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위대한 유산

찰스 디킨스 지음 | -

▣ 독서 나침반Ⅰ - 개관


대중성도 있고 예술성도 뛰어나다는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1861년)은 핍이라는 어린 주인공의 성장 과정을 그린다. 국내에는 '위대한 유산'이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원제의 뜻은 '유산' 자체가 아니라 '유산에 대한 큰 기대'이며, 동시에 당시 사회에 만연한 물질적 기대감을 가리킨다. 따라서 훌륭한 유산이라고 이해되기 쉬운 '위대한 유산'보다는 '막대한 유산'이 더 옳은 표현이라고 하겠다.

사회적 상승욕은 숱한 근대 서구 문학작품의 주제였는 바 이 작품 또한 '신사(紳士)되기'라는 차원에서 같은 주제를 다룬 성장소설이라 할 만하다. 디킨스 당대의 이상적 인간상인 신사는 구시대의 귀족적인 이상과 부르주아적 이상이 결합된 사람으로, 일정한 재산과 교양에다 '신사다운' 덕목을 두루 갖춰야 했다. 이는 서유럽에서도 가장 먼저 시민혁명을 일으켰지만 귀족계급과 근대 시민계급의 부단한 타협을 통해 진행된 영국 근대사의 특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실제 현실에서 신사는 일정한 재산과 사회적 신분에 따라 정해지는 지배집단으로서 계급사회 특유의 배타성과 가부장적 특성을 보여 주고 있다.



주인공인 핍은 대장장이인 자형(姉兄) 조 가저리의 도제로 몇 년을 보내다 런던으로 가서 신사 수업을 받게 된다. 이런 행운은 그가 어린 시절 우연히 도와주었던 탈옥수 매그위치가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유형지(流刑地) 호주에서 크게 성공해 번 돈을 그에게 몰래 보내 주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핍은 자신의 후원자는 그가 짝사랑하는 에스텔러를 양녀로 기르는 미스 해비셤일 거라고 근거 없이 추정하며 자기기만의 길로 빠진다.



핍의 신사 수업은 진정으로 덕목과 실력을 갖추는 과정과 무관하다. 오히려 신사의 속물적 세계에 동화되어 가던 핍 앞에 어느 날 매그위치가 갑자기 나타난다. 핍은 그동안 자신을 후원해 준 사람이 매그위치라는 것을 알게 돼 큰 충격에 빠진다. 하지만 은인을 저버리지 않는 인간다움을 발휘한다. 회한 속에 큰 병에 걸려 누운 핍을 조가 멀리 찾아와 극진히 간호하고 심지어 빚까지 갚아 준다. 자신의 속물성을 뼈저리게 깨달은 핍은 외국에서 사업가로서 노력하여 성공하게 된다. 또 자신이 짝사랑하던 에스텔러가 첫 결혼에 실패한 뒤 과거와 달라진 모습을 보이자 다시 만나 사랑을 이룬다. 핍은 런던 사교계의 화려함 뒤에 숨은 차별과 착취의 현실을 통해 단련됨으로써 조의 세계가 가진 현실적인 무력함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그 세계의 인간다움을 간직한 원숙한 인물로 남는 것이다.



어린 핍을 그리는 초반부를 제외하면 작품은 전체적으로 당대 사회의 낙관적 분위기와 판이한 환멸의 정조가 지배하며, 신사의 이상이 어떻게 탐욕이나 범죄와 직결되는지를 가차없이 해부한다. 물론 주인공의 결말이 오늘의 눈으로 볼 때 흡족하느냐는 점은 논란거리이다. 작가가 당대의 신사 개념을 비판하고 부정하는 것은 틀림없으나, 신사 이외의 다른 삶의 가능성에 대한 본격적인 탐구는 없다. 이런 탐색에 대한 주문은 디킨스에게는 너무 무리한 것이지만, 21세기의 한국 독자라면 거기까지 나아가는 성찰을 통해 고전을 읽는 의의를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국내에 몇 가지 역본이 있으나 고전에 참맛을 제대로 옮긴 것은 없어 아쉬운 상황이다. (김명환, 서울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 독서나침반 Ⅱ


주인공 핍은 부모가 없는 고아로 누나의 손에 의해 길러진다. 핍은 대장장이인 매부 조 밑에서 견습공 노릇을 하며, 고독한 마을에서 살기 때문에 다른 사회를 전혀 접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사회는 여지없이 그에게로 다가온다. 그는 탈출한 죄수를 늪지대의 교회 무덤에서 만나게 되는데 이것이 핍이 경험한 최초의 사회와의 접촉이다. 그러나 핍은 최초의 접촉을 잊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그로 말미암아 핍은 누나의 집에서 물건을 훔치는 경험을 강요당하기 때문이다. 이 죄수와 핍과의 만남이 후에 얼마나 중요한 사건으로 전개되는가는 핍 자신도 독자도 알지 못한다.



