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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

헨리 데이비드 소로 지음 | -
월든

헨리 데이비드 소로 지음



삶의 경제학

내가 이 책을 썼을 때 나는 인가로부터 멀리 떨어진 숲 속에 내 손으로 지은 집에서 혼자 살았다. 그곳은 매사추세츠 주의 콩코드에 있는 월든 호숫가였다. 나는 그때 오로지 내 두 손의 노동만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내가 그곳에 산 것은 2년 2개월 동안이었다. 지금 나는 다시 문명의 세계로 돌아와 있다.

내가 월든 호수에 간 것은 보다 싼 생활비로 살기 위해서라거나 화려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무 방해 없이 나만의 일을 하기 위해서였다. 어느 정도의 상식과 모험심, 사업적 재능의 결여로 그 일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어리석다기보다는 차라리 슬픈 일인 것 같았다. 나는 일반적으로 필요한 자금조차 없이 이 일에 뛰어들었다. 우선 당면 문제로서 의복을 생각할 때, 사람들은 대체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실용성보다는 새것에 대한 선호와 남들의 평판을 염두에 두게 마련이다. 할 일이 있는 사람에게 옷을 입는다는 행위의 목적은, 첫째 생명의 열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고, 둘째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는 노출을 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임을 상기시켜 준다면, 그것이 아무리 필요하고 중요한 일일지라도 새로 옷을 구하지 않고 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어떤 일을 시작할 때는 낡은 옷을 입고 해야 한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가지고 할 무엇’이 아니라, ‘해야 할 무엇’ 또는 ‘되어야 할 무엇’인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해지고 더러운 낡은 옷이라 해도 너무나 열심히 일한 나머지 헌옷을 입고도 새 사람이 된 듯이 느껴질 때까지는, 또 헌옷을 새 술을 담을 낡은 부대처럼 느낄 수 있을 때까지는 새 옷을 구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가 털갈이할 시기는 새들이 그러하듯 우리 인생에서 중요한 단계에 이르렀을 때여야만 한다. 뱀 역시 이런 식으로 허물을 벗고 쐐기벌레 역시 내적 활동과 확장으로써 애벌레의 껍질을 벗는 것이다. 의복이란 인간의 외피이며 속세의 번뇌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을 경우 가짜 깃발을 달고 항해하는 셈이어서 결국 인류는 물론 스스로의 심판에 의해 반드시 징계를 받고 말 것이다.

삶의 필수품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노력으로 획득하는 모든 것들 가운데서 처음부터 또는 오랫동안 사용함으로써 인간의 삶에 너무나도 중요하게 되어서 이제는 야만인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철학적인 이유에서든 그것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것들을 의미한다. 오늘날에는 주거 역시 삶의 필수품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인간이 이곳보다 더 추운 지방에서도 오랫동안 집 없이 삶을 영위했다는 실례는 아주 많다. 따라서 살 집을 지을 작정이라면 감화원이나 박물관, 양로원, 감옥, 또는 화려한 왕릉처럼 지을 필요는 없다. 집주인에게 집세를 달라는 시달림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집, 그런 집이면 족하다. 상자 속에서도 얼어 죽지 않을 텐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보다 크고 화려한 상자 속에 살며 세를 지불하느라 죽도록 고생하고 있다. 나는 지금 결코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경제를 쉽게 생각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간단히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집을 소유한 농부는 집 때문에 더 부유해지는 것이 아니라 가난해질 뿐이다. 오히려 집이 그를 소유한 셈이 되고 만다. 그것은 우리가 만든 집들이 우리가 그 집 속에서 거주한다기보다는 갇히는 결과를 야기하는 다루기 힘든 재산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피해야 할 나쁜 이웃은 바로 우리 자신의 천박한 자아인 것이다. 이 마을에서 거의 한 세대가 지나도록 교외에 있는 자기 집을 팔고 마을 안으로 들어오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가족이 적어도 한두 집 있는데, 그들은 죽어야만 집으로부터 자유를 얻을 것이다.

1845년 3월이 끝나갈 무렵 나는 도끼 한 자루를 빌려 집을 짓기로 작정한 곳에서 가까운 월든 호숫가의 숲 속으로 들어간 다음 재목으로 쓰기 위해 크고 꼿꼿하게 자란 한창 때의 백송나무를 베기 시작했다. 하루는 도끼날이 빠져 히코리의 푸른 가지를 잘라 돌멩이로 쐐기를 박았다. 그런 다음 자루를 물에 불리기 위해 도끼를 통째로 호수 얼음 구멍 속에 담갔다. 그 순간 물 속을 지나는 줄무늬 뱀이 보였는데 그놈은 내가 그곳에 있는 동안(아마 15분은 더 되었을 것이다) 아무 불편 없이 호수 바닥에 가만히 엎드려 있었다. 어쩌면 아직 완전히 동면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문득 어쩌면 인간도 그와 비슷한 이유에서 지금처럼 비천하고 원시적인 상태에 머물고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인간이 자신을 일깨우는 봄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면 분명 보다 고결하고 더욱 성스러운 삶을 영위할 것이다.

