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요가
이우제 지음 | 원더박스
각자의 요가
이우제 지음
원더박스 / 2022년 6월 / 200쪽 / 15,000원
격투가의 비기를 찾아서요가를 처음 시작하면서 기대하던 바가 있었다. 흔히 요가 하면 맨 먼저 떠올릴 법한 고무처럼 쭉쭉 늘어나는 유연한 몸, 군살 하나 없이 날씬한 몸매는 아니었다. 나는 시작이 좀 달랐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부터 나는 격투 스포츠에 매료되어 있었다. 복싱, 무에타이, 레슬링, 유도 등 격투 스포츠 방송이라면 가리지 않고 보았다. 그 가운데 종합 격투기, 복싱, 브라질리언 주짓수는 그냥 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제법 오래 수련하기도 했다. 수련하는 동안 늘 갈증을 느꼈다. 흔한 훈련법을 반복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정말 강한 파이터들을 최고의 자리에 올려놓은 이른바 ‘비기’를 배우고 싶었다. 그래서 끊임없이 찾아보고 파고들었다. 그러다 인터넷에서 우연히 영상 하나와 만났다.
‘이거라면 가능하겠다!’ 영상의 주인공은 힉슨 그레이시. 브라질리언 주짓수 마스터로 무패의 전적으로 은퇴한 전설의 파이터다. 내가 본 영상에서 힉슨은 격렬한 호흡을 보여 주었다. 가슴을 리드미컬하게 부풀렸다가 꺼트리면서 코로 강하게 쉭쉭 소리를 내며 숨을 마시고 뱉기를 반복했다. 또 배를 쏙 당겨서 마치 장기가 사라지기라도 한 듯 뱃가죽과 등가죽을 딱 붙이기도 했다.
그리고 배 안에서 코브라가 지나다니듯 왼쪽 옆구리에서 시작해 오른쪽 옆구리까지 차례로 한 부위만 내밀었다가 당기기를 반복하기도 했다. 복부의 움직임은 마치 큰 태풍에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 같았는데, 가부좌로 앉아 두 눈을 감은 얼굴은 고요했다. 그는 이뿐 아니라 유연하지만 에너지 넘치는 특유의 몸풀기 동작들도 보여 줬다.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해 좀 더 찾아본 끝에 요가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요가가 힉슨의 비기였구나!’ 착각이었을지 몰라도, 나에게 요가의 첫인상은 이토록 강렬했다. 나도 요가를 하면 남다른 수준의 파이터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남들과 달리 몸 안에서부터 강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요가를 시작했다.
지금 같은 동작 하는 거 맞죠?요가를 좀 더 진지하게 배우겠다고 결심하고 적지 않은 돈을 들여 요가 지도자 과정에 처음으로 참여했다. 이미 몇 년간 퍼스널 트레이너로 일하면서 신체 움직임과 기능 해부학에 익숙했고 몸도 제법 유연했기에 자신만만했다. 자기소개를 한 뒤에는 치솟는 자신감을 꾹꾹 눌러야 할 지경이었다.
수업 동기들은 회사에 다니다 몸이 아프기 시작해서, 허리를 다친 뒤에 요가가 좋아져서 요가 지도자 과정까지 오게 되었다고 했으니까. ‘다들 그냥 일반인이구나.’라는 마음이 들면서, 좀 더 큰 뜻이 있어서 거기까지 갔으며 직업이 운동인 데다 이미 요가를 한 지 몇 년 된 나는 그들보다 앞서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첫 번째 빈야사 수련을 마치고 큰 충격에 빠졌다. 정말 무더운 여름날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1 대 1 트레이닝 수업을 마친 뒤 버스를 타고 부지런히 달려가 수업을 들은 날이었다. 현대적인 요가원이라 폭염의 날씨를 고려해 냉방기를 약하게 돌리고 있었다. 살랑살랑 시원한 바람이 피부에 와 닿았다. 하지만 나는 땀을 주룩주룩 쏟아 냈다. 어디 땀뿐인가. 다리는 왜 그리 속절없이 흔들리며 팔뚝엔 왜 경련이 나는지. 또 마음과 달리 몸은 어쩜 그렇게 뻣뻣한지. 힘들어도 너무 힘들었다.
