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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듀어런스

캐롤라인 알렉산더 지음 | 뜨인돌

인듀어런스



캐롤라인 알렉산더 지음/김세중 옮김



뜨인돌/2002년 9월/176쪽/30,000원



 



1부 영웅시대



아일랜드 태생인 섀클턴은 스콧의 남극 탐험에 지원하기 전까지 상선대의 고급 선원으로 일했다. 1908년 그는 남극점에서 불과 150km 떨어진 지점까지 접근했는데 이는 1901년 로버트 스콧의 남극점 1,000km 접근 기록을 약 600km 앞지른 것이어서 새클턴은 일약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탐험으로 인한 빚 때문에 새클턴이 재정 문제로 허덕이고 있는 사이에 스콧이 다시 한번 남극 공략에 나섰다. 하지만 그들은 해내지 못했고, 스콧이 남긴 글은 그가 죽은 지 1년 후에야 발견되었다. 1913년 2월, 스콧의 글이 세상에 알려지자 영국 전체가 커다란 충격과 슬픔에 휩싸였다.

 



이즈음 새클턴은 남극 대륙 횡단을 목표로 탐험에 나섰다. 영국 정부 및 크고 작은 조직, 개인들의 후원과 지지, 그리고 탐험 과정에서 찍은 기록과 사진에 대한 저작권을 양도함으로써 자금 확보는 비교적 순조로웠다. 탐험용 배인 ‘인듀어런스 호’와 보급 팀을 실은 ‘오로라’ 호가 준비되어 출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1914년 8월 1일 런던에서 인듀어런스 호가 출발할 때 독일이 러시아에 대해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영국에 총동원령이 내려져 새클턴의 탐험은 무산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당시 해군성 장관으로 있었던 윈스턴 처칠의 항해를 추진하라는 전보가 전해져 8월 8일 인듀어런스 호는 영국을 떠나 대서양 남쪽으로 본격적인 항해를 시작했다.

 



새클턴은 아문센의 성공 비결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여 탐험대들에게 스키 훈련을 시키고, 영양학자의 도움을 받아 탐험대의 비상 식량을 준비했다. 또 전문가의 자문을 받아 썰매 훈련을 받은 69마리의 개를 준비시켰다. 그리고 탐험가로서 그의 가장 소중한 자산은 낙천성이었다. “남북점 정복 경쟁을 아문센과 섀클턴이 했다면 섀클턴은 스콧과는 달리 중간에 포기하고 되돌아와 아문센 탐험대를 만나서 성대한 축하 파티를 열었을 것이다.” 언젠가 유명한 극지 탐험 역사가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아문센과의 경쟁에서 패배한 스콧을 짓눌렀던 극심한 좌절을 섀클턴이라면 겪지 않았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또한 섀클턴은 부하를 먼저 생각하는 리더로 널리 인정받았다. 사람들은 그에게 절대적인 믿음과 충성을 보였다. 그와 함께 남극점 150km 부근까지 갔다가 후퇴한 일행 중 한 명인 프랭크 와일드는 섀클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영원히 바꾸어 놓은 한 사건을 일기에 적은 적이 있다. 1909년 1월 31일 밤에 비상 식량과 조랑말 고기로 부실한 식사를 하고 난 다음, 섀클턴은 자기 몫의 비스킷 4개 가운데 1개를 와일드에게 주며 강제로 먹였다고 한다. “이 순간의 행동이 얼마나 자상하고 호의적인 것인지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수천 파운드의 돈으로도 결코 살 수 없는 비스킷이었다.” 1914년에 시작하여 1917년에 끝난 ‘인듀어런스 탐험’에서 와일드는 탐험대 부대장을 맡았다. 처절한 시련을 겪은 인듀어런스 호의 대원들에게 유일한 축복이 있었다면 그건 바로 섀클턴의 부하였다는 점이다. 탐험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이 생존 드라마에서 섀클턴은 자신의 대원들과 늘 함께 했다.

 



 



2부 남극을 향해



인듀어런스 호는 마데이라 제도와 몬테비데오를 거쳐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도착했다. 69마리의 썰매견을 싣고 마지막 기항지인 사우스 조지아 섬을 향해 출발한 것은 10월 26일. 인듀어런스 호에는 일반 선원, 고급 선원, 예술가, 과학자 등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일해야 했다. 필요한 일이 있으면 과학자건 누구건 모두 달려들어 로프를 잡고 끌어야 했다.” 해병대 출신의 토마스 오들리는 이렇게 적었다. 배에 탄 선원들 중에는 남극 경험이 풍부한 사람들이 많았다.

