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만 봐도 닳는 것
임강유 지음 | 읽고싶은책
바라만 봐도 닳는 것
임강유 지음
읽고싶은책 / 2022년 8월 / 142쪽 / 11,500원제1부 인생은 언제나바라만 봐도 닳는 것세상천지 무엇조차누군가에게는 무언의 가치가 있다.그것을 칭하기를인생, 세월, 시간이라 말한다.
만인에게 가장 공평한 것은세상이란 호수처럼 흐르는 시간과도 같다.
맑은 호숫가에 몸을 맡기고이리저리 흐르게 할지언정흐르지 않게 할 수 없듯이
나에게 할머니는 나란 존재보다 더 가치가 있다.
호강시켜드리려삼십 평생 바라만 봤을 뿐인데
어느새 구부러진 허리는세월의 유수를 짐작케 한다.
내 이마에 나이테가하나 둘 생길 때마다
오히려 우리 할머니는 닳는 것 같아나이 먹기 되레 두려워진다.
금지옥엽 바라만 봐도 닳는날 키우느라 닳아버린우리 할머니의 허리.
할머니에 대한무언의 고마움으로나도 점점 닳아간다.
조각가의 카타르시스너를 깎아내리는 사람이 있다.그는 너를 조각상으로 만들 것이다.
언어의 칼날로 이리저리 깎아버린 탓에너의 것이 사라지고 있다.
약한 파도에 절벽이 깎이듯너도 깎이고 있다.
조각가는 몇 번의 손짓으로너를 조각상으로 만들었다.
구태여 변명하지 않아도그의 입안에는 그윽한 가시들로 빼곡했고
너의 살갗은 점점 해져가고 있다.너라는 잔상,
단풍도 낙엽이 되어 땅을 밟는데조각이 되어 버린 너는조각가에 의해 두 다리를 잃었다.
작업실 천장에 달린 와이어에 의지한 채허공을 바라볼 뿐,
곧 조각가의 손짓이 멈추고 말을 할 순 없으나허공의 잔상은 조각칼의 통증으로 답할 수 있다.
너를 깎아내려는 사람의 조각상이 되어너는 살아도 죽은 것이고, 죽어도 살아 있다.
그림자로 얼룩진 골목의 허름한 작업실에서반은 부스러기로, 나머지 반은 잔상으로
어릴 적 크레파스어릴 적 크레파스는키가 다 제각각이다.
좋아하는 색과 자주 사용하던 색은짜리몽땅하고
자주 사용하지 않는 색은늘씬했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좋아하는 것, 이루고 싶은 꿈이 생긴다.
그러다시간이 흐르면 어릴 적 크레파스처럼별 볼 일 없어지거나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짜리몽땅한 크레파스는
수많은 과정을 노력했기에늘 후회가 없었다.
이 순간도크레파스의 여정은끝나지 않았다.
지금도 짧은 다리로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으니
키는 더 줄었겠다.
함께사랑은 모래알움켜쥐면 쥘수록흩어져 가는 구름
고이 담아보려 해도작은 가슴엔 언제나아쉬움만 가득 찼다.
가까운 듯, 멀어지는 두 걸음
사랑은 독도법,머물 수 없기에 흐르지.
한 걸음 두 걸음이 모여야떠나지 않고 계속 함께할 수 있다.
봄날의 새순처럼가슴을 찢고 나오는
감정을 주워 담고그대를 부른다.
오늘도 점점앞으로 가는 그대와떨어지지 않으려발을 맞추어 본다.
제2부 슬픈 뒤 아픔회색도시회색도시 서울, 누구나 한 번쯤 꿈꿔 본 도시.큰 도화지에 마음대로 색칠해도 아무도 뭐라 할 사람이 없지.
달을 삼켜버린 까닭에전국에서 유일하게 낮과 밤이 같은 곳
맨땅에 헤딩해도 스포츠가 되고밤하늘에 침 뱉어도 별 또는 달이 되는 곳.
지방에 사는 내게 서울은 그런 곳이다.
신림동, 홍대 골목 곳곳에 새겨진화가들의 낙서는 어느샌가 그래비티라는 미술의 한 장르가 됐다.
