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하루
박완서 지음 | 문학동네
기나긴 하루
박완서 지음
문학동네 / 2012년 1월 / 290쪽 / 10,000원
갱년기의 기나긴 하루
찬바람 난 지 언젠데 자꾸 속에서 열불이 나려고 해서 손사래로 부채질을 하다 말고 내가 미쳤지, 나는 세면대로 가서 찬물로 북북 세수를 하고 외출 준비를 했다. 뭐가 미쳤다는 건지는 분명하지 않았지만, 더 미친 것은 남편에게 뭔가 하소연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였다. 오늘 온종일 내가 무슨 일에 붙잡혀 있어야 하는지 최소한 남편은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출근하는 남편에게 슬쩍 운을 뗀다는 게, 여보 나 왜 이렇게 울화가 치밀고 얼굴이 화끈거리지, 했더니 그가 한다는 소리가 갱년긴가보군, 했다. 그래 갱년기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화상이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지가 여자에 대해 뭘 안다고. 의학적인 답변으로는, 나 지금 갱년기가 맞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팔십 노인들이 모여 앉아 갱년기 타령을 하는 것을 참아내야 할 걱정으로 아침부터 울증에 빠져 있는 아내에게 그건 할 소리가 아니지.
사실 시누이가 이혼하기 전까지 시어머니는 며느리 같은 거 거들떠도 안 봤다. 한 인물 하는 시누이는 대학 때 부잣집 아들에다 키도 크고 인물도 잘나서 킹카로 통하는 동기와 소문난 연애를 해서 한때 어머니로 하여금 딸 가진 근심을 흠뻑 맛보게 했다. 어머니의 성화에는 아랑곳없이 그야말로 서늘하게 견디던 시누이는 그 킹카가 가업을 이어받은 후에 결혼에 골인했고, 연이어서 아들딸을 차례로 낳았다. 딸의 지위가 반석같이 굳어졌다고 판단한 시어머니는 기고만장해졌다. 나는 꿀릴 게 없이 살아왔다는 게 당신의 일생을 쇠꼬챙이처럼 관통하는 자부심인데, 아들에 관해서는 하등 내세울 게 없어서 적잖이 자존심 상했을 것이다. 집안에서나 대외적인 행사에서나 딸사위를 내세우고 아들 내외는 치지도외했다. 그런 딸이 이혼을 한다고 했을 때 한바탕 난리를 예상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도록 모든 문제 - 자녀 양육 문제와 위자료 문제 - 등을 그녀가 원하는 대로 받아내고 서류 정리까지 깨끗이 마무리된 후에 친정에는 통고만 해온 것이다.
5호선을 타려고 지하철 계단을 내려가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시누이한테서였다. 서둘지 마. 이제부터는 집에서 차리지 말고 나가 잡수라고 했어. 내가 아주 예약까지 해놓았으니까 틀림없을 거야. 말이야 바른대로 말이지, 네 잘못이야. 처음부터 울 엄마를 그렇게 길들이는 게 아니었어. 만만하게 보이면 기어오르는 건 늙은이나 아이들이나 마찬가지야. 그녀답지 않게 가벼운 설교까지 하고 나서 전화를 끊었다. 그거 하나 혼자 힘으로 해결하지 못하느냐는 가벼운 질책은 시누이 노릇이라기보다는 우정에 가깝다. 시누이보다는 친구로서 그 여성이 고맙고 의지가 되는 건 사실이다. 나도 고분고분한 성미는 아닌데 처음부터도 아니고, 시집살이 무섭던 옛날에도 고방 열쇠 물려받을 이 나이에 새삼스럽게 시어머니한테 꼼짝 못하고 쥐여 살게 된 사정은 내가 생각해도 하도 치사스럽고 한심해서 설명이 불가능하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는 시어머니가 사준 집이었다. 시어머니는 죽는 날까지 돈은 움켜쥐고 있어야지 생전에 자식에게 물려줬다가는 땅을 치고 후회하게 된다는 믿음이 강한 분이었다. 정년까지 초등학교 교사생활을 했고 먼저 돌아가신 시아버지도 공무원이었다. 두 분이 다 돈을 벌고 자녀도 남매밖에 안 뒀으니 가난하게 살았달 순 없지만, 검약이 몸에 밴 분들이었다. 부자 동네 학군에서도 잘 가르치기로 소문이 나 육학년 담임을 내리 삼 년씩이나 맡을 때가 교사로서의 시어머니의 전성기였을 것이다. 현직 교사의 과외는 금지돼 있었지만 학부모들의 간청을 못이기는 척 자기 반 아이들 중 우수한 학생만을 골라 몰래 과외도 서슴지 않았다. 육학년 담임선생을 둘러싼 치맛바람과 성의표시의 도가 지나쳐 사회문제가 되고 마침내 중학교 입시가 없어질 그 무렵이었다. 시어머니는 그 시절을 마치 도깨비장난처럼 돈이 쏟아져 들어오더라고 회상했다.
