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
펄 벅 지음 | 소담출판사
대지
펄 벅 지음
소담출판사 / 2010년 3월 / 436쪽 / 13,000원
왕룽이 결혼하는 날이었다. 창밖에는 미풍이 살랑살랑 불어왔다. 이제 풍년이 들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이날만은 평소 귀하게 사용하던 항아리의 물을 모두 가마솥에 넣고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6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아들은 아버지의 기침을 가라앉히기 위하여 물을 데워왔다. 그러나 오늘 아침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여자가 오는 것이다. 왕룽은 내일부터 늦도록 누워 있을 수 있고, 아버지처럼 침대에서 따뜻한 물을 가져오게 할 수 있다. 왕룽은 아버지의 아침을 준비해주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은전 여섯 닢과 동전 두어 줌의 돈으로 작은아버지와 그의 아들인 사촌과 또 세 사람의 마을 사람을 청하기로 하였으므로 돼지고기와 생선과 과일을 사올 셈이었다.
성내로 향하던 왕룽은 이윽고 부잣집 황씨네 앞을 지났다. 거기에는 왕룽이 아내로 맞이할 색시가 어릴 때부터 종으로 팔려와 살고 있었다. “결혼 비용이 엄청나게 들어가니 가난한 사람들은 종년밖에 더 얻을 수 있겠니?” 아버지는 황 부잣집에 찾아가 너무 젊지도 않고 또 예쁘지도 않은 계집을 달라고 사정했다. 아버지는 농사꾼의 아내로는 못난 계집이 좋다고 고집했다. 왕룽은 색시가 누군지도 모른 채 그 색시를 데려오는 것이었다.먼저 돼지고기와 쇠고기를 샀고 두부와 향을 산 후 황 부잣집으로 걸어갔다. “저어, 이 댁의 색시를….” 문지기는 왕룽을 위협하며 돈을 달라는 눈치를 보냈다. 왕룽은 허리춤에서 장을 보고 남은 은전 한 닢과 동전 열네 푼을 내 보였다. 은전을 소매에 집어넣은 문지기가 “신랑이오, 새신랑 왔소!” 하고 외쳤다. 그는 문지기를 따라 큰 대청으로 들어갔다. 왕룽이 살고 있는 집이 스무 개나 들어갈 만큼 넓고 천장도 높았다.“이 사람은 왜 여기에 이렇게 있는가?” 노부인은 아편에 취하여 왕룽에게 묻는다. “마님, 저는 색시를 데리러 왔습니다.” “오란을 어서 들라고 하거라.” 여종이 곧 얼굴이 넓적하고 키도 약간 크며 깨끗한 무명 저고리와 치마를 입은 여인을 데리고 왔다. 왕룽은 여인을 얼핏 보고 눈을 돌렸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이 여인이 내 아내가 될 사람이구나.’ 노부인은 오란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저 사람의 말에 순종하고 아들을 많이 낳아주도록 해라. 그리고 첫 아들은 데리고 와서 나한테 보여줘야 하고.” 왕룽은 오란을 자세히 쳐다보았다. 거무스레한 얼굴은 곰보도 아니었고 언청이도 아니며 귀에는 그가 보낸 귀고리를 달고 있었다. 또 손에는 그가 보낸 반지를 끼고 있었다. 그는 자기도 아내가 있다는 생각에 만족감을 느꼈다.
그들은 집을 나와 사당이 있는 서쪽 밭길까지 쭉 걸었다. 지금 왕룽이 평생을 부치고 있는 바로 그 밭들을 경작했던 그의 할아버지가 지은 사당이었다. 왕룽은 향을 꽂고 부싯돌을 꺼내어 불을 붙였다. 두 사람의 결혼이 성립되는 순간이었다.집으로 돌아온 왕룽은 오란에게 부엌일을 맡기고, 쾌활하고 능청맞으며 언제나 허기져 있는 듯한 작은아버지와 열다섯 살짜리 장난꾸러기인 사촌 그리고 이웃 농부 세 사람을 맞이했다. 밤이 되어 음식을 다 먹은 손님들을 보낸 후 왕룽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이 여자는 내 색시다. 이제 일을 치러야지.’ 전신이 떨리고 흥분에 잠긴 채 여자의 몸을 껴안았다.
