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그대를 찾아오거든 가슴을 열어라
칼릴 지브란 지음 | 책이있는마을
사랑이 그대를 그대를 찾아오거든 가슴을 열어라
칼릴 지브란 지음/이영선 옮김
책이있는마을/2001년 11월/725쪽/29,000원
1. 눈물과 미소
환상과 진실
인생은 우리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고, 운명은 수시로 우리를 조종하려 든다. 우리가 가는 길에는 사방에 장애물이 깔려 있다. 또한 도처에서 우리를 두렵게 만드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름다움의 여신이 우리 앞에 나타나 영광의 보좌에 앉으면 우리는 가까이 다가간다. 그리고 그리움의 이름으로 그녀의 옷깃을 더럽히고 그 순결한 왕관을 빼앗는다. 사랑이 정중하게 옷을 차려 입고 우리 곁을 스쳐가면 우리는 두려움에 떨며 어두운 동굴 속으로 몸을 숨기거나 혹은 사랑의 이름으로 사악한 짓들을 저지르며 그녀를 뒤쫓는다.
무거운 멍에를 둘러쓴 현자(賢者)가 우리들 가운데로 온다. 그 발걸음은 꽃의 숨결보다 더 부드럽고 레바논의 미풍보다 더 온화하다. 지혜는 군중들이 모인 거리의 모퉁이에 서서 우리를 부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부름을 하찮게 생각하며 오히려 지혜를 따르는 자들을 경멸한다. 지혜는 자신의 식탁에 푸짐한 음식을 차려놓고 우리를 부른다. 우리는 그곳에 가서 마음껏 먹고 마신다. 곧 그 식탁은 시시껄렁한 기회와 굴욕의 장소가 되어버린다.
자연은 아름다움 속에서 기쁨을 찾으라고 우리에게 우정의 손길을 내밀지만 우리는 그 고요함이 두려워 도시로 도망치고 늑대 앞에서 떨고 있는 양떼들처럼 정신없이 뒤엉켜 있다.
진실은 어린아이의 미소에 이끌리듯 우리를 찾아와 사랑의 입맞춤을 보낸다. 그러나 우리는 진실을 향해 부드러움의 문을 닫아버리고 오히려 불결한 것을 대하듯 팽개쳐버린다.
영혼은 우리의 가슴에 구원을 요청하지만 우리는 마치 돌덩어리에 대고 호소하는 것처럼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그 가슴의 절규와 영혼의 부름을 들었다고 하면 우리는 그를 미친 사람 취급하며 오히려 그를 멀리한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많은 밤을 흘려보낸다. 그리하여 우리는 매일 밤과 낮을 두려움 속에서 맞이한다. 대지의 신들은 우리의 친척이다. 그러나 우리는 생명의 빵을 놓쳐버렸다. 그리하여 굶주림은 우리의 힘을 먹어치운다. 삶이란 얼마나 달콤한 것이며, 또한 우리는 삶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있는 것인가!
삶의 놀이터
아름다움과 사랑을 꿈꾸며 움직이는 한순간은 약자들에게 빼앗아온 화려함으로 가득 찬 강자들의 시대보다도 더욱 위대하고 귀중한 것이다. 바로 그런 순간으로부터 인간의 신성은 솟구친다. 혼란된 꿈의 베일에 가려진 시대에는 그러한 신성이 깊은 잠에 묻히게 된다. 아름다운과 사랑을 꿈꾸며 움직이는 바로 그런 순간에 우리의 영혼은 인간의 법률로부터 자유롭게 되며, 약자들을 억압하는 강자들의 화려함으로 가득 찬 바로 그런 시대에 우리의 영혼은 멸시의 벽에 갇혀 압제의 사슬에 짓눌리게 된다.
아름다움과 사랑의 그 순간은 솔로몬의 노래나 산상수훈, 혹은 앨프레드 서정시의 요람과 같다. 그러나 강자들의 한 시대는 바알베크의 사원들을 파괴하고 팔미라의 궁전과 바빌론의 탑들을 파괴했던 맹목적인 힘의 세계이다.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가 사장되었음을 애도하고 정의의 상실을 슬퍼하는 가운데 영혼이 보낸 하루는 부자들이 쾌락에 탐닉하며 잃어버린 세월보다 훨씬 더 고귀한 것이다. 그런 영혼의 하루는 마음을 불로 정화하고 그 빛으로 가득 채워주지만 부자들의 그런 시대는 검은 날개로 마음을 봉합하여 땅 속 깊이 매장시켜버린다. 영혼의 하루는 사나이의 날이며 갈보리의 날이며 대탈주의 날이다. 그러나 쾌락의 시대는 네로가 죄악의 장터를 지나가고, 코라가 탐욕의 재판대 위에 영혼을 세우고, 또한 돈 주앙이 육체적 욕망의 무덤 속에 영혼을 장사 지냈던 날들과 같다.
