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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추지만 않는다면

류다영 지음 | 모모북스


멈추지만 않는다면

류다영 지음

모모북스 / 2021년 3월 / 264쪽 / 14,800원



1장 - 기억하고 바라보기



뒷모습이 건네는 말


아빠라는 단어보다 아버지라는 단어가 더 익숙하다. 아빠란 단어는 아이를 낳고, 남편이 아이의 아빠가 된 뒤부터 편하게 다가왔다. 아빠는 친근하고 편안한 말, 아버지는 묵직하고 불편한 말로 느껴진다. 아빠라고 부르는 친구도 있었지만 우리 집에선 아버지, 아니 ‘아부지’가 익숙했다. 아빠라고 부르는 게 어색할 만큼 아버지와의 사이도 어색했다.

아버지가 집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면 바로 나와 인사해야 했다. 어쩌다 타이밍을 놓치면 엄마의 등짝 스매싱과 잔소리가 어김없이 날아왔다. 집에 아버지와 둘만 있게 되면 나가기 위해 무슨 핑계라도 댔다. 아버지와 가깝게 지내려 노력하지 않았다. 그게 당연하다 생각했다. 아버지와 딸이니까. 아버지라는 말이 주는 거리를 좁히려고 굳이 노력하지 않았다.

작은 빌라로 이사하는 날 엄마의 표정과 말을 잊을 수 없다. 이사하기 전 집은 문 열면 바로 시멘트 바닥의 부뚜막이 있었다. 거기에 신발을 벗고 문을 열면 바로 방이었다. 부뚜막 하나에 방 한 칸, 다락방이 다였다. 화장실은 여러 세대가 공동으로 썼다.

싱크대가 놓인 주방이 있는 빌라로 이사하던 날 엄마는 세상을 다 얻은 듯했다. “이렇게 부뚜막 아니고 싱크대가 안에 있는 집에 살아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내 소원 성취했다.” 엄마는 아이처럼 밝게 웃으며 닦고 또 닦았다. 통닭집은 나쁘지 않을 정도로 장사가 됐고 별일 없는 날이 이어졌다. 계속 그렇게만 됐으면 나는 다른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는 누구보다 강하고 무슨 일이 생겨도 꿈쩍도 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스무 살에 경남 사천에서 연고 없는 부산으로 와 일을 구하고 가정을 이뤘다. 둘째 아들이었음에도 아래로 두 삼촌과 두 이모를 결혼시키고 의용소방대 표창을 받을 정도로 지역 활동가로 활발히 활동했다. 보증을 잘못서 집을 잃을 위기에서도 걱정하지 말라며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 아버지가 어느 날부터인가 담배 피우는 횟수가 늘었다. 뉴스를 자꾸 보고 전화를 계속했다. 표정은 계속 어두워졌고 어깨는 자꾸 내려앉았다. 집엔 모르는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시간이 흐른 뒤 이유를 알았다. 생닭을 납품하던 아버지의 일에 큰 회사들이 발을 들였다. 회사에서 생닭 판매를 시작했다. 양계장과 가게들은 회사와 계약을 맺었다. 회사에선 배달을 전문적으로 일할 사람을 뽑았다.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아버지는 그렇게 일을 잃었다.

아버지의 등이 들썩거렸다. 9시 뉴스가 끝나가는 시간이었다. 방에 있다가 물 마시러 잠시 나왔다. 그 앞에 아버지가 앉아 있었다. 손에 쥔 무언가를 잘그락잘그락 소리를 내며 닦고 있었다. 전대같이 생긴 주머니에 자꾸 무언가를 넣었다 뺐다 한다. 자세히 보니 연장주머니다. 건설 현장에서 아저씨들이 허리춤에 차고 다닌 걸 본 적이 있다. 빳빳한 새 연장주머니를 아버지가 정리하다 말고 허리춤에 차며 말했다. “이거 어떻노?” 말이 다 안 끝난 것 같은데 아버지의 등이 들썩거린다.