다음 날 왕룽은 전날과 다름없이 줄곧 일을 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식사준비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녀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묵묵히 일을 잘했다. 그러는 동안에 세 개의 방이 놀랄 만큼 깨끗해져서 제법 풍족한 살림 같아졌다. 오란은 말이 없었다. 꼭 해야 할 말 이외에는 하지 않았다.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어느 날 일을 마치고 해가 지자 그녀가 말했다. “애를 가졌어요.” 그녀에겐 평범한 일로만 생각되는 듯했으나 왕룽에겐 큰 사건이었다. 지금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그들에게도 이제 아이를 낳을 차례가 온 것이다.몸을 풀 날이 가까워지자 왕룽은 아내에게 말했다. “해산할 때 도와줄 사람이 있어야 할 텐데….” 황 부잣집 사람 중 누구에게 도움을 청하자고 말하는 왕룽에게 오란은 “그 집 사람은 어느 누구도 안 돼요”라고 말한다. “전 아들을 내 품에 안고서가 아니면 그 집을 찾아가지 않겠어요. 아이에게는 붉은 저고리와 바지를 입히고 머리에는 금부처를 수놓은 모자를 씌우고 발에는 호랑이를 그린 신을 신기고, 나도 새 신발에 까만 공단으로 지은 새 저고리를 입고 우리 모자의 모양을 여러 사람들에게 보이겠어요.” 왕룽은 이제껏 아내가 이렇게 많은 말을 하는 것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는 은전 세 닢을 내놓았다. “은전을 가져보긴 평생 처음이에요.” 지금까진 은전을 남에게 줄 때는 마치 자신의 살이 에이는 듯했다. 그러나 오늘만은 이렇게 주면서도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아들이에요.” 오란이 말하자 왕룽은 허공에 대고 외쳤다. “이제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되고, 저는 아비가 됐습니다!” 그는 아내를 쳐다보았다. 아내의 머리카락은 아직도 땀에 젖어 있고 눈시울이 푹 꺼져 있었으나 그 밖에는 평시와 같았다. 그리고 그는 곧 불안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하늘과 땅에는, 특히 가난한 사람에겐 행복을 방해하는 귀신이 많은 것이다. 그는 사당으로 가서 결혼하던 날 아내와 함께 향을 피웠던 것같이 향을 피웠다. 왕룽과 오란은 열심히 일하여 재산을 모았다.
초하룻날 아침 오란은 새벽 일찍 일어났다. 왕룽과 함께 황 부잣집에 첫 아들을 데리고 갔다. 마님을 만나고 온 오란은 기다리던 왕룽에게 말했다. “그 댁엔 돈이 대단히 궁색한 모양이에요. 영감님이 땅을 팔겠다고 내놓으셨대요.” “땅을 팔아? 그 땅을 우리가 사지.” “땅을… 그 땅을….” 오란은 말을 더듬었다. 그 부잣집에서 종노릇을 하던 그의 아내가 이제 그 땅의 일부분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마침내 땅은 왕룽의 소유가 됐다. 그 한 뙈기의 땅은 왕룽을 더욱 분발시켰다. “아버지. 또 손자가 태어났어요.” 그해도 풍년이었다.
왕룽이 염려했던 대로 그의 작은아버지는 이 무렵부터 골칫거리가 되었다. 그해에도 황 부자의 땅을 살 작정이고 여유만 있다면 해마다 살 생각이었다. 작은아버지는 ‘중용’까지 들먹이며 돈을 나누어 쓰자고 닦달했다. 견디다 못한 왕룽은 돈을 가지러 집으로 갔다. 집에 들어서자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낳긴 낳았어요. 이번엔 계집애예요.”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왕룽은 은전 아홉 닢을 꺼냈다. “빌려준다는 말은 마세요. 거저 주는 거지. 그 집에서 어디 빌려 쓰는 일이 있나요.” 오란이 말했다. 가까이 있는 밭을 사려고 했으나 식구는 늘어만 가고 있다. 밭을 사려는 계획은 다음 추수까지 미루어야 했다.
