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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축구감독이 찾아왔다

사라 라이너첸, 알런 골드셔 지음 | 디오네
그리고... 축구감독이 찾아왔다

사라 라이너첸, 알런 골드셔 지음

디오네 / 2013년 4월 / 280쪽 / 13,800원





1장 일부는 소녀, 일부는 기계



나는 뉴욕 주 롱아일랜드 출신이다. 나는 선천적으로 정상이 아니었다. 태어날 때 왼쪽 다리가 오른쪽 다리보다 짧았다. 의사는 근위 대퇴골 부분적 결손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쉽게 설명하면 더 이상 자라지 않는 짧은 다리뼈가 있다는 것이다. 내 생애 첫 1년 동안에는 두 다리의 길이가 달라도 크게 방해받지 않고 생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걸음마를 시작하면서 균형도 못 잡고 흔들거렸다. 나는 에셴에 있는 보철 및 정형연구소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내가 써본 다양한 다리 부목 중에서 첫 번째 것을 받았다. 딱딱한 플라스틱 중합체로 반짝이게 만든 프레임이 내가 처음으로 쓴 보철이었다. 진료과정에서 내 다리는 수없이 찔리는 상처를 받았다. 그 후로 나는 흰 가운을 입은 사람만 보면 즉각 경기를 일으켰다.

우리 아빠는 고등학교 음악교사로 근무하면서 집에서는 개인 피아노 교습을 했고, 교회에서 오르간을 연주했다. 돈이 많이 필요한 장애아를 낳은 죄로 여러 가지 일을 해야 했다. 무용가인 엄마는 파트타임 안무가로 근무했다. 우리는 베이 힐스 해변에서 8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살았는데, 여름에는 거의 매일 해변 근처에서 지냈다. 가족들이 보호막 같은 걸 내 주위로 쳐주었기 때문에 그 안에서 나는 부목을 벗고 모래사장을 뛰어다닐 수 있었다. 그렇지만 4살 때 나와 다르게 모두가 수영복을 입는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나서 문제가 심각해졌다. 가끔씩 내가 괴물처럼 느껴졌고, 해변에 온 사람들이 나를 희귀동물처럼 바라볼 때는 더욱 그랬다.

나는 대체로 행복한 일상을 보내는 아이였지만, 가끔 엄마에게 투정을 부렸다. “왜 내가 이따위 다리를 지녀야 해? 이게 싫어.” 엄마가 말했다. “그건 달콤한 기침약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란다. 나가서 재밌게 놀기나 하고, 그런 일은 걱정하지 마라.” 부모가 긴 옷을 입혀 결점을 감추게 하는 여성 절단 환자 몇 명을 아는데, 그것 때문에 그들은 언제나 상실한 다리에 대한 수치심만 느꼈다. 그러나 우리 집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엄마는 언제나 나를 보통 아이처럼 대하였다. 엄마는 나를 밖에서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놀도록 하였다. 나는 정글짐을 올랐으며, 술래잡기 놀이를 했다. 엄마는 내가 넘어져도 스스로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었다. 엄마는 내가 언젠가는 스스로 돌봐야 한다는 걸 알았기에 일찍부터 그렇게 하는 걸 당연하게 여겼다. 나는 그 점을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7살이 되자 의사가 수술을 권했다. 내가 자랄수록 양쪽 다리의 차이가 심해질 것이기에, 왼쪽 다리의 아래쪽을 제거하는 게 좋다는 것이었다. 수술을 통해 왼쪽 다리를 제거하자 나는 의족을 착용하게 되었다. 내 첫 의족은 나무와 플라스틱을 혼합해서 만든 것이었는데 마치 고무로 만들어져 자유롭게 회전되는 바비 인형의 다리 덩어리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유압장치가 없어 너무 불안정했고, 걸을 때마다 딱딱 소리를 냈다. 9살이 되었을 때 나는 바비 다리가 내 삶의 일부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아빠는 정기적으로 달리기 경주에 참가했는데 매년 나를 어린이 경주에 참가시켰다. 하지만 늘 꼴찌를 하는 바람에 나는 그걸 싫어했다. 내 바비 다리 때문에 다른 아이들과 경쟁해 달릴 수가 없었다. 11살 때 한 달리기 대회에서 패디 로스바흐라는 여성 절단 장애인 달리기 선수를 소개받았다. 40대인 그녀는 6살 때 트럭에 치여 다리를 잃었다고 했다. 탄소 섬유 파일론으로 된 그녀의 의족을 가리키며 내가 말했다. “그것으로 달릴 수 있다니 놀라워요.” “너도 달리기를 배울 수 있어. 나는 마라톤에 9번이나 참가했어.” 패디는 맨해튼에 있는 병원에서 <어스파이어>라는 프로그램을 이끌고 있었다. 병으로 팔다리를 잃은 재활 환자들을 돕는 운동 프로그램이었다. 패디는 운동선수인 데다 똑똑하고 아름다웠다. 마라톤을 하면서 병원에서 중요한 일을 맡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만나면서 절단 수술을 받고도 평범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보았다. 그녀는 내게 롱아일랜드의 물리치료사를 소개해주었다. 그의 이름은 데이비드 볼스리였다. 데이비드는 낮에는 물리치료사로 밤에는 달리기에 몰두하는 근사한 남성이었다.

