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우면 비로소 깨닫는 것들
천인츠 지음 | 미래문화사
비우면 비로소 깨닫는 것들
천인츠 지음
미래문화사 / 2021년 7월 / 280쪽 / 14,800원
마음속으로 편안함을 누릴 수 있으면 스스로 높아진다
온 세상이 찬미하더라도 그 때문에 더욱더 노력하며 분발하지 않고, 온 세상이 반대하더라도 그 때문에 더욱더 풀이 죽거나 실망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에게 내재하는 것과 몸 밖의 사물을 분명히 구분할 줄 알며, 영예와 치욕의 한계 또한 분명히 안다. - <소요유>
사람은 사회 속에서 살아갑니다. 중국 문화에서 유가적인 전통은 특히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중시하지요. 이른바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논어』 <자로>)와 같은 말은 각각의 사람들이 자신의 사회적인 역할을 잘 수행해야 한다는 점을 특별히 강조합니다. 이것은 물론 긍정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사회의 조직은 각각의 개인이 자기 권리의 일부를 양보하고 서로 협조한 결과로 구성되는 것이므로, 결국 자아의 욕망과 이익, 자유가 어느 정도 제한될 수밖에 없습니다. 어찌할 수 없이 그렇게 되는 측면이 있지요. 하지만 더 나쁜 상황은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와 같은 이치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외재적인 가치를 경쟁의 목표로 삼고 지나치게 추구한 나머지 자아를 상실하는 지경에 이르는 것입니다.
장자가 의미하는 바는 바로 이 지점에서 눈에 띄게 드러납니다. 키워드는 “내재하는 것과 몸 밖의 사물을 분명히 구분” 하는 데 있습니다. 무엇이 내 몸 밖의 사물이고, 무엇이 내 안에 내재하는 것인지에 대한 구별은 개인에게 있어서 무척이나 중요한 것입니다. 남과 관계를 맺고 지내는 일은 외재적인 것입니다.
자아의 내재적인 추구를 불 보듯 훤하게 알고 있다면, 외재적인 영욕은 더 이상 나를 좌우하지 못합니다. 세상의 들끓는 논쟁거리들도 자아의 본성에 명백히 부합하는 것을 알면 “비록 천만 사람이 아니라 해도 나는 간다”(『맹자』<공손추>)라는 담대한 마음이 생겨 물러서지 않게 되는 겁니다. 또한 세상사람 모두가 찬사를 아끼지 않더라도 마음을 들썩대며 스스로 추구하지 않는 것은, 하는 일이 외재적인 것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스스로 추구하는 바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외재적인 것에게만 무게를 둘 만한 것이 아니라는 이야깁니다. 이 세속적인 삶의 무대에서 이와 같은 태도는 매우 높은 경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정말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인가
뱁새는 깊은 숲속에 둥지를 틀지만 가지 하나를 넘기지 않으며, 두더지는 황하의 물을 마신다 해도 배를 채우는 데서 더 나아가지 않는다. - <소요유>
장자는 <추수> 편에서 이미 사람이 하늘과 땅 사이에서 점하는 위치란 기껏해야 큰 산속의 작은 바위 하나거나 작은 풀과 가지 따위라고 말했습니다. 작은 풀과 작은 바위는 큰 산의 관점에서는 송곳 하나 꽂을 곳에 불과하니 굳이 말을 할 것도 없지요. 이 작은 풀과 작은 바위의 필요는 물론 훨씬 더 적어질 수도 있습니다. 한 방울 이슬이나 한 줌의 햇볕일 수도 있지요.
사람이 한 세상을 사는 동안 정말 필요로 하는 것은 아주 적습니다. 문제는 사람의 마음이 필요로 하는 것, 그 욕망이 무지막지하게 크다는 사실이지요. 옛날의 제왕들은 삼천 명의 아름다운 미녀를 후궁으로 두었지만 평생 한 명의 사랑하는 사람을 얻어 행복하기도 어려웠지요. 요즘 여성들의 신발은 높고 낮고 뾰족하고 둥글고 온갖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 한 종류의 신발이 10년 동안 유행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이러한 만족은 허구의 욕망이라고 할 수 있으며 실재적인 삶의 필요는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장자는 가장 실재적인 삶의 입장에서 진실된 말을 전하고 있는 셈입니다.
