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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방

버지니아 울프 지음 | -
자기만의 방

버지니아 울프 지음



제1장

울프는 사실 예술회로부터 “여성과 소설”이라는 주제에 대하여 강연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녀는 “여성”이나 “소설”의 본질에 대해 언급하고 그 두 항목을 연결시키는 전통적 방법을 택하지 않고, “여성이 소설을 쓰려면 자기 자신의 돈과 방이 있어야 한다.”는 아주 조야하게 보이는 주장을 내세우며,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것으로 강연을 대신한다. 이유를 설명하는 방법은 울프가 강연에 오기까지 이틀간 걸어온 방황과 모색의 족적을 기술하는 것인데, 이 기술에 있어서도 그녀는 소설가답게, 메리(성은 베튼, 세튼, 카마이클 등 아무래도 좋다)라는 허구적 화자가 옥스브리지(Oxbridge)라는 가상의 대학도시를 방문한다는 설정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강연에 대한 생각에 골몰하여 잔디 위를 걷던 화자는 대학의 수위로부터 대학의 연구원과 학생들만 잔디 위를 걸을 권리가 있고 나머지는 길을 사용해야 한다는 주의를 받는다. 그녀는 물론 머리 속에 떠오르고 있던 생각의 실마리를 잃어버린다. 강연을 위한 생각의 실마리를 잡기도 전에 여성에게 금지된 구역들이 여성의 사고와 발전을 방해하는 현실을 체험적으로 그린 예이다. 이러한 현실적 제지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자신이 방문하고 있는 옥스브리지의 특정 칼리지에 속했던 여러 문인들의 업적과 그 칼리지에 대한 그들의 회상, 또한 그 칼리지에 보관되어 있는 그들의 원고 등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도서관의 문을 연다.

그때 또다시 점잖은 한 신사가, 여성이 이 도서관에 들어오려면, 대학 연구원을 동반하거나, 소개장을 가지고 와야 한다고 저지한다. 점심식사 시간까지 한 시간이 남아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던 화자는 칼리지의 교회에서 울려나오는 장엄한 오르간 소리에 관심을 갖지만, 곧 그곳에 들어가는 일도 저지 당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그냥 건물들의 외형적 아름다움만을 관람하기로 한다. 예배시간이 되었는지, 모자와 가운 차림의 학생들과 교수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는데, 중년의 학자들은 스트랜드(런던의 번화한 상점가)에서 생존을 위해 싸운다면 절대 살아남지 못할 희귀종들 같은 기묘한 인상을 하고 있었다.

칼리지 안에 들어가지 않아도 그 건축의 아름다움은 충분히 보는 이의 시각에 충족감을 준다. 화자는 이 아름답고 장엄한 건물들이 한때는 목초지였던 땅에 세워지는 과정 중에 흘러 들어왔을 수많은 후원용 재화를 상상한다. 칼리지의 점심시간에 화자가 접하게 되는 혀넙치와 자고새로 시작하여 적포도주, 백포도주를 동반하고, 설탕범벅이 된 디저트로 끝나는 맛나고 풍요한 점심식사는 다시 한번 이 칼리지의 재정적 풍요를 증명해 준다. 이러한 식사를 마친 후라면, 안정된 이성적 사고와 인생에 대한 관대하고 낙천적인 인식이 능히 가능할 것 같았다. 그러나 창 밖에서 화자가 우연히 보게 되는 꼬리 잘린 고양이의 모습은 무언가 우주에 대해 질문을 제기하는 듯한 모습으로, 포만감을 주는 식사의 경험과는 다르게 무엇인가 결핍되어 있고, 무엇인가 다른 세계가 있다는 느낌을 암시한다.

그 결핍과 다름은 제1차 세계대전 전의 감상적이고, 기대와 희망에 가득 찬, 그리고 낭만적 빛을 잃지 않은 남녀관계와, 1차대전이 드러낸 인간의 어리석고 추한 모습을 목격한 후에 환상과 감상을 잃어버린 건조한 남녀관계의 차이를 암시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점심 식사 후 여성들의 칼리지인 펀햄 칼리지를 찾은 화자는 그 차이가 결국은 남성들의 풍요로운 칼리지와 여성들의 빈곤한 칼리지의 차이임을 인식하게 된다.