데이비드는 나를 러닝머신에서 훈련시켰다. 처음에는 의족에 균형을 맞추느라 엉덩이가 아팠지만 편안한 느낌을 지닐 때까지 계속 반복 훈련을 했다. 러닝머신 위에서나 주차장에서 달리기 훈련을 하면서 나는 수없이 나뒹굴었다. 그래도 나는 상처와 멍에 개의치 않고 늘 다시 일어섰다. 달리기 기량이 쌓이자 그는 평지에서 연습할 수 있도록 육상 트랙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데이비드는 강하게 훈련을 시켰고 나는 그것을 좋아했다. 5달이 지나자 나는 100미터를 쉬지 않고 달릴 수 있게 되었다. 달리면서 나는 일부가 동물이고, 일부는 기계인 내 몸이 하나가 되어 움직이는 걸 느꼈다. 갑자기 학교와 가족 외에 세계를 안을 수 있겠다는 목표와 목적을 지니게 되었다.

나는 12살 때 패디를 따라 ‘뉴욕 지체 장애인 체육 대회’에 참가했다. 경기장에 있는 경쟁자들을 보고 생각했다. ‘와, 멋진데! 모두가 나처럼 다리를 잃었네!’ 나는 60미터와 100미터 경주에서 우승했다. 그날 오후 패디는 우리에게 패럴림픽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어머나, 내가 올림픽에 나갈 수 있다니.’ 꿈에서라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내가 패럴림픽에 참가하고 싶다고 패디에게 말하자 그녀가 말했다. “좋아, 그렇지만 뭔가 다른 걸로 움직여야만 해.” 그때 처음으로 바비 다리 대신에 보철을 착용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패디는 마이크 조이스라는 보철 기술자를 소개해주었다. 패디를 만난 덕분에 나는 닮고 싶은 사람이 생겼고, 정보도 얻었으며, 더 나은 다리를 얻을 수 있는 곳도 알게 되었다. 게다가 올림픽 수준에 버금가는 경기에 참가하는 꿈을 꾸게 되었다.



