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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텨온 시간은 전부 내 힘이었다

신하영 지음 | 딥앤와이드


버텨온 시간은 전부 내 힘이었다

신하영 지음

딥앤와이드 / 2024년 12월 / 274쪽 / 17,600원



1장 : 버텨온 시간은 전부 내 힘이었다



내 마음이 가난할 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기분이 나쁠 때가 있다. 친구가 던진 농담에 미간을 찌푸리고, 내 말을 한 번에 못 알아듣기만 해도 짜증이 솟구친다. 저 사람은 왜 무단횡단을 하는 거지? 진짜 죽고 싶은 건가? 앞차가 늦게 가는 바람에 신호라도 놓치면 솜주먹을 꾸욱 말아 쥐고 어금니를 깨문다. 마음이 가난할 때 나타나는 증상이다. 마음의 빈곤은 통장 잔고가 바닥났을 때와 같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세상만사가 짜증난다. 그러다가 갑자기 울분이 터져 울음을 쏟아내기도, 애꿎은 사람에게 화를 내기도 한다. 왜 이럴까, 어쩌다가 이렇게 돼버렸을까. 시발이라는 단어를 입안에 머금고 굴리다 겨우 삼켜낸다.

잘하고 있는데도 혼자 시간 밖으로 밀려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내가 하는 행동이 모나 보이고 진심을 다했음에도 한없이 부족한 것 같을 때. 내 안의 천사와 악마가 있다면 악마에게 모든 걸 빼앗기고만 상태에서 나는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에 게 침을 튀기고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때로는 엉망인 내 상태를 들킬까 봐 선의의 거짓말을 한다. “나 요즘 엄청 좋아. 저번 주말에는 뭐 했어? 예전에 말한 건 괜찮고?”

괜찮지 않은 내가 묻는 안부는 가림막에 불과하다. 이 부정을 절대 전염시키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그러면서도 아등바등 사는 나를 누가 좀 알아봐 주고 다독여줬으면 싶다. 모순에 모순이 더해져 망가진 감정 상태가 무르익으면 내가 경멸스러워 코가 시릴 정도다. 그때 알았다. 예민함의 끝에 도달하면 그냥 눈물이 나오는구나. 너무 나약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구나.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잡념에 빠지다 늦은 새벽에 겨우 잠이 들고 아침에 일어나 표독스러운 피로를 느끼며 하루를 시작하는 나에게 더 이상의 방도는 없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점심을 먹고 일하다 허공을 응시하면 빨리 감기를 하듯 시간이 흘러갔다. 그러다 책상에 있는 노트에서 예전에 적어놓은 한 명언을 발견한다.

“예민한 마음은 상처받기 쉬우나,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이기도 하다.”_엘리자베스 길버트(Elizabeth Gilbert)



손이 닿는 대로 자국이 남을 것 같은 물렁한 나는 나약한 동시에 가장 감성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릴스에 뜬 사별 영상을 보고 얼마나 울었던지. 인류애가 조금이라도 느껴진다면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고, 노을 지는 한강을 바라보며 운전할 땐 이 순간이 영원하길 바라며 달리던 속도를 늦추기도 했다. 나에게 무엇이 필요할까? 넉넉한 돈인가, 안정된 사랑인가, 아주 긴 휴식인가. 아무것도 내 뜻대로 할 수 없으니 답답한 건 여전하다. 다음 날에는 여행지에서 만난 유기견이 자신에게 친절을 베푼 사람을 죽을 듯이 뒤쫓는 영상을 봤다. 차를 따라오는 말티즈를 도저히 보낼 수가 없어 가슴에 품은 그 사람. 그 사람이 나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그 아이 하나만 보고 살았을 텐데….

샤워를 하다 빈 샴푸통을 만지작거렸다. 새로 살 땐 조금 더 상큼한 걸 사볼까? 계란프라이를 3개나 해먹으며 문어와 인간의 우정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고, 해진 파자마를 입고 피아노를 쳤다. 엄마한테는 아직 힘들다고 말하지 못했고 달리기를 하며 흔들리는 나무를 바라봤다. SNS를 보며 몇 번 한숨을 쉬었고, 회사에 생긴 귀찮은 일을 내가 도맡아 하기로 했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나니 더는 눈물이 나지 않았다(슬픈 영상을 보고 눈물이 나지 않으면 홀로 괜찮아졌다 판단하는 편이다). 뒤차가 빵빵거려도 라디오 소리에 더 귀를 기울였고, 친구가 말귀를 못 알아들으면 짜증 대신 상냥함을 보였다. 가난했던 내 마음이 어떻게 다시 부를 이루었는지, 어느 날은 천장을 보며 생각했다. 도망치지 않고 살았으니 가여운 내게 신이 선물을 주신 게 아닐까.