한편 미스 해비샴은 그 동네의 은둔자로 수십 년 동안 그녀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자기의 어린 양녀와 놀아 줄 소년을 찾는다. 핍은 그 상대로 선택된다. 그녀는 태양을 피하여 바깥 세계와 완전히 차단된 생활을 하고 있으며, 온 방안의 공기는 곰팡내 나는 부패 그 자체이다. 그녀는 언제나 신부의 드레스를 입고 지내는데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그녀는 결혼식 날에 신랑으로부터 배신당한 과거를 안고 있다. 해비샴은 그 쓰라린 과거에 그대로 머물러 있기를 고집하며, 이는 자기 자신과 외부에 대한 복수일 뿐 아니라 세상에 대한 복수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해비샴의 억양은 핍과 다르며, 그녀의 태도도 상식에서 벗어난다. 이는 그녀의 기이한 복장과 더불어 일상의 틀에서 벗어난 사회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해비샴의 양녀인 아름다운 에스텔러는 핍의 기대와는 달리 그를 멸시한다. 이런 모든 것들이 핍으로 하여금 자신의 비천한 혈통을 알게 한다.



핍은 해비샴이 자신을 상류계급으로 상승하게 해 줄 후원자라는 추측을 하게 된다. 또한 핍은 에스텔러에게 매혹당한다. 그는 이런 환경 속에서 점점 파괴되어 가는데, 이는 해비샴이 에스텔러 안에 파괴의 도구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핍은 에스텔러를 처음 만나 그녀에게서 사랑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자기가 비천한 노동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자기의 집, 자기의 직업, 또 자기를 지금까지 돌보아 준 친절한 매부에게까지 불만과 혐오를 품게 된다.



이런 혼란의 와중에서 핍은 사회로부터 들어온 또 하나의 인물과 만나게 된다. 해비샴의 집에서 잠깐 본 후 동네의 술집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제이거스 변호사가 바로 그다. 핍은 제이거스와의 만남 후로 급격한 변모를 겪게 된다. 그에게는 장차 막대한 유산이 약속되어 있었다. 핍은 런던에서 신사 교육을 받고 신사의 생활을 하게 된다. 핍의 후원자는 지금까지 친절했던 매부 조에서 제이거스 변호사로 바뀐다. 제이거스를 따라 도착한 런던은 더럽고 좁고 흉했다. 이 부분의 런던에 대한 묘사는 디킨스 자신이 소년 시절 경험했던 런던의 모습과 같다.



핍은 런던에서의 생활에서 단 한 번도 행복한 시간을 갖지 못하지만, 여전히 에스텔러의 주위를 맴돌며 그녀와 평생 동안 함께 지낼 것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 에스텔러는 디킨스 소설의 여러 여주인공들 중에 가장 매력적인 여성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녀도 핍과 마찬가지로 비천하고 형편없는 집안 출신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핍이 늪지대에서 만났던 죄수이며, 어머니는 제이거스 집안의 가정부였다. 더군다나 에스텔러 자신도 신경쇠약에 걸린 여인의 손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핍은 그런 에스텔러를 위해 '신사'가 되고 싶다고 한다. 그러나 에스텔러는 어리석은 신사들이 모이는 '숲속의 방울새' 그룹 중에서도 가장 둔한 인물인 드러믈과 결혼한다.



한편 핍에게 막대한 유산을 물려준 장본인은 미스 해비샴이 아니라 핍이 늪지대에서 도와주었던 죄수로 판명된다. 바로 그 죄수가 핍을 매부의 대장간에서 끄집어내어 허망한 희망의 사회에서 살도록 해 놓은 장본인이다. 사실 그는 자신이 핍을 '신사'로 만들어 놓았다고 자랑한다. 그러나 핍은 죄수 매그위치가 바라는 것과 같은 신사가 되지는 못한다. 매그위치가 자기가 만든 신사를 보고 싶은 갈망 때문에 갖은 고생 끝에 핍을 찾아오지만 핍은 그가 싫게만 느껴진다. 단지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동정의 감정만을 느낄 뿐이다.



