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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각오로 살아 보라는 너에게

이다안 지음 | 파람북


죽을 각오로 살아 보라는 너에게

이다안 지음

파람북 / 2020년 8월 / 240쪽 / 14,000원



불행이 운명이라면



우리 가족은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아주 오래전부터 불행했다. 가장 오래된 기억을 끄집어내 보자면, 부모님이 싸우자 동생과 붙박이장에 숨어 울었던 일이 떠오른다. 아빠와 엄마는 고작 5살이던 우리 앞에서 서로를 때리고, 욕하며, 할퀴는 장면들을 여과 없이 보여줬다.

어느 날은 아빠가 자신에게 맞고 친정으로 짐을 싸서 나간 엄마를 데려오라며 내 등을 떠밀었다. 난 그때 스스로 머리를 묶지도 못할 만큼 어렸는데, 산발이 된 머리와 잠옷 차림으로 외할아버지 댁 벨을 누를 때 생애 첫 수치심을 느꼈다.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아빠가 직장을 그만두고 백수를 자처했다. 해고를 당한 건지, 자진 퇴사한 것인지는 아직도 확실히 모르지만, 아빠는 항상 자신이 스스로 나온 것이라고 강조했다. 둘 중 어느 쪽이 진짜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때부터 우리 집은 가난이라는 굴레까지 뒤집어쓰고 걷잡을 수 없이 피폐해졌다는 사실이다.

아빠는 가족들이 돈 못 버는 자신을 무시한다 여겼고, 그 자격지심을 폭력을 행사하여 굴복시키는 것으로 해소했다. 엄마는 항상 아빠가 우리의 인생을 망쳤다고 여기며 분노했다. 나 역시도 그렇게 생각했다. 가난에서 기원한 증오가 우리 가족 불행의 원천이었다. 그리고 그 물살은 나와 아빠에게로, 나와 엄마에게로, 나와 동생에게로 번져 결국 나로 하여금 가족 모두와의 관계를 뒤틀리게 했다.

아빠는 속 좋은 사람처럼 허허 웃다가도 문득 심사가 뒤틀리면 고함과 함께 손부터 올라가는 다혈질이었다. 난 그런 아빠를 무서워하기보다 경멸했다. 적대심을 가지고 있었고, 가까이하기 싫은 기피의 대상이었다. 하루는 초등학생이던 내가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는데, 아빠가 내 이불 속으로 들어와 나를 안으려 했다. 난 짜증을 내며 저리 가라고 소리쳤고, 아빠는 그 순간 버럭 화를 내더니 내 팬티 속으로 손을 넣어 엉덩이를 잡아 뜯었다. 꼬집은 게 아니라 잡아 뜯었다는 표현이 더 적절했다. 난 너무 아파서 악을 쓰며 울었고, 아빠는 벌을 준다는 듯이 내게 훈계하며 계속해서 엉덩이를 잡아 뜯었다. 내가 아빠와 한 이불 속에서 마주 보고 누워 무방비 상태로 엉덩이를 뜯기고 있는데 그 모습을 엄마가 방문 너머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 아빠가 내 방을 나가자, 엄마는 나를 주사맞을 때처럼 엉거주춤 서서 바지를 내리게 한 후 피가 철철 나는 엉덩이에 약을 발라줬다. 나는 이 기괴하고 역겨운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한동안 나사가 빠진 듯 패닉 상태로 지냈다.

고등학생으로서 첫 등교를 하던 날이었다. 가족은 모두 자고 있었고, 난 교복을 챙겨 입은 뒤 아침밥을 먹기 위해 전날 끓여놓은 김치찌개 냉장고에서 꺼내 데웠다. 홀로 정적 속에서 먹히지 않는 밥을 억지로 먹고 서둘러 학교에 갈 채비를 했다. 시계를 보니 시간이 빠듯했다. “야, 밥 차려.” 그때 안방에서 아빠가 잠에서 막 깬 얼굴로 나와 내게 말했다. 난 고등학교 입학식 날 따뜻한 아침밥을 차려주는 엄마나, 학교까지 태워주며 잘 다녀오라고 등을 두드리는 아빠는 언감생심 바란 적이 없었다. 그러나 혼자 등교 준비를 하는 딸에게 밥 차리라고 명령하는 아빠는 꼴 보기 싫었다. “나 학교 가야 돼. 늦었어.”

