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마가렛 미첼 지음 | -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마가렛 미첼 지음
제1부
미국 남북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1861년 4월의 어느 눈부신 오후였다. 평소부터 남자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쾌활한 성격의 스카렛은 부친의 대농장 테라 포치에 깃든 시원한 그늘에서 돌턴 가의 쌍둥이 형제와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지나칠 만큼이나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는 쌍둥이는 바로 개구쟁이 스튜어트와 브렌트였다. 그러나 스카렛에게 있어 그 멋진 형제들은 아무리 보아도 사랑하는 애슐리에게 견주어 평가할 수 없었다. 뭇 남성들을 매혹시키기에 충분히 아름답고 이지적인 스카렛 오하라가 사랑하는 사람은 성격상으로도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매우 내성적인 애슐리였다. 애슐리 역시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으나 항상 성격 차이로 고민하는 형편이었다.
쌍둥이 형제는 내일 밤에 있을 월크스 가문의 댄스 파티에서 애슐리와 찰스의 누이동생인 멜라니와의 약혼소식이 발표될 것이라고 말했다. 순간 스카렛은 태연을 가장하고 있었으나, 실은 두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독점의식이 강한 그녀에게 있어서 사랑하는 애슐리가 멜라니와 결혼한다는 것은 참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오는 아버지를 기다리며 실낱같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이미 60세가 넘었지만 아직도 로맨틱하고 게다가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 제랄드 오하라는 전부터 스카렛이 애슐리에 대해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던 터라 스카렛으로 하여금 애슐리를 단념시켜야 하겠다고 생각하고는 “애슐리와 멜라니가 결혼을 한다는구나.”라고 말했다. 그 순간, 아버지의 팔을 잡고 있던 스카렛의 손이 맥없이 아래로 떨어져 내리며 괴로움이 야수의 이빨처럼 그녀의 마음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나의 사랑하는 애슐리가 멜라니와 결혼하다니! 믿을 수도, 그렇다고 믿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그때 머리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렇다, 애슐리는 내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그래, 그럴 거야. 나는 항상 숙녀답고 온순하며, 얌전하게만 행동했으니까, 내가 자기를 친구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 걸로 알았음이 분명해. 결국 나에 대한 자기의 사랑은 희망이 없는 것으로 단념해 버렸는지도 몰라. 그렇다! 내가 브렌트나 스튜어트 따위를 사랑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거야! 오! 지금까지 그 생각을 못한 난 얼마나 바보일까! 그렇다, 그에게 내 마음을 알려줄 방법을 찾아야 돼. 그가 내 마음을 알게 되면 멜라니 따위와 결혼할 리 없지. 물론이야!”
스카렛의 생각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아직 늦지 않았다. 결혼의 제단 앞에 나란히 선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함께 사랑의 도피를 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만든 일이 이 지방에서는 얼마든지 있지 않았던가! 더구나 애슐리의 약혼은 아직 발표되지 않았다. 그렇다! 아직도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충분하다! 멜라니를 떼어놓고 사랑하는 애슐리를 독점할 수 있으리라는 신념에서 곧 심장이라도 멎을 것 같은 벅찬 감동에 사로잡힌 스카렛의 표정은 이상하리 만큼 만족스럽게 변해갔다.
일단 마음속으로 애슐리가 자신에게 돌아오도록 만들 수 있다고 자신한 그녀는 아침 일찍부터 소란을 피우며 가장 화려하고 노출이 심한 의상을 준비해 입었다. 그 이유는 물론 애슐리의 마음을 유혹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하여 파티장인 존 월크스 산장에 도착한 스카렛은 가족들과 마차에서 내린 순간부터 인기가 대단했다. 주인인 존 월크스가 직접 스카렛이 자기의 팔을 잡고 마차에서 내리도록 하기 위하여 현관 앞 계단을 내려올 정도였다. 그때 동생 스웰렌의 애인인 프랭크 케네디가 다가와 스웰렌의 팔을 잡아주는 모습을 보고 스카렛은 질투를 느꼈다. 단순한 질투였다. 자신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람들이 자신의 눈앞에서 좋아하는 감정을 보이고 있으면 무조건 질투의 불길을 태우는 게 바로 그녀의 성격이었다. 이윽고 스카렛은 인근에서 어깨를 겨룰 사람이 없을 정도의 대지주이며 40이나 된 케네디와 자기 자신의 재산을 생각해보고는 그에게 매력 있는 미소를 살짝 지어 보여 주었다.