칼리지에서 만나게 된 초라한 여성학자의 늙은 모습, 바닥이 비칠 정도로 멀건 그레이비 수프와 소고기와 감자와 야채, 그리고 포도주 대신 물이 나오는 평범한 싸구려 저녁식사는 화자에게 여성의 상대적 빈곤의 결정적 증거로 작용한다. 저녁 후에 친지인 여성학자 메리 세튼(메리 베튼, 메리 세튼 등의 평범한 이름의 사용은 우리말 식으로 하면 갑녀, 을녀 등의 인물설정이라 볼 수 있다.)과 이에 대한 자신의 감상을 설파하던 화자는 펀햄 칼리지의 기원에 대한 메리 세튼의 설명을 듣게 된다. 1860년경에 사회의 조롱과 회의 속에서 끈질긴 설득과 피나는 노력을 통하여 여성들은 삼만 파운드의 돈을 모금하는 데 성공하였고, 이것이 펀햄 칼리지의 기금이 되었다고 했다. 그러니 저녁식사 때 포도주와 자고새, 그리고 쟁반을 머리 위에 들고 나르는 하인들을 볼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여성들은 왜 돈을 벌 수가 없었는가? 돈을 벌기 위해서는 가정생활을 제대로 영위할 수가 없고, 자녀들을 제대로 길러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돈을 번다고 해도 1880년까지 여성들은 재산권이 없었으므로, 그 돈은 남편의 소유가 되어 남편이 원하는 대로 처분될 수밖에 없었으므로, 돈을 번다는 것이 여성에게는 무의미한 활동이었다.

하룻동안의 상념을 정리하며, 화자는 늦은 시간에 숙소로 돌아온다. 인적이 끊어진 숙소 앞에서 그녀는 문밖에 쫓겨난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가를 생각하고, 그러나 안에 갇혀 있다는 것은 더 비참할 것이라고 여성의 위치를 상징하는 두 상태의 우열을 가려본다. 남성의 풍요와 안전함, 그리고 여성의 빈곤과 불안정성, 그리고 작가의 형성에 있어서 풍요로운 전통이 가지는 힘, 또한 전통의 결여가 가지는 힘에 대한 생각들로 그녀는 하루의 일과를 결산한다.



제2장

런던으로 돌아온 화자는 “여성과 소설”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아무 것도 쓰지 못한 채, 도움이 될 만한 자료를 찾아 대영박물관 도서관으로 향한다. 도서관에서 화자가 발견하는 것은 남성이 여성에 대해서 쓴 책은 너무나 많아서 그녀가 가진 시간과 능력으로는 도저히 그것을 다 섭렵할 수 없는 반면, 여성이 남성에 대하여 쓴 책은 것의 없다는 사실이었다. 화자의 앞에 앉아서 자료를 찾고 있는 남자는 때로 소중한 자료를 발견하였다는 듯이 만족의 신음 소리를 발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식으로 자료연구에 대한 훈련을 받은 적이 없는 화자가 추적하고 있는 한 가지 질문, “왜 여성은 가난한가?”에 대한 의문은 “중세시대 여성의 상황”이라든가 “피지 섬의 여성풍습”이라든가 하는 수십 갈래의 주제 앞에서 그녀의 손길에 잡히지 않고 흩어져 버린다. 또한 남성은 여성에 대해 무수한 언급을 해왔지만, 그들의 의견은 하나도 일치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포우프(Pope)는 여성들이 특징이 없다고 말한 반면, 라 브뤼예르(La Bruyre)는 여성들은 극단적이어서 남성보다 낫거나 못하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오전 내내 자료를 찾은 후에 이런 엇갈린 의견들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결론 - 예를 들면 여성은 남성보다 체모가 적다는 식의 - 을 써 가지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화자는 결론 대신 하나의 그림을 그렸다. 그것은 분노한 모습으로 『여성의 지적, 도덕적, 육체적 열등성(The Mental, Moral, and Physical Inferiority of the Female Sex)』이라는 제목의 책을 쓰고 있는 흉한 모습의 남자교수였다. 남성들이 여성에 대하여 지금까지 써온 모든 글이 진리의 백색광 속에서 쓰여진 것이 아니고, 감정과 분노의 붉은 광채 속에서 쓰여졌음을 말해주는 하나의 이미지를 창조한 것이다.

점심식사를 하러 가서 신문을 펼쳐든 화자는 지구를 모르는 외계인이 와서 신문의 제목만 보아도 영국이 가부장적인 사회임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느낀다. 모든 것을 운영하고, 권력을 지니고, 운동선수 노릇을 하고, 재판을 하는 사람은 모두 남성임을 한눈에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화자가 그려놓은 이미지 속의 남자는 왜 그렇게 분노하고 있는 것일까? 그는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이 부를 원한다고 생각해서 그들에게 분노하고 있는 것과 같은 원리로 분노하는 것일까?

