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우리를 25단어로 키우셨다
테리 라이언 지음 | 바다출판사
어머니는 우리를 25단어로 키우셨다
테리 라이언 지음/이은선 옮김
바다출판사/2002년 5월/360쪽/9,800원
프롤로그
우리 엄마 이블린 라이언은 열 남매의 어머니이고, 알코올중독자인 남편의 아내였다. 여성들의 사회활동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1950년대와 1960년대였기에 여성들은 가난이라는 두 글자 앞에서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우리 엄마 같은 상황에 처했던 주부라면 누구라도 아이들을 키우기가 암담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엄마는 우리들에게 인생은 잔인한 것이 아니라 풍요로운 것임을 가르쳐 주었다. 가혹한 시련과 가난 속에서도 충만함과 너그러움과 담대함을 가르쳐 주었다. 엄마가 '향신료'라고 주장했던 벌레가 둥둥 뜬 수프로 끼니를 연명하면서도 우리들은 전혀 가난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으니까.
대공황 이후 경제가 차츰 살아나기 시작하면서 각종 신문이나 방송에 여러 개의 콘테스트가 우후죽순 생겨났다. 엄마는 지방신문에 글을 투고하고 받은 원고료 1달러씩을 모아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었지만 우리에게는 어마어마한 콘테스트에 입상하는 즐거운 상상을 하게 했다. 영혼이 풍요로우면 가장 막막한 곳에서도 살 수 있는 법이다. 특유의 낙관주의로 온 집안을 감쌌던 우리 엄마 이블린 라이언처럼 말이다.
나는 다섯 살 때부터 오른쪽 귀에 연필을 꽂고 하루에도 몇 시간씩 다리미판 앞에 서 있는 엄마를 보며 자랐다. 엄마는 다림질을 할 때 아이디어가 가장 잘 떠오른다고 하셨다. 해마다 공책을 새로 사서 1등 상을 받을지 아니면 허탕을 칠지 모를 문구들을 열심히도 적었다. 엄마의 글솜씨 덕분에 우리 대가족은 감히 꿈도 꾸지 못할 생활필수품을 사용하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엄마는 큰상을 받을 때마다 주최측에 고맙다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가끔 아무런 상도 받지 못한 채 몇 달이 지나갈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때면 엄마는 창문 앞을 서성이며 집배원 아저씨를 기다리곤 했다.
우리 엄마는 콘테스트 여왕!
1953년 여름이 거의 끝나갈 무렵부터 엄마는 콘테스트 가뭄에 시달렸다. 하지만 6년 동안 세들어 살던 집에서 쫓겨나게 된 것에 비하면 콘테스트 가뭄은 걱정 축에도 못 끼었다. 욕실도 없이 방만 달랑 두 개인 그 집은 우리 식구들이 살기에 너무 작았다. 게다가 방이 두 개라고는 하지만 엄마, 아빠가 한 방을 차지하고 나면 우리 아홉 남매가 나머지 한 방을 써야 했다. 하지만 이 생활도 막을 내려야 했다. 집주인이 몇 달 뒤엔 집을 비워달라고 한 것이다. 아빠는 이 말을 듣고도 어디선가 해결책이 생기겠지 하며 천하태평이었다. 어디로 이사해야 할지, 필요한 돈은 어디서 마련해야 할지 엄마는 걱정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 즈음 큰오빠 딕이 자전거를 타고 신문을 돌리다 교통사고를 당했다. 다행히 한 쪽 팔만 부러지는 가벼운 사고였지만 자전거는 완전히 망가지고 말았다.
새 자전거를 살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딕 오빠는 신문배달을 다른 아이에게 넘겨줘야 했다. 그러고서 며칠 뒤 엄마는 철물점에 들렀다가 웨스턴 오토에서 주관하는 자전거 콘테스트 광고를 보셨다. <어린이 여러분! 이 문장을 25개 이하의 단어로 마무리지어 보세요. "내가 X-53 슈퍼 웨스턴 플라이어 자전거를 좋아하는 이유는 …이다."> 엄마는 응모권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의 목표는 우수상 100편에게 주어지는 자전거를 타서 딕 오빠에게 선물하는 것이었다.