매그위치를 몰래 탈출시키려는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매그위치는 심한 상처를 입고 다시 체포된다. 상처입은 죄수의 침대 옆에서 핍은 비로소 '신사'가 되어가기 시작한다. 그에게서 애정 깊은 은인의 모습을 보는 것이다. 조에게 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은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고 자신을 자책한다. 매그위치는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사형 집행을 받기 전에 죽는다. 또한 그의 중죄로 인하여 전재산이 국가에 몰수당한다. 핍이 물려받기로 되었던 유산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오히려 큰 빚을 지고 만다. 그 동안 흥청망청 시간을 보낸 탓으로 특별한 기술이나 직업도 없는 형편이 되고 만다.



소년기의 핍은 누나 때문에 불행했고 미스 해비샴으로 인해 야심에 차 있었고, 에스텔러로 인해 좌절을 맛보았다. 또한 제이거스가 가져온 '위대한 유산'의 소식 때문에 유혹을 당했었다. 핍은 이러한 유혹과 좌절을 맛보면서 점차 사람들에 대한 애정의 깊이를 깨달아 간다. 이것이 바로 그를 신사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한편 그와 함께 신사의 과정을 밟은 허버트는 자기 아버지로부터 무엇이 진짜 '신사'인가를 배운다. 마음으로부터 신사가 아닌 사람은 태도에서도 진짜 신사가 될 수 없다고 허버트는 믿고 있다. 핍이 에스텔러를 상류계급의 상징으로 쫓아다니는 반면에, 허버트는 일부러 돈 한푼 없는 클라라와 약혼함으로써 자기 자신이 속해 있는 위선적인 계급에 도전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진정한 의미의 신사는 귀족 태생의 드러믈도, 런던에서 신사 교육을 받은 핍도 아니다. 시골 대장간에서 묵묵히 정직한 직업인으로 살아가는 핍의 매부 조가 바로 디킨스가 찾으려 한 신사이다. 제이거스가 핍을 데리러 와 그 동안 키워 준 데 대한 대가를 지불하려 했을 때 조는 당당히 거절한다. 그는 두 번 화를 내는데, 한 번은 자기 부인을 위해서였고 또 한 번은 어린 핍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비난받았을 때였다. 매부 조는 겉으로는 대장장이의 거친 완력으로 뭉친 인물이지만 내면에는 진정한 신사만이 가질 수 있는 온화함이 넘쳐흐른다. 그는 영원한 핍의 보호자이다.

매부 조와 더불어 진실한 인간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비디이다. 그녀는 시골 학교의 말수 적은 선생이었으나 조의 부인이 공장의 조수 올릭에 의해 상처를 입고 누워 있을 때, 조의 집안사람들을 돌보아준다. 핍에게 언제나 좋은 충고를 해 주는 그녀는 결국 자신과 같은 유형의 인간인 매부 조의 아내가 된다. 핍이 오랜 방황 끝에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매부 조와 비디 사이에 난 아이를 '핍'이라고 이름지은 것이 다름아닌 자신에 대한 매부 조와 비디의 사랑의 표시임을 알게 된다. 핍은 매부에게서 위대하고 진실된 참인간을 보게 된다. 핍은 비로소 자신이 진정한 유산을 물려받았음을 깨닫게 된다.



독자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디킨스의 독특한 풍자 속에서 진정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신사의 본질은 물질적인 풍요나 인위적인 교육에 의해 길러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따뜻한 사랑이 바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가 디킨스의 작품을 읽으면서 이러한 감동을 느끼는 것도 그의 '위대한 유산'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아닐까.





*****



엉뚱하게도, 나는 부모님의 비문을 보면서 그분들의 모습을 상상했다. 아버지는 네모난 얼굴에 건장한 체구였으며, 어머니는 하얀 얼굴에 주근깨가 박혔고 허약했으리라 생각했다. 부모님의 무덤 옆에는 다섯 개의 작은 비석이 나란히 서 있었다. 바로 내 동생들의 것이었다. 비석들을 보면 동생들은 연이어 태어났고 고만고만할 때 죽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 마을은 바다에서 20마일이나 떨어진 강을 낀 습지대에 있었다. 습기 차고 추웠던 어느 저녁 나절 -내가 처음으로 사물을 인식하기 시작한 때로 기억한다- 나는 쐐기풀이 뒤덮인 교회 앞 공터에 있었다. 그 음산한 풍경에 몸을 웅크린 채 훌쩍거리고 있을 때였다. "시끄러워!" 갑자기 무덤 사이에서 한 사나이가 나오며 소리쳤다. 잿빛 옷을 입고 있는 사나이는 발목에 족쇄를 차고 있었다. 온몸은 진흙투성이에 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요 쥐새끼 같은 놈! 시끄럽게 굴면 모가지를 비틀어 버릴 테다!" 사나이는 내 턱을 잡고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나이는 몹시 추웠던지 말할 때마다 이가 딱딱 부딪쳤다.



