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50년째 살고 있습니다만
이유진 지음 | 예미
아빠와 50년째 살고 있습니다만
이유진 지음
예미 / 2020년 9월 / 176쪽 / 14,000원
1부 70년생 이유진
70년생 이유진 나는 1970년생이다. 어릴 적부터 오줌 질질대며 나가 돌아다니느라 바빴고, 파출소에서 껌 씹으며 딸 잃고 애타 하는 엄마를 기다렸다. 초등학교 6학년까지 골목대장으로 남자애들 상대로 불의에 맞섰다. 그때 맞은 주먹 한 방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나는 딸 넷의 둘째로 자랐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태권도를 잠깐 배운 적이 있었는데 동네 분들이 “네가 남자 하면 되겠다”는 말을 자주 했다. 당시 학교에서는 남자가 반장, 여자가 부반장을 했고, 집안에 남자가 있느냐 없느냐로 뭇 남성들의 남성성을 가름했다. 그러다 보니 학교에서는 남자들이 여자 놀려먹는 재미로 깔깔대고 여자들은 속상해 울며 선생님께 일러바치기 일쑤였다.
명절이나 제사 때면 남자들은 안방에 자리 잡고 앉아 손님들을 맞이했고 여자들은 하루 종일 부엌에서 음식을 했다. 며느리 셋이 부엌에서 모든 것을 해결했다. 손자들은 어른들과 함께 안방에 자리했고, 손녀들은 건넌방에서 하루 종일 집에 가기를 기다렸다.
할머니 댁이 울산으로 내려가면서 명절 또는 제사 때마다 엄마 아빠는 밥과 반찬, 간식을 준비해 두셨고, 언니에게는 특별히 용돈을 쥐어주며 동생들하고 잘 지내고 있으라는 지령을 내리고 가셨다. 그때만해도 울산까지 가는 데만 열 시간 넘게 걸리는 지옥의 명절이었다. 명절이나 제사 때 굳이 우리가 안 가도 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집안에서 정작 필요한 사람은 제사 지낼 남자와 음식 만들 여자였으니까.
나는 아빠나 엄마가 옭아매어 키운 것도 아닌데도 언제나 자유로운 삶을 꿈꿨다. 네 살이나 차이가 나는 언니의 영향이었을까, 또래보다 어려운 책을 일찍부터 읽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는 중국설화집인 듯 신선에 대한 얘기, 『플루타르크영웅전』과 같은 책을 읽었고, 초등학교 때에는 우리와 비슷한 딸 넷의 『작은 아씨들』을 읽으며 둘째 조의 ‘독립된 삶’에 매력을 느꼈고, 중학교 때에는 『보바리 부인』을 읽으며 ‘계약결혼’을 알게 되었으며, 『꽃도 십자가도 없는 무덤』을 읽으며 자유를 그렸고, 그러면서 딸 넷 중 하나는 달라도 된다고 생각했다.
집안에 아빠 빼고는 남자가 없어서였는지 그때만 해도 남녀에 대한 구분이 심했던 탓이었는지 남자애들하고 친하게 지낸다는 것은 소문을 만드는 일이었다. 단지 남자들은 힘과 공부의 경쟁상대였거나 좋아하는 사람 정도로만 취급되었다.
나는 성인이 되어서도 남자들과 몇 년을 만나고 놀러 다니고 했지만 사귀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냥 사람을 만난 것뿐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는다. 여자 앞에서 남자들의 과한 행동과 허세는 보는 것만으로도, 내가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싫었다. 남자들이 여자를 얻기 위해 하는 모든 행동들이 비굴하게 느껴졌다. <동물의 왕국>을 보면서도 수컷이 암컷을 향해 구애하는 동물 본연의 행위를 난 왜 그렇게 부정했을까. 어찌 되었든 그런 허세는 과잉을 받아줄 만큼 재미도 여유도 없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뒤늦게 열일곱 번의 소개팅을 했다. 남자들의 삶이 궁금해서 호기심으로 시작했고, 어느 정도 횟수를 채우다 보니 그 나이대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대략 알게 되었다. 소개팅을 접을 무렵에는 30분 정도 앉아 있다가 “나 집 갈래요” 하고 나왔다. 한번은 내 상대가 아닌 것 같아 언니를 소개시켜 주겠다고 제안한 적도 있다.