인생이 아무리 롤러코스터라고 해도 가끔은 심해까지 내려가는 내가 두렵다. 하지만 그냥 살아만 내어도 다시 올라오는 게 인생이니 하루를 충실히 보내기만 해도 다시 궤도를 되찾을 수 있다. 어쩌면 마음의 가난은 내가 만들어낸 허상일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마음의 부도 없는 것이니 인생사 공수래공수거가 아닐까. 생각난 김에 빈 종이에 단어를 적어본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인생사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떠나니 지나치게 탐하지 말고 내 사람들에게 친절해 보이자.

마음을 비우니 그제야 채워지는 느낌이 든다. 비울수록 채워진다는 뜻이 이런 것이구나. 앙상한 가지만 무성했던 마음이 비로소 숲이 된 기분이다. 겨울이 지나 봄이 오는 것처럼 날이 따스워지면 내 마음은 파릇한 잎사귀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이것은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섭리니 내 예민함도, 불행도, 슬픔도 머지않아 사라진다. 구제불능 같았던 삶이 어쩐지 사랑스러워지는 느낌이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니 그제야 공기가 맑다.

마침내, 고장 나버린 어른


“모든 인간의 불행은 조용한 방에 홀로 앉아 있을 수 없는 것에서 비롯된다.”

_블레이즈 파스칼 (Blaise Pascal)



내가 고장 났다고 느낀 건 인터넷 창이 스무 개가 넘어갔을 때였다.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스스로에게 물으며 자세를 고쳐 앉았지만 이상하다고 느낀 이상 단전에서 올라오는 불안함을 막을 순 없었다. 성인 ADHD를 검색해서 몇 가지 테스트를 했다. 공감 가는 문항에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 오후 7시가 넘어서야 켜놓은 창을 하나씩 정리해 본다. 참 징하기도 하지…. 그러면서 문득 내가 사소한 것에 미련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출판사를 운영하고 글을 쓰기 위해선 항상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려야 한다. 좋은 인사이트를 모으기 위해 자료 아카이빙을 먼저 하는 편이다. 오늘도 인터넷이라는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나. 그러다 보물이라도 발견하면 나중에 써먹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창을 그대로 방치를 해두는 편이다. 다른 일을 처리하다 전에 켜둔 창을 보면 순간적으로 산만함이 생기는데, 이런 것이 하나둘 쌓이니 자연스레 인터넷 창이 늘어나게 됐다. 좋은 걸 놓치기 싫은 미련이 만든 산물이다. 물론 주어진 일은 어떻게든 끝내지만, 그날은 켜켜이 쌓여있는 인터넷 창을 보고 기분이 퍽 상해버렸다. 정말이지 내가 고장 난 것만 같아서.

수많은 창이 내 상태를 대변해 주는 것만 같아서 ADHD와 도파민 중독에 관한 기사를 접하게 되면서 여러 정보를 찾아보게 됐다. 숏폼과 SNS를 좋아하고 한 가지에 집중을 하지 못하며 늘 새로운 것을 갈구하는 인간이라면 난데? 도파민 중독자에 ADHD까지…. 나는 병들어가고 있는 걸까? 급하게 도파민 디톡스를 시도해 봤지만, 삼일천하에 그쳤다. 기어코 쾌락의 끝에 도달해야 이 짓을 멈출까? 아니면 머리를 밀고 절이라도 들어가 속세와 단절이라도 해야 하나. 나름 진지하게 이 문제를 고민하며 얕은 공부를 이어갔다. 그러던 도중 발견한 정보가 하나 있다.

