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명화
김선경 지음 | 세종출판사
불멸의 명화
김선경 지음
세종출판사 / 2021년 12월 / 313쪽 / 15,000원
제1부 개천가의 아이들
삶의 흔적사람은 왔다가 가야 한다. 끝없이 머무를 수가 없다. 그래서 왔다간 흔적으로 후세에 뭔가 남기기를 원한다. 그런 간절함이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虎死留皮 人死留名)”라는 속담에 고스란히 묻어나 있다.
양력으로 1월 2일에 태어나서 서른일곱 온살 배기 아들과 결혼 문제로 한참 실랑이를 할 때다. “나중에 나이가 들어 아프면, 누가 너를 보살펴 주겠니?” “아빠가 그런 걱정을 왜 하세요?” 아들이 세게 나온다. 가만히 생각하니 아들놈이 나이가 들어 아플 때는 나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게 분명하다. 마음이 상해도 어쩔 수가 없다. 방을 얻어 독립해 나간 아들과 마주치기만 하면 얼굴을 붉히다가, 그날 이후로 휴전상태가 되었다. 가정이 그렇게 평화로울 수가 없다.
아들도 내가 그런 말을 안 하니까 마음에 여유가 생겼는지, 매일 저희 엄마한테 전화를 해서 안부를 묻는다. 일주일 마다 꼬박꼬박 찾아와서 문안인사도 한다. “며느리가 있으면 아들이 저러겠나?” “어림도 없지요.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우리는 아들이 혼자 사는 게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호강에 겨웠다.
시대의 흐름을 보면, 주자가례에서 말하는 관혼상제(冠婚喪祭) 중 상(喪)과 제(祭)의 정립이 필요한 시점이 된 것 같다. 비혼 독신 자녀의 증가와 결혼을 하더라도 출산을 기피하는 현상 때문에 후손이 끊긴 경우가 속출한다. 장례문화는 매장에서 화장으로 바뀐 지 오래다. 이런 추세라면 납골당에 안치한 유골을 관리할 사람도 없을 게다. 모두의 육신이 한 줌의 재로 변해 허공으로 사라질 것이 기정사실처럼 보인다.
제사도 아들, 딸이 살아 있는 세대까지는 어떻게든 명맥은 유지할지는 모르나 미래의 가족 구조상 끝내 종식을 고할 것이 확실시된다. 매장한 산소가 없으니 이름자 적힌 비석이 없겠고, 납골당의 위패도 치워지고 없을 것이다. 이 세상에 왔다간 흔적은 자식들이 죽거나 나이가 들어 기억을 상실하는 병에 걸리면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는 뜻이다. 우리 부모님의, 부모님의 부모님이 그러하듯. 그래서 수필에 아등바등하는지 모르겠다. 아무도 기억해 줄 이가 없으니 스스로의 자취를 남기려고 집을 짓는다. 나 자신의 묘지를 만들어 비석을 세우고, 내가 혼으로 찾아가는 묘지. 그 수필이 깃들 곳을.
수필에 집착하는 또 다른 이유는 뭘까? 구덕산 자락 양지바른 곳에 옹기종기 마을을 이룬 대신동. 그곳에서 태어나 온 동네를 휘젓고 다니던 개구쟁이 꼬마가 어느새 주름진 얼굴로 변했다. 그간 여러 곳을 옮겨 다녔지만 궁극에는 산 뒤편에 붙은 아파트에 30년 가까이 터잡아 살고 있다. 마치 그 산 그늘을 벗어나면 큰일이나 날 것처럼….