나는 신혼여행과 결혼휴가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결혼을 꿈꿨다기보다 ‘신혼여행=해외여행’이었던 때라 어느 나라로 신혼여행을 갈지를 상상했고, 결혼 휴가 동안 새 집에 새 가구에 나만의 공간에서 내 물건들을 차곡차곡 정리하는 상상을 했다. 왜냐하면 막 해외여행이 자유화되어 쉽지 않았고, 결혼은 곧 굴레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남편감으로 화학자를 선택했다. 20대 중반쯤 어떤 남편을 원하냐는 질문에 ‘화학자’라 답했다. 세상모르고 실험에 푹 빠져 사는 남편, 방탕은 아니지만 버금가게 자유로운 생활을 하는 아내로서, 주중엔 저마다 자기 삶을 살다가 주말은 함께 보내는 그런 부부의 삶을 그렸다. 그러기에 화학자는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때론 결혼한 여자가 되었다. 2005년 내 나이 서른 여섯, UVIC(University of Victoria Canada)에 영어연수를 온 우리나라 대학생들에게 나는 이혼하고 한국을 떠나온 아줌마였다. 한국에서는 택시기사 아저씨들이 아이가 몇 살이냐는 질문을 자주 했다. 그럴 때면 말이 길어지는 것이 싫어서 ‘왜’라는 질문을 던졌고 나는 소심하게 거부했다.
지금 나는 쉰 살이 넘었다. ‘결혼’이라는 단어가 아직까지도 언급되는 현실이 의아하지만 예전에 비하면 아주 많이 편해졌다. 지금의 나는 ‘옆집 남자’를 구하고 있다. 나랑 같은 공간에서 살지는 않지만 언제든 곁에서 나랑 놀아주고 문제가 생기면 도와줄 그런 남자를 찾고 있다.
70년생 나는 이렇게 살아왔다. 특별히 어느 누가 자유를 구속하지 않았음에도 늘 벗어나고자 했고 늘 자유를 그리워했다. ‘나의 삶’을 살고자 부단히 애를 썼음에도 저 밑바닥에는 ‘여자’, ‘결혼’이라는 굴레에 갇혀 살았다. 사회통념 그 틀에 과감히 맞서 싸우지는 못하고 머릿속으로만 ‘나만은 벗어나야지’ 하며 살았다.
내 나이 마흔, 불혹일까 불안일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항상 뭔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서, 나 자신을 세울 수 있을 때 남들과 동등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나만의 것, ‘나’라는 존재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면 ‘해야지 해야지~~’ 했던 일들은 다소 시간은 걸리긴 했지만 이루어졌다. 다소 시간이 걸렸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간절히 원하지 않았던 것이고 이룰 자신이 없었기에 미뤄왔던 것일 게다.
그런데, 내가 이렇듯 하려고 하고, 해야지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어찌 보면 굳이 박사학위가 필요한 것도 아닌데. 이쪽 분야에 와서 7년, 나름 무지 공부해가며 지금까지 왔는데 뭔가 채워지지 않은 허함이 한편에 있다. 전공이 아니기에 당당함이 부족했고, 실무와 이론이 막역하기에 ‘공부’가 필요했다. 공부야 하면 되는데 굳이 박사과정에 들어가는 이유는, 공부에 대한 욕심과 이왕 공부하는 거 나도 만족하고 남에게도 인정받고, 그 두 가지를 만족할 수 있는 것이 학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다 불안에서 비롯된 것일 게다. 5년 공부해서 10년 버티고, 또 공부해서 얼마 안 되는 시간 동안 만족하고. 이것이 인생인가? 아님 내가 나에게 만족하고 세상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살 수만 있다면 굳이 공부하지 않아도 되는 것인가?
다행인 것은 존 밀턴은 “더 이상 공부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진리에서 멀어진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은 우리가 마땅히 받을 자격이 있어서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에게 감추어진 새로운 진실을 반드시 찾으라고 주어진 것이다”라고 말했다. 공부를 안하고는 이 세상에 존재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은 시대를 거슬러 지금까지 사람들은 지속적인 새로운 잣대를 가지고 자신들의 불안을 합리화시키고 있다고 했다. 사람들이 불안해하는 것은 세상이 나를 고립시키고 나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갖는 두려움 때문이라고 했다.
예를 들어 가난한 자들이 그 시대를 살 수 있다는 것은, 노동의 신성함에 가치를 두어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기에 세상 사는 것이 부끄럽지 않다거나, 하나님을 믿고 안 믿고가 잣대가 되어 가난할지라도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세상 사는 것이 부끄럽지 않다는 것이다.