인생은 그런 것이다. 어두운 운명의 무대 위에서 비극처럼 연출되기도 하고 찬송가처럼 대낮에 불려지기도 한다. 그리고 결국은 하나의 보석처럼 무한정 보호되는 것이다.
2. 선구자
지성과 반(半)지성
네 마리의 개구리들이 강가에 떠 있는 통나무 위에 누워 있었다. 어느 순간 갑자기 통나무가 물결에 휩쓸리며 천천히 강 아래로 밀려갔다. 개구리들은 아직까지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저 신기함으로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정말 무지무지하게 재미있다. 통나무가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이 움직이군. 너희들 통나무가 움직인단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니?” 첫 번째 개구리가 말했다. “아니야. 이 통나무는 다른 통나무들과 똑같아. 지금 통나무가 움직이는 게 아니라구. 이건 강물이 바다로 가면서 우리들과 이 통나무를 실어다주는 것뿐이야.” 두 번째 개구리가 말했다. “움직이고 있는 것은 통나무도 아니도 강물도 아니야. 움직이고 있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야. 생각 없이는 아무것도 움직일 수가 없으니까." 세 번째 개구리가 말했다.
세 마리의 개구리들은 정말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놓고 입씨름을 하기 시작했다. 싸움은 점점 더 격렬하고 시끄럽게 이어지는 가운데 그들의 의견은 좀처럼 모아지지 않았다. 이윽고 그들은 네 번째 개구리에게 의견을 물어보았다. 그때까지 네 번째 개구리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세 마리의 개구리가 일제히 자신을 주목하기 시작하자 네 번째 개구리가 입을 열었다. “너희들의 말은 모두 옳아. 너희들 중 아무도 틀리지 않았어. 움직이는 것은 통나무와 물과 우리들의 생각 그 전부야.” 네 번째 개구리의 말을 듣고 세 마리의 개구리들은 너무너무 화가 났다. 그들 각자가 자신의 주장이 완전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사실과 다른 두 친구의 의견이 완전히 틀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조금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상황은 갑자기 전혀 예기치 않던 사태로 발전했다. 세 마리의 개구리들이 힘을 합쳐 네 번째 개구리를 통나무 밖으로 밀어버린 것이다.
나의 고독 너머에
나의 고독 너머에 또 하나의 고독이 있다. 그 고독 속에 살고 있는 사람에 비하면 나의 소외는 고작 시끄러운 시장 골목 안에 있는 것 같으며, 나의 침묵은 기껏 잡음에 불과할 뿐이다. 그 높은 고독을 찾아내기엔 나는 너무 어리고 불안하기만 하다. 아직도 계곡 저편의 소리는 내 귀를 잡고 늘어지며 그 그림자가 내 앞길을 막아선다. 그러므로 나는 진정 갈 수가 없다.
깊은 산 너머에 무아(無我)의 구릉이 있다.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에 비하면 나의 평화는 한낱 회오리바람이며, 나의 무아란 착각에 불과하다. 그 성스러운 구릉을 찾아내기엔 나는 너무 어리고 방탕한 존재이다. 피 냄새가 몸에서 진동하고 선조들의 활과 화살이 여태까지도 내 손 안에 맴돌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정녕 갈 수 가 없다.
이토록 무거운 짐 지워진 몸 너머에 더욱 자유로운 내 존재가 살고 있다. 자유로운 존재가 되기에는 나는 아직 너무 어리고 분노를 쉽게 폭발한다. 숙명처럼 짐 지워진 자아를 살해하지 않는다면 모든 인간이 자유로워지지 못하는 것처럼 나 또한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없다.
만약 어둠 속에 시들어 가는 나의 뿌리를 구하지 않는다면 어찌 나의 잎사귀들이 바람결에 노래할 수 있을까? 비록 깃털을 키우기 위해 내 손으로 둥지를 만들었지만 내 깃털이 그 둥지를 떠나지 않는다면 어찌 내 안의 독수리가 태양을 향해 치솟을 수 있을까?