주인인 존 월크스와 매우 기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스카렛은 사람들 가운데서 애슐리의 모습을 찾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현관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그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시선을 집안으로 정원으로 재빨리 보내고 있던 스카렛은 문득 낯선 사나이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 사나이는 홀 안의 구석진 곳에 홀로 서서 냉정하고도 거만한 태도로 스카렛을 쏘아보고 있었다. 기분이 나빴다. 어느덧 파티는 무르익어 갔고 애슐리와 조용히 이야기할 기회를 갖지 못한 스카렛의 마음은 답답하기만 했다. 여자들은 모두 밤에 기운을 차리기 위하여 낮잠을 잤고, 남자들은 전쟁 이야기로 열을 내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스카렛의 아버지는 물론 스튜어트와 돌턴, 애슐리 등이 있었으며, 특별한 사나이로 보이는 레드 버틀러만 입을 다물고 마치 가소롭다는 듯이 멸시하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더 이상은 허무맹랑한 그네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다는 듯이 레드 버틀러가 앞으로 나섰다. “나는 여러분이 보지 못한 많은 것을 보고 왔습니다. 적은 양의 음식과 싼 임금을 지불하며 기꺼이 북부를 위하여 싸울 수천의 사람들과 공장과 제철소, 조선소와 탄광, 철광까지도 보고 왔습니다. 그 모든 게 남부에는 없는 것들입니다. 남부가 가지고 있는 것은 오직 목화와 노예, 그리고 교만뿐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한 달도 채 가지 못해서 우리들을 무찌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한 청년이 나섰다. “버틀러, 너무 뽐내지 말아! 사관학교에서 퇴교 당한 주제에 무얼 안다고.” 그 순간 레드 버틀러의 눈빛에 혐오와 분노가 끓었고 앞에 나선 청년은 당장에라도 칼을 뽑을 만큼이나 당당한 기세였다. 다음 순간 마음을 안정시킨 레드 버틀러는 애슐리에게 도서관을 보여 달라며 자리를 피하고 말았다. 기세가 등등해진 젊은이가 당장 버틀러를 쫓아가 결투라도 신청할 기세를 보이며 흥분하자 애슐리가 조용히 타일렀다. “이것 봐, 자네 오늘 운이 좋았네. 그는 사격의 명수야. 자네 따윈 어림도 없을 걸세.” 숨어서 지금까지의 모든 이야기를 들으며 온갖 생각을 하던 스카렛의 얼굴에 비로소 안도의 빛이 어렸다. 애슐리와 말을 할 기회가 왔기 때문이었다.
2층으로 올라가는 동안 스카렛은 조금 전에 있었던, 아니 느꼈던 레드 버틀러의 시선을 생각했다. 마치 자신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을, 두 개의 탐스러운 젖가슴은 물론 그 훨씬 아래의 가장 은밀하고 수줍은 삼각지대까지도 온통 드러내놓고 있는 상태의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같이 느껴졌던 그가 불현듯 생각났다. 그때 스카렛을 부르는 소리에 그녀는 계단에 멈추어 섰다. 온순한 눈을 한 풍채 좋은 청년 찰스였다. 그는 여자에게 수줍음을 타기 때문에 스카렛이 돌아보자 얼굴을 붉혔다. 스카렛은 평소 쾌활하고 남자답지 못한 청년인 찰스와는 인사 정도만 나누며 지내왔으나 오늘은 자신이 주위의 모든 시선을 끌고 싶다는 속셈으로 다른 날과 달리 반색을 하며 말했다. “어머, 찰스 해밀턴! 역시 언제나 훌륭하시군요. 분명히 고의적으로 애틀랜타에서 가엾은 내 가슴에 상처를 주려고 오신 모양이군요! 그렇지요?” 찰스는 흥분으로 말을 제대로 이어가지 못했다. 생각은 여전히 애슐리에게 가 있으면서도 그렇게 말하는 스카렛의 마음을 그는 모르고 있는 것이다. “저. 스카렛? 오늘은 꼭 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머! 그래요? 그럼 내가 2층에 갔다가 돌아올 동안 기다려 주세요. 찰스, 만일 다른 여자와 놀러 가면 안돼요. 난 아주 굉장한 샘쟁이니까요. 아시겠어요?” 찰스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자신이 전쟁에 나가는 동안 기다려달라고 정중하게 말했다. 이어서 자신은 스카렛을 사랑하고 있으며 결혼해달라고 선언하듯 말했다. 결혼? 스카렛은 주저앉고 말았다.