어느 밤이 깊어가는 날. 아파트 앞 도로에서 들려오는 정겹고 찰진 소리, “찹쌀떡, 메밀 묵!” 시장기를 돋우는 난데없는 소리에, ‘설마, 꿈은 아니겠지?’ 하며 몽롱함 속으로 젖어든다. 덕분에 어릴 적, 우리 동네의 아침에 나던 분주한 소리들이 연이어 떠오른다. 무거운 양철 동이를 따배기 놓은 머리에 이고 길게 외치던 재첩국 아지매의 구성진 소리, “재치국 사이소, 재칫국!” 두부 장수가 방울 종을 흔들며 지나가는 영롱한 소리, “땡그랑, 땡그랑!” 그리고 어머니가 급히 나무 대문을 열고 나가는 둔탁한 소리. “삐거덕!” 어머니의 대문을 여닫는 소리는 어제 약주가 과했던 남편을 배려하는 마음, 아직 이부자리에서 꼼지락거리고 있는 자식들을 아끼는 마음, 그 마음을 담은 사랑의 울림소리다.
살다 보면 현실에서 함께하는 것들도 있다. 저녁 무렵 멀리서 들려오는 은은한 교회의 종소리, 이웃집의 현란한 피아노 소리, 창문을 두드리는 요란한 빗소리, 또한 뒷산의 달콤한 아까시나무 꽃향기, 스쳐가는 여인에게서 나는 향긋한 분 내음, 아내가 끓이는 구수한 된장국 내음. 이런 청각과 후각을 자극하는 것들에는 과거의 어느 한순간을 떠올리게 하는 묘한 마력이 숨어 있다.
주말 산행 길에 구덕산 기상관측소 근방의 내 고향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산마루에 서면,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세계가 눈앞에 아스라이 펼쳐진다. 내가 쓰는 수필은 그 세계에서 나와 인연을 맺은 특별한 이들의 발자취를 담은 글이다. 내가 기억하고 기록하지 않으면 왔다간 자국도 없이 스러질 소중한 분들의 이야기. 그래서 때늦은 나이에 글공부하고, 수필을 쓴다.
수필을 쓰면서 새삼 느끼는 것은, 어릴 때 말고는 딱히 내세울게 없이 참 건조하게 살았다는 점이다. 기껏 떠오르는 것들은, 타인과 환경을 탓하며 게으름과 실패를 정당화했던 패배에 절은 의식, 사랑했던 사랑을 이런저런 핑계로 떠나보내야 했던 서글픈 용기, 국가를 위한다는 가당찮은 명목으로 가정을 등한시했던 오만과 허세, 곁눈질 없이 우직하게만 살아 금전적으로는 항상 여유롭지 못했던 가장의 비애….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세상살이에 지쳐 허덕이던 나를 여태껏 살아오게 한 원동력이 있다는 점이다. 고비마다 나를 아껴주고 도움을 줬던 가족과 은인의 존재, 못난 나를 믿고 의지해 준 아내와의 운명적인 만남, 가정에 소홀했음에도 잘 성장한 아들과 딸을 가진 행운, 남의 어려움을 같이 아파하는 한결 넉넉해진 가슴…. 이런 일들을 삶의 흔적으로 남기기 위해 수필을 쓴다. 나와 함께했던 소중한 분들의 발자취를 기록하기 위해 희미해진 기억 속을 정처 없이 헤매고 다닌다. ‘덕분에 구경 한번 잘하고, 참 편하게 살다 간다’는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자 오늘도 바지런히 책상머리에 앉는다.
제2부 술이 빚은 만상
부산 갈매기프로야구는 내 삶의 활력소다. 프로야구 시즌이 시작되고 텔레비전으로 중계를 보다 보면, 특이한 복장과 분장을 하고 승패와는 상관없이 그냥 응원을 위해 사는 것처럼 행동하는 별난 사람들을 자주 접한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야구에 살고 야구에 죽는 야구에 곱게 미친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나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거의 버금한 수준이 있다.
프로야구가 1982년도에 출범했을 때는 사직야구장이 건립되기 전이라, 구덕운동장 동편에 붙은 구덕야구장에서 경기를 했었다. 그해 우리 부서에서도 야구의 인기에 편승하여 단체로 야구 관람을 갔었다. 그날 롯데의 상대는 제과업계의 맞수이자 호남을 연고로 하는 해태 타이거즈였다. 우리는 당연히 홈팀의 응원석인 1루 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문제의 소지가 하나 있었다. 우리 부서의 핵심 선배 중 한 분이 해태를 응원한다는 거였다. 그래서 자리는 같이 하되 타이거즈 선수가 안타를 쳐도 절대로 손뼉을 치거나 벌떡 일어서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하였다. 안 그러면 뒤에서 소주병이 날아와 애꿎이 우리 머리까지 깨진다고 통사정을 하였더니, 선배도 그 정황을 이해하고 굳게 다짐했다.