도깨비장난으로 생긴 돈을 도깨비한테 도로 빼앗기지 않으려면 땅을 사는 게 수라는 게 시어머니의 믿음이었다. 땅에 대한 시어머니의 그런 철학과 당시 공무원이던 시아버지의 정보랄까, 선견지명이 맞아떨어져 여기저기 땅을 조금씩 사 모은 건 사실인 모양이었다. 그것도 남편의 추측일 뿐 명색이 장남이 그 땅의 실체를 파악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설마 돌아가신 후에는 그 땅이 있는 땅인지 없는 땅인지, 오랜 세월 자식들한테 세도 부릴 만한 경제적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그 정체를 드러내리라 체념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그 시기가 어머니 생전에 왔다. 시누이의 이혼이 그 계기가 됐던 것 같다. 뽐내기 좋아하는 시어머니에게 만족감을 주던 딸이 이혼하자 그게 중대한 결격 사유라고 생각한 듯했다. 출세를 했나 돈을 많이 벌었나 하다못해 다니는 회사가 남들이 다 알아주는 버젓한 회사인가, 다 아닌 아들이 그 나이에 집까지 없다는 게 뻐기기 좋아하는 시어머니에게 얼마나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겠는가.
못난 아들의 자존심을 은근히 긁은 적은 많았지만 그때처럼 대놓고 분풀이를 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정신을 못 차리게 한바탕 야단을 치고 나서 땅 판 돈이라며 우리에게는 과분한 중형 아파트를 사주었다. 꾸중을 들을 때는 정말이지 끝까지 참아내기 힘들어 그 돈 도로 내놓고 싶었지만 못 그랬다. 남편이 나 대신 그래주길 바란 것도 같고, 남편이 그러면 어쩌나 조마조마했던 것도 같다. 아무튼 우리의 참을성이 아파트 한 채 값이라면 우린 대단한 사람들임에 틀림이 없다.
그게 그리 오래되지 않은 근래의 일인데도 그 일을 계기로 이 집에 시집오고 나서 이십여 년 동안 한결같이 고부 사이를 평화롭게 유지시켜주던 불간섭주의랄까, 쿨한 관계가 순식간에 무너졌다. 부모 자식 간에도 자유를 사고팔 수 있게 하는 게 돈의 힘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아파트를 사주시고 나서 시어머니가 나에게 말씀하시는 투가 강압적으로 변한 것도 사실이고 내가 그걸 꾹 참고 받아들인 것도 사실이지만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다.
