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어디에 사는가를 두고 혼자 심각해졌다. 마음이 뇌에 사는지 심장에 사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어느 때는 한없이 뜨겁다가 어느 때는 무서울 만큼 냉정해지는 마음의 정체가 일평생 궁금했다. 나는 결론을 내렸다. 마음도 외로워서 저물 무렵에는 심장으로 거처를 옮기기도 한다는 것으로.
마음이 세 든 집에 가보았다. 마음은 보이지 않고 그리움만 독거하고 있었다. 그리움이란 무엇일까 하고 혼자 궁리해 보았다. 글과 그림과 그리움이 한 엄마에서 나온 자녀들이라고 들었다. 동사 ‘긁다’가 그들을 낳은 어미라고 했다. 나무껍질에든 동판에든 그 위에 긁어 새기는 것이 글과 그림이 되었고, 마음에 긁어 새기는 것은 그리움이 되었다고 한다. 나는 이 말이 아름답다고 여겨졌고, 쉽게 수긍되었다.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고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일은 없는 것들에 대한 열망과 사라져갈 것들에 대한 연민이다. 존재를 확인하고 싶은 욕망,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그림으로 표출되고 시로 읊어진다.
그리움의 원천은 마음의 교환, 결핍의 틈새를 메울 사귐이다. 사귐도 ‘새기다’에서 왔다. 벽에 암각화를 새기듯 자신의 존재를 상대의 심장에 돋을새김해 두는 게 사귐이다. 그러므로 사귄다는 것은 필시 보고 싶어 하고 그리워하는 마음과 잇닿아 있다. 모든 사라지는 것들의 공허와 상실의 운명으로부터 그리움은 서로의 부재를 견디는 방식이다. 견디는 동안 서로의 형상은 돌올하게 가슴에 새겨진다. 그러므로 삶이라는 추상이 느낌으로 감각되는 생의 유효기간은, 무언가를 그리워하기 시작해서 더 이상 그리워하지 않게 된 동안까지이다. 곁에 있을 때는 가장 기쁜 기쁨으로 사랑하고, 곁에 없을 때는 심장에 동판화를 새기듯 죽을 것처럼 그리워하면 될 일이다.
사람이 시를 쓰는 이유는 마음을 숨겨둘 언어가 그곳에 많기 때문이다. 사람이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마음을 감춰둘 여백이 그곳에 많기 때문이다. 그 마음을 굳이 그리움이라는 말로 부르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사람이 이 세상에 와서 일평생 복무하는 일의 전부라서 그렇다.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그리움에 종사하다 그리움에서 퇴직하는 일이다. 죽은 이들을 해부해 보면 마음자리가 늘 비어 있다. 그리움 세포가 마음을 가장 먼저 괴사시키고 온 장기로 전이되기 때문이다. 의사들은 그 붉은 종양의 발원지가 마음이라고 진단한다. 그래서 누군가를 미치도록 그리워해 본 사람들은 안다. 세포가 분열하듯이 그리워하면 그리워할수록 마음의 우주가 팽창한다.
나는 사랑한다, 그리운 것들을
나는 바닷가 우체국에서 그리움을 수학했다. 누가 그곳에 우체국을 세웠는지 모른다. 내가 그 바다에 갔을 때부터 거기 있었다. 벽면 하나를 통유리 창으로 달아 바다를 훤히 내다보고 있었다. 바람이 물어오는 먼바다의 문장을 수집하고, 수시로 희고 붉고 검게 변하는 구름의 기분을 지켜보며, 이따금 돌고래 떼가 뿜어대는 무지개 분수를 감상하며 거기 서 있었다. 가을 끝자락부터 새봄이 시작되기 전까지 나는 그해 겨울동안 그 바닷가에 살았다. 외로워서 편지를 썼고, 독백하다 지치면 시를 썼고, 분량이 넘치면 우체국에 들어가 주소지 없는 그리움을 부쳤다.
그리움은 공평하다. 누구나 그리움의 지분을 가지고 있다. 다만, 쓰는 용도가 다르고 다루는 기술이 다를 뿐이다. 방치해 두고 아예 사용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고루하고 구시대적이고 촌스럽다고 숨기는 사람도 있다. 그리움을 적절하게 투자해 행복을 창출하는 데 쓰는 사람도 있고, 그리움을 과다하게 복용해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그리움 기술자로서 그리움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지낸다. 가까이 하면 좀 사람을 지치고 힘들게 하는 구석이 있다. 너무 멀리하면 수분이 부족한 피부처럼 영혼을 푸석거리게 만든다. 지내기에 쾌적한 실내온도가 있듯이 그리움에게 단호하게 말해 둔다.