몇 달이 지나도 비는 내리지 않았다. 그런데 오란은 또 아이를 배었다. 그동안 왕룽은 해마다 앞마당에서 곡식을 타작했지만 이제는 여러 달째 쓸모없이 비어 있는 앞마당에 멀거니 서 있었다.“이 빌어먹을 하늘아!” 왕룽은 어느 날 굶주려서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사당으로 갔다. 그리고 침을 뱉었다. 향을 피워본 지도 이미 오랜 일이다. “네 마음대로 해라. 천벌을 받아도 이보다 더하려구!” 오란은 음식거리도 없는 부엌에 불을 지필 나무조차 없기 때문에 언제나 침대에 누워 있기만 했다. “여보, 우리 남방으로 가야겠소.”그에겐 이제 동전 한 닢도 남아 있지 않았다. 작은아버지는 땅을 팔아 연명을 하라고 부추겼다. “난 땅은 안 팔겠소.” 그러나 왕룽에게는 먹여 살려야 할 아이가 셋이나 있고 늙은 아버지도 있었다. 마침내 왕룽이 힘없이 말했다. “값은 얼마나 주겠소?” 흥정하는 사이 오란의 외침이 들렸다. “땅은 팔지 않아요. 팔아버리면 남방에서 돌아왔을 때 농사지을 땅이 없어지니까요. 대신 탁자하고 침대 두 개, 이불, 의자 두 개, 부엌에 있는 솥을 팔겠어요. 그렇지만 쇠스랑과 괭이나 호미 같은 농구는 안 팔아요. 땅도 안 팔겠어요.”
남방으로 떠날 준비를 해봤자 나무 경첩에 달린 문을 꼭 닫고 쇠고리를 채우는 일이 전부였다.왕룽은 기차 안에서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남방 도회에는 쌀이 흔해서 아침이면 빈민 식당에서 쌀죽을 먹을 수 있다는 것과, 당장은 거적을 사서 거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내었다. 일자리에 대해서도 알아보았으나 모두들 인력거꾼보다는 비렁질이 더 낫다고 말했다.기차에서 내린 왕룽은 우선 거적 여섯 장을 샀다. 잿빛 석벽을 따라 거지 움막들이 늘어서 있었다. 부잣집 담장을 따라 동그란 움막을 지었다. 안에 들어앉아 있으면 비바람은 넉넉히 피할 수 있었다.빈민 식당에서 배를 채우고 나니 온몸이 노곤해지며 잠이 쏟아졌다. 이튿날 어떻게 해서든지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한 왕룽은 오란의 의견을 물었다. “나와 아이들은 구걸을 할 수 있어요. 아버님도 할 수 있어요.” 왕룽은 저녁에 돈을 치르기로 하고 인력거를 끌고 거리로 나갔다.
인력거를 끌며 도시에 익숙해진 왕룽은 거리에서 연설하는 사람들을 자주 보았다. 청년은 “우리 국민들은 단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우리들 자신을 교육해야 한다”고 외쳤다. 그러나 왕룽은 자기도 중국 국민의 한 사람이지만 자기에게 하는 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큰놈은 훔치는 것을 매우 부끄럽게 여겼기 때문에 솜씨가 서툴렀다. 그러나 작은놈은 점점 익숙해져서 구걸보다 훔치기를 훨씬 더 잘했다. 그런 일쯤은 오란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도둑질이라도 해서 먹고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왕룽은 달랐다. “우리들은 구걸해서 얻은 고기는 먹어도 되지만 훔치는 건 안 돼. 우리는 구걸을 할망정 도둑놈은 아니야!” 그는 작은놈이 훔쳐온 고기를 길바닥에 내동댕이쳐 버렸다. 그러나 오란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그 고기를 주워서 물에 씻어 다시 국 솥에 넣으며 조용히 말했다. “아무튼 고기는 고긴데 왜 그래요?” 아이를 실컷 두들긴 후 움막으로 돌아가며 왕룽은 혼자 중얼거렸다. “우린 대지로 돌아가야 해.”