2장 챔피언 되기



1988년 가을, 나는 13세에 캘거리에서 열린 ‘캐나다 전국 선수권 대회’라는 첫 국제 육상 대회에 참가했다. 내 첫 경주는 100미터였고, 모든 주자들의 나이가 나보다 많았다. 나는 경주를 멋지게 해내 세계 신기록을 달성했다. 200미터 경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금메달 2개를 따고 세계기록 2개를 달성했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 나는 육상 경기를 가장 우선시했는데, 따로 관심을 둘 만한 중요한 대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독서를 즐겼고 학교 성적도 좋았다. 사진가 질 크레멘츠가 쓴 『신체적 장애를 지니고 사는 느낌』이라는 작품집의 모델이 되기도 하였다. 이 책이 인기를 끌자 TV 토크쇼에 출연해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10대가 되자 힐끔거리며 쳐다보는 일이 유난히 신경에 거슬렸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오래된 펑크 뮤지션의 음악을 들으면서 시간을 때웠다. 그들의 음악 취향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때 나타난 사람이 데이비드 맥클린이다. 그는 학교 악단과 록 그룹에서 드럼을 쳤다. 그는 중학교 시절부터 뼛속 깊이 펑크족이었다. 그리고 나는 하드코어 펑크족을 선호하는 절단 장애아였다. 우리 둘은 아주 찰떡궁합이었다. 2학년 때는 처음으로 댄스 파티에 참가하여 데이비드와 춤을 추기도 하였다. 그는 나를 평범한 사람으로, 그리고 운동선수로 존중해주었다. 그는 내가 이상한 금속 조각을 끼고 육상 트랙을 달리는 가난한 절름발이 소녀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나를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루는 친구 집에서 밤샘 파티가 열렸다. 새벽에 몇 사람이 발가벗고 수영장으로 뛰어들었다. 그들은 나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했다. 나는 데이비드 앞에서 다리를 벗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자 깊은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한 다리로 수영장에 뛰어들어도 괜찮을 거라고 믿기 시작했고, 데이비드가 그걸 문제 삼는다면 어쨌든 그와 함께하지 않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운동화를 벗고, 바지 밖으로 가볍게 다리를 빼내고 보철을 풀었다. 그러고는 남은 다리 부분에서 프레임을 슬쩍 빼냈다. 남은 다리 부분을 두른 틀을 벗고 내 인공 수족을 수건으로 싸서 탁자에 기대어 놓았다. 그러고는 더 이상 자기 분석을 할 것도 없이 수영장으로 뛰어들었다.

우리는 함께 헤엄을 쳤다. 데이비드는 나와 함께 놀면서도 전혀 당황해하지 않았다. 그는 나를 편안히 여겼고, 그래서 나도 편안해졌다. 수영을 마치고 우리는 2층에 있는 침실로 몰래 올라갔다. 곧장 침대로 뛰어들었고 열정적으로 사랑을 나누었다. 우리는 서로 존중받고 받아들여진다고 느꼈다. 그날 밤 우리는 잠자리를 함께했다. 같은 침대에서 그저 함께 잤다는 뜻이다. “좋아, 지금 다리를 벗을 거야.”라고 내가 그에게 말했을 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무서우면서도 친밀한 순간 중의 하나였다. 그저 좋다는 느낌을 한참 넘어섰던 건 데이비드가 팔로 나를 안았을 때 내가 바라는 바를 분명히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날 아침 깨어났을 때 데이비드의 팔은 여전히 나를 두르고 있었다. 그는 나를 온전한 여자로 느끼게 해주었다.