팔순이 다 된 노인에게 그렇게 많은 사교모임이 있는 줄은 몰랐다. 정기적인 것만도 한 달에 서너 번은 되는 것 같았다. 처음 시작이 얼마나 모욕적이었는지는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시어머니의 회수 때였으니까 아파트 사주신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아무리 자식 신세 안 지는 걸 코에 걸고 사시는 도도한 분이라지만 생신만은 우리가 꼬박꼬박 챙겨드렸다. 거의 밖에서 치렀지만 그건 당신이 원하셔서 그랬던 거고 집에서 차리기 싫어서 그랬던 건 아니다. 그러나 이번만은 이름 붙은 생신이고 버젓한 아파트도 장만했겠다 집에서 차리겠다고 했더니 당신도 좋아하셨다. 집들이 겸해서 가족은 물론 가까운 친척까지 청해서 풍성하고 화기애애한 잔치를 벌여 시어머니를 흐뭇하게 해드렸다. 그 후에도 내 음식 솜씨를 두고두고 칭찬해주신 것도 애써 차린 보람이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꼭 대접해야 할 친구분들이 몇 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집에서 차려드려야 하나 했더니 그게 아니라 먹긴 밖에서 먹지만 딸이나 며느리가 참석해서 살갑게 대접도 하고 나중에 음식값도 내는 게 당신네들 생신모임의 관례라고 했다. 자식 신세 안 지고 산다는 걸 코에 걸고 사는 잘난 노인네들인 줄만 알았더니 자식 효도 받는다는 걸 자랑하고 싶어하는 귀여운 데도 있구나 싶어 기분이 좋았다. 그럼 지금까지 그 역할은 누가 했을까, 보나마나 시누이였겠지. 시누이 이혼 후에도 남들이 행여 수군거릴까 신경쓰면서도 맡길 데가 거기밖에 없었을 시어머니를 생각하니 불쌍한 마음까지 들었다.
그 잘난 시어머니를 불쌍해할 수 있는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건 거기까지였다. 그날 시어머니한테 당한 모욕은 며느리로 하여금 다시는 그분과 화해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4.4회 모임이니까 L호텔 뷔페로 할 거라고 했다. 4.4회라는 모임 이름은 경성사범 입학년도인 1944년에서 따온 거라고 했다. 시어머니는 당신이 경성사범 출신이라는 걸 자랑스러워할 뿐만 아니라 일제시대에 들어갔다는 걸 반드시 밝히고 싶어했다. 일제시대에 경성사범 들어가는 건 하늘의 별 따기, 전교 일등이나 가능한데 그 전교도 시시한 학교는 안 되고 명문 학교라야 된다는 거였다. 4.4회 멤버는 다행히 많지는 않았다. 연세들이 높으니까 돌아가신 분도 있고 그분들의 특별한 우월감에 동조할 만큼 현재의 삶도 유복한 분들만이 동참하는 모임 같았다. L호텔이라면 점심 값이 꽤 나갈 텐데, 내심 쫄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처음 해보는 대외적인 효돈데 그 정도는 해야지, 집에서 요리 솜씨 부릴 때보다 훨씬 더 신이 났다.
노인네들이 식탐도 많고 예상했던 것보다 양도 큰 것에 놀랐다. 헌 부대에 곡식이 더 많이 들어간다는 옛말을 실감케 했다. 눈치 봐서 잘 잡숫는 것을 접시가 넘치게 덜어다드려도 순식간에 없어졌다. 갈비는 물론 노인네들이 잡숫기 어려운 대게나 가재도 미처 채워드리기도 전에 어찌나 잘 잡숫는지 아무리 뷔페라지만 너무 자주 드나들며 맛있는 것만 담아오는 게 눈치가 보일 지경이었다. 당신들도 좀 움직였으면 좋으련만 처음 한 접시만 손수 덜어오고 앉은 채 꼼짝 않고 맛있는 걸 마음껏 즐기셨다. 그 모습을 보니 아무리 비싸도 돈이 안 아까울 것 같았다.
