핑을 끝냈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아빠, 달리기 대회에 나가고 싶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사토리 선생님이 찬성한다면 얼마든지 좋다고 했다. 그러자 릭은 다시 맹렬히 글자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그 글을 읽는 순간 가슴이 뭉클했다. “전 아빠와 함께 달리고 싶어요.” 나는 릭에게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일단 대회에 나가기로 약속은 했지만 이만저만 걱정이 아니었다.

자선 달리기 대회가 열리는 1977년 10월 22일 토요일의 날씨는 화창했다. 드디어 나는 아들의 휠체어 손잡이를 잡고 난생 처음으로 달리기 대회의 출발선에 섰다. “탕!” 출발 신호가 떨어졌다. 나와 릭도 출발했다. 휠체어를 밀면서 달리는 게 쉽지 않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달려보니 보통 힘든 게 아니었다. 얼마 달리지도 않았는데 숨이 턱 밑까지 찼고, 손에 땀이 배자 휠체어의 고무 손잡이에서 자꾸 손이 미끄러졌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경주로의 중앙선 쪽이 약간 높아서 우리는 자꾸 도로 가장자리로 흘러갔고, 그때마다 휠체어 한쪽이 들렸다. 그런데 가족과 친구들이 우리의 이름을 부르며 격려하는 소리가 길가에서 들려와 지친 몸과 마음에 활력을 주었다. 하지만 그 외의 사람들은 우리를 빤히 바라보거나 손가락질하며 이렇게 소리쳤다. “와아, 저것 좀 봐!”

한동안 그렇게 달렸고, 어느 순간 경주로에는 우리뿐이었다. 나와 달리 릭은 즐거워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저 멀리 결승선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남아 있는 힘을 모두 끌어내 결승선을 통과했다. “우리가 해냈다, 릭!” 나는 숨을 헐떡거리며 말했다. 주디와 아이들, 사토리 선생님 가족이 우리에게 달려와 내 말을 되풀이했다. 집에 오자마자 나는 기절하듯 쓰러졌다. 온몸이 욱신욱신 쑤셨다. 한편 릭은 오늘 경기에서 느낀 점을 내게 말해주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이윽고 릭의 머리 쪽 금속 바에서 뚝딱거리는 소리가 그치자, 나는 릭에게 다가갔고, 아들이 쓴 글을 읽고 왈칵 눈물을 쏟았다. “아빠, 달리고 있을 때는 장애가 느껴지지 않았어요.” 나는 릭을 힘껏 끌어안았다. 그리고 내 안의 모든 진심을 담아 말했다. “릭, 사랑한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덧붙였다. “릭,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함께 달릴 수 있을 거야.”



‘팀 호이트’의 끝없는 도전

나와 아들 릭은 첫 번째 레이스를 계기로 ‘팀 호이트’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첫 대회에 참가한 지 3년, 팀 호이트는 새로운 레이스에 나설 준비가 되었다. 그 무렵 매사추세츠 주에서 매년 열리는 마라톤 대회 ‘10K’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우리는 참가하기로 했다. 하지만 대회 당일, 미처 예상치 못한 장애물이 나타났다. 주최 측부터 다른 참가자들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우리가 달리는 걸 원치 않았다. 심지어 몇몇 참가자는 왜 저런 아이를 레이스에 참가시키려고 하느냐며 따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내 끈질긴 설득에 그들은 결국 두 손을 들었다. 마침내 신호가 떨어지자 팀 호이트는 힘차게 출발했다. 그동안 고되게 노력하고 철저하게 준비한 효과가 금세 나타났다. 우리는 38분 30초로 300명 중에서 150명을 제치고 결승선을 통과했다. 그때 선수 한 명이 내게 다가와 자신을 피트 위스네프스키라고 소개했다. 그는 우리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해냈는지 알려주고 싶어서 왔다고 말하며, 우리가 지속적인 훈련을 겪은 여느 선수들과 다르지 않다고 했다. 기분 좋은 칭찬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나와 릭의 친구가 되었고, 훈련도 함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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