나는 무거운 케틀벨을 100번씩도 거뜬하게 들어 올릴 만큼 체력이 좋았고, 다리도 앞뒤로 찢을 수 있을 만큼 유연했다. 게다가 힉슨 그레이시를 보고 영감을 얻어 나름 명상을 흉내 내며 요가스러운 자세를 준비해 왔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빈야사 수련 한 번에 자신감은 땡볕 아래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려 사라졌다. 숨을 쉬고 있는데도 숨찬 느낌, 자세를 버티고 있는데도 무너져 내리는 느낌, 힘을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천근만근 무거운 몸…. 나를 지도하던 선생님은 짓궂은 농담까지 던졌다. “지금 같은 동작 하는 거 맞죠?”
비슷한 시기에 아쉬탕가 빈야사 요가 워크숍에 참가한 적도 있었다. 편백나무로 마감된 수련실에 쭈뼛쭈뼛 들어갔더니 이모라고 불러도 하나 이상하지 않을 수련자들이 앞줄에 서 있었다. 열정적으로 사는 분들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조금 얕잡아 봤던 것 같다.
선생님의 산스크리트어 구령에 맞춰 수련이 시작되었다. 에캄(하나), 드웨(둘), 트리니(셋)… 판차다샤(열다섯). 숫자가 높아질수록 나와 그분들의 움직임엔 큰 차이가 나기 시작했다. 그분들은 그냥 고수였다. 붕붕 날아다녔다. 체중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다들 몸은 어찌나 유연한지 다리를 겨드랑이에 끼우고 몸을 비틀어 등 뒤에서 양손을 맞잡기도 하고, 두 발을 머리 뒤로 넘겨 교차한 상태에서 양손으로 몸을 들어 올리기도 했다.
팔 굽혀 펴기나 턱걸이라면 내가 더 잘할 텐데, 왜 나는 동작이 무겁고 저분들은 가벼울까? 100미터 달리기라면 내 기록이 훨씬 좋을 텐데, 왜 나는 느리고 저분들은 민첩할까? 내가 동경한 힉슨 그레이시에는 나보다 그분들이 더 가까워 보였다.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머릿속이 혼란스럽기만 했다.
여기서 나의 짝을 소개해야겠다. 이 사람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일단 운동을 정말 싫어한다. 하면 잘하는데 이상하게 안 한다. 집에서 같이 운동하면 10분을 넘기지 못하고 드러누워 소파와 일체가 되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런 짝이 신체적으로 나를 압도할 때가 있다. 바로 쇼핑할 때. 그녀는 쇼핑센터 전체를 다 돌아도 전혀 지치지 않는다. 다리도 안 아파하고 피곤해하지도 않는다. 심지어 어떤 날에는 쇼핑센터를 몇 바퀴 돈 뒤에 오히려 에너지가 충전된 것처럼 팔팔해지기까지 한다.
하지만 난 쇼핑센터의 공기를 맡기 시작해서 15분쯤 지나면 급속도로 지치기 시작한다. 마치 200미터 달리기를 전력으로 연거푸 네다섯 번은 반복한 느낌이 든다. 쇼핑 막바지에 이르러 짝이 마지막으로 한 바퀴를 더 돌겠다고 하면 나는 그러라고 하고 카페인을 수혈하러 커피숍으로 향한다. 그렇게 잠시 쉬어야 간신히 집으로 돌아갈 힘이 생긴다. 이렇게 운동과 쇼핑을 비롯해 어느 맥락에 놓이느냐에 따라 우리 둘의 체력은 상대적으로 약해지거나 강해지기를 반복한다.