“네.” 온통 신경이 애슐리에게만 쏠려있는 스카렛은 건성으로 그렇게 대답하고 여전히 애슐리와 멜라니가 이야기하고 있는 곳으로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 일이, 그런 일들이 지금 애슐리를 아무도 모르게 방으로 끌어들이는 스카렛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밖으로 나가던 도중 갑작스레 스카렛에게 이끌린 애슐리는 그녀가 이끄는 대로 빈 방에 들어섰다.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몸까지 떨며 말했다. “난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잠시 동안 숨이 막힐 것 같은 침묵이 흘렀다. “모든 남자들에게서 자신을 인정받고 싶단 말이오? 그렇다면 말하지. 스카렛 당신은 이미 옛날부터 내 마음을 빼앗고 있었어. 그건 당신도 잘 알 거야.” “애슐리. 말해 줘요. 말해야 돼요! 아, 나를 더 이상 괴롭히지 말아 주세요. 정말로 내가 당신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나요?” “그런 말을 하면 안 돼. 스카렛! 그건 본심이 아냐! 그런 말을 하면 당신은 후에 당신을 미워하게 될 거야. 또한 그 말을 들었다는 이유로 나도 미워질 거구.” “애슐리, 당신은 나를 좋아하고 있어요. 좋아하고 있지요? 분명히 그렇지요?” “스카렛, 밖으로 나가지 않겠소? 나는 멜라니와 결혼하기로 되어 있어.”“그렇다면 그녀를 사랑하고 있나요?” “그녀는 나와 닮은 점이 아주 많아. 내 피의 일부분이며 우리는 서로 이해하고 있어.” “그래도 당신은 날 사랑한다고 말했어요.” 그러자 애슐리가 말했다. “난 해선 안 될 말을 그만 하고 말았어.” “난 죽을 때까지 당신을 증오하게 될 거예요. 비열한….” 그 순간, 부드럽게 손을 내민 애슐리의 뺨으로 스카렛의 손바닥이 매섭게 올려졌다. 애슐리는 조용히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갑작스러운 공허에 멍하니 서 있는 스카렛을 뒤로 하고 조용히 방을 나가고 말았다.