나름대로 보람 있는 효도를 한 것 같아 꽤 나가는 음식값도 아까운 줄 몰랐다. 카드로 긋고 영수증을 받는데 손님들을 저만치 앞세우고 뒤처졌던 시어머니가 종종걸음으로 돌아오더니 영수증을 날렵하게 낚아채서 당신 핸드백에 찔러넣으면서 날카롭게 속삭였다. 네 구좌로 부쳐주마.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꼭 그만한 액수가 다음날 내 통장으로 입금돼 있었다. 그 순간 모욕당한 듯한 기분은 아파트를 당장 토해내도 시원치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4.4회 모임 외에는 다들 L호텔보다는 싼 데서 했지만 여러 번 치르는 걸 보니 그게 다 내 주머니에서 나간다면 수월치 않은 액수일 테니 마냥 좋은 얼굴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역시 그분은 나보다 한 수 위였다는 걸 인정 안 할 수가 없었다.
회수 해가 지나자 한숨 돌리는가 했더니 올해부터는 4.4회가 발목을 잡았다. 4.4회가 정기적으로 모일 구실로 계를 만든 건 최근의 일이라고 했다. 그것도 누가 목돈을 타가기 위한 계가 아니라 돈만 다달이 각출할 뿐 타가는 사람은 따로 정해져 있었다. 같은 경성사범 동기인데 교직을 중간에 그만두고 살림만 하다가 늘그막에 과부 되고 자식들도 병들거나 돈을 못 벌어 단칸방에서 비참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는 걸 알아낸 것도 시어머니였고, 복 좋은 우리들이 보고만 있을 게 아니라 도움에 나서자는 제안을 한 것도 시어머니였다. 돕는 방법도 매우 합리적이었다. 매달 십만 원씩 들고 나와 점심 먹고 나머지는 그 친구에게 보내기로 했기 때문에 먹는 것은 최소한으로 줄여서 싸구려로만 먹는다고 했다. 그 정도만 해도 감동 스토리인데 시어머니는 거기 만족하지 못하고 점심은 자기 집에서 낼 테니 모인 돈 전액을 보내자는 안을 냈고 멤버들로부터는 물론 대환영을 받았다. 그 멤버들을 더욱 편하게 해주려면 도우미가 필요했다. 늙은이가 부엌에서 움직이는 건 같은 늙은이끼리도 편하게 바라볼 수는 없는 일이니까. 내가 다달이 시어머니 아파트로 시누이 말 짝으로 파출부 나가게 된 경위가 대강 이러했다.
오늘도 시어머니는 나 할 일은 수저만 놓으면 될 정도로 다 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같이 손이 많이 가는 음식들을 며느리 손 안 빌리고 당신 혼자서 완벽하게 차려놨다는 자부심으로 씽쌩 찬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시어머니 주변을 나는 헛되게 맴돈다. 내가 할 일을 찾아낼 수가 없어서 어쩔 줄을 모를수록 얼굴만 달아오른다. 그런 나를 가만 놔둘 시어머니가 아니다. 얘야, 손님 초대한 줄 뻔히 알고 오면서 꽃다발이라고 한 다발 사오면 내가 얼마나 낯이 나겠니? 너는 다 좋은데 센스가 모자라.
남친이 자기를 좋아하는 여친에게 너는 다 좋은데, 성격도 좋고, 능력도 있고, 직장도 좋은데, 생긴 것만 빼면 말이야, 이렇게 말했을 때 그 여자친구가 받은 모멸감이 바로 이런 거 아닐까. 남편의 청혼을 받아들이고 양가가 상견례를 치르고 나서 엄마는 별로 탐탁하지 않은 듯 말했었다. 자고로 시어머니 자리는 좀 무식한 듯해야 며느리 신상이 편하다 했는데.... 엄마는 그때 그 자리에서 벌써 경성사범 출신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질렸을 것이다.
4.4회 멤버들은 열 명 남짓했다. 똑똑한 사람들은 정확하기도 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거의 한꺼번에 시간을 지켜 나타났다. 그들은 집에 들어올 때부터 떠들던 수다를 식탁에서 먹고 마시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주로 같이 늙어가는 동창들 얘기였다. 누구는 암, 누구는 치매, 누구는 뇌졸중에 걸리고 누구는 과부가 됐다는 우울한 소식에도 그분들의 식욕은 주춤도 안 하고, 심난해지는 것 같지도 않았다. 식사가 끝나고 자리가 거실 소파로 이동하자 나는 마음이 급했다. 커피든 녹차든, 시어머니 의중의 가장 아름다운 잔을 대령해야만 뒷말이 없다는 것도 스트레스였다. 시어머니 생각으로는 그거야말로 센스의 문제일 터, 그러나 센스야말로 간섭을 가장 싫어하는 원초적인 감수성이라는 걸 그는 알까.