내가 X-53 슈퍼 웨스턴 플라이어 자전거를 좋아하는 이유는
"안정성과 서비스, 디자인이 더 한층 새로워져
웨스턴 플라이어 특유의 기능과 어우러지면서
어디에 세워놓아도 X-53 슈퍼 플라이어가 단연 돋보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웨스턴 플라이어에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집을 비워야 하는 문제 때문에 엄마 얼굴에 초조한 빛이 확연히 드러나기 시작할 무렵, 어느 날이었다. 번드르르 윤이 나는 새까만 폰티악이 커브를 돌아 우리 집 앞에 서더니 짙은 곤색 줄무늬 양복 차림의 남자 셋이 차에서 내려 우리 집 쪽으로 걸어왔다. 엄마는 길을 잃었나 보다고 생각하며 문을 열었다. 엄마의 검은색 눈동자가 키 큰 남자의 파란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라이언 부인 되십니까?" "네, 그런데요." "딕이라는 아드님이 댁에 있습니까?" "네." 엄마는 뒤에 서 있던 딕 오빠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려놓으며 대답했다. "이 아이가 딕인데, 무슨 일이신가요?" 세 남자가 갑자기 한 목소리로 외쳤다. "축하한다, 딕! 5,000달러를 상금으로 받게 되었단다!"
6만 5,000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딕 오빠가 상금 5,000달러(지금으로 환산하면 3만 5,000달러)와 세탁-건조기 세트, 그리고 웨스턴 플라이어 자전거를 받게 된 것이었다. 엄마가 자기 이름으로 콘테스트에 응모한 줄 전혀 몰랐던 딕 오빠는 눈만 끔뻑일 따름이었다. 엄마는 그 돈이면 집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생각에 안도의 눈물을 흘렸고, 그 모습을 보자 우리 형제들도 덩달아 울음을 터뜨렸다. 한눈에 우리 집 형편을 짐작했을 세 사람은 꼭 필요한 사람에게 대상이 돌아갔다는 사실에 놀라는 한편, 감동하는 눈치였다.
부모님은 상금을 가지고 워싱턴 애비뉴 기찻길 근처에 있는 60년 된 방 네 개짜리 이층집을 계약했다. 상품으로 받은 X-53 슈퍼 웨스턴 플라이어 자전거 덕분에 오빠는 신문배달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우리 식구들은 엄마가 그렇게도 의지하는 하나님과 우리 집이 직통으로 연결된 것은 아닐까 하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슈퍼마켓 싹쓸이 대작전
새 집은 우리가 이사하고 난 뒤에도 빈집처럼 보였다. 우리에게는 가전제품은커녕 가구를 살 여유마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웨스턴 오토 콘테스트 이후 몇 달 동안 엄마의 당첨행진이 이어지면서 이곳도 집다운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웨스팅하우스 냉장고와 냉동고, 커피메이커, 담요 세 장, 부엌용품 한 세트, 모토롤라 라디오, 벽시계…. 그 중 1등 상으로 받은 대형 냉장고와 냉동고는 군대나 식당에 어울릴 만한 것이었는데 아이스크림 한 통만 달랑 넣어두니 더욱 휑해 보였다. 루시 고모가 가끔 와서 엄마를 억지로 슈퍼로 끌고 가 생필품을 사주고 가시기도 했지만 그것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러나 우리 엄마가 누군가!