이 도시의 풍요함과는 별개의 세상인 가난의 밑바닥에서 왕룽은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저녁 바람의 상큼함을 얼굴로 느낄 때마다 밭에 대한 그리움이 마음속에서 치밀어 올랐다. “이런 날은 밭을 갈기 딱 좋은 날인데.” 듣고 있던 아버지가 말했다. “나도 내 평생에 몇 번이나 이런 고비를 당해서 고향을 떠난 일도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언제나 고향으로 되돌아가셨어요?” “그럼. 땅이 있었으니까 그렇게 할 수 있었지, 내 아들아.” 아버지는 짧게 말했다. 왕룽은 더욱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언젠가 두 집 건너 움막에 살고 있는 사내가 말했다. “당신 저 성벽 안을 구경한 적 있소? 난 딸을 팔러 갔을 때 본 일이 있소. 얼마나 돈이 흔한지 말해도 당신은 곧이듣지 않을 거요. 부자가 너무 부자가 되면 반드시 변동이 생기는 법이오.” 왕룽은 되풀이 생각해보았으나,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봄은 움막촌에도 찾아왔다. “만약에 저 집 양반이 갖고 다니는 금덩이가 내 것이 되고, 허리춤에 든 은전들이 내 것이 된다면….” 모여 앉은 사람들은 언제나 돈타령이었다. 그러나 왕룽은 달랐다. “만일 내가 그 황금과 은을 가지고 있다면 나는 그걸로 땅을 살 것이고, 그 땅에서 곡식을 거두겠소”라고 말하는 왕룽을 사람들은 비웃었다. 왕룽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에 그리움이 더해갔다.“어디서 또 난리가 난 모양이외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밀고 밀리는 이런 싸움을 계속 벌이는지?” 군인들은 사람들을 붙잡아 갔다. 왕룽은 새로운 공포로 전신에 소름이 끼쳤다. 움막 속에서 몇 시간이나 군사들이 전쟁터를 향해 가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소문대로 일이 벌어지나 봐요. 적군이 성문을 깨고 쳐들어오는 모양이에요.” 그때 두 집 건너 움막에 있던 사내가 왕룽의 움막 안을 들여다보며 소리쳤다. “아직도 이렇게 앉아 있는 거요? 마침내 때가 왔소. 우리들을 위해서 부잣집 대문이 열렸소.” 그러자 오란은 마술에 걸린 사람처럼 번개같이 빠져나갔다. 사람들은 부잣집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끌어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왕룽 혼자였다. 그때 그는 도망치는 매우 비대한 사나이와 마주쳤다. 겁먹은 사내가 애걸했다. “돈은 얼마든지 드리지요. 목숨만 살려주세요.” 돈이란 말에 왕룽은 귀가 번쩍했다. 사나이는 손바닥에 누런 금화를 꺼내놓았다. 왕룽은 금화를 가슴에 끌어안으면서 몇 번이고 혼자 중얼거렸다. “이제, 고향으로 갈 수 있다. 내일은 고향으로 돌아간다!”
고향에 돌아온 왕룽은 이제 고향을 떠나 있었던 것이 꿈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누가 내 사립문을 부수었소? 누가 쇠스랑과 괭이를 훔쳐갔소?” 어떤 사람이 말했다. “자네 작은아버지가 그랬네. 겨우내, 비적들이 자네 집에 틀어박혀서 이 부근 마을을 노략질했지. 자네 작은아버지는 그들과 매우 친했지.” 왕룽은 그의 작은아버지가 더 이상 마을에 남아 있지 않은 것이 기뻤다. 왕룽은 열심히 일했다. 그의 집은 다시 새로워졌다. 오란은 임신하여 배가 불룩했다. 추수 때까지 먹고살기에 충분한 돈이 아직 그들에게 남아 있었다. 곡식이 자라는 들이나 그 자신이나 모두 햇볕과 비가 알맞아 느긋한 느낌이었다.