고대 그리스 철학파 중 하나인 스토아학파는 더 잘 사는 인생을 위해선 절제와 금욕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 끝에 다다르면 열반처럼 어떠한 욕망도 느낄 수 없는 상태가 된다고…. 하지만 현대인의 삶에서 극단적인 억제는 그리 좋은 방식이 아닐지도 모른다. 에피쿠로스학파는 스토아학파와 반대로 쾌락주의를 추구했지만, 실제로 쾌락만 좇다가 거대한 공허함에 빠져 삶의 의욕을 잃은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결국 인생이란 균형을 찾는 여정이 아닐까. 무엇이든 적당한 것이 가장 좋다. 인간은 항상성을 유지하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추우면 더운 곳을 찾고, 더우면 시원한 곳을 찾는 것처럼, 삶에서도 균형을 유지하려는 본능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어딘가에 쏠려 푹 절여진 내가 이 지독한 산만함을 제압할 방법은 없다. 편하게 패배를 인정하고 끊임없이 균형을 맞추기 위해 노력할 뿐. 오버를 했다간 그릇도 못 찾을 수도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제는 과감하게 창을 끈다. 똑똑하기 위해 멍청해지고 싶진 않다. 방치는 안 하는 것보다 못하니 더는 미련을 갖지 않기로 했다. 북마크에 쌓인 페이지도 정리하고 바탕화면에 쌓인 파일도 깔끔히 삭제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엄지를 튕기며 숏폼을 마구잡이로 넘기는 것보다 핸드폰을 베개 밑에 가두고 눈을 감고 있는 시간을 늘려본다. 주 1회는 꼭 피아노를 연주하고 아무 생각 없이 한강 러닝도 한다. 이것은 항상성을 유지하려는 내 작은 노력이다. 고통과 괴로움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면 삶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다니 쾌락과 절제 사이에서 미묘한 중심 잡기를 이어가야겠다. 보고 싶은 것이 많아도 참고, 하기 싫은 것이 많아도 해야만 하는 인생이 고되지만 어디 나만 그럴까. 군데군데가 고장 난 나는 얼굴에 기름때가 묻은 아마추어 수리공처럼 작은 것을 하나씩 고쳐나가고 있다. 언젠가 숙련된 정비공이 되면 자유자재로 일상을 다룰 수 있겠지. 그날을 고대하며 고된 몸을 이끌고 침대 속으로 들어가 본다. 하루가 길다.

낭만 실종 사태


내가 글을 쓰며 자주 낭만을 언급하는 건 생존 사회에 열중하면서 눈동자의 빛을 잃은 사람을 자주 목격했기 때문이다. 낭만을 가진 사람은 적어도 바뀐 계절의 향 정도는 맡을 수 있다. 뭐 좋은 거 없냐고 물으면 혼자 배시시 웃으며 주머니에서 몇 개의 취향은 꺼낼 수 있는 상태 말이다. 그에 반해 메마른 사람은 역정을 낸다. 먹고살기 바쁜데 무슨 낭만이냐며 혀를 끌끌 찬다. 그런 이와 나누는 대화는 숨이 턱턱 막힌다. 아무렇지 않게 끼니를 거르고 자신의 행복은 사치에 불과하다며 빽빽하게 일만 하는 삶. 그 누구보다 바지런하지만, 입술의 핏기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말 그대로 ‘생기’를 잃은 것이다.

버트런드 러셀의 책 <행복의 정의>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꽃 이름 따위를 알아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 돈벌이에는 보탬이 안 될 텐데.” 실제로 행복의 가장 큰 방해 요소는 생존 경쟁이라고 한다. 이 경쟁은 단순히 먹고사는 것이 아닌 순위의 영역으로 내가 얼마나 더 잘하느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니까 경주마처럼 좁은 시야로 달리며 상대를 앞지르는 게 최우선 목표인 거다. 그들에게 뒤처짐은 곧 죽음이며 멈추지 않고 역전하는 것만이 오직 행복을 충족시켜 준다. 나 또한 그런 적이 있었다. 20대 중반의 나는 치열한 서울에 입성하며 타인의 성공에 열등감을 느끼며 몸과 정신을 혹사하고 고착된 삶을 혐오하기 바빴다. 만약 일찍 성공했다면 지금보다 더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을까? 그렇다면 대체 뭐가 더 행복했을까. 그놈을 이겼다는 우월감? 과연 내가 그걸 양식 삼아 평생을 살 수 있을까? 아마 아닐 테다. 나는 더 높은 존재에 질투를 느끼며 누군가의 뒤꽁무니를 쫓기 바빴을 것이다.

우린 남들에게 이기거나 지려고 태어난 게 아니다. 행복하기 위해 태어난 거지. 고통이 가득한 세상 같지만, 자세히 보면 선하고 유쾌한 것이 더 많다. 조금만 여유로워져도 사랑, 소속감, 우정, 성취, 성장, 계절, 낭만 같은 보석이 시선 안에 들어온다. 이것이 당신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키다. 이 땅에 태어나 마땅히 누려야 할 것을 모르는 체하고 달릴 이유는 없다. 트랙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기에 나를 지나치는 수많은 발을 뒤로한 채 천천히 호흡을 고르며 하늘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욕망이 도를 넘으면 인간은 벌을 받는다. 엄한 욕구만 가득했던 나는 인간관계와 커리어가 한 번에 무너지는 경험을 하며 무언가에 홀렸다 빠져나온 것처럼 삶을 새로 정비하기 시작했다. 그 뒤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쉴 수 있는 여백을 만들었다. 일요일에는 시장에서 재료를 사 나를 위한 요리를 하고, 50분짜리 클래식 공연 영상을 틀어둔 채 멍을 때리기도 했다. 뻔뻔하게 낭만을 논하면서 브레이크를 밟아오니 그제야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세상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다. 행복한 사람은 맹목적이지 않다. 그들은 자신만의 속도를 가지고 있고 옆 사람에게 안부를 물을 수 있는 여유가 있다. 원하는 도달점에 조금 늦어도 괜찮다. 나는 천천히, 오래 달리는 인생을 살고 싶다.