사실 그때 경기장 상황은 보통 심각한 게 아니었다. 내가 경기 중에 화장실에 잠깐 들렀을 때의 일이다. 넥타이를 맨 점잖게 생긴 관중 한 분이 술 취한 집단에게 둘러싸여 멱살잡이를 당하고, 거의 폭행 수준의 욕을 얻어먹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와서 해태 응원하노!” “안 그래도 경기가 지고 있어서 열받아 죽겠는데, 확 마!” 경기는 엎치락뒤치락 끝에 홈팀인 롯데가 지고 말았다.
경기가 끝나고 야구장 앞, 구덕맨션 1층에 있는 맥줏집에서 뒤풀이를 할 때였다. 마침 롯데 선수들 몇몇이 퇴근 복장을 하고 우리가 있는 곳으로 쑥 들어왔다. 좀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우리 부서원 중에서 목소리가 큰 선배가 기어이 한 소리를 하고 만다. “경기도 지고 뭐가 잘 났다고 뻔뻔스럽게 여기에 기어들어 오노. 그냥 집에나 쳐가지!” 그러자 분위기가 일순 싸해지고, 조금 있으니 선수들은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이제야 속에 묻어둔 이야기를 하나 털어놓으려고 한다. 그때의 살벌한 분위기 때문에 인사도 못했지만, 그중 한 선수는 중1 때 바로 내 뒷자리에 앉았던 친한 급우였다는 사실. 나중에 미스터 올스타를 두 번하고, 야구계의 신사로 알려진, 감동을 여러 번한 그 선수. 그날의 분위기상 모른 체 시치미를 뚝 떼어 내 살길을 찾을 수밖에….
그리고 1983년 무렵, 부산에 사무실을 둔 국가기관끼리 친목과 체력증진을 위해 재부 행정기관 체육대회가 열렸을 때였다. 대회는 구덕운동장 주변의 체육시설을 이용하여, 축구, 배구, 육상, 줄다리기 등으로 승부를 겨루는 방식이었다. 나는 축구 선수로 선발되어 축구장으로 임시 개조한 구덕 야구장에서 몸풀기로 공을 다루고 있었다. 내가 찬 공이 3루 벤치 쪽으로 힘없이 굴러 갔다. 마침 그 앞에 나와 있던 선수가 공을 발로 차지 않고 손으로 잡아, 밝고 겸손한 표정으로 나에게 건네줬다. 그 선수가 고 최동원 선수다.
최 선수의 불같은 강속구와 무쇠팔의 투혼으로, 롯데는 1984년 후기리그 우승과 함께 한국시리즈 우승을 거머쥐게 되었다. 그 후의 행적을 보면 그는 야구를 위해 살고, 야구의 발전을 위해 혼신을 불살랐던 진정한 부산 사나이임에 틀림이 없다. 약자 편에 서서 시대를 앞서가다 자기를 희생한 거인 중의 거인이 아니던가. 우리 모두는 그에게 너무나 큰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1986년 사직야구장으로 옮기고 난 뒤에는 귀가길이 멀어서 발길이 좀 뜸해지기는 했다. 그래도 호국보훈의 달인 6월에 호국영웅의 시구가 있으며. 행사 겸해서 필히 관람석 한 자리를 차지했다. 갈 때마다 느끼는 사항이지만 사직야구장의 응원 열기만큼은 자타 공인 리그 최고 수준이다.