후식 자리의 화제는 단연 아픈 얘기였다. 고혈압, 당뇨, 불면증, 건망증, 난청, 퇴행성관절염, 심지어는 요실금까지, 병 자랑을 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었다. 내가 참아줄 수 없는 건 병 자랑이 아니라 그 모든 증세를 갱년기 탓으로 돌리는 거였다. 갱년기엔 누구나 다 그래. 갱년기 현상은 조만간 지나가게 돼 있어. 갱년기를 잘 넘겨야 하는데. 정작 갱년기는 여기 이 부엌 구석에서 거봉포도를 송이째 내놓을 것인가 알알이 떼어서 내놓을 것인가를 못 정해서 속에서 열불이 나고 있는 난데. 나는 손사래로 부채질을 대신하면서, 조용히 음습한 죽음이나 직시해야 할 노인들의 즐거운 착각도 이쯤 되면 초기 치매현상이 아닐까 걱정이 되는 한편 재미있기도 했다.
제동을 걸 사람이 없어선지 착각이 착각을 불러오기 시작하면서 화제에도 기름이 오르기 시작했다. 병 자랑이 서로의 용모에 대한 탐색으로 변했다. 그래 갱년기니까, 병 자랑보다도 미용에 대한 관심이 더 어울리겠지. 너 그동안 보톡스 맞은 거 아냐? 쟤 저번에 땡긴 거 이제 자리잡을 때가 됐는데 아직도 어색한 것 같지 않니? 쟤가 몇 년이나 젊어지나 봐가며 나도 해볼까 하는데…… 한 사람의 삼십 년 젊어지는 꿈은 갱년기에서 삼십 년을 더 끌어내려 처녀 때 자기가 한 인물 한 얘기, 자기를 따르던 숱한 남자들 얘기로 접어들었다. 연애는 영원한 회춘재인가. 노인들은 자기가 지금 몇 살인지 헷갈리고 왔다갔다하면서 보기 민망할 정도로 생기가 나 보였다.
어느 자리에도 꼭 노래 부르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건 분위기 쇄신을 위해서나 전환을 위해 좋은 일이었다. 시어머니가 선창을 하고 다들 따라 불렀다. 그윽한 애조를 띤 후렴은 이러했다. '무까시노 히까리 이마 이즈꼬.' '그 옛날의 광영은 지금 어디에.' 대체 그 소절을 왜 그렇게 애타게 반복해 불렀을까. 저분들이 하자 없이 모범적으로 살아온 건 알겠는데 그래도 그렇지, 평생 초등학교 선생 노릇하면서 언제 한번 광내고 살아본 적이 있다고. 그러면서도 인생 전반에 대한 측은지심 같은 걸로 마음이 울적하게 가라앉았다. 그때 시어머니가 나에게 이제 가도 좋다는 눈짓을 했다. 그런다고 당장 나오긴 좀 뭣해서 잠시 머뭇거리고 있는데, 그제야 곗돈들을 모으다 말고 누가 느닷없이 말했다. 야, 그 배고프던 그 시절은 지금 다 어디로 갔을까.
시선이 아득해지는 그들을 뒤로하고 시어머니 아파트를 나오면서 생각했다. 그 노인들이 애타게 찾은 그 옛날의 광영이 그럼 배고픈 시절이었단 말인가. 말도 안 돼. 그러면서도 나는 쫓기는 기분이 들었다. 말도 안 되는 것한테 쫓기는 기분에서 벗어나려고 나는 조금 서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