만족함을 알아야 늘 즐겁다는 말이 있습니다. 점점 더 많은 것을 가진다고 해서 점점 더 즐거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린 시절의 소소한 즐거움을 돌이켜 볼 때, 사람들은 종종 그 즐거움이 풍요로운 자원 위에 세워진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날 물질적 삶의 수준 향상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지만, 조사에 따르면 행복감은 절대로 이와 비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와는 반비례하는 경우도 있지요.
그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는 것, 결점을 포함해서
이치라는 것은 작은 성과에 의해 가려지고, 말이라는 것은 화려한 수사에 의해 가려진다. - <제물론>
“말이라는 것은 화려한 수사에 의해 가려진다.” 이 말은 비교적 쉽게 이해가 갑니다. 화려한 미사여구는 종종 진심이 담긴 말의 참뜻을 가려 버리곤 합니다. 오늘날의 세계를 생각해보면, 한 가지 사건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입장의 말들이 존재하고 정보는 넘쳐나는데, 도대체 무엇이 진리인지는 알기가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왁자지껄한 소음은 사람들이 고요하게 진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힘들게 만듭니다. “이치라는 것은 작은 성과에 의해 가려진다” 이 말은 아무래도 약간의 설명이 필요한 듯합니다.
장자는 큰 이치라고 하는 것이 일종의 전체라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의 만물은 모두 이치 안에서 서로 통하고 어우러지는 것이지요. 만약 우리가 어떤 한 부분을 돋보이게 하고 두드러지게 만든다면, 그 돋보이고 두드러진 부분은 일단 어느 정도 성과를 보이는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실제로 전체 이치의 관점에서 본다면 부분적으로 훼손이 되는 겁니다. 예를 들어, 큰 나무를 잘라서 들보나 서까래를 만드는 것은 물론 좋은 일이겠지만, 그런 경우 곁가지나 잎은 어찌 될까요? 그런 부분들은 버려지고 말 것이니 훼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겁니다. “그것들은 쭉정이를 버리고 알곡을 취하는 이치와 같지 않습니까? 무엇이 나쁘다는 겁니까?” 장자는 이에 대해 동의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추수> 편에서 올바르다고 하는 것만 취하고 그르다고 하는 것은 모두 버리는 것이 왜 온당치 않은지에 대해 나름의 대답을 보여 주었지요. “이것은 천지와 만물의 이치에 밝지 못한 것이다. 어찌 하늘만 있고 땅은 없으며, 양만 있고 음은 없을 수 있겠는가?”
세상 모든 것은 서로 상대되는 짝으로 이루어집니다. “모든 사물은 서로 상대적으로 대비를 이루는 것이지, 하나만 단독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없다.” 만물에는 양면이 있는 법이지요. 중국 근대의 홍일법사 리수퉁 큰스님도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습니다. “슬픔과 기쁨이 교차한다.” 삶 전체를 놓고 보자면, 모두가 그렇지 않을까요? 즐거움만큼 슬픔도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면서 마주하고 더 관대하게 공감하며 알아가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겁니다. 어떤 사람에게 좋은 면이 있다면 우리는 물론 기뻐하고 그것을 마음에 들어 할 겁니다. 하지만 그처럼 좋지는 않더라도, 또는 아주 나쁜 부분이 있더라도, 사실 그것은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요인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연애를 할 때는 종종 그런 말들을 합니다. 상대방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 상대방의 결점까지도 사랑한다고 말이죠. 장자도 연애할 때 틀림없이 그런 생각을 했을 겁니다.