아무도 몰라줘도젊음의 고생을 용기로 쳐주는 섬.
내가 사는 곳과는 가깝고도 멀어서우주선을 타야지만 착륙할 수 있는 다른 행성.
내가 생각하는 서울은 그런 곳이다.
우유니 사막엔 모래가 없다는 이상한 말에도회색도시의 한 모험가는 사막으로 떠났고,내가 사는 곳에선 우유니 사막엔 모래가 있다고 한다.
나도 우주선을 타고 회색도시로 가야겠다.
회색도시의 모험가에게로
착각의 밤매일 착각의 밤을 지난다.어릴 적 학교에서 적은 장래희망은 착각이었다.
조약돌을 집어 쌓는다 하여사람들은 그것을 탑이라 부르지 않았다.
버스에서 만난 이성이 나를 쳐다봤다고 해서그것을 사랑이라 부르지도 않았다.
착각의 밤,차가운 공기에 착각을 불어넣고
이내 별들의 전쟁이 시작됐다.새벽을 깨우는 자명종.
구름이 걷히고 모습을 드러낸새벽녘 불빛과 수많은 착각들을 뒤로해야 했다.
그리고 잠들지 못한 새벽,안갯속을 유유히 걸었다.
가슴에 희망을 품고.
떠나소서애써 부정하며 여기까지 왔습니다.나의 사랑을 부정하면서까지그대 떠나길 바랐습니다.
그대 한없이 주는 사랑이내겐 과분했습니다.
나에게 그댄 가질 수 없는별과도 같았습니다.
차마 그대 놓아줄 자신이 없어그대가 내가 싫어져 놓길 바랐습니다.
그대 행복만 해도 모자란 사람인 걸 알기에그대 떠난 지금 나 홀로 아프길 바라봅니다.
끝없는 사랑 주지 못한 나는그대에게 아픈 손가락이었습니다.
날 떠나 부디만개하는 꽃들 사이, 화려한 장미가 되어활짝 피길 뒤에서 바라봅니다.
사랑했던 기억, 아픈 추억모두 내가 안고 가겠습니다.
그대 대신 아픈 내가아름다울 수 있게그대 나를 떠나소서.
이기심저 달 무얼 위해 떠있나사람들의 이기심은 하늘을 찌르는데
어둠 드리우니달은 표적이 됐다.
무얼 위해 빛을 뿜는가우리의 내면이 어둠인데
오늘따라별들도 서서히 멀어져 가네.
밤과 달이 있는 한우리 마음은여전히 어둠 짙은 바다라네.
제3부 그리고눈 속에 핀 꽃지고지순 피어나라.오죽(烏竹)조차 오죽하면60년에 한번 꽃을 피우고 지겠느냐.
강릉의 해변은점차 사라져도
그대가 남긴 글 속강릉 바다는여느 바다보다 풍성하더라.
파도 모래 위에꽃을 그리니
그대 생각에오늘 밤 잠은 다 잤노라 생각했다.
스물일곱 송이 낙화하여땅에 처박히니그곳에서 그대의 향기 남아돈다.
오늘 밤, 그대의 말마따나차가운 달의 시선만이골목골목 가득 메워진다.
이내 겨울밤 서리 찾아오니죽림(竹林)에는 눈 속 꽃이 피어났다.
나그네매일 걷는 길오늘따라 유난히 성난 소리 들려와
가던 길 멈추고귀 기울여 보니
나무에 붙은 매미 한 마리서글프게 노래하네.
그 소리에지나던 나그네
발걸음을 멈추고끝까지 들어주고 간다네.
희망어두운 망망대해돛단배 하나.
이리저리 둘러봐도어둠뿐이요.
저 수평선 너머 보이는 등대 하나이리 오라 손짓하네.
꼭짓점연과 선으로 이어져 완성된 꼭짓점은사람과 사람을 잇는 유일한 방법,
연을 맺은 사람끼리는여러 선으로 뒤엉켜 있다.
호수에 떠 있는 오리 한 쌍,
물비늘은 부러운지빛을 품고 뿜어낸다.
새들은 재잘재잘 노랠 부르고연과 선은 호수로 모여들었다.
연과 선은하나를 잇는 꼭짓점,
잇고 잇는 그런 과정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