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 수 없는, 행복
로라 먼슨 지음 | 윌컴퍼니
믿을 수 없는, 행복
로라 먼슨 지음
윌컴퍼니 / 2012년 12월 / 256쪽 / 13,800원
고통받지 않기로 결정하다: [새벽 5시. 여름. 몬태나] 어젯밤 남편이 집을 나갔다. 더 이상 날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며. 그리고 9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돌아오지 않고 있다. 아마도 사람들은 내가 큰 고통에 빠져 있을 거라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고통받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이제껏 내가 들었던 말 중에 가장 현명한 말은 정신과의사가 들려줬던 말이다. 그녀는 당시 풀리지 않던 작가로서의 경력과 남편의 힘겨운 직장생활 때문에 내가 울자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지금 통제할 수 없는 것들에 자신의 행복을 걸고 있어요. 어쩔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욕망을 버려야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어떻게 욕망을 완전히 버리고 살 수 있겠나?
유명한 소설가인 내 친구에게 ‘책이 출판되든 안 되든 상관없이 어떻게 평생 글을 쓸 수 있겠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러자 그는 말했다. “출판이 되고 안 되고의 유일한 차이는 책이 나왔다는 사실뿐이야.” 나는 이렇게 항변했다. “내 작품이 그렇게 형편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문제는 아직 확실한 ‘간판’이 없다는 거야. 몬태나 출신의 무명작가에 불과할 뿐이지.” “그래도 글은 계속 써야 해. 출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고. 하지만 아예 포기하는 것과 초연한 것에는 큰 차이가 있어.” “나는 지금 막다른 골목에 처해 있는 것 같아. 초연해지는 방법을 모르겠어.” 내 말에 그 친구는 웃음으로 답했다. 그리고 나는 그 친구가 뭔가 소중한 정보를 내놓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냥 쉽게 얻어지는 게 아니라, 열심히 노력한 사람만 얻을 수 있는 정보 말이다. 험난한 여정은 오롯이 나의 몫이다.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와 보자. 나는 남편의 행방조차 모르고 있다. 휴대전화도 받지 않고 문자 메시지에도 답이 없다. 하지만 나는,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그의 말을 믿지 않는다. 남편에게 뭔가 다른 사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개인적인 시련의 계절이 있기 마련이다. 나는 남편이 가장으로서 충분한 돈을 벌지 못한다는 죄책감과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얼마나 자책하는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결국 혼자 힘으로 바닥에서 일어서야 한다. 또 나는 이런 상황에서는 분노나 불안보다 이해심이 더 크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를 사랑한다.
나의 다비드: [어린이집으로 출발하기 한두 시간 전, 차 한 잔을 마시며]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돌아보는 게 중요하다. 남편과 나는 집안에서 막내였다. 나이 많은 부모님 밑에서 형제자매들과 함께 부족함 없는 집안에서 자랐다는 공통점 이외에도, 우리에겐 펠트 중절모에 울 외투를 입고 직장에 다니시며 남성 사교클럽에서 무료한 오후 시간을 보내시던 아버지와 현명한 안주인으로 우리에게 예의에 맞게 악수하는 법과 올바른 포크 사용법을 가르쳐주신 세련된 어머니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긋지긋한 여름 캠프로, 뉴잉글랜드 기숙학교로, 그리고 오하이오에 있는 사립 교양대학으로 보내졌고, 여기서 남편을 처음 만났다.
그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처럼 너무나 멋있고 자신만만했으며 유능해 보였다. 우리는 성공을 굳게 믿었다. 세상은 놀라운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고, 우리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 기쁘고 놀라운 일들이 벌어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그러한 것들을 찾아가기로 했다. 그 당시 우리는 큰 꿈을 꾸었다. 그는 야생 전문 사진가가 되거나, 알래스카의 오지를 비행하는 경비행기 조종사가 되고 싶어 했다. 또는 로키 산맥으로 헬리콥터 스키 여행을 안내하거나, 카리브 해나 호주에서 스쿠버 다이빙을 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 나는 남편과 함께 전 세계를 여행하며 소설을 쓰는 꿈을 꿨다. 그리고 어떻게든 우리는 부자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현실, 바퀴벌레, 지하실의 부랑자, 그리고 맥주: [같은 날 초저녁, 긴 하루] 연애 시절, 우리는 보스턴에 정착했다. 왜 보스턴으로 이사를 했느냐고? 우리에겐 일정한 수입이 없었다. 우리는 여전히 부모님의 경제적 지원이라는 끈에 매달려 있었고 동생들의 뒤치다꺼리를 마다치 않는 언니, 누나들에게 신세를 지고 있었다. 그리고 보스턴에는 사랑하는 가족들(형제자매와 조카들)이 살고 있었다. 당시 나는 레스토랑에서 야간 아르바이트를 했다. 우리는 낮 시간을 비워두었다. 그는 이수해야 할 학점이 남아 있었고, 나는 써야 할 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세계여행을 하는 데 필요한 돈을 모을 때까지는 듀플렉스(두 세대용 주택)에서 지냈다. 좁고 누추한 집이었지만 우리는 행복했다.