느림의 미학을 알고 나니 비로소 조급함을 내려놓게 된다. 쉬었다 뛰어도, 남을 역전하지 않아도 방향만 안다면 식은 열정을 채우며 다시 뛸 수 있다. 또 낭만을 쥐고 뛰는 것과 그냥 달리는 것은 천지 차이니 즐거움을 추구하는 일을 잊으면 안 된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과거에 질투하던 사람을 자연스레 역전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시인 고은의 <순간의 꽃> 한 구절이 떠오른다. “내려올 때 보았네 /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나는 올라갈 때도 충분히 풍경을 만끽하고 싶다. 그러니 절대로 총기를 잃지 말아야지. 부디 이 이야기가 당신이 잃은 낭만의 불씨를 살려주길 바란다. 빠른 성공에 혈안 되어 아름다운 것을 쉽게 지나치지 말기를. 행복의 검열을 높여 스스로 괴롭히지 말기를.

2장 : 누군가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다정의 역사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_안도현, <너에게 묻는다>



다정함을 예찬하는 사람이 된 건 제대로 된 사랑을 갈구해서였다. 사랑받기 마땅한 사람은 사랑을 주는 법을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다정해지고 싶었다. 더 많이 사랑받고 싶어서. 다정에 숙련된 나는 마음이 없어도 시기적절하게 다정다감한 태도를 보일 수 있게 됐다. 미운 사람 앞에서도 용케 잘 웃어 보였고 낯선 사람에겐 배려와 예의를, 가까운 지인에게도 항상 살갑게 굴었다. 사랑이 많아서 손해 볼 건 없지 않은가? 내 사랑의 원천은 댐이 아닌 드넓은 바다였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소모되는 느낌을 받았다. 착한 사람 마스크가 그리 즐겁지 않았던 거다. 가식적인 관계가 판을 치는 요즘, 나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데 무슨 호의냐며 시니컬한 태도를 지니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다정의 끈을 차마 놓진 못했다. 그것이 더럽게 물들어가는 나를 구원해 주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내 마음이 무한하지 않다는 걸 알았기에 조금은 영악해질 필요가 있었다.

‘시기적절하게 표현하며 감정을 조절하자. 그럼에도 냉혈한만큼은 되지 말자.’ 그렇게 고군분투를 한 지도 어언 10년이 지났다. 내가 내린 결론은 하나다. ‘다정한 사람은 귀하다.’ 다정함은 인간에게 가장 좋은 태도이자 고도의 사회적 능력이며 배움으로 늘 수 있는 영역이었다. 다정한 사람은 얼음장 같은 상황도 단숨에 녹이는 힘을 가지고 있고 화난 사람도 웃음으로 전염시킨다. 다정함은 우울을 정화하기도, 죽음을 생각하는 이를 종종 살리기도 한다. 다정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냉소적이다. 친절을 오지랖이라 생각하고 하나라도 손해 보기 싫어하며 항상 우위를 점하려 하니 자주 인상을 찌푸리고 작은 일에 다이너마이트처럼 폭발하는 거다. 그야말로 대예민시대가 따로 없다.

애석하게도 모든 화살은 제일 가까운 사람에게 향한다. 맞다. 우리가 가장 짜증을 많이 내는 사람은 가족과 친구 그리고 내 옆의 동료다. 제일 다정해야 하는 사람의 등에 칼을 꽂고 있는데도 그들은 당신에게 웃어 보이지 않은가. 이 사실에 등골이 서늘해야 한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다정함의 시작은 제일 가까운 사람에서부터 시작돼야 한다. 그러고 나면 낯선 이에게 기분 좋은 미소를 보이는 일이 별거 아니게 된다. 평소에 잘 웃는 사람이 어디서든 잘 웃으니까. 다정한 사람의 주름에 온기가 마구 껴있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웃는 모습만 봐도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누군가가 ‘저 사람 진짜 웃는 게 예쁘다’라고 옆 친구에게 속삭였으면 좋겠다. 아직 웃는 게 어색한 나는 여전히 다정함을 추앙하고 있다. 이런 내가 가식적으로 느껴질 때도 있지만, 절대 선한 목적을 잊지 않으려 한다. 실제로 이런 희망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차가운 태도를 바로잡을 수 있다. 모든 관계에서 보상 심리를 내려놓게 되면 대가 없이하는 행동의 진가를 알게 된다. 그것은 상대가 아닌 나에게 더 크게 다가온다. 선물을 받는 사람보다 주는 사람이 더 기쁘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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