내 표정을 보더니 아빠는 고함을 지르며 김치찌개가 담긴 대접을 내 얼굴로 던졌다. 순간적으로 피했지만, 이마와 콧등을 타고 김치찌개 국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새 교복이 더러워질까 무서워 얼른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때 갑자기 화장실 문이 열리더니 아빠가 속옷도 입지 않은 나체의 몸으로 달려들어 내 교복을 잡아당겼다. “이년 이거 교복 다 찢어 버려야 돼! 너 같은 건 학교 갈 필요가 없어!”

나는 교복을 찢으려 하는 것보다 나체인 아빠가 달려드는 것에 더 놀라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그러자 엄마가 아빠를 말리며 안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닫힌 안방 문틈으로 두 사람이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입학 첫날부터 지각한 나는 눈치를 보며 빈자리를 찾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갑자기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가스가 차듯 뱃속이 부글거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상태는 심각해졌다. “입학 첫날부터 실수하면 어떡하지. 아, 안 돼….”

식은땀이 온몸을 적시고 손에서 흐른 땀 때문에 교과서가 축축해졌다. 선생님이 경직된 분위기를 풀려는 듯 던진 농담에 아이들이 까르르 웃었다. 나 혼자 웃지 못하고 극심한 고통 속에서 배를 움켜 쥐었다. 악몽 같은 시간을 견디고 있던 그때,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주위가 다시 소음으로 산만해졌고, 순간 거짓말처럼 배가 평온해졌다. 다시 수업이 시작되었고, 주위가 조용해지자 뱃속은 알람이라도 맞춘 것처럼 곧바로 부글거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정체 모를 고질병은 평생을 따라다니며 내 인생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나는 처음에 이 병이 다분히 내과 질환이라고 생각했다. 단지 ‘타인과 조용하고 고립된 공간에 있을 때’만 복통이 시작된다는 점이 의아했지만, 어쨌거나 배가 아픈 것이니 내과에서 관련 약을 처방받아 먹으면 나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도 내 병은 낫지 않았다. 내과에서는 ‘과민성대장증후군’이라며 마음을 편안히 유지하는 것이 방법이라고 했지만, 내 의지와 상관없이 생겨나는 ‘불안’을 치유하는 방법은 알려주지 못했다.

후에 난 이 병이 우울증에 따른 ‘사회 공포증’의 증상임을 알게 되었다. 내과가 아닌 정신과에서 상담을 받으며 치료하려 애썼지만 개선되지 않았다. 병원에서조차 원인을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는 ‘내탓’으로 돌리니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만 쌓여갔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도 이 병은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면접을 볼 때, 회의실에 들어갈 때, 애인의 차에 탔을 때, 심지어 친한 친구와 조용한 방 안에 같이 있을 때도 배가 아팠다.

관계의 부재



나는 학교에 다니며 호프집을 비롯해 콜센터, 마트 시식 코너, 카페, 옷 가게 등 온갖 아르바이트를 쉬지 않고 했다. 그러면서도 반드시 학점 은행제 편입을 하겠다는 의지로 모든 과목의 성적을 A 이상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다 부질없는 짓이라는 걸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루하루 생활비가 빠듯한 내가 그 비싼 등록금을 내고 몇 년을 더 공부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2년의 학자금 대출로 난 이미 언제 갚을 수 있을지 모를 빚이 쌓여있는 상태였다. 매달 이자를 내는 것만 해도 벅찬 날들의 연속이었고, 내가 이곳을 졸업할 때쯤이면 집안 사정도 조금은 괜찮아져 있을 거라 믿었던 기대와 달리 엄마는 여전히 내 학비를 보태줄 돈이 한 푼도 없다고 했다.