시브룩 팜스 콘테스트에서 엄마는 시를 지어서 슈퍼마켓 상품권을 받았다. 다른 사람이라면 고작 슈퍼마켓 상품권에 실망했겠지만 우리 엄마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나 다름없었다. 그 상품권을 사용할 수 있는 날이 가까워오자 엄마는 온 식구를 모아놓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생각을 크게 해야지. 공짜로 카트 하나를 가득 채울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 겨우 세일하는 닭고기나 생선튀김으로 시간과 공간을 낭비해서야 되겠니? 이번 기회에 너희들도 뉴욕 비프스테이크, 바닷가재, 캐비어, 연어스테이크 같은 것도 먹어봐야지.”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쇼핑 카트가 너무 작고, 단 10분내에 쇼핑을 마쳐야 한다는 점이었다. 시작 신호와 함께 동네 아주머니들의 도움으로 싹쓸이 대작전을 마친 엄마는 진열대로 오는 길에 프랑스식 초콜릿 소스와 고급 아이스크림, 브로콜리, 송이버섯을 곁들인 라쟈냐를 위로 얹더니 마지막 몇 초를 남겨놓고 신선한 파인애플과 지팡이 모양의 사탕까지 끼워 넣었다. 산더미 같은 카트를 아슬아슬하게 끌며 코너를 돌아 나오는 엄마를 보고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엄마가 싹쓸이한 식료품은 전부 합쳐서 411달러 44센트 어치였다.
우리는 깡통들이 수북히 쌓인 식탁 주위로 모여 앉았다. “엄마, 그런데 캐비어가 뭐예요?” 바브가 물었다. “물고기 알이야.” 엄마가 대답했다. 우리는 잠시 말이 없었다. 물고기 알이라는 설명만으로 충분했다. 이제 우리 형제들 중에서 캐비어에 손을 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미 육군 연구결과에 따르면 낯선 음식에 도전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똑똑하대.” 엄마가 말했다. 그러나 바닷가재 역시 우리 형제들에게 외면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징글맞게 행복하다는 게 문제야!
우리 엄마는 시끄러운 야구광이었다. 몇 년 동안 아들의 경기를 관전하며 어찌나 소리를 질렀던지 나중에는 목소리가 낡은 라디오에서 나오는 직직대는 소리처럼 바뀔 정도였다. 엄마는 운동신경이 뛰어난 편은 아니었지만 연습이 필요한 아들이 있으면 한두 이닝 정도 연습 상대가 되어주기도 했다. '함께 노는 야구'에 대한 시 쓰기 콘테스트에 응모하여 ‘덴버 포스트’에서 상금 5달러를 받기도 하셨다.
‘야수 선택’
요리를 잘하는 엄마도 있고,
바느질 잘하는 엄마도 있고,
우리가 부르기만 하면
달려오는 엄마도 있지요.
하지만 난 말괄량이처럼
1초만에 슬라이딩할 수 있는
그런 엄마가 좋아요.
야구는 우리 가족을 연결하는 고리였다. 딕 오빠가 열 살짜리 리틀리그 선수였을 때 오빠가 투수로 대성할 자질이 있음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사람은 엄마였다. 오빠는 불독스 팀의 선발투수 역할을 맡았다. 딕 오빠가 불독스 팀에서 데뷔전을 치르던 날이었다. 엄마가 그렇게도 보고싶어 했던 데뷔전이었는데 막내가 볼거리에 걸려 보러가지 못하게 되자 엄마는 대문까지 나가 딕 오빠를 배웅하면서 그 날 오후에 주운 네잎클로버를 선물했다. 딕 오빠가 그때까지 받은 네잎클로버를 다 합치면 평생 쓰고도 남을 것이다. 네잎클로버 찾기 선수였던 엄마는 모아두었다가 행운이 필요할 때마다 우리에게 선물했다. 딕 오빠는 네잎클로버를 뒷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엄마. 오늘은 그게 부적이라도 동원하고 싶은 날이에요." 그러자 엄마가 말했다. "아, 행운을 빈다는 뜻에서 선물한 게 아니란다. 승리 투수의 호주머니에 들어 있으면 네잎클로버도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 싶어서 그런 거지."