아는 척하기도,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기도 어려웠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이거라도 있으면 아빠 써 주겠제….” 아버지의 뒷말에 입이 더 안 떨어졌다. 아버지는 일을 찾아 건설 현장으로 나갔지만 일을 못 구했다. 기술이 없어 일도 쉽게 얻을 수 없었다. 연장이라도 있으면 일을 구할 수 있을까 싶어 돌아오며 연장을 사 온 날이었다.

누군가의 뒷모습에 자꾸 눈이 갈 때가 있다. 보따리 짐을 발밑에 가득 두고 앉아 버스를 기다리는 할머니의 뒷모습, 학교로 상담하러 왔다가 복도를 걸어 돌아가는 엄마의 뒷모습, 하던 일을 잃고 생계를 걱정하는 아버지의 흔들리는 뒷모습, 아버지는 언제까지고 강할 거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가족의 모든 걱정을 다 해결하고 지켜주는 사람이니까. 그 생각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몇 해 전 박범신 작가의 『소금』이란 소설을 읽었다. 제목이 썩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표지 색깔이 눈에 띄어 아무 생각 없이 집어 들었다. 예상과 다르게 아버지에 관한 내용이었다. 글 중 이런 내용이 있다. “무슨 아버지가 저래. 하고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녀에게 아버지는 그저 아버지일 뿐이었다. 아버지는 사람이다, 라고 누가 말하면 웃음이 날 것 같았다.”

딱 내 마음이 그랬다. 아버지는 아버지였지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아버지는 토르처럼 강해야 했고, 캡틴 아메리카처럼 리더십이 있어야 했다. 가족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로봇 짱가나 슈퍼맨처럼 언제 어디서고 나타나 해결할 수 있어야 했다. 당연히 그래야 했다. 예상치 못하게 본 아버지의 들썩이는 뒷모습 이후 아버지가 다르게 보였다. 일을 잃고 부양의 책임이 무거워 한없이 힘 빠진 한 사람으로, 한 남자로 보였다.

부모에게 아이는 나이가 들어도 아이라는 말이 있다. 아이에게 부모도 마찬가지다. 힘들어 돌아서면 ‘언제나 그 자리에서 든든히 버팀목처럼 서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존재가 부모다. 부모가 되고 보니 항상 그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아이에게 힘든 모습, 약한 모습을 보이기가 싫다. 다시 아버지의 흔들리는 뒷모습을 본다면 그때와 다른 태도를 보일 수 있을까? 아마 그때와 똑같이 반응할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보인 모습이지만 부모의 마음을 알기에 더 모른 척, 못 본 척, 못 들은 척하지 싶다.

뒷모습은 많은 말을 건넨다. 도움을 청하기도 하고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내어놓기도 한다. 외로움을 호소하기도 하고 위로를 바라기도 한다.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 하기도 하고 함께 있어 달라 손 내밀기도 한다. 누군가의 뒷모습이 말을 걸어온다면 그 사람이 원하는 방법과 표현으로 따뜻한 말을 건네면 좋겠다.

2장 - 내 인생 터닝 포인트, 삶의 의미가 되다



삶은 선택과 그로 인한 변화로 만들어진다. 가볍게는 식사 메뉴를 선택하는 것에서도 삶이 달라진다. 난 요리를 잘하지 못한다. 결혼 전까지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으며 지냈다. 요리라고 해 봐야 라면을 끓이는 게 다였다. 식사 시간이 되면 “밥 먹어”라는 엄마의 부름에 나가 수저 놓고 먹기만 하면 됐다. 길게 잡아 15분 정도의 식사 시간을 위해 어느 정도 준비 시간이 필요한지 몰랐다. 15분의 식사 시간을 위해 한 시간 이상의 준비가 필요하다는 걸 직접 살림을 하면서 알았다. 한 시간이란 시간도 오로지 요리하는 데 드는 시간만을 이야기한다. 장을 보고 정리하는 시간까지 포함하면 한 끼 식사를 위해 세 시간은 너끈히 필요하다.