일을 서두르지 않고 정성을 들였기에 4월 중순이 되어서야 뼈대를 세울 준비가 끝났다. 나는 고운 모래가 나올 때까지 사방 6피트에 7피트 깊이로 식물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만큼 지하 광을 팠는데, 그 정도면 아무리 추운 겨울이라도 감자가 얼 염려가 없었다. 나는 이렇게 땅을 파는 일에 즐거움을 느꼈는데, 그것은 어느 지방에서든 땅 속을 파고 들어가면 일정한 온도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 오랜 세월이 흘러 지상의 건물이 사라지고 나면 후세 사람들은 땅에 파인 자국을 보게 될 것이다. 결국 집이란 것은 여전히 굴 입구에 만들어 놓은 일종의 현관인 셈이다.

화가들이 알고 있듯이 이 나라에서 가장 흥미로운 주거 형태는 통상 가난한 이들이 사는 아무 꾸밈도 없는 소박한 통나무 오두막이다. 그런 집을 생생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바로 그들이 집을 외피삼아 사는 그곳 주민들의 삶이지, 결코 그 표면적인 형태가 아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나는 굴뚝을 세우고 이미 방수처리가 된 측벽에 통나무에서 잘라낸 첫물 목재를 불완전하고 물기가 많은 그대로 지붕널을 달고, 널 모서리는 대패로 반듯하게 다듬어 주었다. 이렇게 해서 내게는 폭 10피트에 길이 15피트, 8피트짜리 기둥이 서고 다락방과 벽장이 있고 양편으로 큼직한 창이 나 있으며 뚜껑 문이 둘 달리고 한쪽 끝에 문을 내고 맞은 편에 벽돌로 벽난로를 만든, 야무지게 지붕널을 달고 회반죽을 바른 집 한 채가 생겼다.

내가 무엇보다 선호하는 일은 특히 내 자유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고, 또 험하게 살더라도 나로서는 행복할 수 있으므로 지금 당장은 값비싼 양탄자나 좋은 가구, 맛있는 요리, 그리스 식이나 고딕 양식의 주택을 손에 넣기 위한 돈을 버는 데 내 시간을 써버릴 생각은 없었다. 지금보다 더 많은 여유가 생길 경우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는 이들에게는 일을 두 배로 하라고 충고하고 싶다. 그래서 몸값을 다 치르고 자유를 살 수 있을 때까지 말이다. 나로서는 날품팔이야말로 무엇보다 독립적인 직업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특히 그 일은 한 사람의 생계비를 벌기 위해서 1년에 3, 40일정도만 일하면 되기 때문이다. 해가 지는 것과 더불어 하루 일이 끝나고 나면 그는 일과는 아무 상관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지낼 수 있다. 그런 반면 끊임없이 사업에 몰두해야 하는 그의 고용주는 일 년 내내 휴식을 누릴 짬이 없다.

간단히 말해서 나는 신념과 경험 두 가지 모두에 의해, 소박하고 현명하게만 산다면 이승에서 한 사람이 먹고사는 일은 힘겨운 일이 아니라 유희나 다름없는 일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것은 보다 소박한 민족이 영위하는 직업이라는 것이 아직도 인위적인 민족의 경우에는 스포츠인 것과 마찬가지다. 나보다 더 쉽게 땀을 흘리는 사람이 아닌 한 꼭 이마에 땀을 흘려 가며 생계비를 벌 필요는 없는 일이다.

나는 독립된 주거지를 선호한다. 일반적으로 이웃과 가능한 유일한 협력은 극히 부분적이고 피상적이게 마련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협력이란 거의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의 귀에 들리지 않는 화음처럼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같이 보인다. 신념이 있는 사람은 어딜 가든 똑같은 신념으로 협력할 것이다. 반면, 신념이 없는 사람은 어떤 무리에 속하든 세상 나머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살아갈 것이다. 가장 고상한 의미든 아니든 협력이란 함께 삶을 영위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독립적인 삶은 너무 이기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실이지 나는 지금껏 자선사업에 그다지 관여한 적이 없다. 나는 일종의 의무로 몇 가지를 희생시켰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자신의 즐거움을 희생시켰다. 다른 모든 일이 그렇듯이 자선에도 재능이 있어야 한다. 선행이라는 일자리는 이미 만원이다. 게다가 나도 그 일이라면 꽤 해본 편인데,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그 일이 내 체질과 맞지 않는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사회가 내게 요구하는 선행을 하기 위해, 또는 세상을 파멸로부터 건지기 위해 나만의 소명을 의식적으로, 또 고의로 저버려서는 안 된다. 그리고 나는 어딘가 이 세상과 비슷하면서도 거의 무한대로 더 큰 어떤 불변성이 있어 현재의 세상을 지켜줄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러나 누구라도 그 일에 소질이 있다면 막을 생각이 없다.