자신의 길은 자신이 가는 것
길이라는 것은 사람이 다녀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사물이라는 것은 사람이 이름을 붙여서 의미가 생기는 것이다. - <제물론>
루쉰은 일찍이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긴 적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원래 길이 없었다.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지니, 그대로 길이 된 것이다.”(<고향>) 이와 같은 뜻을 장자는 위의 글을 통해 이미 밝혔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길에 대해 그다지 특별한 느낌을 갖지 못합니다. 길이라는 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고, 우리 앞에 펼쳐져 있어서 설사 ‘문을 걸어 닫고 차를 우리지’ 않더라도 ‘문을 나서면 그대로 길이 있는’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문을 열고 집을 나서면 어디든 길인 거지요. 그러나 이러한 길은 원래부터 있던 것이 아닙니다. 길은 사람들이 어디론가 다니기 시작하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미 존재하는 길을 다닐 때, 우리는 선택의 문제에 직면합니다.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작품 중에 <가지 않은 길>이라는 제목의 시가 있습니다. 시인은 노란 잎이 우거진 숲속에서 고요하고 한적한 두 갈래 작은 오솔길을 발견하고, 결국 그중에 더 조용한 길을 선택합니다. 수많은 시간이 흐른 뒤, 시인은 처음 그때의 결정을 돌이켜 생각하며 그 선택이야말로 자신의 일생을 결정지은 중요한 선택이었다는 사실을 절감합니다.
“나는 사람들이 덜 밟은 길을 택했고, 그리고 그것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걸어가야 할 길을 결정하는 과정이 시인에게 인생에 대한 감상을 불러일으킨 것입니다. 인생의 길은 형태가 없는 듯하지만, 그래도 같은 이치를 따릅니다. 게다가 우리는 어떤 길이라도 다른 사람이 이미 밟은 것과 같은 길을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오직 자신의 길을 직면하고 스스로 그 길을 선택하며 나아갈 수밖에 없으니까요.
몽상이 현실을 비추어 준다
옛날에 장주가 꿈에서 나비가 되었다. 하늘하늘 나는 나비는 얼마나 자유로운가! 자신이 장주인 줄도 몰랐다. 순간 깨어 보니 여전히 장주 자신이었다. 장주가 꿈에 나비로 변한 것인지, 나비가 꿈에 장주로 변한 것인지? 장주와 나비는 틀림없이 서로 나뉘어 있는 존재다. 이것을 일컬어 사물 변화의 이치라 한다. - <제물론>이것은 아마도 고대 중국에서 가장 아름답고 아스라하면서 황홀한 꿈일 것입니다. 『장자』에는 여러 차례 꿈이 등장합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장자는 자기 자신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습니다. 갑자기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아직 팔랑대며 날아다니는 나비의 상태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살짝 믿을 수 없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순간의 황홀함이 현실과 꿈을 구별할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이겠지요.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두 세계 사이에는 분명한 경계와 제한이 있으며, 분명히 나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러한 의식은 장자가 이 순간 현실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만약 그가 여전히 나비의 상태로 즐기고 있었다면, 스스로 그 즐거움을 누리며 거짓이 아니라고 여기고 있었다면, 어떻게 이처럼 분명히 현실을 인식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런 판단은 절대적인 것일까요? ‘갑작스럽게 깨달음’ 이전에 장자와 나비를 구별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을까요? 그와 같이 스스로 즐거움을 누리는 느낌은 참된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저 헛된 환상에 지나지 않았을까요?
꿈은 분명 현실 속에서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와 아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지요.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확연히 다른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채널을 갖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통은 참된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다른 세계를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과 세상의 만물이 서로 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요.
장주와 나비, 현실과 몽상 사이의 결합은 장자를 곤혹스럽게 하기도 하고 집착하게 하기도 했습니다. 장자의 경험과 연관되는 것으로서 무한한 상상 속으로 그를 인도하였을 뿐 아니라 실재 세계에서 마주하는 대상의 본질을 반성하고 궁리하게 만든 것입니다.
굽어보기부터 우러러보기까지
시작은 단순하지만, 그 끝은 장차 번다하리라. - <인간세>
장자의 이 말은 일상적인 관찰과 경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아주 평범하면서도 심오한 이치를 담고 있지요. <인간세>를 둘러싼 환경에서 보건대, 장자는 아마도 부정적인 측면의 의미를 말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관찰을 통해 인간 세상의 여러 상황에 통달했습니다. 지혜와 계교로 서로 이기고자 다투는 사람들도 처음에는 모두 광명정대한 방법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결국 마지막에는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든 비열한 방식을 동원하게 됩니다. 극단에 이르면, 그 괴상망측함을 이루 다 헤아릴 수도 없게 됩니다. 예의에 걸맞게 술을 마시는 사람들도 처음에는 매우 단정하게 규율을 준수하지만 나중에는 취해서 이성을 잃고 극단적으로 나아가게 되면 소란을 떨면서 자신의 즐거움만 탐닉하게 됩니다.