요리를 잘하지 못하다 보니 재미도 없다. 손에 익숙하지도 않고 엄마가 알려준 대로 해도 엄마가 해준 그 맛이 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직접 하는 요리를 선택한다면 힘들지만 건강한 요리는 먹을 수 있다. 그렇게 하기 힘들다면 배달 음식을 시켜 먹는 방법도 있다. 배달 음식은 세 시간을 투자하지 않아도 된다. 식사를 준비하는 시간에 내가 원하는 다른 걸 할 수 있다. 맛도 보장된다. 하지만 건강까지 보장하지는 못한다.

선택을 통한 다른 변화도 있다. 머리 스타일을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따라 이미지가 변한다. 이미지가 변하면 처음 만나는 사람이 나에 대해 하는 평가도 달라진다. 10층에 있는 집에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탈지 계단을 이용할지에 따라 건강에도 변화가 생긴다. 고등학교, 대학교 진학을 선택하면서 삶 전체 진로가 변화하기도 한다. 이런 걸 보면 삶은 끊임없는 선택으로 인한 변화로 만들어진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평생 내 이름으로 불리며 살 줄 알았다. 결혼해도, 아이를 낳아도 ‘다영’이란 이름은 계속 이어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분명 사랑도 결혼도 내가 선택했다. 그 선택으로 며느리, 아내, 엄마라는 말들이 이름을 대신했다. 시댁에서 남편이 이름으로 나를 부른 적이 있었다. 시어머니가 이제 이름 대신 여보나 도연, 정윤 엄마로 부르라 하는 걸 들으며 내가 사라지는 것 같아 씁쓸했다.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 누구의 딸, 누구의 며느리이기 이전에 난 난데 왜 역할이 이름을 대신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나를 부르는 호칭을 내가 선택할 수는 없는 걸까. 난 내 이름을 잃고 싶지 않았다.

나로 불릴 기회는 나도 모르게 왔다. 도서관에 부모교육 수강 신청을 하러 갔다. 신청자 이름과 연락처를 물어보는 데 나도 모르게 ‘도연이 엄마’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연락처를 묻는데 내 전화번호가 떠오르지 않아 휴대폰을 쳐다봤다. 도서관을 나오는데 가슴이 찌릿했다. 만약 그때 시간과 기회를 잡지 않았다면 지금도 변함없이 이창석의 아내, 이도연과 이정윤의 엄마가 내 이름을 대신했을 거다.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다가오는 변화는 기회로 생각되어 반갑다. 하지만 변화를 거부할 때 다가오는 변화는 위기로 느껴져 어서 지나가기만 바란다. 다가오는 변화가 있다면 그것이 기회인지 위기인지 알아차려야 하다. 변화가 또 다른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알아차려야 한다. 그렇다면 나는 내게 다가온 변화를 위기가 아닌 기회로 잘 맞이했는가? 의문이 던져진다.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에서 산티아고가 만난 영국인이 이런 말을 한다.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야말로 이제껏 ‘위대한 업’을 시도해 보려던 내 의지를 꺾었던 주범이지. 이미 십 년 전에 시작할 수 있었을 일을 이제야 시작하게 되었어. 하지만 난 이 일을 위해 이십 년을 기다리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행복해.”

기회와 선택 앞에서 우리가 망설이는 이유는 지금의 안정된 삶이 흔들릴 것이라는 불안감,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이런 불안함과 두려움에 인생이 달리질 수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를 애써 못 본 척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 주위를 다시 둘러보기를 바란다. 기회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십 년 후, 이십 년 후에도 지금과 같은 것을 바라보고 있는, 지금 그대로의 모습일 수 있다.