변질된 선(善)에서 솟는 것만큼 지독한 악취도 없다. 그것은 인간에게도 신의 경우에도 한낱 썩은 고기일 뿐이다. 그건 안 될 일이다. 그보다는 차라리 자연스러운 악행을 당하는 것이 낫다. 내가 굶주릴 때 먹을 것을 주고 추위에 떨 때 따뜻하게 해주고, 또는 수렁에 빠졌을 때 나를 끌어내 준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내게 선을 베푼 사람이 아니다. 그 정도의 일은 뉴펀들랜드 종의 개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넓은 의미에서 볼 때 자선은 인간애가 아니다. 우리가 가장 유복하게 살고 있을 때야말로 바로 우리에게 가장 도움이 필요한 때가 아닐까? 그리고 그 경우 우리를 돕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나 또는 나와 비슷한 인간에게 진심으로 선을 베풀려고 한 자선 모임에 대해선 들어 본 적도 없다. 자선은 인류에 의해 높이 평가받는 거의 유일한 미덕이다. 아니, 그건 지나치게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데, 그러한 과대평가는 바로 우리의 이기심 때문이다.



내가 살았던 장소와 삶의 목적

내가 처음 숲 속에 거주했을 때가 우연히도 독립기념일인 1845년 7월 4일이었다. 내가 숲 속에 들어간 이유는 신중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들만을 직면하기 위해서,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 이르렀을 때 제대로 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삶이란 그처럼 소중한 것이기에 나는 삶이 아닌 것은 살고 싶지 않았고, 도저히 불가피하기 전에는 체념을 익힐 생각도 없었다. 나는 깊이 있게 살면서 인생의 모든 정수를 뽑아내고 싶었고, 강인하고 엄격하게 삶으로써 삶이 아닌 것은 모조리 없애버리고 싶었다. 숲 속에 널찍하고 반들반들하게 길을 닦아 삶을 맨 안쪽까지 몰아붙인 다음 천박함을 있는 그대로 뽑아서 온 세상에 공표하고 싶었다. 그렇지 않고 그 삶이 숭고한 것이라면 직접 체험함으로써 그 숭고함을 알고 싶고 다음 번 여행 때에는 그것에 대하여 진정한 얘기를 할 수 있기를 원했다. 내가 보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이 악마의 것인지 하느님의 것인지 이상하리 만큼 확신하지 못하면서 다소 성급하게 ‘하느님을 찬미하고 영원토록 기쁘게 하는 일’이야말로 이승을 사는 인간의 주된 목적이라는 식의 결론을 내리는 듯이 보였기 때문이다.

사실상 삶에서 성공하려면 탁월한 계산가가 되어야 한다. 단순화하고 단순화하여야 한다. 하루 세끼 식사를 할 게 아니라 필요할 때 한 끼만 먹도록 하라. 백 가지 요리를 다섯 가지로 줄이라. 나머지 일들 역시 같은 비율로 줄이라. 우리의 삶이란, 수많은 소국들로 구성되고 끊임없이 국경이 바뀌어 결국에는 독일인조차 현재의 국경이 어딘지 말할 수 없게 된 저 독일연맹과 흡사하다. 국가 그 자체도 이른바 내적 개선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비대해서 다루기 힘든 조직체가 되어, 그 안의 수백만 가정이나 다를 바 없이 여기저기 가구가 엎질러지고 자신이 놓은 덫에 걸리고 계산과 적당한 목표의 부족으로, 사치와 부주의한 지출 때문에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유일한 치료책은 엄격한 검약, 스파르타식 간소함보다 훨씬 더 가혹한 생활양식, 고양된 목표다.

시간이란 내가 낚시하는 냇물일 뿐이다. 나는 그 물을 마시지만, 물을 마시는 동안 모래가 깔린 바닥을 보고 그것이 얼마나 얕은지를 알게 된다. 시간의 얕은 흐름은 이내 흘러가고 만다. 그러나 영원은 그대로 남는다. 나는 좀더 깊은 물을 마시고 싶다. 바닥에 조약돌처럼 별들이 깔린 하늘에서 낚시를 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하나조차 헤아릴 수 없다. 알파벳의 첫 번째 글자가 뭔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태어난 그날처럼 현명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언제나 뉘우치며 살고 있다. 지성이란 식칼과 같아서 사물의 비밀을 인식하고 갈라낸다.