요가 지도자 과정에 참여하기 전, 나에게 익숙한 움직임은 내 몸을 고정해 놓고 외부의 물체(쇳덩이나 사람)를 밀거나 당기는 것이었다. 이와 달리 요가는 중력을 견디며 내 몸을 움직이는 것이다. 내가 인지하든 인지하지 못하든 몸은 계속해서 중력을 견뎌야 한다. 그런데 숙련된 요가 수련자는 중력을 잘 이용한다. 중력을 타고 논달까! 그분들은 몸의 무게 중심을 적절히 옮겨 가며 힘을 덜 써도 잘 버티고 움직일 수 있는 곳에 둔다. 물론 그렇게 할 수 있을 만큼 몸이 유연하고 부드럽다. 하지만 몸이 더 두껍고 뻣뻣한 나는 중력에 덜 저항할 수 있는 자리에 몸을 두려면 힘을 더 써서 몸을 접거나 비틀어야 했다. 당연히 더 힘들고 더 빨리 지칠 수밖에.
쇳덩이를 들어 올리는 속칭 헬스와 요가는 대척점에 있는 듯 보인다. 이 양쪽에 모두 발을 담그고 수련하려 안간힘을 쓰다 보니 몸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시선이 차츰 내 안에 자리 잡았다. 그러면서 강하고 저력 있는 사람들을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무시해 왔는지 깨닫게 되었다. 부상이 있으면 있는 대로 자기 수련을 이어 가는 사람, 신체 조건이 상대적으로 불리해도 자신이 몸담은 분야에서 꾸준히 연마하는 사람, 삶이 넉넉하지 않아도 나약해지지 않고 부지런히 살아가는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일상은 내게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어설프고 힘들어 보이겠지만 나름 괜찮아.”
어쩌면 우리는 모두 자기 자신이 가장 강해질 수 있는 순간과 만나기 위해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이 질문이 내 안에 화두로 자리 잡은 뒤 요가가 내 삶에 더 깊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호흡과 바나나요가를 시작하면 크게 두 가지 수련 방법에 주목하게 된다. 명상 수련과 아사나 수련이다. 물론 더 광범위하고 폭넓은 수행 방법이 있을 것이다. 다만 평범한 한국인들이 ‘요가 한번 해 볼까?’ 하고 인터넷을 검색하거나 요가원을 수소문하다 보면 대체로 이 두 가지에 이르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다 보니 스트레스가 많고 마음이 괴로워 자신을 돌보고 싶은 생각에 요가를 찾은 사람이라면, 요가를 산들바람이 부는 숲속의 잔잔한 호숫가에서 담요나 매트를 정갈하게 깔고 차분히 앉아 눈을 감고 명상하는 수련자의 이미지로 그려 낼 법하다. ‘요가’와 ‘명상’이란 단어가 주는 기대감이랄까. 내게도 그런 기대 속에서 요가를 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땐 일단 요가를 하기만 하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습관적으로 버럭버럭하는 모습도 줄어들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시기를 떠올리면 부끄러운 장면들이 머릿속을 지나간다. 짝과 연애하던 시절에 짝이 유명한 애니메이션을 예매한 적이 있었다. 나는 자막 버전이 아니라 더빙 버전이라는 이유로 못마땅해서 투덜대다가 짝이 내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그만 소리를 버럭 지르고 말았다. 어느 명절에는 결혼과 취직 이야기가 계속 나오는 게 기분 나빠서 집을 나가 버린 적도 있다.
아침부터 계획대로 움직이지 못한 날엔 세상이 나를 못나게 보는 것 같아서 지나가다 어깨가 부딪힌 사람에게도 욕을 한 바가지 퍼부어 줘야 직성이 풀리고는 했다. 일종의 감정 노동이 필요한 퍼스널 트레이너로 일하면서 매너 있고 친절하며 이야기 잘 들어 주는 미소 가득한 공적 페르소나가 강화되는 만큼,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그림자도 따라서 더욱 짙어졌던 것 같다.