가족이기에 더


스무 살에 만나 첫눈에 반한 연인은 스물여덟에 남편이 되었다. 스무 살 고백은 거절당했지만 이후 프로포즈는 거절당하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큰 용기를 냈다. 옛 여자 친구와 삼자대변까지 하며 결혼을 선택한 건 나와 정반대 성향의 그 사람이 매력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여행 계획을 잡으면 그때부터 들떠 있다. 어디를 갈 것이며, 어떤 코스로 돌지 계획을 세우는 게 우선이다. 숙소와 그날그날의 식사메뉴까지 미리 결정한다. 첫날 입을 옷과 거기에 맞는 액세서리까지 준비를 하는 스타일이다. 이벤트처럼 같이 가는 사람들끼리 드레스코드를 맞추기도 한다. 그런 준비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렇게 준비했으면 여행을 가면 그대로 따라야 한다. 어떻게 보면 기획자나 가이드를 했으면 좋았을 정도로 꼼꼼하게 준비하고 계획대로 움직인다.

남편은 나와 다르게 차분하다. 여행 갈 곳을 정하면 거기서 끝이다. 최소한의 준비로 여행을 시작해서 부족한 것이 있으면 현지에서 조달한다. 가고자 한 곳에 상황이 안 돼 못 간다면 다른 곳에 가는 것이 여행의 묘미라 한다. 결혼 전엔 그런 부분이 사람을 너무 여유로워 보이게 했다. 어떤 불안함도 없이 집시처럼 유유자적 다니는 것이 속세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영혼처럼 보여 얼마나 멋져 보였는지 닮고 싶기도 했다.

그런데 결혼하니 그 이유가 갈등의 원인이 됐다. 아이를 데리고 먼 길을 갈 때 바리바리 준비하고 챙기는 나와 다르게 너무 여유로운 남편은 내 속을 터지게 했다. 여행길에 미처 못 챙긴 물건이 있어 불안해서 한숨을 쉴 때면 “괜찮을 거야”라며 영혼 없이 내뱉는 남편의 말이 무책임하게 느껴져 화가 났다. 결혼 선택의 이유와 결혼 후 갈등의 원인이 같다는 건 아이러니한 일이다.

결혼은 두 사람이 좋아 한집에 사는 것만이 아니라 한 가정을 꾸리고 부모로부터 완벽한 독립을 이루는 것임을 생각하지 못했다. 결혼을 로맨스 드라마에 나오는 아기자기하고 달콤한 신혼생활로 생각했다. 언제까지고 부모님의 보호 아래 있는 자식이라 생각했지, 주말드라마처럼 양가 갈등과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 등이 쫙 펼쳐질 줄 몰랐다.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고, 몰랐다고 탓하고 싶지만 결혼한 언니도 있었고 주위의 결혼한 커플의 갈등을 보면서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었음에도 무엇이 그렇게 좋았는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결혼한 지 2년 만에 첫아이를 낳았다. 첫아이는 예정일 보다 늦게 나온다는 말을 믿고 기다리다 보니 일주일이나 훌쩍 넘겨버렸다. 유도분만 날짜를 잡은 날 진통이 와 자연 분만으로 아이를 만났다. 나에게는 첫아이. 하지만 친정엄마에겐 셋째 손주였다. 엄마의 이른 결혼과 언니의 이십 대 초반 결혼, 바로 낳은 첫 손주로 인해 엄마는 마흔 대 초반에 할머니가 되었다.

엄마는 딸 셋을 낳은 것에 우리 세 자매가 느낄 정도로 아쉬워하진 않았다. 하지만 주위에선 아들은 하나 있어야 한다는 말을 계속해서 건넸다. “아들 하나 낳아야지”라고 말하지는 않아도 “아들이 있으면 나중에가 편할낀대”, “딸만 있어 우짜노” 같은 말을 우리 세 자매가 있는 자리에서 아무렇지 않게 했다. 나중에 들으니 엄마도 아들을 바랐다. 언니가 결혼하니 아들 손주를 내심 바랐으나 언니도 예쁜 여자 조카를 둘 낳았다. 성별이 뭐가 중요할까 싶지만, 엄마의 설움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상황에 첫아이를 낳았다.