 



인듀어런스 호의 상륙 예정지는 웨들 해 동쪽의 바셀 만이었다. 그곳으로 가는 항로는 웨들 해에서 형성된 얼음들이 남극 대륙, 파머 반도, 사우스 샌드위치 군도 등 세 개의 육지가 바다를 에워싼 채 얼음의 이동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배가 항해하기에 나쁜 조건을 고루 갖춘 곳이다. 배가 웨들 해의 강한 해류에 휩쓸린다면 얼음과 더불어 서쪽으로 흘러가거나 얼음에 둘러싸여 빠져나오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12월 5일 아침, 사우스 조지아 섬을 출발한 인듀어런스 호는 이틀 뒤에 처음으로 부빙 군을 만났다. 이후 6주 동안 배는 부빙군을 피해 멀리 돌기도 하고, 때로는 과감하게 밀고 나가기도 하며 조심스럽게 남쪽으로 내려갔다.

 



1915년 1월 13일, 바셀 만까지는 불과 1주일 정도의 거리를 남겨두고 육지가 멀지 않은 얕은 바다에서 배가 부빙들의 틈새에 갇혔다. 인듀어런스 호는 기온이 올라감에 따라 녹기 시작한 빙하의 틈을 따라 이동했으나 또 다른 빙하에 막혀버렸는데 이번엔 따로 떨어져 있던 부빙들이 강풍으로 인해 한데 얼어붙으면서 배 주변을 완전히 포위해 버린 것이었다. 대원들이 직접 얼음 위로 올라가서 칼과 쇠지렛대로 얼음을 잘라내려고 시도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결국 2월 24일, 섀클턴은 항해 중단을 명령했고 과학자와 선원들은 남극의 겨울을 함께 보낼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지만 그곳에서 겨울을 보내야만 했다.

 



“초조하고 미칠 것 같았다.”고 의사로 참가한 알렉산더 맥클린은 일기에 적었지만 섀클턴은 전혀 화를 내지 않았으며, 절대 비관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고 겨울을 준비하는, 진정으로 위대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조타수인 허버트 허드슨은 가장 가까운 송신기지가 있는 포클랜드로부터 무선 신호를 받으려고 노력했지만 당시의 무선 기술은 그런 ‘기적’을 허락하지 않았다. 탐험대는 육지가 보이지 않는 곳에 있었고,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3부 침몰



영하 22도. 맹렬한 눈보라와 함께 3월이 시작되었다. 봄이 되어 얼음이 녹으려면 10월까지 약 7개월을 기다려야 했다. 섀클턴은 갑판 사이에 있는 창고를 선실로 개조하여 대원들을 머무르게 하고, 자신은 인듀어런스 호에서 가장 추운 곳인 선장실에 그대로 머물렀다. 개들 역시 배 주변에 얼음으로 만든 ‘도글루(개와 에스키모의 집 이글루의 합성어)로 숙소를 옮겼다. 대원들은 개를 훈련시키기도 하고, 가끔 물개를 잡기도 했으며, 얼음 너머 저편으로 하이킹을 가기도 했다. 하지만 3월말이 되자 밤이 낮보다 훨씬 길어지기 시작했고, 4월 중순부터는 하루의 대부분을 캄캄한 어둠 속에서 보내야 했다.

 



5월이 되어 이제 앞으로 4개월 동안 해를 전혀 볼 수 없을 것이었다. 대원들의 바깥 활동이 중단되면서 온갖 종류의 오락이 개발되기 시작했는데 새로운 놀이를 하나 만들 때면 리츠 전체가 온통 시끌벅적하게 변하곤 했다. 이 기간 동안 대원들의 일기를 보면 전반적으로 만족스러운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매일매일 지루하게 되풀이되는 일상이 스트레스를 주긴 했지만 특별히 문제가 될 만한 마찰이나 불화는 없었다. “서로 관심 분야가 다르고 대원 대부분의 개성이 뚜렷하며 생활방식도 달랐지만 우리 모두는 이곳에서 행복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라고 오들리는 일기에 적었다.