편입을 위한 발판이라 생각하고 들어온 대학이었는데, 생활고에 떠밀려 나는 어이없게도 우리 과에서 가장 먼저 취업을 했다. 그나마 꿈에 가까워지려 택한 이름 없는 중소기업의 패션 잡지사였다. 100만 원 남짓한 월급을 받으면서도 나는 에디터로서 잡지에 글을 쓸 수 있는 이 직업에 감사하며 열정을 다해 다녔다. 능력도 없으면서 히스테리만 가득했던 편집장의 갖은 공격을 받고 화장실에서 수도 없이 울었지만, 그래도 잡지가 출간되면 가슴 한구석이 뿌듯했다.

일찍이 사회생활을 시작하니 여러 루트를 통해 다양한 나이대의 새로운 친구들이 생겼다. 누구와도 쉽게 친해지고 어느 집단에서나 스스럼없이 잘 어울리며 사교성 좋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건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의 일방적인 평가였다. 나는 내 진짜 모습, 이를테면 가난, 가정불화, 우울증, 사회 공포증, 학벌 콤플렉스, 낮은 자존감, 쉽게 상처받는 예민함 등을 숨기고 또 숨기느라 철저히 가짜 얼굴을 하고 살았으니까.

그래도 내가 조금은 솔직해지고 편안해질 수 있는 친구들이 있었다. 초ㆍ중ㆍ고를 모두 같이 나온 동창 3명이었는데, 나의 진정한 친구들은 영원히, 오로지, 이 셋뿐이라는 생각을 강박처럼 여기면서 그 아이들에게 소속감과 안정감을 찾으려 무던히 애쓰곤 했다. 이 때문인지 학년이 올라가고, 학교를 졸업하면서 그 아이들이 새로운 친구들을 사귈 때마다 극심하게 우울해지기를 반복했다. 나는 여전히 그 아이들뿐인데, 내가 그들 세계의 자장권에서 점점 멀어져 가는 것이 나를 미치도록 두렵게 만들었다.

3명 중 특히 친했던 S에게는 연인에게 바랄 법한 관심과 애정을 갈구했다. S는 내가 초등학교 때부터 가정 폭력과 부모의 역할 부재 등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자세히 알고 있던 유일한 아이였다. S는 화목한 가정에서 부족함 없이 애지중지 자란 외동딸이었기에 나의 결핍은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내 치부를 알고 있는 유일한 존재가 곁에 친구로서 남아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큰 위안이 됐다.

하지만 내가 대학 입시에 실패하고 박봉의 직장인이 되어 고시원에 살면서부터 우리 사이는 조금씩 틀어지기 시작했다. 다른 3명의 아이들이 나와 다르게 부모님이 주는 용돈을 받으며 캠퍼스 생활과 처음 사귄 남자 친구, 해외여행과 명품 등에 푹 빠져 있을 때, 나는 궁핍한 생활에 찌들어 매일 청춘을 좀먹고 있는 현실이 씁쓸했다. 자격지심에 파묻힌 나는 아이들이 무심히 던지는 모든 행동과 말 하나하나에 크게 자극받으며 절망과 같은 아픔을 느꼈다.

소설 『쇼코의 미소』에서 작가가 말했듯이, 어떤 연애는 우정 같고, 어떤 우정은 연애 같다. 힘들고 지쳐있는 나의 마음을 아이들이 진심으로 어루만져주길 바랐다. 자신의 행복을 조금 숨기고 내게 관심을 쏟아주길 원했다. 그 서운함을 퉁명스러운 말투와 행동으로 표현하면 후회하고 미안해하며 내 전부가 되어줄 줄 알았다. 나의 우울함을 안아줄 줄 알았다. S를 비롯한 아이들은 서서히 나와의 연락을 끊었다. 20여 년간 나를 외로움 속에서 지탱시켜 주었던 위태로운 울타리는 그렇게 어느 순간 보잘것없이 허물어졌다.