우뚝 솟은 조명탑에 대낮같이 밝은 조명등이 켜지고, 하얀 유니폼을 입은 홈팀의 선수가 푸른 잔디밭에 장난감 병정처럼 포진한다. 이에 어우러진 백구가 경쾌한 타구 음을 울리며 까만 밤하늘을 가르기 시작하면, ‘부산 갈매기’, ‘돌아와요 부산항에’ 등 세상에서 가장 큰 사진 노래방이 펼쳐진다. 뒤이어 찢어진 신문지 흔들기, 완급을 조절한 파도타기, 머리에 덮어쓴 황색 봉다리의 물결 등, 누구라 할 것 없이 열광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든다.
요즘 야구장에 가면 여성과 가족단위의 관중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어 관전 문화가 건전한 쪽으로 잘 성숙되어 있다. 하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거친 수컷들이 판을 치는 야생의 세계가 따로 없었다. 술에 만취하여 욕설은 기본이고, 오물을 투척하여 앞에 앉은 관중들은 마른하늘에 날벼락 맞기 일쑤였다. 2009년에 개봉하여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해운대>를 본 사람들은 다들 공감했을 게다. 술에 대취한 설경구가 철망을 부여잡고 조선의 4번 타자 이대호 선수에게 욕설을 질펀하게 내지르던 장면이 ‘어찌 저래 실제와 똑같노!’ 하고.
사실 현장은 더 난장판이었다. 술에 만취한 관중이 흐트러진 복장으로 경기장에 난입하여 경기 진행요원과 술래잡기를 하는 것은 애교 수준에 불과하고, 드럼통으로 된 쓰레기통에 불을 질러 드높은 그물망 위로 끌고 올라가 필드에 던져 넣는 고난도의 묘기도 서슴없이 펼쳐냈다. 그게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라는 데 사태의 심각성이 있다. 누군가 주동이 되어 군중 심리를 부추기면, 영화 <부산행>의 좀비들처럼 떼거리로 사정없이 확 달려들었다.
성적이 나지 않으면 구단 버스 앞에 드러누워 감독 청문회도 서슴없이 해대고, 버스 유리창도 박살을 내는 등 극성팬들의 등쌀에 선수들도 영화처럼 <극한직업>으로 내몰렸다고나 할까. 아버지를 따라온 애들을 생각하면 얼굴이 다 화끈거릴 정도였다. 물론 파울볼을 잡으면 “아(아이들) 주라!” 하는 좋은 풍토를 조성한 것도 있긴 하지만….
휴대폰에서 야구 중계가 보편화되지 않았을 때, 나는 KBO리그가 개막하면 모든 일정을 텔레비전 중계에 맞췄다. 지금은 성적이 부진하여 시들해졌지만, 부산 남자라면 다 그랬다. 회식 중에도 수시로 화장실에 가는 척하며 식당 텔레비전 앞에서 서성였다. 술자리가 파하면 교통비 아끼지 않고 부리나케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향했다. 그러면 택시 기사는 당연하다는 듯 라디오 주파수를 야구 중계에 맞췄다. 롯데가 한참 꼴찌 탈출을 위해 사력을 다할 때, 텔레비전 중계화면에 비친 열혈 팬들 손에는 이런 현수막이 들려져 있었다. “롯데가 잘해야 집구석이 편하다.” 마치 나의 경우를 빗댄 것 같았다.
경기에 지고 나면 기분이 엉망이 된다. 특히, 집에서 중계를 보고 있으면 아내가 내 눈치를 슬슬 보고, 가급적 주변에 얼씬도 하지 않는다. 경기가 잘 풀리지 않으면 온갖 욕설을 다 퍼붓는다. 그러다가 역전이라도 시키면 세상 다 가진 기분으로 혼자서 손뼉을 치고 방방 뛰며 난리도 아니다. 내가 생각해도 살짝 맛이 간 상태가 된다. 그래도 이기는 날은 부부간에 금실이 돈독해지는 효과는 있다. 아내 입장에서는 야구가 병 주고 약주고 하는 셈이다. 그래서 시즌이 끝나면 나의 세상 다 끝난 표정과는 달리 아내는 새삼 홀가분한 표정이 된다. ‘아, 오해하지 마시라!’ 이것은 내가 한참 젊고 현직에 있을 때의 이야기다. 지금은 텔레비전 채널 선택권 자체가 없으니, 궁여지책으로 텔레비전 한 대를 더 구입하여 안방에서 쥐 죽은 듯이 조용히 보고 있다.