어느 날 밤 왕룽은 오란의 젖가슴 사이에서 남자의 주먹만 한 단단한 덩어리가 손에 닿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이 덩어리가 무엇인지 물었다. “그렇게 보고 싶으면 보세요.” 풀어헤치자 숱한 보석이 쏟아졌다. “어디서…. 어디서….” 왕룽은 말을 더듬었다. “그때 남방 부잣집에서요.” 팔아버리기 위하여 왕룽이 집어 담는데 애처로운 음성으로 오란이 말했다. “진주 둘만 줘요. 그저 갖고만 있을래요.” 그녀는 두 개의 진주를 다른 헝겊으로 싸서 젖가슴에 넣었다. 그녀는 퍽이나 만족한 표정이었다.보석으로 땅을 사기 위하여 왕룽은 황 부잣집에 갔다. 그렇게도 많은 노비들이 분주하게 일하던 앞뜰에 이제는 한 여인과 영감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 집엔 나하고 영감님뿐이에요. 아무도 없어요.” “청지기들과 종들은요?” 여인은 귀찮은 듯이 말했다. “그 사람들은 벌써 달아나버렸어요.” 왕룽은 이 여인과는 흥정할 마음이 나지 않았다. “다음 날 다시 오지요. 다음 날.”부유한 황 부자가 몰락하였다는 것이 점점 더 괴이하게 여겨졌다. ‘농토를 허술하게 해서 그렇게 된 거야.’ 안타까운 일이었다. 문득 두 아들에게 생각이 미쳤다. 놀리지 말고 일을 몸에 익히게 하고 언제나 흙냄새에 정이 붙게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왕룽은 그간의 사정을 알아보려 찻집에 들러 주인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그 집엔 아무도 없지요. 남은 사람이라야 영감하고 영감님을 섬기는 척하는 뚜챈이란 종년뿐이죠. 영리한 계집이라 황 영감은 그 계집에게 노상 바보가 되고 마는걸요.” 왕룽은 다시 황 부잣집으로 가서 여인에게 물었다. “영감님이 땅 문서에 자기 도장을 찍을까요?” 여인이 대답했다. “찍고 말고요. 내 모가지를 걸어놓고 맹세하죠.” “당신은 땅값으로 돈을 받겠소? 보석을 받겠소?” “보석으로 받겠어요.”
이제 왕룽은 소 한 마리를 가진 사람이 경작하고 추수하기에는 땅이 너무 많았다. 아이들에게는 일을 시켰으나 오란은 들에 내보내지 않았다. 그의 아내는 더 이상 가난한 집의 아내가 아닌 것이다. 이제 왕룽에겐 아무 근심이 없었다. 구태여 마음이 쓰이는 일이 있다면 처음 난 계집애 걱정뿐이었다. 그 애를 낳던 해 흉년으로 인해 몹시 굶어서 그런지 아이는 말이 터지지 않고 천치같이 웃기만 할 뿐이었다.
이 고장엔 5년에 한 번씩 흉년이 들었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땅으로부터 도망쳤다가 다시 돌아왔지만 왕룽은 기반을 쌓아 어려운 시절이 닥치더라도 버티겠다고 결심했다. 다행히 10년간 풍년이 지속되었다. 그 덕에 새로 집도 지었다. 왕룽은 밭에서 일하는 대신 농사 관리와 생산물 판매에만 매달려도 바빴다. 그러나 글자를 모르는 그는 적지 않은 수모를 당한 끝에 큰아들 놈을 서당에 보내어 곡물가게에 데리고 가서 대신 쓰고 읽게 하기로 작정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작은놈이 자기도 서당에 나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래, 같이 가거라.” 훈장이 그들에게 처음으로 이름을 지어주었다. 형을 능언, 작은놈을 능운이라고 했다. 돌림자인 능자는 흙에서 부유함을 얻는다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