나는 부유한 사람들 속에서 성장했다. 하지만 그때 나에게는 돈이 많지 않았다. 다시 말해 나는 상류층 사교클럽에는 언제라도 들어갈 수 있었지만, 당장 생활비를 걱정해야 할 처지였다. 우리는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그래서 다른 곳에서의 삶을 꿈꾸기 시작했다. “시애틀이 어떨까?” 어느 날 <아웃사이드>를 읽다가 그에게 말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시애틀로 이사 가고 싶다고 여기저기 얘기를 흘리고 다닌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애틀 퀸앤힐에 있는 아파트를 관리하는 일자리를 제안받았다.
그 일을 맡으면 따로 집세를 내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나는 글을 쓰는 데 좀 더 많은 시간을 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당시 미국 북서부 지역에 엄청난 맥주 붐이 일면서 남편은 소규모 맥주 공장에 취직하게 되었고, 곧 새로운 일에 매료되었다. 이후 4년 동안 우리는 시애틀 북부 지역을 이곳저곳 옮겨 다녔다. 시애틀은 내게 한없이 자유롭고 개방적인 곳이었다. 그리고 글을 쓰는 일이 분노에서 놀이로 바뀌기 시작했다. 내가 글쓰기에 몰두하는 동안, 그는 맥주 공장을 북서부 지역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업체로 키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곧 그는 지역 유명인사가 되었다. 나는 작가모임에 가입해 정식으로 등단을 시도했고, 여러 출판사의 문을 두드렸으나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그와 나는 잠시 헤어져 지낸 적도 있었다. 각자 다른 사람을 만나보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그리워했고, 결국 서로에게 돌아왔다. 더욱 애틋한 감정으로. 그래서 우리는 결혼을 했다. 신혼여행 후 우리는 다시 행복한 마음으로 시애틀로 돌아와 신접살림을 시작했다. 새 신혼집에서 보내는 첫날밤이었다. 파스타 뽀모도로를 만들어 파스타 그릇에 담고 있는데, 남편이 들어와 말했다. “나 새 일자리 제의받았어. 새로 생긴 맥주회사야. 내가 그 맥주회사를 운영하는 거야. 그러면 당신은 일하지 않고 글만 써도 돼!” 나는 뛸 듯이 기뻤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어. 이사를 가야 해. 한 달 후에. 몬태나로.” 한 달 후 우리는 전체 인구가 시카고의 삼분의 일밖에 되지 않는 네모난 모양의 거대한 주 몬태나에서 살게 되었다. 이 아름다운 주로 이사 온 지 거의 15년이 다 되어간다.
몬태나: [깊은 밤] 처음 5년 동안 우리는 딸과 아들을 낳았고, 마을 밖 8만 제곱미터의 경치 좋은 땅에 전원주택을 직접 디자인해 지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8년 후 모든 것이 바뀌었다. 잘나가던 남편의 맥주회사가 문을 닫으면서, 남편은 몇몇 친구와 함께 취업알선업체를 창업했다. 남편은 열심히 일했고, 일이 끝나면 잠깐씩 짬을 내 스키나 골프를 즐겼다. 하지만 9ㆍ11테러 사건으로 남편 사업은 큰 타격을 받았고, 이후 7년 동안 성과도 없이 죽으라고 일에 매달려야만 했다. 그 여파는 만만치 않았다. 저축해놓은 돈과 투자금이 바닥을 드러냈고, 우리는 불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포기하거나 줄여나가야 했다. 그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남편이 실의에 빠졌다는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이 내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때로 나는 애원을 하기도 했다. “나를, 우리 결혼을 텃밭이라고 생각해줘. 당신이 가끔은 돌봐야 할 대상이라고.” 하지만 상황은 오히려 악화되었다. 어느 날 아침,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남편은 인사도 없이 집을 나서며 이렇게 말했다. “내 앞가림도 제대로 못 하고 있는데 내가 당신이나 우리 결혼생활을 어떻게 돌볼 수 있겠어?” 많은 뜻을 내포한 말이었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15년이라는 세월을 함께했는데……. 새벽 2시, 나는 이렇게 앉아 여전히 남편이 어디에 있을지 궁금해하며 우리의 ‘찬란했던’ 시절의 오르막과 내리막을 뒤돌아본다. 그의 마음이 이미 떠났다면 어쩌지?