“회원님, 오늘 컨디션이 많이 안 좋아 보이시네요. 차근차근 몸 풀면서 시작하시죠.” 겉으로 이렇게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어떻게 매일 골골대고 징징대기만 하지. 돈 내고 운동을 이렇게 하고 싶을까.’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회원님, 잘하셨어요. 그런데 조금 더 견고하게 움직여 주셔야 해요.” 이렇게 응원했지만 ‘몇 번을 말하는데 도대체가 바뀌지를 않네. 기대를 하지 말자.’라고 포기한 때도 있었다.
애당초 진심이 아닌 말들은 나를 더 억압할 뿐이었다. 도움 되는 강사가 되고 싶었던 초심과는 다르게 진상 회원을 가려내는 교만과 시간을 때우려는 태만이 차오르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술을 마시고 죄 없는 의자에 화풀이하고 있었다. 이대로 두면 안 되겠다는 경각심이 들어 다음 날 정신과를 찾아갔다. 의사 선생님은 반문했다. “요가 하신다면서요? 그럼 도움이 좀 될 텐데요.”
허탈하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했던 그 말. “요가 하신다면서요?” 내가 한 요가에는 무엇이 빠져 있던 것일까? 그리고 정신과 선생님이 생각한 요가는 무엇이었을까? 어느 날 짝이 말했다. “아휴… 난 오빠처럼은 요가 못 할 거 같아.” “엥? 왜?”
짝은 요가란 게 조용히 앉아서 명상을 하거나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가만히 앉아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한다. 그런데 나는 집 한구석에서 열을 끌어 올리며 다스베이더의 숨소리와 비슷한 소리를 내며 숨을 쉬고(우자이 호흡),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위로 뛰고 뒤로 넘어가고 거꾸로 섰다. 이렇게 격하게 움직이니 짝이 질색할 수밖에. “아니, 요가에 이런 것만 있는 건 아냐.” 황급히 수습했지만 속으로는 부끄러웠다. 명상을 하기는 했지만, 다리를 잘 찢고 몸만 쭉쭉 늘리면 요가를 잘하는 거라고 나도 모르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현타’가 왔기 때문이다. ‘아, 내 수련에 빈구석이 있구나!’
이런 일들을 계기로 탐문 조사하듯 요가에 대해 아름아름 묻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명상’이라는 요가의 또 다른 면에 주목해 나갔다. 파탄잘리의 『요가수트라』에 따르면 명상이란 마음이 한곳에 계속 모이는 것이라 한다. 우리는 무언가에 집중하는 것에 익숙하다. 스마트폰으로 소셜 미디어에 접속하고 있다 보면 순식간에 시간이 사라지고, 소파 위에 늘어져서 드라마를 1화부터 정주행하기 시작하면 하루 이틀은 거뜬히 삭제할 수 있다. 다만 이렇게 집중하면 거북목과 늘어나는 체지방이 따라붙는다는 부작용이 따르긴 하지만. 이런 집중도 『요가수트라』에서 말하는 명상에 들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부작용을 낳는 집중을 명상으로 권하진 않을 테니까.
그럼 어떤 집중이 계속되어야 명상일까? 일단 명상을 하겠다고 바닥에 앉아 보자. 그럼 십중팔구 5분 내로 오만 가지 감각이 떠오른다. ‘다리가 불편하네.’ ‘허리가 뻐근한데.’ ‘발에 피가 안 통하는 것 같아.’ ‘아, 졸려.’ ‘언제까지 하지?’ … 이렇게 앉아 있는 순간을 불편하다고 느끼기 시작하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확장되기 시작한다. 특히 일과를 마치고 밤에 명상을 하려고 앉으면 아침 출근길에 있었던 일을 시작으로, 점심으로 먹은 음식의 맛과 식당에 대한 평가, 퇴근길에 친구와 술 한잔 못 한 아쉬움 같은 것까지 분수처럼 솟아오른다. 그러다 생각이 다음 날 다시 출근해야 한다는 것과 업무 목록으로 이어지기라도 하면 고뇌의 시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건 순식간이다.