1992년 나는 미국 대표팀의 일원으로 바로셀로나 패럴림픽에 참가했다. 100미터 달리기에 출전했지만 주최 측이 팔 절단 장애인 선수와 다리 절단 장애인 선수를 하나로 묶어 버리는 바람에 경주에서 가장 불이익을 받았다. 나는 출발선에서 스타팅 블록에 걸려 넘어졌고 꼴찌에서 두 번째로 들어와 결승에 진출하지도 못했다. 패럴림픽 경주에서 패배해 운동선수라는 정체성이 흔들렸는데 설상가상으로 부모님의 이혼이라는 사건까지 겹쳤다. 여러 해 동안 부모님이 이혼할 것 같다고 생각하기는 했으나 현실이 되자 당황스러웠다. 지구가 온통 내 발밑에서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3장 제일 잘 달린다고 해도 도망칠 수는 없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워싱턴 DC에 있는 조지워싱턴 대학으로 진학을 했다. 나는 장학금을 받았고, 엄마가 수업료와 학비를 힘닿는 데까지 보태줬다. 나는 기숙사에서 뉴저지 출신의 데릴라와 필라델피아 출신의 돈나를 룸메이트로 만났다. 데릴라는 두 다리가 절단된 장애인이었고, 돈나는 암 환자였다. 나는 학교를 상대로 장애인을 한 방에 몰아넣은 데 대해 강력히 항의하였다. 다음 학기에 돈나가 기숙사를 나가자 대학은 우리에게 다른 룸메이트를 강요하지 않았다. 내 생각에는 우리가 조용히 살기를 학교가 바란 것 같다. 확실히 이길 만한 싸움은 하는 게 좋긴 하다.

나는 다시 달리기를 시작했다. 스포츠는 항상 내 몸을 기분 좋게 했고 운동을 하지 않을 때면 상실감을 느끼기도 했다. 1994년 열린 미국 장애인 육상 선수권 대회에 참가했다. 데릴라에게 달리기를 같이 하자고 권유했지만 처음에는 거절했다. 그녀는 짧은 바지와 드레스를 입기보다는 긴 스커트를 입는 식으로 장애를 드러내지 않았다. 장애를 대하는 태도는 달랐지만 우리는 3학년 때도 같은 방을 썼다.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정신적 자매가 있다는 것은 내게 큰 행운이었다. 1995년 데릴라는 보스턴에서 열린 장애인 육상 대회에 나와 함께 참가했다. 나는 데릴라에게 비법을 전수했고, 나와 함께 훈련하는 다른 선수 모두와 미국 팀의 의족 기공사들을 소개해주었다. 데릴라는 인상적인 달리기를 했고, 단 한 번의 경주로 그 애의 인생이 바뀌었다. 대회가 끝난 후에 데릴라는 공공장소에서도 반바지를 입기 시작했다. 그녀가 머리를 높이 쳐들고 온 세상이 보도록 의족을 드러낸 채로 워싱턴의 여기저기를 걸어 다니는 걸 볼 때면 내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1학년 때 나는 알렉스라는 남자와 사귀었다. 그는 훌륭한 남자친구였고 우리는 멋지고 사랑스러운 관계를 맺었다. 보철 없이 남자 앞에서 옷을 다 벗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하지만 3학년이 되면서 우리의 관계가 깨졌다. 그리고 아빠의 재혼이 있었다. 이런 혼란 속에서 나는 낮에는 내내 자고 일어나 조지타운의 술집들이 문을 닫을 때까지 밤을 새는 생활을 계속 했다. 1995년 여름, 결국 학교를 휴학하고 롱아일랜드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완전히 실패자가 된 것처럼 느꼈다. 다행히 엄마의 보살핌으로 다시 마음을 추스릴 수 있었다.

다음해 1월 나는 스페인으로 연수를 갔다. 그곳에서 우연히 대학친구를 만나서 데릴라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데릴라가 학교를 옮겨서 육상을 시작했고, 1996년 패럴림픽에 대비해 훈련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나는 충격을 받았다. 내가 그녀를 육상의 세계로 이끌어주었지만 나에게는 이 모든 것을 비밀로 해왔던 것이다. 미국으로 돌아오자 더 황당한 말을 들었다. 데릴라가 내가 마약을 한다는 소문을 냈다는 것이다. 나는 그녀의 배신에 치를 떨었다. 데릴라는 1996년 미국 패럴림픽 팀의 100미터 주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경쟁 상대는 팔을 절단한 선수였고 그녀는 메달을 따지 못했다. 아틀랜타에서 열린 절단 장애인 연합 연례 회의에서 데릴라가 내 옆자리에 앉은 적이 있다. 그때 나는 그녀가 나에 대해 나쁜 소문을 퍼뜨린 정황을 언급했지만 그녀는 끝까지 사과하지 않았다. 상처를 받긴 했지만 심리치료를 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모든 상황을 알고 있던 육상 팀원 대부분이 내게 공감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때 이후 한 차례 더 달리고는 모든 운동을 그만두었다. 나는 그녀가 내 인생에서 사라져준 게 기뻤다.