아버지의 파란색 듀센버그: [다음 날 정오] 마침내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친구의 호숫가 별장에 있었단다. 휴대폰이 터지지 않는 곳이다. 생각할 시간이 며칠 더 필요하단다. 문득 아버지가 보고 싶고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하다. 아버지는 지금으로부터 4년 전에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아버지가 살아 계신다면 지금 정도가 직장에 계신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기 딱 좋은 시간이다. 내가 전화할 때면 “내가 뭘 보고 있는지 아니?” 아버지는 매번 이렇게 물으셨다. “오래전에 네가 준 나무 액자. 앤틱 자동차 사진이 붙어 있는 액자 말이야. 기억하니?” “기억하죠. 제가 사드린 파란색 듀센버그잖아요.” 그러면 아버지는 나를 놀리곤 하셨다. “진짜 자동차는 사주지 않아도 된다.”
당시 자동차 마니아셨던 아버지는 동경하는 자동차에 대해 말씀하시곤 했는데, 그 차가 바로 파란색 듀센버그였다. 한번은 아버지 생신을 맞아 내가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을 준비한 적이 있었다. 앤틱 자동차 잡지에 나온 파란색 듀센버그 사진을 오려서 차고에서 구한 나무 조각을 톱으로 잘라 자동차 모양으로 만든 나무 블록에 붙였다. 그리고 뒤에다가는 이렇게 썼다. “여기 아빠의 파란색 듀센버그가 있어요. 비록 지금은 장난감이지만 나중에는 진짜로 사드릴게요.”
심장발작으로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엄마는 아버지의 사무실을 정리하여 유품 몇 가지를 내게 보내주셨다. 그중에는 놀랍게도 내가 쓴 단편 소설도 몇 작품이 있었다. 독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시던 아버지였는데 말이다. 그리고 듀센버그 사진이 붙은 나무 블록…… 아버지는 이것을 거의 30년 동안이나 문진(文鎭)으로 사용하셨던 것이다. 아버지가 정말로 자동차를 갖고 싶었다기보다는, 아직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딸의 재능에 대한 아버지의 굳건한 믿음에 관한 문제였다. 지금 당장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나를 믿어준 것에 대해 감사드린다고 말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리고 실의에 빠진 40대의 남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여쭤볼 수 있다면 좋으련만.
가혹한 유예기간: [3일째. 남편이 요구한 ‘며칠’의 마지막 날] 남편이 집에 돌아오지 않은 지 3일째가 되는 지금, 내 눈은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이곳저곳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깨닫는다. 침대에 나만 홀로 있다는 것을. 바로 그때 또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카술레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더구나 남편은 내가 해주는 요리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어쩌면 내 요리가 남편을 집으로 불러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쩌면 말이다. 아이들과 함께 주방에서 요리에 들어갔다. 그때 차고로 트럭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는데, 개들이 짖지 않았다. 남편이 돌아온 것이다.
남편은 익숙한 장소에 온 것처럼 벽난로 옆 의자에 앉았다. 남편에게서 나무 탄내가 났다. 기뻤다. 사실 그가 정말로 캠핑을 한 건지 의심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남편은 나와 전혀 눈을 맞추지 않았다. 아들이 남편의 무릎 위로 올라가며 물었다. “아빠, 물고기 잡았어요?” “몇 마리 잡았지. 그런데 다 놔줬어.” 남편의 목소리가 낯설게 느껴졌다. “카술레를 만들고 있어.”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너무도 절박한 심정으로.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이웃집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이 밖으로 뛰어나가는데 왠지 보내기가 싫었다. 아이들이 우리 부부 사이에서 일종의 완충재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남편과의 진지한 대화를 위해서는 아이들이 없는 편이 나았다. “우리 얘기 좀 해.” 내가 먼저 남편에게 말했다. 남편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스크린 포치로 나가 대화를 나눴다.
남편은 눈물을 흘렸다. 생각을 많이 했다고 털어놓았다.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다고. 마음이 가는 대로 하고 싶다고 했다. 더는 내 곁에 머물고 싶지 않다고 했다. 혼자 있고 싶다고. 아이들도 아빠가 얼마나 절실하게 행복을 원하는지 이해해줄 거라고 했다. 시내에 살 집을 마련하겠다고 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당신, 글을 쓰는 직업으로는 성공하기 어려울 거야.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마다 당신이 얼마나 자책했는지 알아. 난 더는 못 참겠어. 애초에 작가인 당신과 결혼하지 말았어야 했던 것 같아.” 고작 이런 말을 하려고 했던 거야? 내가 작가로 성공하지 못했다고 나를 비난하는 거야?