세상 일이 모두 다 이러합니다. 처음에는 서로를 믿다가 결국 나중에는 종종 서로를 속이고 배신하는 지경에 이르지요. 그래서 장자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시작할 때는 모든 일이 소소해 보이지만, 결국 나중이 되면 커다란 재앙으로 변해 버린다고, 가장 명확한 대책은 아직 미미해서 잘 보이지 않을 때 완벽하게 단속해야 미연에 화를 방지할 수 있다는 것이 장자의 생각입니다.하지만 이 말은 맥락을 떠나게 되면 제대로 이해하기가 힘들어집니다. 세상의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고 중간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싹이 트고 잎이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기까지 장대한 과정이 있는 법이지요. 까마득히 높은 빌딩이라도 모두 땅에서부터 지어 올리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모두 땅에서, 심지어는 위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아래로 땅을 파는 것에서 시작하지요. 굽어보기부터 시작해서 점점 우러러보는 쪽으로 변화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다시 보아야 알 수 있는 아름다움
사람의 덕이 뛰어나면, 그 외형은 잊히기 마련이다. 사람이 잊어도 되는 것을 잊지 않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는 것, 그야말로 진짜 ‘잊음’이라 할 것이다. - <덕충부>
사람의 외형은 타고나는 것이며, 일반적으로 이 외형적인 모습은 수많은 변화의 가능성을 지닙니다. 그러나 사람의 내면적인 수양은 전적으로 그 자신의 마음가짐과 노력 여하에 달려 있지요. 이 두 가지 표현이 밖으로 드러나면, 하나의 외모는 아름다움이 되고, 다른 하나는 기질의 아름다움이 됩니다. 외모의 아름다움은 첫눈에 들어오는 아름다움이고, 기질의 아름다움은 다시 보아야 알 수 있는 아름다움이라고 하겠지요. 처음의 인상, 그러니까 첫눈에 들어오는 아름다움은 말할 것도 없이 압도적인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때의 ‘아름다움’은 주로 외모의 형상에서 옵니다. 그러나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기질의 아름다움은 소리 없이 드러나는 법이지요.
위령공이 좋아하는 사람은 등이 굽은 곱사등이었습니다. 입술이 없고 목에는 커다란 종기까지 나 있었지요. 이러한 외모를 가진 사람에게 한눈에 반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아마도 처음에는 두려워서 꺼리는 마음이 있고 싫어하거나 미워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점차 군주의 마음을 얻게 된 것은 내면적인 미덕이었습니다. ‘덕’은 ‘덕성’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얻는다’라는 뜻도 지니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사람이 ‘얻은’, ‘도’의 일부라는 뜻이지요. 스스로 ‘도’로부터 얻어낸 ‘덕’은 그 사람의 완전한 소유이며,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외모가 추악한 사람의 내면을 좋아하고 그 외형적인 특징을 잊는 것은,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내면적인 미덕이 전체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덕’이 진실로 ‘뛰어난’ 경우에만 가능한 일이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외형적인 추악함을 잊은 다음에 또 무엇을 기억할 수 있겠습니까?
작은 도둑이든 큰 도둑이든 마찬가지
세상 사람들은 모두 뭔가를 위해 죽는다. 어떤 사람은 인의를 위해 죽어서 사람들이 그를 군자라 일컫는다. 어떤 사람은 재물을 위해 죽어서 사람들이 그를 소인이라 일컫는다. (그래도) 뭔가를 위해 죽었다는 점에서는 모두 같다. 군자라고 일컫기도 하고 소인이라 일컫기도 하는 경우가 있을 뿐이다. - <병무>
모두가 “자신의 본성을 상하게 하고 결국 죽음에 이른다”라는 점에서 범하고 있는 잘못이 같다면, 고하와 경중을 논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인의와 재물 사이에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생각은 세속적인 관념에서 나온 것입니다. 추구하는 목표에 고상함과 저열함의 차이가 있고, 그래서 군자와 소인이라는 서로 다른 이름을 붙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