남성들은 남성의 약점을 사실에 가깝게 지적하는 여성에 대하여 “지독한 페미니스트”라고 부르짖는다. 그것은 남성들이 항상 자기 자신들의 부풀려진 이미지를 여성들의 눈 속에서 보는 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여성이 이렇게 과장된 거울 역할을 해주지 않았다면, 세계는 아직도 야만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남성에 대한 이런 위험한 생각들을 좇고 있을 때, 점심값을 지불할 때가 되었다. 화자는 몇 장의 종이를 주면 사회가 자신에게 잠자리와 먹을 것을 주는 신기한 제도에 잠시 생각이 미친다.

그녀가 돈의 힘을 갖게 된 것은 봄베이에서 바람을 쐬던 친척 아주머니가 말에서 떨어져 죽었기 때문이었다. 그 유산상속 통지를 받은 것은 여성에게 참정권이 주어진 날과 같은 날이었는데, 화자는 두 가지 권리 중에 재산이 그녀에게는 더 소중했다고 말한다. 이제 그녀는 당시 여성에게 허락되었던 허드렛일 - 당나귀 쇼나 결혼식을 취재한다든지, 조화를 만든다든지, 유치원 아이들에게 알파벳을 가르친다든지 하는 - 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또한 생계를 위해서 남성에게 평생 종처럼 아첨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또한 정복욕과 소유욕에 시달리는 남성들에게 동정심까지 지니게 되었고, 남성들에 대한 공포나 씁쓸함이 사라졌으며, 사물을 그 자체로 평정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습관이 생겼다.

자신의 거처가 있는 거리로 돌아온 화자는 탄부와 유모와 식료품가게 주인이 일에 열중하고 있는 광경을 보면서, 앞으로의 세계에서 여성이 보호해야 할 성이라는 관념이 없어지면 여성 탄부나 군인, 선원, 기관사 등도 등장하고 그런 일이 가지는 긴장감과 위험부담 때문에 여성의 수명도 남성의 수명만큼 짧아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여성의 삶이 변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고를 급진적으로 확대시켜 가고 있는 부분이다.



제3장

대영박물관에서 아무런 실마리를 찾지 못한 화자는 자기 방의 커튼을 내리고, 트레베일란(Treveylan) 교수의 영국사 책에 나오는 사실의 기록들 속에서 엘리자베스 시대의 여성들은 어떻게 살았으며, 그 시대의 여성들은 왜 시를 쓸 수 없었는가에 대한 답을 얻으려고 한다. 여성의 지위에 관한 페이지에서 화자는 아내를 구타하는 것은 당시 남성들의 권리로 여겨졌다는 항목을 발견한다. 여자의 부모는 또한 부모들이 정해준 혼처를 거절하는 딸을 감금하거나 구타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에는 클리템네스트라(Clytemnestra), 안티고네(Antigone), 클레오파트라(Cleopatra), 맥베스 부인(Lady Macbeth), 페드르(Phedre), 크레시다(Cressida) 등 강렬한 성격을 가진 여성들이 수도 없이 등장한다. 역사책과 문학이 그리는 여성상은 괴물과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독수리의 날개를 가진 지렁이의 형상이었다. 그러나 역사적 기록을 찾아보면 실질적으로는 문학이 그려내는 강인한 여성상은 볼 수 없다. 가끔 여왕들의 이름이 언급되긴 했지만, 지적 능력과 성품의 장점으로만 무장한 중산층의 여성이 역사의 흐름에서 중대한 역할을 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여성이 자신의 삶을 기록한 문헌도 없다.

그러므로 뉸햄과 거튼의 여학생들은 앞으로 엘리자베스 시대의 여성들의 삶이 어떠했는가에 대하여 연구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제인 오스틴의 삶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알고 있고, 18세기 이후에는 문학적 영향력을 행사한 여성들이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시대의 여성들은 아무 것도 쓰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들은 아마도 아동실에서 나오자마자 열 다섯 혹은 열 여섯의 나이에 결혼을 했을 것이다.