3. 예언자
기쁨, 그리고 슬픔에 관하여
기쁨과 슬픔은 서로 등을 맞대고 있는 형제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들의 기쁨이란 것도 사실은 가면을 벗은 그대들의 슬픔임을 알아야 한다. 조금 전만 해도 웃음이 떠오르던 바로 그 샘이 금방 그대들의 눈물로 채워지지 않는가? 이처럼 기쁨과 슬픔은 그 근원이 같아 결코 어느 하나만 가려 지닐 수 없는 것이다. 그대들은 슬픔이나 눈물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대들의 영혼이 슬픔에 잠기면 잠길수록 기쁨 또한 더욱 커지리라. 도공의 가마 속에서 모진 뜨거움을 견뎌낸 도자기가 곧 그대들의 포도주를 담는 잔이 아닌가. 또한 아름다운 선율로 그대들의 영혼을 달래주는 피리도 누군가의 칼에 몸을 내어준 나무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대들의 마음이 기쁠 때 가슴 속 깊은 곳을 들여다보라. 그러면 곧 알게 되리라. 그다지도 큰 기쁨을 주었던 것이 또한 모진 슬픔도 가져다준다는 것을. 그대들이 슬플 때에도 다시 한 번 가슴 속을 들여다보라. 그러면 그토록 기뻐했던 바로 그것 때문에 지금 울고 있음을 알게 되리라.
어떤 사람들은 ‘기쁨은 슬픔보다 위대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반대로 사람들은 슬픔이야말로 정말 위대하다.‘라고 반박한다. 그러나 내 그대들에게 말하거니와 기쁨과 슬픔, 그 둘은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이들은 언제나 함께 다닌다. 만일 어느 하나가 홀로 그대들의 식탁 앞에 앉아 있다면 기억하라, 다른 하나는 그대들의 침대 위에 잠들어 있을 것이다.
그대들은 모른다. 그대들의 영혼은 기쁨과 슬픔 사이에 마치 저울추처럼 매달려 있다. 그러므로 그대들의 마음이 텅 비어 있을 때에만 비로소 움직임을 멈추고 균형을 이루게 된다. 삶이란 보물을 지키는 자는 창고 안에 넣어둔 금과 은의 무게를 달고자 수시로 그대들을 들어올린다. 그런 까닭에 그대들의 기쁨과 슬픔이 오르내리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우정에 관하여
그대들, 친구란 그대들의 궁핍한 부분을 채워주는 그런 존재이다. 마치 그대들이 사랑으로 씨를 뿌리고 감사로서 수확하는 들판과도 같다. 또한 그대들의 아늑한 집에 차려진 따뜻한 식탁처럼 기쁜 웃을 주는 것이다. 하여 그대들은 굶주린 채 그를 찾아와 비로소 마음의 평안을 얻게 되리라.
그대들의 친구가 찾아와 속마음을 털어놓을 때 단지 제 마음 속의 생각으로 ‘그건 아닌걸’하고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또한 ‘그건 그래’라는 말도 억누를 필요는 없다. 그 친구가 말없이 있다면 먼저 그대들의 가슴으로 그의 가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도록 하라. 이렇듯 우정의 숨결 안에서는 아무 말 없이도 모든 생각, 욕망, 기대가 찬사나 대가 없이 기쁨으로 태어나고 나누어지는 것이다.
그대들의 친구와 헤어질 때에도 결코 슬퍼하지 말라. 그대들이 친구와 헤어지고 나면 그의 가장 사랑스러운 것들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리라. 이는 마치 산을 오르는 자보다는 벌판에 서서 바라보는 자에게 그 산이 더욱 선명히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대들, 우정에는 결코 영혼의 결합 이외에 다른 목적을 두지 말라. 자신의 내면에 감추어진 신비를 드러내는 것 외에 또 다른 무엇인가를 찾는 사랑은 이미 사랑으로서의 자격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것은 단지 다른 사람을 향하여 던져진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은 것들만 잔뜩 걸려드는 그물에 불과하다.
그대들의 친구를 대할 때는 항상 최선을 다하라. 그가 그대들 마음의 썰물 때를 알고 있다면 밀물 때는 언제인지도 알게 해야 한다. 그러나 그대들, 그저 남아도는 시간을 함께 보내려고 찾는 친구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와 같이 하는 시간에 싱싱한 활기와 생명을 불어넣기 위하여 친구를 찾아야 하리라. 그대들의 요구를 만족시킴은 결코 그대들의 공허감만을 채우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곧 상대방의 요구도 만족시키는 것이다. 그러니 순수하고 부드러운 우정 속으로 웃음이 배게 하여 늘 기쁨을 함께 나누라. 순결한 우정의 손만 있다면 숲 속의 잎사귀에 맺힌 이슬방울 하나에서도 빛나는 아침을 찾아낼 수 있으며, 그것은 다시금 뜨겁게 불타오른 것이다.