롯데가 한국시리즈에서 마지막으로 우승한 게 1992년도이다. 그 이후 제리 로이스터 감독이 와서 ‘노 피어(No Fear)’를 강조하며 공격야구를 한 시즌과 양승호 감독이 취임하여 불펜을 동원한 ‘벌떼야구’로 연달아 가을야구를 한 시즌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반적으로 성적이 별로였다. 내 야구 관전사를 놓고 보면 정신건강에 별로 이로울 게 없었다는 이야기다. 아내도 그만큼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는 뜻도 되고.
우리 다섯 형제의 야구사랑은 큰형님에게서 정점을 찍는다. 큰형님은 소위 말하는 골수 롯데 팬인 롯빠다. 팔순이 넘은 연세 탓인지, 근자에 노환으로 병원에 입원을 하고 치매기도 살짝 있다. 다급한 마음에 전력상 어려운 줄 알면서도 이렇게 억지를 부릴 수밖에. “롯데야! 우리 큰형님이 건강하고 정신이 온전할 때, 우승이란 선물을 줄 수 있도록 야구 좀 잘하자. 부탁한데이.”
제3부 도룡뇽의 승천
행복한 갈등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딸은 어떤 인연으로 내게 왔을까. 과학적으로는 사람이 처음 수정될 때 조합되는 유전적 정보의 반은 어머니로부터, 반은 아버지로부터 온다고 한다. 사람은 짝을 이루는 46개의 염색체를 가지는데, 그중 한 쌍의 성 염색체가 성별을 결정한다고도 한다. 어쨌든 딸은 나와 아내의 유전적 특성 조합에, 아들이 흔히 우리 집안 내력을 거스르고 태어난 나의 분신이다.
딸내미가 예정일보다 20일 앞서 아기를 출산했다. 몸무게가 평균보다 훨씬 못 미치는 사내아이다. 아내는 부랴부랴 병원으로 달려가고, 나는 그 다음날 손자와 신생아실 유리창 너머로 대면했다. 정말 조그맣다. 사위는 눈도 겨우 뜨는 아기를 두고 병원 아기들 중에서 제일 잘 생겼다고 자랑한다. 산부인과에 딸린 산후조리원에서 유리창을 통해 한 번 더 대면을 했다. 처음 봤을 때와 별반 다름이 없다. 퇴원 후의 몸조리는 경찰 지구대에 근무하는 사위의 업무 특성을 감안하여 딸의 집에서 하기로 했다. 딸내미는 퇴원하면서 아내 편으로 백일 동안은 상가에 가지 말라고 당부를 해왔다. 나는 삼칠일까지만 안 가면 되는데 뜬금없이 왜 저러나 하고 가볍게 흘려들었다.
아내는 편도 한 시간 반 정도 거리를 오가며, 사위가 야간 근무에 들어가면 잠도 자면서 딸과 손자를 돌보기 시작했다. 딸도 수시로 손자의 온갖 표정을 동영상으로 촬영하여 가족 대화방에 올렸다. 돌때 하객들에게 보여줄 성장앨범을, 경비를 절약하기 위해 직접 만들고 있다고 한다. 덕분에 떨어져 있어도 곁에 있는 것처럼 손자를 맘껏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미뤘던 손자와의 맞대면이 우리 집에서 60일 만에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한 번 울면 감당이 안 된다는 정보를 미리 파악하고 있어서 바짝 긴장했는데, 이날따라 이상하게도 울지 않는다. 눈에 초점이 잡히기 시작했는지 온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기도 한다. 까만 눈망울은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신비롭다. 맨살의 다리를 통해 전해져 오는 체온은 나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을 선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