지금은 고인이 된 한 주교는 여성이 셰익스피어와 같은 천재성을 갖는 것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적어도 셰익스피어의 시대에 태어난 셰익스피어와 똑같은 재능을 가진 여자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녀는 결코 셰익스피어가 될 수는 없었으리라는 것은 사실이다. 셰익스피어에게 쥬디스라는 여동생이 있었다고 가정하자. 그녀는 여성이므로 셰익스피어처럼 문법학교에 가서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을 공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책에 관심이 있다 하더라도, 그녀는 집안 일을 거드는 틈틈이 책을 훔쳐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더군다나 글을 쓴다는 것은 숨어서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십대를 채 벗어나기 전에, 그녀의 부모는 그녀를 옆집의 양털 중매상인의 아들과 약혼시키기로 작정하였을 것이다. 결혼이 혐오스럽다고 말하는 그녀를 가두고 아버지는 구타와 회유로 그녀의 마음을 돌리려 했을 것이다. 오빠와 같은 공상력과 언어적 재능을 갖추고 있었던 그녀는 어느 여름날 견디다 못해 보따리를 챙겨 런던의 극장가로 왔을 것이다. 그러나 허드렛일부터 시작하여 배우로 성공한 오빠와는 달리 배우가 되고 싶다는 그녀의 말에 극장의 지배인은 푸들이 춤추는 거나 여자가 연기를 하는 거나 비슷할 거라고 하며 폭소하였을 것이다. 마침내 닉 그린(Nick Greene)이라는 배우감독이 그녀에게 동정심을 가져 그녀를 정부로 삼았고, 그녀는 그의 아기를 임신하고 목매어 자살했을 것이다.

셰익스피어와 같은 천재는 노동을 하는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 가운데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혹 여성들 가운데 어떤 천재성이 발현되었다고 하면, 그녀들은 마녀로 오인 받아 익사당했거나, 훌륭한 사람의 어머니가 되었거나, 광녀가 되었거나 혹은 익명의 민요작가가 되었을 것이다.

18세기 루소의 예 이후에 성행하기 시작한 고백문학의 예를 보면, 하나의 저술이 나온다는 것은 남성의 경우에도 온갖 장애를 극복하고 탄생하는 기적과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성의 경우에 그 장애라는 것은 더욱 대단한 것이었다. 그녀가 자신만의 방을 가진다는 것은 부모가 아주 부유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19세기 초까지도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또한 키츠(Keats)나 카알라일(Carlyle), 플로베르(Flaubert) 등 가난한 남성작가들에게 허용되었던, 도보여행을 즐긴다거나 자기만의 거처를 따로 가진다거나 하는 일도 물론 여성에게는 허용될 수가 없었다. 키츠나 플로베르나 다른 천재들은 세상의 무관심을 그렇게도 못 견뎌 했다. 그러나 글을 쓰려는 여성에게는 무관심이 아니라 세상의 적의가 기다리고 있었다.영양이 좋은 우유를 먹은 쥐의 발육과 그렇지 못한 쥐의 발육에는 완연한 차이가 보인다. 예술가의 성장에도 사회가 그에게 어떤 영양가를 공급하는가가 대단히 중요하다. 여성 예술가에게 사회는 어떤 양분을 공급했는가, 그녀는 멸시당하고, 구타당하고, 설교당하고, 타이름을 당했다. 여성의 지적 열등성에 대하여, 닉 그린이 여성은 연기를 할 수 없다고 말했듯이, 여성은 작곡을 못 한다든지, 여성은 이것을 못한다, 저것을 못한다는 의견들이 너무도 분분하여서 그것을 읽는 여성들은 자기실현의 활력을 잃게 된다.

그런데 사실, 예술가에게 중요한 것은 셰익스피어의 경우처럼, 그 마음에 아무런 거리낌과 장애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마음은 반항과 피해의식과 복수심 등을 모두 다 태워 연소시켜 버리고 아무런 장애도 없이 백열하고 있는 것이다.



제4장

그런데 16세기의 여성의 마음이 이런 상태에 있을 수 없었다는 것은 너무나도 명백하다. 17세기에는 레이디 윈첼시(Lady Winchelsea)라는 귀족부인이 시작(詩作)을 시도하였다. 상당히 재능이 뛰어났던 그녀의 시는 남성들의 편견과 부당성에 대한 분노로 점철되어 있었고, 그녀의 사생활은 우울함의 연속이었다. 찰스 램이 사랑하였던 뉴 캐슬 공작 부인(Duchess of New Castle) 마가렛 카벤디쉬(Margaret Cavendish) 역시 “여성은 박쥐나 부엉이처럼 살며, 짐승처럼 노동하고, 벌레처럼 죽어간다.”고 분노하고 있다. 그러나 가르침 받고 길들여진 일이 없는 그녀의 상상력은 유용하게 쓰여질 수가 없었다.

그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도 그녀에게 교육적 제언을 하지 않았고, 아첨할 뿐이었으며, 외부인들은 그녀를 조롱하고 비난했다. 당대의 편지작가인 도로시 오스본(Dorothy Osborne)은 그 자신이 상당한 문필재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마가렛 카벤디쉬가 시집을 출판한 것을 거의 광기 어린 행동으로 취급했다. 여자가 글을 쓴다는 것, 그것도 가정사의 틈틈이 편지를 쓰는 정도가 아니라, 시를 써서 출판한다는 것에 대하여 당대 사회가 가졌던 편견을 대변해 주는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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