내가 부르기 전엔 달려 나오지 마라, 특히 손님이 왔을 때 흥분하거나 먼저 나대지 마라. 여기서 ‘손님’이란 내가 무언가에 끌려 매혹된 감정, 혹은 찌르르 감정되는 첫 느낌, 호기심이 드는 첫인상처럼 심장의 전기반응을 일컫는 환유이다. 단속하지 않으면 그리움이 제멋대로 작동해 주인을 곤경에 빠트리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나는 사랑보다 그리움을 더 좋아한다. 이렇게 발설하면 따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사랑하면 그리운 거고, 그리워해야 사랑인 건데 어떻게 둘이 따로따로 분리될 수 있느냐고. 언뜻 일리가 있어 보이지만 전문가적 소견으로 보면 엄밀하게 그건 틀렸다. 사랑이 끝나고 나니 비로소 그리움이 밀려드는 경우도 있고, 서로 그리워하다가 막상 사랑하다 보니 그리움이 증발되고 없더라는 슬픈 사례도 보고되고 있다. 그리움과 사랑은 한 몸이 아니라 이란성 쌍둥이 같은 것이다.
내가 사랑보다 그리움을 더 좋아하는 이유가 있다. 사랑은 때로 못 견딜 만큼 괴롭지만 그리움은 보고 싶은 바다나 기다리는 첫눈이나 설레는 여행 같아서 참으면 참아진다. 또 참은 만큼 굉장한 기쁨이 있다. 사랑은 배신하는 일이 있지만 그리움에게 배신당하는 사람은 없다. 사랑은 유지에 드는 체력도 시간도 비용도 필요하지만 그리움은 그런 게 필요 없다. 무엇보다 사랑은 나 혼자만의 소유가 아니어서 권리 주장이 어렵지만 그리움은 온전히 단독 소유다. 저당 잡혀도 눈치 볼 이유가 없다.
사랑은 이타적일 때도 있지만 지극히 이기적인 욕망이다. 이 결핍, 이 욕망의 충족은 타자와의 호혜적인 관계성에 의존한다. 즉, 인정욕구와 같아서 주체적으로 주관하고 해결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그래서 사랑은 사회적이다. 그리움은 어떤가. 지극히 개별적이고 사적 영역 안에 있다. 타인에 좌우되지도 않는다. 내가 생산하고 내가 소비한다. 공급이 과다해 재고가 남아돌아도 상관없다. 제조일자는 있으나 유효기간은 없다. 부패해서 누군가의 배를 앓게 하거나, 너무 높이 적재해 무너져도 타인이 다칠 일이 없다. 사랑은 육감만으로도 들키지만 그리움은 바코드를 찍고 신원조회를 해도 나오지 않는다. 국가가 내 마음을 압수수색해 디지털 포렌식하기 전에는 그 비밀한 내막이 드러나는 일도 없다. 사랑에는 고난도의 기술과 각종 매뉴얼이 필요하지만, 그리움은 특별한 학습이나 기술 없이도 누구나 사용할 수 있다. 수분크림 같아서 잘 사용하면 촉촉하고 탱탱하게 마음의 텐션을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다.
그리움 애용자를 다수는 그리움을 과거를 추억하고 회상하는 데 쓴다. 초보자들이 주로 그렇게 한다. 그 그리움은 내가 이미 늙어버렸다는 자조와 한탄의 증명이다. 그 그리움은 경험한 것들, 이미지로만 존재하는 것들, 기억으로 편집된 것들에 붙들려 있다. 자전적인 서사에 머무는 그리움이 나는 몹시 안타깝다. 진짜 선수들은 지금 당도한 것, 여기에 살고 있는 것, 무해하고 무용해 보이는 것들에게 향한다. 그러다 경지에 오르면 그리움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로 물길을 튼다. 너나 그것이나 무엇에게가 아니라 나 자신을 그리워하는 데 에너지를 쏟는다. 자신을 그리워하는 그리움에 주입된 상태를 나르시시즘, 혹은 자기애라고 한다. 나르시스의 몸에서는 피톤치드가 은은히 스며 나온다. 그리움은 편백나무나 자작나무 숲 같은 영혼을 갖는다. 그리움을 볼 수는 없지만 냄새 맡을 수는 있다. 그리운 것들은 모두 냄새로 온다. 아기 냄새, 엄마 냄새, 겨울바람 냄새, 설탕 냄새, 생선 냄새, 고양이털 냄새, 자운영꽃 냄새, 비 냄새, 유자 냄새, 재스민 냄새, 사람 냄새. 그렇게 그리운 것들은 실체적이고, 생생하고, 곁에 있다. 나는 그것들을 느끼고, 내 사랑은 모두 그리운 것들의 고유한 냄새로 온다.