엄마는 늘 이처럼 삶의 희열이 빛나는 분이었다. 아빠가 알코올중독증 때문에 집안을 온통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갈 때도 그것만큼은 달라지지 않았다. 우리들을 얼마나 행복하고 밝게 키우느냐는 자신에게 달려있다고 생각하고 우리들의 미래에 희망을 심어 주었다. 아빠는 그런 엄마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어느 날 밤인가 위스키와 분노로 잔뜩 취해서 들어온 아빠는 거실에 서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뭐가 문제인지 알아? 징글맞게 행복하다는 게 문제야!" 이 말에 엄마와 우리 형제들은 웃음을 터뜨렸고, 나중에는 아빠까지 웃음보가 터졌다.
아빠의 입원
아빠가 딕 오빠의 야구 경기를 보러 갔다가 졸도하여 병원에 입원하시는 일이 벌어졌다. 나흘이 지났지만 의사들은 신경쇠약증일지도 모르지만 그것도 확실하지는 않다고 했다. 엄마는 날마다 병원까지 걸어서 왔다갔다해야 했다. 아빠가 입원한 상황이니 우리 가족의 생존과 평화는 전적으로 엄마의 두 어깨에 달려 있었다. 엄마가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서라도 아빠가 빨리 퇴원하셔야 했다. 아빠는 2주 동안 입원한 뒤 퇴원 날짜를 받았다. 엄마와 루시 고모의 부축을 받으며 안으로 힘없이 걸어 들어오는 아빠의 모습은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초췌했다. 야구 경기를 보러 집을 나설 때만 해도 몸집이 좋으셨는데 2주 새에 야위고 구부정했으며 듬성듬성 흰머리가 보였다. 좀 누워야겠다던 아빠는 며칠이 지나도 일어날 줄 몰랐다. 술도 마시지 못했다.
아빠랑 울렁울렁 언덕 타러 갈 사람?
아빠가 자리에서 일어난 뒤 이틀이 지나자 예전 모습을 찾은 것 같았다. 다시 출근을 시작한 첫 날, 일찍 퇴근한 아빠는 즐거운 표정이었다. “아빠랑 울렁울렁 언덕 타러 갈 사람?” 아빠가 벳시, 바브, 데이브를 보며 물었다. ‘울렁울렁 언덕’은 아빠판 디즈니랜드였다. 길을 달리다 불룩 솟은 곳이 있을 때 아빠가 엑셀레이터를 힘껏 밟으면 자동차 바퀴가 1~2초 동안 허공에 붕 뜨고, 잠시 하늘을 나는 듯한 행복한 착각에 빠지는 놀이였다.
우리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빠와 함께 보내는 시간을 좋아하게 되었다. 아빠는 다정다감하고, 부끄럼을 많이 타고, 재미있고, 사랑스럽고, 정이 많은 분이었다. 아빠는 우리를 태우고 시골길을 따라 오랫동안 드라이브를 했고, 사과와 토마토를 잔뜩 사다주시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음식을 만들어 주실 때도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아빠는 너무 허약하고 힘이 없어 보여서 덜컥 겁이 날 때도 있었다. 아빠는 인생의 곡선이 바닥까지 다다랐음을 분명 느꼈을 것이다.
다섯 개의 여행 가방
우리 형제들은 저마다 일생일대의 중대한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었다. 나는 고등학교로 진학할 때였고, 그 전해 겨울에 이미 딕 오빠는 마이너리그 선수로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구단에 스카우트되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버브 오빠도 160명의 후보 가운데 최종 선발자 3명안에 뽑혀 그 해 여름 타이거타운으로 떠났다. 두 오빠의 승전보는 우리 가족 모두가 노력한 결과였다. 엄마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게다가 보스턴의 어느 여행가방 회사가 연 콘테스트에서 다섯 개짜리 여행가방 세트를 탄 덕분에 두 오빠의 짐을 꾸릴 수가 있었다. 엄마는 당분간 쓸 일이 없길 바라며 남은 여행가방 두 개를 침실 벽장 속에 넣었다. 한 사람씩 떠날수록 우리의 공간이 넉넉해지기는 했지만 우리는 언니, 오빠와 헤어지는 게 싫었다. 앞으로 영영 못 만나는 게 아닐까 겁이 났다.