4. 사람의 아들 예수
예수의 슬픔과 미소 - 마리아의 친척 중 한 사람
그의 눈길은 언제나 높은 곳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의 두 눈에는 하느님의 불길이 가득 담겨 있었지요. 때때로 그는 무척 우울한 표정을 짓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슬픔은 고통에 찬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부드러운 손길이 되어 주었고, 외로운 사람들에게는 따뜻한 손길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의 미소는 미지의 무언가를 갈망하는 것처럼 갈증이 묻어 있었습니다. 마치 아이들의 해맑은 눈길 위로 잘게 부서져 내리는 별들의 조각 같았습니다. 그의 슬픔은 입술 위로 배어나오자마자 미소로 변하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마치 가을날의 숲에 드리워진 황금빛 베일처럼 어느 밤 고요한 호숫가에 내려앉는 달빛처럼 그렇게 느껴졌습니다. 그의 미소는 결혼식날을 맞은 아름다운 신부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친구를 두고서는 차마 높이 날아오를 수 없는 날개를 가진 슬픔 때문에 슬퍼했습니다.
훌륭한 목수였던 예수 - 나자렛의 부자 레위
그는 누구보다 훌륭한 목수였다. 그가 고안해낸 방문은 아무리 뛰어난 도둑이라도 결코 열 수가 없었다. 또 그가 만든 창문들은 언제나 시원한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그리고 그는 삼나무로 아주 견고한 궤짝을 만들어 반짝반짝 윤이 나도록 닦아놓기도 했고, 쟁기와 갈퀴를 튼튼하면서도 사용하기 쉽게 만들 줄도 알았다. 우리 회당의 설교대도 그가 직접 만들었다. 그 설교대는 오래 된 뽕나무로 만든 것이었는데 성서를 올려놓은 받침대 양쪽 옆으로 날개를 조각하여 붙여 놓았다. 또 그 밑에는 황소의 머리와 몇 마리의 비둘기, 그리고 눈이 커다란 암사슴을 멋지게 조각해주었다. 이것들은 모두 갈대아와 그리스 목공양식을 따른 것이었지만 그가 발휘하는 기술은 갈대아에서 온 것도 그리스 양식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30여 년 전에 많은 사람들의 손을 빌려서 지은 집이다. 당시 나는 갈릴래아의 마을에 있는 집 짓는 사람들과 목수들을 모두 불러모았다. 그들은 저마다의 독특한 기술과 방식을 지니고 있었는데 나는 그들이 지은 지금의 집에 대해서 대단히 만족했었다. 여러분 모두 나자렛의 예수가 고안한 우리 집의 몇몇 방문과 창문들을 구경해보아야 한다. 내가 만족스럽게 여기는 우리 집의 다른 어떤 부분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견고하고 보기 좋게 잘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가 만든 두 개의 방문과 동쪽으로 난 창문이 다른 방문이나 창문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 동안 예수가 만든 문과 창문 이외의 것들은 모두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낡아 허술해지고 말았다. 오직 예수가 만든 것들만 변함없이 튼튼하게 제 구실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예수는 두 사람 몫의 품삯을 받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한 사람 몫밖에 받지 않았던 너그러운 목수였다. 그런데 지금은 이스라엘의 위대한 예언자가 된 모양이다. 만일 그 당시에 예수라는 이름의 젊은이가 예언자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나는 그에게 일보다는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또한 그의 이야기를 들은 대가로 목수보다도 훨씬 더 많은 품삯을 아낌없이 지불했을 것이다. 지금도 나는 많은 일꾼들을 고용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의 손 위에 하느님의 손이 놓여 있는지 내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참지 못하는 예수 - 야무니의 비르바라
겨울이 봄을 기다리며 추위를 견디는 것처럼 예수께서는 무지하고 게으른 사람들도 잘 견뎌냈다. 그는 마치 매서운 바람은 온몸으로 받아내는 산처럼 꿋꿋함을 잃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의 거친 말과 태도도 부드럽게 받아들였다. 자신에 대한 온갖 트집과 험담에는 아예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세상의 핍박에 강한 사람만이 진리를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 언제나 온화하고 묵묵한 태도를 보인 것만은 아니다. 그는 위선자를 용서하지 않았고 사기꾼이나 교활한 사람들에게는 결코 굴복함이 없었다. 그는 어느 누구의 다스림도 받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육신이 어둠 속에 갇혀 있다고 해서 빛의 존재조차 믿지 못하는 사람들을 참지 못했다. 자기 마음 속에서 해답을 구하지 않고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새벽이나 황혼의 어스름에 자신의 꿈을 맡기지 않고 밤과 낮을 분명하게 구분지어 판단하려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결코 참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