2부 신념에 관하여
뒷바라지에 관하여 - 하고 싶은 거 다 하라고 살면서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은 삶을 살아낼 수 있는 원동력이다. 아가들이 세상 떠나라 울어대는 걸 볼 때면 ‘쟤는 뭘 믿고 저렇게 우는 걸까’ 싶다. 아가들이 엄마 품속에서 쌔근쌔근 잠이 들고, 배가 고프거나 뭔가 마음에 안 들 때 울 수 있는 것은 엄마와 아빠가 원하는 것을 해줄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아가들의 이러한 행동은 당신들이 나의 부모니까 당연히 나를 보살펴야 한다는 믿음이 태어날 때부터, 엄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생긴 것은 아닐까?
믿음이란 그동안의 일관된 행동들에 기반해서 조건-반사적으로 갖게 되는 마음이다. 발로 차면 반응하고, 울면 달래주고, 넘어지면 일으켜주고, 재롱부리면 웃어주고, 뭐라 말하면 답해주고, 착한 짓 하면 좋아해주고 등을 겪으면서 자연스럽게 믿음의 원을 그렸고, 자라면서 조금씩 조금씩 반경을 넓혀 나간다.
자신의 말귀를 알아듣고부터는 조건-반사적으로 해왔던 행동들이 줄어든다. 자식도 부모도 서로가 지켜보며 반응해줄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다. 자식들은 학교로 학원으로 돌아야 하고, 부모는 집안일에 바깥일에 서로가 바쁘다. 어느 순간 부모는 조건을 내건다. 네가 하고 싶다면 부모인 내가 책임지고 다 해주마.
아빠도 그랬다.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유진아, 하고 싶은 거 다 해, 아빠가 다 해줄게”라 하셨고, 공부하고 있는 내 뒤에서, 상장을 내밀 때면, 성적표를 바라보며, 그럴 때마다가 하고 싶은 거 다 하라고, 뭐가 되었든 아빠가 다 해줄 거라고 하셨다.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나의 한계를 알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하고 싶은 거, 할 수 있는 게 줄어들었다. 아빠가 다 해줄 거라고 했는데 공부를 해달라고 할 수도 없고,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집과 학교, 독서실을 오가는 동안 아빠를 대할 시간도 줄었고, 아빠를 피하게 되었다.
아빠의 기대에 못 미치는 대학이라 합격통지를 받고도 등록금 내달라는 소리를 한동안 못 했다. 대학에 입학하고 컴퓨터를 접하면서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되겠다는 새로운 꿈을 가지게 되었다. 아빠는 좋아하셨고, 다시금 뭐든지 하고 싶은 거 하라는 말씀을 오랜만에 들었다. 강남에 있는 유명한 컴퓨터 학원을 다녔고, 대학원엔 다니면서 자격증과 학력을 만들었다.
그 후로도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서른여섯에 캐나다로 떠났고, 한국으로 들어오기 전에도 여행을 하겠다고 지원금을 요청했다. 가진 돈이 없어도 자동차를 여러 번 사고, 박사과정 내내 돈벌이를 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아빠라는 존재가 뒤에 있었기 때문이다.
친구들이 부모가 되고 그의 자식들이 웬만큼 성장을 하고 보니 말과 행동이 다르다. 대학을 보내면 이후로는 그들 몫이라고 했었는데 아르바이트도 못하게 하고, 견문 넓히겠다고 여행 가는 애들의 호텔과 차편을 일일이 다 끊어주고, 현지에서 터진 문제도 대신 처리해주고, 자식 결혼할 때 아파트 하나씩은 해줘야 한다며 재테크를 하고 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우리 부모님은 자식들이 결혼을 했어도 곁에 끼고 사신다. 2층은 부모님, 3층은 막내, 4층은 셋째, 5층은 언니네가 살고 있다. 우리들이 늙어 수입이 없더라도 이 집에서 나오는 월세를 받으면 기본적인 공과금을 낼 수 있을 거라고 다 마련해놓으셨다며 뿌듯해하신다. 돌아가실 때 얼마씩 주겠다고 저금도 하신다.
자식 된 입장에서는 ‘하라고 했잖아, 해준다고 했잖아’ 하며 부모의 역할과 의무를 생각한다. 부모 된 입장에서는 본인의 역할과 의무를 어디까지 규정하는지 알고 싶다. 규정의 필요성이나 규정을 해야 한다는 당위성에는 동의를 하는지. 이러한 것들이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알고 싶다.
형평성에 관하여 - 형제라도 똑같지 않다고
키가 큰 사람과 키가 작은 사람이 있다. 두 명 모두가 저 너머 멋진 풍경을 보고 싶다. 둘 다 보게 하려면 키가 작은 사람에게는 받침대가 필요하다. 키가 큰 사람과 키가 작은 사람이 있다. 두 명 모두에게 같은 높이의 받침대를 제공하면 키가 큰 사람은 저 너머 멋진 풍경을 더 넓게 더 높은 곳에서 볼 수 있고, 키가 작은 사람은 저 너머 멋진 풍경을 볼 수 있다.