 



인듀어런스의 이같은 평화의 배경은 섀클턴이 대원을 뽑았던 방식을 보면 알 수 있다. 대원들을 뽑기 위한 면접에서 느닷없이 노래를 부를 수 있느냐, 다른 대원들과 함께 마구 소리를 지를 수 있겠느냐고 물었던 것처럼 섀클턴이 원했던 건 화려한 경력의 이력서가 아니라 ‘마음 자세’였다. 또한 대원들은 그의 말이 ‘명령’이어서라기보다는 합리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에게 복종했다. 그는 늘 공정했으며, 의복을 비롯한 모든 물품을 선발대나 고급 대원들보다 일반 대원들에게 먼저 분배했다.

 



1년 중 가장 어두운 6월이 시작되었다. 기온은 영하 30도까지 떨어졌고, 며칠 전까지만 해도 맑았던 얼음 사이의 물도 밤 사이에 15cm 정도의 두꺼운 얼음이 되었다. 기온이 오르면서 녹았던 얼음은 기온이 내려가고 강풍이 불자 서로 부딪혀 배를 밀어올리거나 배에 손상을 입혔다. 그렇지만 8월말까지는 별다른 사고 없이 무사했다.

 



봄이 오고 있어 모두들 안심하고 있었는데 10월 중순경부터 바람에 흔들리며 얼음이 가하는 충격으로 오른쪽으로 배가 기울었다. 드디어 부빙의 압력이 최고조에 달한 10월 24일, 기우뚱거리던 배가 한 쪽으로 쓰러지며 순간적으로 거대한 얼음이 키와 선미재를 맹수처럼 난폭하게 찢어버렸다. 갑판이 부서져 나가고 용골이 쪼개졌다. 바닷물이 콸콸 쏟아져 들어왔고, 마침내 모든 상황이 종료되었다. 배가 서서히 아래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와일드와 워슬리, 섀클턴이 우려했던 최악의 사태가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섀클턴은 배를 포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개들을 대피시키고 모든 물품들을 얼음 위로 내렸다. 섀클턴은 떨어져 나간 엔진이 갑판 바닥에 구르는 것을 기관실 위 창을 통해 말없이 지켜보았다. 온갖 소리들로 뒤범벅이 된 아수라장 속에서도 휴게실에 걸린 시계는 여전히 똑딱거리고 있었다. 섀클턴은 마지막으로 배에서 내렸다. 그는 인듀어런스 호의 푸른 함기를 높이 들어올렸고, 얼음 위의 대원들은 다들 그 깃발을 향해 경의를 표했다. 인듀어런스 호의 붉은 비상등이 마지막 인사처럼 조용히 깜박거렸다.

 



 



4부 페이션스 캠프

대원들은 부서진 배에서 약 100m 떨어진 넓고 안전한 부빙 위에 캠프를 설치했다. 다섯 개의 텐트에 인원이 배정되었고, 각 대원들에게는 슬리핑백이 지급되었다. 기온은 영하 39도까지 떨어졌다. 가장 가까운 육지는 600km 떨어진 곳에 있었다. 조작되었음이 분명한 제비뽑기에 의해 대부분의 고급 대원들은 질이 떨어지는 백을, 일반 대원들은 품질이 좋고 따뜻한 가죽 백을 뽑았다. 방수가 되지 않는 그라운드 시트 위에 누운 대원들의 머리 바로 밑에서는 얼음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밤새 들려왔다. 무시무시한 굉음이 머리 밑에서 들려올 때마다 대원들은 텐트와 슬리핑백, 그라운드 시트를 접어야 했다.

 



다음 날 아침, 섀클턴은 대원들에게 며칠 안에 북서쪽으로 약 300km 떨어진 스노우 힐이나 로버트슨 섬으로 간다고 말했다. 행군을 해야 했으므로 대원들은 각자의 개인 소지품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강아지 세 마리를 비롯한 동물들을 총으로 쏘았다. 장애물을 헤치고 보트와 썰매가 지나갈 수 있는 길을 여는 선발대가 앞서 출발하고 나머지 대원들이 뒤를 따라 거의 1km 정도로 길게 늘어진 행군대열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곧 상황이 나빠져 얼마 걷지 못하고 행군을 멈추어야 했다. 결국 다시 캠프를 세우고 얼음이 녹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면 굳이 부빙 위를 행군하지 않고 보트를 바다에 띄울 수 있을 것이었다. 인듀어런스 호의 잔해에서 불과 2km 정도 떨어진 곳에 오션 캠프(ocean camp)라는 새로운 캠프가 세워졌다.