작품들이 저마다 성과를 올린 덕분에 1960년 여름부터 상품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어마어마한 상품도 있었다. 엄마는 싱글벙글하며 상품들을 뜯지도 않고 침실 보물 벽장에 차곡차곡 쌓아 두었다. 오하이오 주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신문에서 엄마 이름이 보일 때마다 우리는 환호성을 질렀다. 엄마는 상금이 순식간에 없어지더라도 개의치 않고 한 턱 낼 줄도 아시는 분이었다. 길거리에서 마주친 사람들이 건네는 따뜻한 말 한 마디가 훨씬 더 소중했기 때문이다.
엄마의 보물창고
나는 딕, 버브, 로그 오빠도 보고 싶었지만 리 앤 언니가 가장 보고 싶었다. 언니는 키가 크고 재주가 많았는데 나와 정반대였던 리 앤 언니는 빨래, 다림질, 청소 등 시간 나는 대로 엄마를 도왔다. 그러나 언니가 열여덟 살에 간호학교에 입학하자 그 때까지 언니가 하던 일은 아홉 살인 내게 넘어왔다. 매주 일요일 아침이면 아침 청소를 하라는 엄명이 떨어졌다. 그런데 청소할 때 우리가 손대지 못하는 곳이 있었다. 바로 ‘엄마의 보물창고’인 침실 벽장이었다. 그 벽장은 서서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높았는데 만약 우리 집이 우주라면 그 곳은 블랙홀이었다. 그 곳은 엄마가 받은 상품들을 모두 모아놓은 곳이었다. 가전제품이 고장나면 엄마는 컴컴한 벽장 속으로 들어가 한참을 뒤져서 마침내 새 것을 들고 나왔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벽장 앞에 반원 모양으로 서서 엄마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초조하게 기다렸다.
첫 번째 시험에서 전과목 A를 받아 집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던 어느 날 엄마는 <아메리칸 밴드스탠드>를 보고 있었다. 텔레비전 화면에는 높이 15cm에 길이 1m도 넘는 초대형 샌드위치가 보였다. 그 순간 나는 엄마가 이 프로그램을 보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짤막한 노래 멜로디에 맞게 샌드위치의 이름을 지어보라는 콘테스트 광고가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한 주가 끝나갈 무렵 엄마는 샌드위치 이름을 어찌나 많이 만들었는지 응모 때 동원할 수 있는 가명이 거의 바닥난 상태였다. “고기 치즈 샐러드 넣어/날름 먹고 입 싹 씻는/샌드위치” 엄마의 말에 우리들은 모두 배꼽을 잡으며 박수를 쳤다. “정말 재미있어요, 엄마.” 브루스 오빠가 말했다. “좋았어, 그럼 이 작품도 보내마. 우표값도 4센트밖에 안 되니까. 4센트로 이만큼 인생을 즐길 수 있는 방법이 어디 있겠니?”
10월이 되자 나는 고등학교의 새로운 수업에 적응했고, 길 건너편의 조그만 빵집에서 1주일에 한 번씩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하루 저녁 일하고 3달러를 받을 때면 뿌듯했지만 덕분에 내 손과 머리에서는 빵 굽는 냄새가 떠날 날이 없었고, 나는 한동안 쿠키를 멀리했다. 그 즈음에는 콘테스트에 당첨되더라도 돈이 되는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언니와 오빠들이 떠났는데도 우리 집 경제사정은 나아지기는커녕 점점 악화되기만 했다. 설상가상으로 다시 술을 입에 대기 시작하신 아빠는 월급에서 용돈으로 챙기는 금액이 날로 늘어갔다. 엄마는 무책임한 아빠를 보며 빚 문제로 다그칠 때도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서 엄마는 더욱 조바심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