자살 계획



SNS에 ‘동반 자살’을 검색하자 나온 계정은 꽤 여럿이었다. 많은 사람이 ‘장난 사절’, ‘진짜로 죽을 사람만’ 같은 글로 자신의 자살 계획이 진심임을 어필했다. 나는 그 와중에도 불신이 생겨 섣불리 아무 계정에다가 메시지를 보내진 않았다.

혼자 죽는 것이 아닌 동반 자살을 생각하게 된 것은 오로지 ‘확실하게’ 죽고 싶어서였다. 내가 서툰 방법으로 자살을 시도했다가, 불구가 되어 다시 깨어나거나 식물인간이 되는 경우가 가장 최악의 시나리오였기 때문이다. 확실한 자살 방법을 구체적으로 계획할 수 있게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고, 행여나 죽음의 순간에 공포심이 생겨 포기하지 않도록, 곁에서 마음을 다잡아주며 반드시 자살을 추진시켜 줄 또 다른 누군가가 필요했다. 더불어 나 혼자만의 결정이 아니라 타인과의 약속이 되면 책임감과 도의감이 생겨 억지로라도 끝을 맺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살에 ‘도의’라는 말이 어울리는진 모르겠지만, 그때의 내겐 그것이야말로 진짜 도의였다.

한참 동안 스크롤을 내렸다 올렸다를 반복하다가 가장 담백하게 글을 써놓은 계정에 메시지를 보냈다. 곧바로 답장이 왔다. 내가 나이와 성별을 말하자 상대는 18살의 여고생이라고 회신했다. 고등학생이라니, 너무 어린 나이라는 인식이 든 순간 죄책감이 들었다. 어른으로서 학생에게 몹쓸 짓을 시키는 느낌이었다. ‘나이가 많이 어리네요.’ 내 말에 상대는 ‘문제가 되나요?’라고 되물었다. 생각해보면 자살에 나이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는 초등학생일 때도, 중학생일 때도, 고등학생일 때도 간절히 죽고 싶었으니까. 숱하게 옥상을 올라가던 10대 시절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아이는 내가 여자이고 언니여서 더욱 좋았다고 했다. 행여나 이상한 남자들이 불순한 목적으로 연락을 해올까 봐 걱정되고 무서웠다고 했다. 바보 같은 아이는 내 말이 거짓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듯했다. 나는 이 아이에겐 맨 처음 연락한 게 다른 사람이 아닌 나라서 다행이라고 여겼다.

우리는 매우 적은 양의 대화로도 금세 친해졌다. 서로가 버릇처럼 말하는 죽음에 대한 욕망이 짧은 시간 동안에도 우리를 강하게 결속시켜 주었다. 18살 소녀와 내가 택한 동반 자살 방법은 연탄가스를 이용한 질식사였다. 일정 기간 방해받지 않고 타인에게 쉽게 발견되지 않을 수 있는 공간을 생각하다 독채로 지어진 에어비앤비 숙소를 장소로 정했다. 번개탄과 갈탄을 섞으면 유독가스가 강력해 확실히 죽을 수 있다는 글을 보고, 나는 마트에서 갈탄과 번개탄을 하나씩 구입했다. 창문을 완벽하게 밀봉할 청테이프도 여러 개 준비했다.

마지막 준비물은 수면제였다. 우리가 이 자살 방법을 선택한 것은 고통 없이 죽기 위한 게 컸으므로 수면제가 반드시 필요했다. 약국에서 파는 수면 유도제는 효과가 약해 정신과에서 직접 처방받은 수면제를 구해야 했다. 한 곳에서 일주일 치 이상 직접 처방받는 수면제를 구해야 했다. 한 곳에서 일주일 치 이상 처방을 해주지 않기 때문에 나는 정신과를 다섯 군데 넘게 돌아다니며 수면제를 모았다. 잠이 오지 않아 죽을 것 같다고 말하며 최대한 강력한 수면제를 달라고 호소했다.