형평성이란 무엇인가. 두 사람에게 같은 높이의 받침대를 제공하는 것을 말하는가, 키가 작은 사람에게 받침대를 제공해서 두 사람 모두가 같은 것을 보게 하는 것을 말하는가. 형평, equity란 ‘균형이 맞음’으로 상황에 맞도록 규칙을 유연하게 적용하는 것이다. 비슷한 용어로 사용하는 공정은 ‘공평하고 올바름’, 출발선의 평등을 의미하며, 이는 경쟁의 조건과 기회가 동일해야 함을 의미한다. 공평은 ‘어느 쪽으로도 치우지지 않고 고름’으로 결과의 형평성을 언급할 때 사용한다.
같은 배 속에서 나고 자라도 어느 순간엔 가진 것들이 서로 다르다. 어려서는 공부를 얼마나 더 했는가, 타고난 손재주를 얼마나 더 발전시켰는가, 어떤 기회가 더 주어졌는가 등 거쳐 온 과정을 통해서 결과가 달라진다. 커서는 주어진 것을 어떻게 관리했는가, 얼마나 키웠는가, 어떻게 했는가 등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부모는 특정 자식에게 치우치지 않고 고르게 올바르게 키웠다고 한다. 자식들이 서로 다른 능력을 보이는 것은 그들의 몫(팔자)으로 생각한다. 같은 양의 노력을 들였다고 해도 자식에 따라 차이가 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자식은 서로 다른 능력의 차이를 보이는 것은 부모의 뒷바라지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부모가 쏟는 노력이 모든 자식들에게 똑같이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조절을 해서 자식들의 능력이 어느 정도 같아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날 막내가 왜 자기한테는 공부하라고 안 했냐고, 공부를 시켰어야 하지 않았냐고 화장실에 앉아 볼일 보고 있는 엄마에게 따졌다. 막대 나이 40이 넘어서 일어난 일이다. 엄마는 지금도 약간 울컥하며 억울하다는 듯 감정을 잔뜩 실어 말씀하신다. “내가 안 시킨 거냐, 자기가 공부를 안 해놓고 지금에 와서 왜 그러냐”고.
남자형제가 있으면 자식에 대한 형평성은 애초에 없다고 본다. 다행히도 우린 딸들만 있었기에 같은 출발선상에서 시작할 수 있었다. 엄마 아빠가 우리들에게 해준 것을 보면 나름의 규칙이 있었다. 첫째라서 혹은 막내라서 뭔가를 더 해주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첫째와 셋째를 한 팀으로, 둘째와 넷째를 한 팀으로 묶어 추석 때는 첫째와 셋째의 베갯잇을 해줬으면, 설날 때는 둘째와 넷째의 베갯잇을 해주었다. 첫째 둘째는 잠바를 먼저 사주고, 그다음에 셋째 넷째의 잠바를 사주셨다. 뭐든 네 명에게 똑같이 네 개를 해주셨고, 약속된 순서가 있었기 때문에 불공평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그런데 학교에 가고 성적을 받고 학원엔 가고 하는 것은 전적으로 자식들의 몫이다. 똑같이 대학 등록금을 내주고 싶어도 대학을 간 놈과 안 간 놈이 있다. 공부 안 하는 놈을 붙들어다 억지로 공부시킬 수 있는 여유는 없었다. 하지만 막내는 엄마가 붙들고 시켰어야 했다는 것이다. 자기에게는 관심이 없다 했었다고 말한다.
자식들이 성장하고 가족들이 생기면서 가족회비를 걷는다. 가족여행비와 아빠 용돈을 마련하기 위해서 시작했다. 왜 아빠에게만 용돈을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그 이유는 모르겠다. 이렇게 매달 내는 거 외에도 여행 갈 때마다 걷고, 펑소에도 이것저것 걷는다. 그러다 보니 처갓집으로 들어가는 돈이 너무 많다느니, 각 가족 수가 다른데 똑같이 내는 것은 불공평하다느니 말이 많다.
하지만 사는 형편을 빤히 아는 아빠는 우리들에게 같은 회비라도 누구에게는 큰돈일 수 있다고 한 번 말씀하셨다. 그러고는 언제부턴가 여행을 갈 때나 가족행사가 있을 때 아빠가 먼저 보태라고 하시며 돈을 주신다. 자연스럽게 우리들의 배분량은 줄어든다. 부모가 생각하는 형평성과 자식이 생각하는 형평성은 다른 것 같다.
3부 아빠와 50년을 살았다
아빠와 50년을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