4장 기회를 향한 도약



1997년 뉴욕 마라톤 대회에 도전했다. 대회를 위해 나는 매일 달리기 훈련을 했다. 학교 수업도 정상적으로 출석했고 미디어 컨설팅 회사에서 최저임금을 받으면서 일도 하였다. 외출을 자제했고, 술집이나 파티에도 가지 않았다. 대학 시절 언론에 홍보하는 방법을 배운 덕분에 나는 미디어를 잘 다루었다. 대회가 있기 전 ‘패럴림픽 선수, 100미터 세계 기록 보유자, 뉴욕에서 태어난 사라 라이너첸이 첫 마라톤을 하고...’라는 식으로 보도 자료를 작성하여 뉴욕에 있는 언론사에 보냈다. 마라톤 대회가 열린 날 NBC 방송국이 나의 모습을 취재했다. 스튜디오에 있던 NBC 스포츠의 앵커는 이렇게 말했다. “잘했어요, 사라! 뉴욕을 대표해줘요!” 정말 고향의 영웅이 된 기분이었다. 처음 도전하는 마라톤이어서 32킬로미터 지점을 지났을 때 몸 전체에 고통이 왔지만, 비가 내리는 가운데 관중들의 환성 속에 끝까지 달렸다. 팔을 공중으로 휘저으면서 6시간 32분 만에 결승선을 넘어섰다. 올림픽 메달만큼이나 끝내주는 경험이었다.

1998년 로스앤젤레스로 날아갔다. 그곳에 있는 USC 대학에서 장학금을 받고 대학원 과정에 입학하라는 제의가 왔기 때문이다. 장학금 이름은 ‘마이크와 함께 수영하기’인데, 수혜 대상은 운동을 하는 중에 장애를 지니게 된 선수들이었다. 장학금 수여를 위한 면담에 참가했지만 장학위원들은 나를 믿지 못했다. “학생이 육상 선수이긴 했지만 그건 장애인이 된 이후입니다. 우리는 선수로 활동하는 중에 장애를 지니게 된 학생에게만 장학금을 줍니다.” 나는 기운을 잃었다. 대학원을 향한 창이 닫히는 것처럼 보였다. 장학금을 받을 방법을 찾아보던 나는 3월에 열리는 로스앤젤레스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기로 했다. 장학기금에 내가 기여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나는 대회가 열리는 주간에 로스앤젤레스로 가서 장학위원들에게 “USC 대학 표식이 달린 모자와 ‘마이크와 함께 수영하기’라고 쓴 티셔츠를 입고 마라톤을 할지 모르고, 경기가 끝난 후에 내 기부 증서와 함께 수표를 보낼지도 모릅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마라톤을 하면서 취재 기자 옆으로 달려가 외쳤다. “안녕하세요, 전 사라예요! 내 인조 다리로 달리려고 뉴욕에서 왔습니다!” 내 인터뷰는 뉴스에 생중계되었다. “저는 USC 대학의 장학기금을 모금하러 왔는데요. 멋진 목적을 이루려고 달리는 거라서 너무 흥분돼요.” 나는 경주를 6시간 15분 만에 끝냈다. 뉴욕 마라톤보다 기록을 15분 단축했다. 다음 달 나는 ‘마이크와 함께 수영하기’ 장학금 수여자로 선정되었고, USC 대학원 신문방송학 과정에 무사히 입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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