같이 죽기로 한 상대가 학생이었기 때문에 숙소 예약부터 약을 구하는 일까지 모두 내 돈으로 해결했다. 전라남도 여수에 산다는 그 여고생은 매번 보탬이 되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하며, 죽기 위해 고속버스를 타고 내가 있는 서울까지 오겠다고 했다.

누군가에게 의지해 계획을 세우려고 동반 자살을 택한 것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내가 모든 것을 리드하고 있었다. 아이는 수동적이었으나 항상 강조하는 말이 있었다. 자살에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것. 나 역시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 혹시나 실패할 만한 요소들은 아주 작은 것까지 놓치지 않고 방어를 해두었다. 나는 그 아이와 자살 계획을 세우며 점점 안정을 찾았다. 죽는 것을 실행에 옮길 수 있게 됐다는 희망이 우울감과 불안감을 해소해 주었다.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며 우리가 약속한 그날이 빨리 오기만을 기다렸다.

“언니는 유서 가지고 가실 거예요?”죽기로 한 날을 하루 남기고 그 아이가 내게 물었다. 나는 매우 정성스럽게 유서를 작성했었다. 자살이라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던 나의 고통들을 낱낱이 써두었다. 내가 죽은 뒤에 타인으로부터 섣부른 비난이나 알량한 동정을 받기 싫어서였다. “나는 프린트해서 가져가려고, 너는?” 노트북으로 쓴 길고 긴 내용은 근처 PC방에서 출력한 뒤 가지고 가려 했다. 유서를 PC방에서 출력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냐마는 그래도 마지막 편지는 문서 파일이 아닌 종이로 남겨두고 싶었다.

우리는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었지만 단 한 번도 서로의 이름을 묻지 않았다. 나는 몇 번씩 그 아이의 이름이 궁금했으나. 굳이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 우리 사이의 암묵적인 약속이었다. '이 아이는 정말 자신의 죽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후회나 두려움은 없을까. 혹시나 마음이 약해져서 내 계획을 틀어지게 하면 어쩌지.'

나는 그 아이와 꽤 깊은 유대를 가지고 있었으나 불쑥불쑥 생겨나는 불신의 생각들이 꼬리를 물기도 했다. 그래도 확실했던 것은 그때의 내 심정이 소풍을 앞둔 초등학생처럼 설레었다는 점이다. 나의 오랜 숙원이었던 죽음을 드디어 이룰 수 있다는 것에 가슴이 기분 좋게 두근거렸다. 시계를 보니 내일까지 불과 몇 시간 남지 않았다. 내일 이맘때쯤이면 난 죽어있을 것이다. 그리고 영원한 안식 속에서 비로소 행복해지겠지. 나와 그 아이는 좀처럼 잠이 들지 못하고 사사로운 이야기들을 오랫동안 이어갔다.

그것은 잔인한 폭력



드디어 죽기로 한 날이 밝았다. 함께 죽기로 한 아이는 저녁쯤 터미널에 도착한다고 했다. 나는 일단 근처 PC방에 들러 유서를 출력한 뒤, 예약해둔 숙소에 미리 가 있기로 했다. PC방에 도착해 저장해둔 유서를 열었다. 출력하기 전에 한 번, 두 번, 세 번 다시 읽었다. 유서를 쓰던 날처럼 눈물이 나진 않았다. 그저 오점이 절대 남아선 안 되는 서류를 검토하듯 무덤덤했다. 배가 고픈 건지 마음의 허기인지 알 수 없는 공허함에 한참을 멍하니 모니터만 바라보았다. 서둘러 출력을 하고 나가려는 순간,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내게 말을 걸었다. “실례합니다. 자살하려는 사람이 있다는 신고를 받아서요. 모니터 보니까 유서를 쓰고 계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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