우연과 운명
나는 운명을 믿지 않는다. 그렇지만 운명에 ‘그리운 운명’이라는 게 있다고 믿는다. 보충 설명을 하자면, 누군가를 일평생 그리워하도록 프로그램된 운명이 분명 있을 거라는 의미다. 그 운명에 ‘우연’이라는 뜻밖의 사건이 가세하면 한 편의 드라마가 된다. 그래서 많은 로맨스 장르의 영화는 운명이라는 원고지에 우연이라는 펜으로 스토리를 써내려 간다. 지구에 사는 그 많은 그리움 중에 불멸의 전설로 남은 그리움들은 대개 이 우연과 운명의 플롯에 기대고 있다.
사랑의 서사가 있다. 이 사랑은 숨 막히는 현실 속에서는 단 한 순간도 살아가지 못한다. 오직 필름 속에서만 생화처럼 피어 있다. 영화 속의 사랑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것이 현실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닌데도 가능한 것처럼, 내게도 일어날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조작술. 내가 주로 읽는 책들은 이런 영화적인 사랑이 얼마나 인간의 이성과 합리적인 사유를 마비시키는지, 현실의 사랑을 얼마나 초라하게 비관하게 만드는지 경고하고 있다. 그런데도 갈증처럼, 지상에 없으나 있다고 믿고 싶은 사랑을 찾게 된다. 그 위험한 낭만적 서사에 빠지면 우연의 연속이 빚어낸 운명이 어딘가에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믿게 된다. 기어이 내게도 올 것이라고 믿게 된다. 인간이 그리움을 버리지 않는 한 그들은 망하지 않을 것이다. 영화업자들은 앞으로도 계속 낭만을 찍어낼 것이고 더욱 정교한 운명을 개조해 낼 것이다.
운명을 예감하게 하는 말이 있다. A few years later. ‘그 후’나 ‘몇 년 후’ 같은 말들이 그렇다. 그 말들은 이야기의 클라이맥스가 끝나고 사족처럼 남은 여운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지만, 이제 이야기는 서론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거대한 폭풍에 휘말리는 운명의 서사에 들어설 것이라는 강렬한 암시를 주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금이 아니라 ‘몇 년 후’에는 막연한 기대감과 슬며시 고조되는 흥분이 따라붙게 된다. 마치 무료하고 덧없는 일상에 던져준 ‘주만지의 게임 상자’처럼.
크리스마스이브의 뉴욕을 배경으로 시작되는 영화, <세렌디피티> 만큼 ‘A few years later’가 강렬한 운명의 예감으로 다가오는 영화도 드물다. 운명 같은 것을 믿게 되면 제대로 살아가기가 힘들어지는 게 인생이라고 믿는 여자와 전혀 로맨틱하지도 고독하지도 않은 남자가 우연하게 만나는 전개. 삶의 우연의 연속에 지나지 않지만, 때로 그 우연이 필연이 된다는 것. 낡은 문법이지만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의 삶 속에 우리가 지나치고 있는 운명의 계시가 들어 있다고 믿고 싶어지는 때가 있다.
그래서일까. 우연한 마주침을 운명이라고 과장해서 말하는 남자에게 여자는 그 운명을 시험해 보자고 한다. 5달러짜리 지폐에 남자의 전화번호를 적고, 『콜레라 시대의 사랑』 책의 앞면지에 여자는 자신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어둔다. 그것들이 수많은 시간과 수많은 사람의 손을 거쳐 서로에게 돌아간다면 운명을 받아들이자는 기발한 확률적 시험. 영화는 사랑에 왜 운명을 받아들이자는 기발한 확률적 시험. 영화는 사랑에 왜 운명이 필요한지 입증해 보이기라도 하듯 애거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처럼 숨겨진 운명의 정체를 집요하게 추적해 간다.
몇 년 후, 그동안 삶은 ‘아슬아슬하게’ 평온했다. 스스로가 선택한 삶의 방식과 습관화된 체계로 아침이면 일어나 일터로 나가 돈을 벌고, 퇴근해 잠들었다. 누군가 정해 준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들이 자신이 정하고 설계한 것이라 믿었다. 자신이 선택한 사람을 사랑하고, 그 선택 안에 있는 모든 행복과 불행이 자신의 의지와 계획으로 빚어진 것들이었다. 정말 그럴까? 런던의 여자는 사랑하는 남자를 곁에 두고도, 단 한 번 스치듯 만났던 뉴욕의 남자를 그리워한다. 그가 좋아하는 영화라고 말한 폴 뉴먼의 영화, <폭력 탈옥> 포스터 앞에서 어쩌면 필연적인 운명이라는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리운 운명’이 작동하자 여자는 떠나기로 결심한다. 어디로 갈 것인지를 묻는 연인에게 여자는 조금은 두렵고 아직은 덜 여문 확신으로 대답한다. “New York, Maybe!”