 



며칠 동안 인듀어런스 호와 오션 캠프 사이를 오가며 필요한 물건을 날라서 창고를 만들고 식사를 보충했다. 그리고 3톤이나 되는 물건을 회수하여 ‘토끼 우리’라는 별명이 붙은 조타실에 보관했다. 주방과 텐트, 망루를 세우고 스토브도 자리를 잡음으로써 새로운 캠프가 어느 정도 모양을 갖추었다. 망루에는 영국 국기와 인듀어런스 호의 삼각기를 나란히 게양했다.

 



일과표가 정해지고 각 텐트별로 급식 담당자도 지정되었다. 오후가 되면 대원들은 각자 책을 읽거나 옷을 꿰매며 자유시간을 보냈다. 갑자기 얼음이 녹거나 개가 없어지는 것을 감시하기 위해 밤에는 한 시간 간격으로 불침번을 섰다. 남극 횡단 탐험대가 사용할 예정이던 비상 식량은 따로 보관해 두었고 대원들에게 나눠지는 배급 식량은 굶어죽는 것을 간신히 면할 정도로 적은 양이었다. 그리고 단조롭고 지루한 날, 낮과 밤의 극심한 온도 차 때문에 대원들의 신경이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에 앞으로 있을 여행 준비를 위해 배를 높이고, 썰매를 만들었으며, 얼음이 녹고 낮도 훨씬 길어져서 대원들은 예전보다 조금은 나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11월 21일 저녁, 높은 망루 위에서 대원들은 인듀어런스 호의 최후를 지켜보게 되었다. 섀클턴은 이렇게 적었다. “오후 5시에 인듀어런스 호는 머리부터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가장 상처를 많이 받은 뱃고물이 맨 마지막으로 물 속에 들어갔다.… 도저히 더 이상 쓸 수가 없다.”

 



얼음이 녹으면서 흐르는 물이 차츰 불어났고, 바람의 방향이 이리저리 바뀌면서 캠프가 육지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12월 21일, 섀클턴은 다시 서쪽으로 행군을 시작하기로 했지만 며칠 동안 힘들고 별 소득도 없는 행군이 계속되어 대원들은 모두 지친 상태였다. 그래서 결국 행군을 중단하고 단단해 보이는 얼음 위에 페이션스 캠프(patience camp)를 세웠다. 비관적으로 되어 가는 상황 속에서 가장 심각한 것은 식량 문제였다. 식량이 줄어드는 것을 늦추기 위해 개들을 죽이기까지 했지만 2월에 이르자 연료뿐 아니라 식량도 거의 바닥이 드러났다. 얼음에 갇힌 이후 가장 심한 눈보라가 몰아닥친 후 눈에 덮힌 조인빌 섬의 산자락이 모두의 눈에 선명하게 드러났지만 얼음이 녹지 않아 건너거나 배를 타지 못하고 대원들이 탄 배는 여전히 북쪽을 향해 표류하고 있었다.

 



부빙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따라 새로운 계획을 짜는 작업이 반복되었는데 4월 8일, 마지막으로 가져온 보트인 제임스 커드 호 바로 아래에서 얼음이 삼각형으로 갈라지자 결국 배를 띄우게 되었다. 몇 개월 전부터 이미 정해져 있었던 각자의 위치에 따라 배에 나누어 타고 얼음 사이로 난 물길을 따라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대원들은 지금껏 15개월 동안이나 얼음에 갇혀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진짜 고난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5부 보트 여행



바다에서의 첫날밤, 섀클턴과 대원들은 파도에 흔들리는 6m*3m 크기의 부빙에 캠프를 쳤다. 모두들 식사를 마친 후 각자의 텐트 속으로 들어가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캠프를 지지하고 있던 부빙이 갑자기 갈라졌다. 그 사이로 빠진 대원들을 가까스로 구할 수 있었고 또 다른 위험을 막기 위해 다들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후에도 거대한 파도, 부빙의 움직임 때문에 항로는 계획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대원들은 얼음도 박살낼 수 있는 힘을 지닌 범고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조마조마한 밤을 보내야만 했다. 그렇게 불안한 표류를 계속하던 어느 날 엘리펀트 섬이 불과 50km 앞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노를 계속 젓는데도 바다쪽으로 흐르는 강한 해류에 붙잡혀 가까워지지 않는 섬을 코 앞에 두고 힘겹고 고통스러운 사투를 계속한 끝에 결국 대원들은 엘리펀트 섬에 상륙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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