“당신 말은 받아들일 수 없어.” 내가 말했다. 남편은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받아들이지 않겠어.” 이건 남편의 문제라는 내 생각을 밝혔다. 하지만 남편은 자신의 고통은 끝났고 확실히 입장을 정리했다고 했다. 나는 냉정함을 잃지 않았다. 나는 남편에게 몇 달 동안 여행을 다녀오라고 제안했다. “지금 농담해? 난 지금 그럴 여유가 없다고.” 남편은 만약 내 말대로 한다면 그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뻔하다고 했다. 다시 떠나야 한다는 걸 알고 돌아오거나, 아니면 아예 돌아오지 않게 될 거라고 했다.
남편의 사업이 막바지에 있다는 걸 안다. 남편은 몇 달 후에 사업을 접을 계획이다. 하지만 사실은 몇 년 전에 사업을 정리했어야 했다. 우리의 결혼생활이나 자신의 건강은 내팽개친 채 다 죽어가는 사업을 어떻게든 살려내려는 남편이 못마땅했다. “그러면 나는 내팽개칠 수 있단 말이야? 우리 결혼생활은? 아이들은? 우리가 함께 이룬 것들은?” 남편은 아무 말도 없었다. 그때 드라이브웨이에서 요란한 모터 소리가 들렸다. 남편 친구 몇몇이 남편과 함께 산악 오토바이를 타러 온 것이다. 남편은 내게 사랑한다고 말하며 서둘러 밖으로 뛰어나갔다. 남편의 말에 나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그렇게 나가고 난 이후 남편은 연락도 없이 그날 밤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아빠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해 하는 아이들과 또 하루를 보내야 한다. 오늘은 아이들에게 뭐라고 핑계를 대야 하나? 이런 내 마음이 남편에게 전달됐는지, 아니면 양심에 걸렸는지 전화벨이 울렸다. 남편은 사과했다. 산악 오토바이를 탄 후에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사무실에서 잠을 잤단다. “점심때는 돌아오는 거야?” 남편에게 물었다. “응.” 남편이 힘없이 답했다. 남편의 목소리에서 그가 가족들을 힘들게 하고 있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또한 자신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전화를 끊자마자 카술레를 오븐에 넣었다. 아이들이 주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다 됐어요, 엄마?” “거의! 점심때 먹을 거야! 아빠가 점심때는 오신대. 아빠는 지금 일 때문에 힘든 시간을 보내고 계셔. 우리가 참고 아빠를 응원해줘야 해.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엄마가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기억하지? 지금 아빠도 그만큼 힘들어하고 계시거든.” 아이들 모두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내 안의 또 다른 나: [6월의 마지막 날] 남편이 카술레를 먹으러 집으로 돌아왔다. 아무런 말도 없이 5분 만에 그릇을 비우고, 테이블에서 일어나 곧장 거실 소파에 누워 야구경기를 시청했다. 아빠를 위로하고 싶었는지, 아니면 아빠를 집에 잡아두고 싶었는지 아이들이 남편 곁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남편의 속마음을 헤아려보려 노력했다. 이건 남편의 심리전이다. 남편은 나의 화를 돋우고 있었다. 그러면 모든 게 성질 못된 아내 때문이라고 변명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이번 위기만큼은 끝까지 견뎌보련다. 여기에 머물며 내 일에만 집중할 것이다. 고통받지 않겠다는 나의 결심을 지킬 것이다.
웨딩케이크 위의 신랑신부: [7월] 나는 내 정신과의사에게 남편이 시내에 집을 얻고 싶어 한다고 털어놓았다. “남편분이 잠시 혼자 여행을 떠나도록 권할 수는 없나요?” “이미 제안해봤어요. 일 때문에 시간을 낼 수가 없대요. 여행 경비도 만만치 않고. 제가 뭘 할 수 있죠?” “아무것도 요구하지 마세요. 그리고 이걸 남편분에게 주세요. 지금 잠깐 쭉 읽어보세요.” Divorce.com이라는 웹사이트에서 발췌한 내용이었다. 별거에 들어가는 부부들이 결정해야 할 사항이 적힌 리스트였다. 의사는 말을 이었다. “그건 전략이에요.” 아하, 전략이구나! 남편에게 미리 잔뜩 겁을 먹게 하려는 속셈이었다. “남편에게 언제 건네줘야 하나요?” “차차 아시게 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