나는 필요 이상으로 두 손을 바삐 놀릴 생각이 없다. 내 머리가 곧 두 손이며 두 발인 것이다. 내 모든 최고의 기능은 머릿속에 집중돼 있다. 나는 본능적으로 내 머리가, 짐승이 굴을 팔 때 주둥이와 앞발을 쓰는 것처럼 굴을 파는 기관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그것으로써 이 언덕을 파볼 생각이다. 이곳 어딘가에 가장 풍부한 광맥이 있다. 나는 점치는 막대와 엷게 떠오르는 수증기를 보고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하여 바로 이곳에서 굴을 파기 시작한 것이다.



독서

나는 여름내 책상 위에 호머의 『일리아스』를 놓아두었지만 이따금씩 읽곤 했을 뿐이다. 처음에는 집도 마저 지어야 했고 콩밭에서 잡초도 뽑아야 하는 등 두 손을 끊임없이 놀려야만 했기에 그 이상 책을 읽는다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앞으로 책을 읽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일하는 사이사이에 가벼운 여행기를 한두 권 읽었지만 곧 그 일이 부끄러워졌다. 나는 내가 사는 곳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이다.

알렉산더 대왕이 원정 때마다 보물함 속에 『일리아스』를 넣어 지니고 다녔던 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글로 적인 말은 유물의 꽃이다. 그것은 다른 어떤 예술품보다도 우리와 친근하며 그만큼 보편적이다. 책의 세계의 소중한 재산이며 세대와 민족의 온당한 유산이다. 아무리 가난한 집이라도 그곳 선반에는 가장 오래되고 훌륭한 서적들이 자연스럽고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게 마련이다. 책은 스스로를 위해 아무런 변호도 하지 않지만, 그것이 독자를 계발시키고 고무시키는 한 양식 있는 사람이라면 책을 거부하지는 않을 것이다.

위대한 시인들의 작품은 아직 인류가 제대로 읽은 적이 없는데, 그 이유는 위대한 시인만이 그것들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대중은 그 작품들을 마치 별을 보듯이, 요컨대 천문학적으로가 아니라 점성술적으로 읽었을 뿐이다. 사람들 대부분은 마치 장부를 적고 장사에서 속지 않기 위해 계산법을 배운 것처럼 하찮은 편의를 위해 읽는 법을 배웠다. 고귀한 지적 운동으로서의 책 읽기에 대해서는 거의 또는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치품처럼 우리의 마음을 달래주고 보다 고귀한 기능을 잠들게 만드는 독서가 아니라, 발끝으로 서서 읽는 일, 우리의 가장 기민하고 주의 깊은 순간을 바쳐서 읽는 행위야말로 고결한 의미에서의 독서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책이 독자처럼 우둔하지는 않다. 어쩌면 바로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꼭 들어맞는 말을 해주는 책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제대로 귀를 기울여 이해할 수만 있다면 아침이나 봄날 이상으로 우리의 삶에 유익하고 문제의 새로운 양상을 제시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한 권의 책을 읽고 자신의 삶에 새로운 기원을 마련했던가! 지금까지의 기적을 설명하고 새로운 기적을 보여줄 책이 우리를 위해 어딘가 분명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지금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도 어딘가에 표현돼 있을 수도 있다. 지금 우리를 혼란케 하고 어리둥절하고 난처하게 만드는 문제들을 과거의 모든 현자들도 직면한 적이 있었다. 어느 한 문제도 빠지지 않고 말이다. 그리고 각각의 현자들은 자신의 능력에 따라 자신의 언어와 자신의 삶으로 그 문제들에 해답을 주었다. 나아가서 우리는 책에서 지혜와 더불어 관대함도 배우게 될 것이다.



고독

지금은 온몸이 하나의 감각으로 바뀌고 땀구멍 하나하나로 기쁨을 숨쉬는 감미로운 저녁이다. 나는 이상하리만큼 자유로운 자연의 느낌을 품고, 자연의 일부를 품고 돌아다닌다. 구름이 낀 데다 바람까지 부는 서늘한 날씨인데도 나는 셔츠 차림으로 돌이 깔린 호숫가를 따라 걸어 본다. 특별히 눈길을 끄는 것은 없다. 자연의 모든 요소가 내게 유난히 친숙하게 느껴진다. 휴식은 결코 완결되는 법이 없다. 가장 거친 동물들은 쉬지 않고 먹잇감을 찾아 나선다. 여우며 스컹크, 토끼들이 이제 겁 없이 들과 숲 속을 배회한다. 그들은 자연의 야경꾼들…. 생동감 넘치는 삶을 하루하루 이어주는 연결 고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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