명상을 하면서 생각을 멈추기란 정말 어렵다. 우리가 이렇게 저렇게 생각하라고 가르치는 세상에 사는 데 익숙해서 더 그런 것도 같다. 그래서일까. 생각을 멈추고 살라는 말은 돈 한 푼 쓰지 말고 살라는 말처럼 들리기까지 한다. 명상에 갓 입문한 시절(여전히 나는 명상이라는 거대한 세계의 아주 작은 부분만 경험했겠지만 편의상 이렇게 표현한다), 나는 생각을 멈출 수 없다는 데 깊은 자괴감을 느끼며 답답해했다. 한편으론 나만 안 되는 건 아닐 거라고 스스로 위로하기도 했지만 타박하는 마음이 더 컸다. 그러다 우연히 한 스님의 말씀을 듣고 놀라운 발상의 전환을 할 수 있었다.
“여기 길길이 날뛰는 원숭이가 있습니다. 원숭이를 얌전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줄로 묶는다고 매질을 한다고 원숭이가 가만히 있을까요? 원숭이를 달래려면 바나나를 주면 됩니다.” 폭발하는 생각들과 요동치는 마음을 원숭이라고 생각해 보자. 이 원숭이는 하지 말라고 하면 할수록 더 길길이 날뛴다. 이제 그 생각 안 하겠다고 외치는 순간 더 자주 생각하게 된다. 짝사랑할 때를 떠올려 보자. 그 사람 생각이 멈추질 않으니 마음을 달랠 수 없어 얼마나 괴로운가. 그럴 때는 이 생각이란 원숭이에게 바나나, 다시 말해 집중할 대상을 주면 된다. 다만 명상에서는 집중할 대상을 텔레비전이나 스마트폰처럼 어지러운 바깥 대상에 두는 게 아니라 나 자신에게 둔다. 나는 아주 기초적이고 단순하게 실천해 보기로 했다. ‘호흡’이라는 바나나를 내 안의 원숭이에게 던져 주기로 한 것이다.
호흡은 누구나 하고 언제든 한다. 도구도 필요 없다. 눈을 감고 있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집중하기에 이만한 대상도 찾기 어렵다. 눈을 감고 있노라면 코끝으로 공기가 와 닿고, 그 공기가 몸 안으로 들어와 차갑던 것이 따뜻하게 데워지면서 가슴으로 들어간다. 그렇게 들이마신 숨이 가슴을 부풀리고 배와 허리 뒤쪽까지 지긋이 밀어낸다(이때 척추가 한결 편하게 세워지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들숨의 끝에 굳이 애써 멈추는 순간 없이 숨을 들어온 길로 자연스럽게 내보낸다. 이제 부풀어 두꺼워졌던 배와 허리가 다시 얇아지고, 잠시 완만하게 부풀던 가슴이 가볍게 내려앉고, 코끝으로 스르륵 공기가 나가면 한 번의 호흡이 끝난다.
호흡을 이렇게 관찰하는 동안, 짧은 시간이지만 다른 생각은 멈추게 된다. 과거에 했는데 아쉽거나 후회되는 일들도, 지금 당장 해야 하는데 미뤄 두어서 마음이 쫓기던 일들도 잠깐 동안 생각의 울타리에서 나가 있는다. 이렇게 호흡을 한 번 관찰하는 사이 짧지만 명상을 시도해 본 셈이다. 이 짧은 집중이 쌓이고 모여서 이어지면 명상이 된다. 영적 지도자 오쇼 라즈니쉬의 표현에 따르면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며 끊어지는 것과 비슷한 찰나의 집중이 마침내 끊임없이 미끄러져 흘러내리는 기름처럼 이어질 때 명상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