심장이 터질 것 같고 마치 애슐리에게 배반당한 것처럼 느낀 스카렛은 꽃병을 벽난로를 향해 힘껏 집어던졌다. 병이 산산 조각나는 순간 아무도 없어야 할 방의 벽난로 뒤의 긴 의자에서 한 사람이 몸을 일으켰다. “전쟁인가요? 이건 너무하시는군요.” 다름 아닌 레드 버틀러였다. “남의 이야기를 엿듣다니!” 그녀가 차갑게 쏘아주었다. “그렇지만 엿듣는다는 건 가끔씩 매우 재미있고 또한 유익한 것을 가르쳐 주더군요.” “당신은 신사가 아녜요!” “지당한 말씀. 아가씨도 역시 숙녀는 아니시고.” 레드 버틀러의 말은 스카렛에게 매우 흥미를 느끼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만일 이 남자를 죽여 버릴 수 있다면. 그렇지 않아도 애슐리에게 그토록 무참하게 당했는데…. 그녀는 버틀러의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들으며 문을 탁 닫았다.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에 모두들 아우성을 치며 사방으로 흩어지는 가운데 오직 두 사람, 말을 타고 있는 애슐리와 그 옆에 안타깝게 올려다보며 서 있는 멜라니의 온화한 눈빛을 스카렛은 멀리서 바라보았다. 자신을 거절했던 애슐리가 멜라니와 격렬하게 포옹하며 뜨거운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스카렛은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다. 그때 실로 엄청난 생각이 스카렛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한 찰스 해밀턴을 이용할 계획이 떠올랐던 것이다. 찰스와 결혼한다면 애슐리를 사랑한다고 말했던 것이 나의 본심이 아니라는 것을 그가 알게 될 것이며 멜라니 역시 오빠인 찰스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내가 찰스와 결혼한다면 괴로워할 것이다. 그것으로 내 애인을 빼앗긴 복수는 물론 스튜어트나 브렌트에게도 상처를 주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질투와 원한이, 그리고 짙은 시샘에 얽힌 스카렛은 찰스 해밀턴과 가급적 빨리 결혼해서 모두에게 복수해야겠다고 거듭 다짐했다. 그로부터 정확히 2주 후 모두가 놀라는 가운데 스카렛 오하라는 찰스 해밀턴의 아내가 되었다.
제2부
레드 버틀러의 생각과 판단이 정확했음을 증명하듯 바야흐로 남군은 많은 전사자를 내고 북군에게 연일 패퇴하고 있었다. 많은 전사자들의 명단이 호외를 통하여 거리에 물결쳤고, 그 소식을 접하고 비통해하는 가족들의 슬픔이 어디에서고 그칠 줄 몰랐다. 그 가운데 스카렛 오하라에게도 한 통의 전사통보서가 날아들었다. 그러니까 스카렛 오하라는 마음을 결정지은 지 2주일 만에 한 사람의 아내가 되었고, 다시 2개월도 못되어 그의 미망인이 되고 만 것이다. 그녀의 짧은 신혼 생활은 행복한 것이 아니었다. 첫날밤부터 남편 찰스에게 “내 옆엘 오면 소리를 지를 거예요! 정말이에요! 저리가세요. 날 건드리지 마세요!”라는 식으로 대했던 그녀였다.
미망인이 된 스카렛은 주위의 모든 가족들에게 큰 걱정거리였다. 스카렛은 남들을 의식해서 검은 상복을 입고 슬픈 표정을 지어야 된다는 것에 그야말로 질식이라도 할 것만 같았다. 당장에 모두 벗어버리고 화려한 드레스 차림으로 사교계에 나가 뭇 남자들과 사귀고 싶었다. 자신이 어찌 미망인이란 말인가. 어느 날 스카렛을 지켜보던 어머니의 권유로 슬픈 마음을 위로 받기 위해 사반나나 애틀랜타로 여행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곳에 가면 다른 사람이 아닌 멜라니가 있을 것이라는 어머니의 말 때문이었다. 그렇다. 멜라니가 거기에 있다면 그리운 애슐리가 그곳으로 오지 않겠는가.