새벽부터 진통이 시작되었다. 유도분만이 잡힌 날이었기에 입원 준비는 다 되어 있었다. ‘진통이 시작되자마자 가면 더 힘들 수 있으니 진통을 충분히 겪고 가라’는 수많은 선배 엄마들의 정보를 듣고 예약 시간에 맞춰 병원에 갔다. 그랬던 덕분인지 첫아이치고는 진통을 짧게 겪고 수월하게 낳았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아이를 낳는 고통이 수월하지 않다는 건 같은 고통을 겪은 사람이면 다 알 것이다. 남편도 옆을 지키고 수발든다고 고생 많았으나 어디 낳은 사람에 비할 수 있겠나 싶다.

출산 후 가장 생각나는 사람은 아무래도 가족이다. 아이 낳았다는 소식에 시부모님은 한걸음에 달려오셨다. 시댁에는 첫 손주였기에 너무나 기뻐하며 봐주셨다. 그런데 친정 부모님은 그날 오시지 않았다. 당시 친정 부모님은 농장을 운영하고 계셨기에 한가하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전화 통화의 첫마디는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아, 낳았나? 뭐 낳았노? 딸? 그라믄 엄마가 내일 아빠 배달 갈 때 같이 내려갈게” 듣는 순간 의문이 들었다. ‘그럼 아들을 낳았으면 내려오셨을까?’ 손주의 성별이 궁금해서 물어보셨을 거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날 그 순간은 일상적인 여느 날과는 다른 특별한 날이지 않은가. 산고를 겪은 만큼 몸도 마음도 약해져 있는 날이다. 몸의 회복이야 몸조리로 되겠지만 마음 회복은 시간이 지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여자가 엄마가 되는 날, 초보 엄마도 엄마가 필요하다. 엄마가 오지 않았던 날 엄마의 자리에는 언니가 있었다. “애 낳는다고 애썼다” 엄마가 해줬으면 좋을 말을 언니가 해줘서 눈물이 났다. 엄마가 잡아주면 좋았을 손을 언니가 잡아줘서 감사했다. 언니에겐 첫 조카인 아이를 보며 복숭아처럼 빨간 볼에 주름 하나 없이 나와 예쁘다는 이야기를 해줘서 기뻤다.

언니는 언니로서 이모로서 엄마로서 나의 곁을 지켜줬다. 엄마가 있었으면 좋았을 그 자리에 언니가 있어서 감사했다. 부모님이 해줄 보호와 말, 표현을 언니는 충분히 하고 더 해줬다. 하지만 언니는 부모님의 역할을 할 뿐 부모님이 될 수는 없기에 부모님의 부재가 주는 서운함과 섭섭함은 그대로 남았다. 이튿날 부모님은 아주 잠깐 병원에 들러 환하게 웃으며 한마디 말을 남기고 갔다. “아 낳는다고 고생했네.” 무뚝뚝한 분들이라 세심한 표현까지 바라진 않았지만, 생각보다 더 짧게 있다 가는 게 못내 서운했다.

가족관계는 복잡 미묘하다. 혈연으로 맺어지기도 하고 입양 등의 절차를 거쳐 가슴으로 맺어지기도 하는 끈끈한 관계다. 가족은 타인과 비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 진한 사이이기에 내가 무엇을 하든 이해해 줄 거로 생각하기도 하고 그래야 한다고 여기기도 한다. “가족이니까”라는 말은 이해ㆍ용서ㆍ편함 등 많은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타인에게는 하지 않는 실수로 가족 사이가 틀어지기도 한다. 가족이라도 갈등이 생기면 각자의 입장에서 판단하기에 해결도 화해도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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