운명이란 ‘메이비’일지도 모른다. 확정된 무엇이 아니라 내가 원하므로, 그 흔들림이 좌초될까 봐 그것을 운명이라는 강력한 힘으로 결박해 두고 싶은 마음. 내가 선택한 것을 완전하게 믿을 수 없는 불안한 인간들의 몸부림 같은 것. 아마도, 운명이란 있는 것이 아니라 있어야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별것 없는 관계도 운명이라고 믿으면, 아닐 때보다 훨씬 근사하고 튼튼하고 강렬하고 가치 있는 결합력을 선물해 준다. 운명이 아니라 실은 그래야 한다고 믿는 믿음이 이 모든 것들을 연출하고 감독한다.
누구에게나 눈이 내리는 크리스마스이브의 밤이 있다. 누구에게나 세렌디피티 같은 뜻밖의 행운이 있고, 누구에게도 같은 선물을 고르고 같이 카페모카를 떠먹는 필연의 순간이 있다. 다만 그 우연한 만남을 운명으로 바꾸어내는 조나단과 사라가 있는가 하면, 그런 운명을 믿지도 열망하지도 않는 사람도 있을 뿐이다. 운명이라는 보스에게 나는 잘 보이고 싶다. 그리움의 행동대장이 열망이다. 나는 충성하겠다. 그렇게 나는 ‘지금’ 안에 설레는 운명의 예감과 황홀한 ‘몇 년 후’의 서사를 채워 넣겠다. 진실로 나는 그리운 필연이 있다고 믿는, 그 믿음을 의심하지 않겠다. 열망하겠다.
그리움의 힘
그리움은 고독과 닮았다. 고독을 가까이하는 사람들은 특히 나무를 좋아한다. 아마도 나무가 그리움이나 고독이나 자존을 상징하는 사물로서 가장 잘 어울리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내가 아끼는 책에도 나무와 고독이 나온다. 프랑스 작가 장 지오노가 쓴 『나무를 심은 사람』은 고독한 양치기가 죽을 때까지 황무지에 도토리를 심어 거대한 참나무 숲을 이룩한 이야기다. 아주 짧은 이 단편소설이 수많은 언어로 번역된 이유는 뭘까? 인간들은 모두 고독한 내면을 지니고 있고, 그 안에 자라나 그리움들이 숲을 이루어 술렁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움은 누군가를 향하는 마음이고, 그 이타심은 고결한 행동을 이끌어낸다. 책을 펼치면 맨 앞에 이렇게 나온다.
한 사람이 참으로 보기 드문 인격을 갖고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여러 해 동안 그의 행동을 관찰할 수 있는 행운을 가져야만 한다. 그 사람의 행동이 온갖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있고, 그 행동을 이끌어 나가는 생각이 더없이 고결하며, 그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고, 그런데도 이 세상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잊을 수 없는 한 인격을 만났다고 할 수 있다. - 『나무를 심은 사람』, 장 지오노 지음, 두레출판사
나는 꽃씨를 뿌리고 나무를 심는 사람들은 그리움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마음에 그리움이 꽉 차서 힘드니까 그걸 꺼내서 나무로 심어두고, 꽃씨를 뿌려두는 묘책을 생각해 내지 않았을까. 그리움을 밖에다 심어두고 좀 헐렁하고 편안해진 마음으로 살면 지내기가 한결 부드러울 테니까. 노을도 마찬가지다. 태양이 품고 있기 힘드니까 참다 참다 저녁 무렵이 되면 몸 밖으로 게워낸 각혈이 노을이다. 그리움 때문에 사람이든 탸앙이든 창의적이고 예술적인 짓을 한다. 남 보기에는 그게 우아하고 아름다운 일로 보이겠지만 실상 품고 사는 자들에게는 애타고 숨 막히고 견디기 힘든 고약한 중병인 셈이다.
아픈 존재
동사가 사라진 삶
이반 일리치 읽기를 권한다. 그는 우리 시대의 중요한 사회 사상가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전통사회가 침몰하고 있다. 그는 이에 대한 비통한 애도사를 줄기차게 써왔다. 『학교 없는 사회』, 『성장을 멈춰라』, 『병원이 병을 만든다』 등이 그가 남긴 저작들이다. 그는 이 저작들에게 학교, 교통, 위성도시, 대형병원, 매스미디어와 같은 대량생산 산업시스템이 시민들의 자발적 행동능력을 어떻게 빼앗아갔는지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시장 상품 인간을 거부하고 쓸모 있는 실업을 살 권리’를 주창한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에서는, 산업사회가 그토록 찬미하고 계몽했던 ‘해방된 인간’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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