스카렛이 여행 겸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고모님 댁으로 온 그 해 한여름 어느 날의 일이었다. 전쟁 중인 장병들을 돕기 위한 바자회에 참석한 스카렛은 낯선 사나이를 발견하였다. 그는 검정색 고급 양복을 입었고 키가 컸으며, 가까이에 서 있는 사관들에 비해서 눈에 뛸 만큼 잘 생긴 사내였다. 태도도 자신감에 넘쳐 있었고 불쾌한 기분이 들만큼 상대를 무시해 버리는 데가 있었으며, 스카렛을 응시하고 있는 그의 대담한 시선에서는 어떤 악의 같은 게 느껴질 정도였다. 순간 그 사내가 다가오자 스카렛은 크게 놀라며 당황했다. 그 사나이가 바로 레드 버틀러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를 이렇게 기억해 주실 줄은 미처 몰랐는데요, 오하라 양.” 깨끗하고 투명한 목소리로, 묘하게 느껴질 만큼이나 느릿한 그 말은 짙은 찰스턴 사투리였다. 지난날의 부끄러움 때문에 당황하고 있던 스카렛은 그때 마침 멜라니가 다가오자 고마운 마음을 느낄 정도였다. “어머, 레드 버틀러 씨 아니세요? 찰스턴에서 이곳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멜라니가 버틀러를 반갑게 맞이했다.“월크스 부인. 물건을 좀 들여왔습니다.” “어머, 그럼 선생께서 저 소문의 주인공 버틀러 선장이셨군요. 저 적군의 봉쇄를 뚫은.” 그때 스카렛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하자 멜라니가 스카렛에게 부채질을 해주었다. 그때 레드 버틀러가 말했다. “여기는 정말 덥군요. 미스 오하라가 정신을 잃을 정도인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창가로 모실까요?” “좋아요.” 그렇게 대답하는 스카렛의 음성이 너무도 거칠었기 때문에 멜라니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이 사람은 이제 미스 오하라가 아니에요. 해밀턴 부인입니다. 저의 언니예요.” 하고 말했다.
바자회에서는 상이군인에게 기부할 물건을 모으고 있었다. 버틀러가 순금 담배 케이스를 바구니 안에 넣는 것을 보며 스카렛은 자신이 상복을 입고 왔음을 다행으로 여겼다. 기껏해야 손에는 찰스에게서 받은 결혼반지 하나밖에는 없었으니까. 스카렛 앞으로 패물들이 담긴 바구니가 다가오자 스카렛은 갖은 게 없다는 태도를 취해 보였다. 그러자 멜라니는 결심한 듯 자신의 결혼반지를 빼어 바구니에 넣었다. 그러자 버틀러가 허리를 굽혀 존경의 찬사를 보내는 광경을 바라보던 스카렛은 찰스와의 결혼반지를 얼른 빼어 바구니에 넣었다. “아, 역시 훌륭한 부인이십니다.” 레드의 찬사를 듣고 있던 스카렛의 마음은 끓어올랐다. 솔직히 그와 한번쯤 교제해 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지만 짐짓 모든 감정을 숨긴 채 그를 의식적으로 대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레드 버틀러에 대한 소문이 점차로 나빠지고 있었으나, 스카렛만은 그렇지 않았다. 이상하게 거부감이 들면서도 그를 물리치기 싫은 게 바로 그녀의 심정이었다. 레드는 최근에 와서 이상할 만큼 스카렛에게 친절을 베풀었고, 그런가 하면 가끔씩 커다란 선물까지도 그녀에게 하는 것이다. 어느 날의 일이었다. 레드는 몇 겹이나 되는 엷은 종이로 포장된 최신형의 보닛을 선물했다. 스카렛은 새로운 의상이나 모자 같은 걸 손으로 만져 보기는커녕 구경하는 것조차 구속을 받아 오던 터여서 아름다운 보닛을 보자 거의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스카렛은 그 모자를 사겠다고 레드에게 제안했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부인에게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그 담록색이 어울리는 사람은 부인뿐이니까요. 부인의 눈빛을 내가 기억하고 있지 않은 줄 아십니까?” “어머! 그렇다면 나를 위해서 이 모자를 맞추셨나요!” 스카렛의 놀라움은 그야말로 하늘에라도 뛰어오를 만큼이나 아주 대단한 것이었다. “물론이죠. 아, 너무도 귀엽군, 견딜 수 없을 만큼이나, 스카렛.” 그렇게 말한 레드는 재빨리 몸을 굽혔다. 그러면서 그의 콧수염이 가볍게 그녀의 볼을 스쳤다. 그런 일이 있는 가운데 어느덧 스카렛의 마음에서는 이상스러울 만치 레드라는 남자를 진심으로 생각하는 마음이 싹트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 멋지고 건방진, 그리고 조롱하는 것 같은 사나이를 처음 본 순간부터 좋아했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