"제발 살려 주세요.....!" 나는 겁에 질려 겨우 말했다. "이름이 뭐냐? 어디 사는 놈이냐?" 그러나 미처 대답을 하기도 전에 사나이는 나를 거꾸로 세웠다. 주머니를 털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주머니에서 나온 것은 먹다 남은 빵 쪼가리가 전부였다. "이 빵 쪼가리보다는 네 녀석 볼이 더 맛있겠구나." 사나이는 나를 비석 위에 앉혀 놓았다. 그리곤 입을 벌려 빵조각을 우겨 넣었다. "넌 누구랑 사니?" "누나하고요. 대장장이 조 가저리 부인 말예요." "대장장이!" 대장장이란 말에 사나이의 눈이 번쩍 빛났다. 나는 더욱 주눅이 들어 슬그머니 고개를 숙였다.



"잘 들어, 네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니까. 너 줄칼이 뭔지 알지?" "....네에." "먹을 게 뭔지도 알지? 음식 말이다." "....네에." "그럼 당장 가서 줄칼을 가지고 와. 먹을 것도. 안 가지고 오면 네 심장과 간을 빼 먹을 테니. 내일 아침까지 가지고 오면 살려 주지. 대신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돼. 저기 저쪽에는 나 말고도 한 사람이 더 있어. 그 사람은 어린애 간 빼 먹는 데 비상한 재주를 가지고 있지. 아무리 숨어도 소용없어. 사실 지금도 그 사람이 널 해칠까 봐 내가 보호하고 있는 거라고. 어때, 시키는 대로 할래?" 사나이의 소름끼치는 말에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하느님이 널 때려죽일 거다." 사나이는 비로소 비석 위에서 나를 내려놓았다. "가! 약속 잊지 말고!" 쐐기풀과 가시덤불이 뒤덮인 묘지 사이로 절룩거리며 가는 그를 보고 나는 그대로 줄행랑을 쳤다.



누나는 나보다 스무 살이나 위였다. 미인은 아니었으나 나를 길렀을 뿐 아니라 남편에게도 정성을 다한다고 주위 사람들은 누나를 매우 좋게 생각했다. 누나에 비해 자형, 조 가저리는 잘생긴 편이었다. 푸른 눈빛에 금발의 고수머리가 보기 좋았고 성격도 온순했다. 그날 사나이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집으로 뛰어들었을 때 대장간 문은 닫혀 있었다. 자형이 날 보고 말했다. "어디 갔다 왔니? 누나가 얼마나 찾았는데. 벌써 열세 번째나 나갔단다. 이번에는 타클러('나'를 때릴 때마다 사용하는 회초리)까지 들고 갔어." 타클러라는 말에 나는 우뚝 섰다. 얼마나 많이 때렸던지 타클러는 아예 반질반질 길이 난 것이었다. 누나는 부엌 문을 와락 열자마자 소리를 지르며 나를 밀쳤다. 나는 자형 쪽으로 나가떨어졌다. 자형이 얼른 내 앞에 나서서 누나를 막아 주었다. 한 바탕의 소동 끝에 누나는 회초리를 내려놓고 저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자형은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누나의 눈치를 살폈다.



나는 몹시 배가 고팠다. 그러나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교회 앞 공터에서 만난 사나이를 위해 먹을 것을 챙겨야 했기 때문이었다. 누나가 워낙 알뜰해서 우리 집에는 음식이 남는 법이 없었다. 따라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내 것을 남길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었다. 높은 지붕에서 뛰어내리는 것이나, 깊은 바다 속을 뛰어드는 것만큼이나 힘들었다.



내 몫의 빵과 함께, 크리스마스 파티를 위해 누나가 만들어 놓은 음식들을 훔쳐 챙긴 후 대장간에서 자형이 쓰는 줄칼 하나를 꺼내서 가슴에 품고 나는 안개 낀 늪지대로 달음질쳤다. 포병대 근처의 둔덕에서 사나이는 내 쪽으로 등을 댄 채 잠을 자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다가가 사나이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먹을거리를 보면 무척 기뻐하리라. 사나이는 내 손길에 놀라 벌떡 일어나 도망쳤다. 그런데 그 사람은 내가 찾던 사나이가 아니었다. 그 역시 남루한 잿빛 옷에 족쇄를 차고 있었지만 어제 만났던 그는 아니었다. 포병대 쪽으로 가니, 내가 찾던 사나이가 있었다. 잔뜩 몸을 움츠린 채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밤새 그런 모양이었다.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