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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빛나는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

이청안 지음 | 레몬북스


가장 빛나는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

이청안 지음

레몬북스 / 2020년 6월 / 264쪽 / 14,000원



1부 그대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사랑에도 졸업이 있었으면 좋겠다

돌이켜보면 ‘졸업’과 동시에 많은 사람이 멀어져갔다. 시차는 있었겠지만, 자의적으로 타의적으로 한 단계의 졸업이 지나면 꽤 많은 사람을 잊고 살았다.

나는 지금, 학교가 아닌 회사에 다닌다. 퇴사한다면, 졸업과 비슷한 끝이 있는 셈이다. 그런데 사랑에는 졸업이 없었다. 대상이 달라진다고 해도 같은 과정을 또 겪어야 한다. 팔순에도 아흔에도 새 사랑이 찾아온다면 우리는 신입생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처음 찾는 교정을 거닐듯이 싱그러울 것이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마음에는 졸업이 없었다. 다만 상대와의 연애가 심심하게 끝나건 요란하게 끝나건, 완결 지어진 실수투성이 작품만이 남아있을 뿐.

“저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하고 인사를 하다가 문득 ‘퇴근이란 참 좋구나.’하고 감사하게 되었다. 퇴근은 퇴사도 아니고 졸업도 아니지만, ‘실수해서는 안 되는 사람의 시간’을 벗어나 ‘원래 실수투성이인 인간 이청안’으로 돌아와도 된다는 자유를 주고 있지 않은가.

사랑에도 졸업이 있었으면 좋겠다. 빛나는 졸업장을 받지 못할 거라면, 퇴근이라도 시켜주었으면 한다. 더는 실수투성이 작품을 찍어내지 않고 이제 그만 감사하며 퇴근하고 싶다. 세기의 걸작으로 졸업작품을 만들지 못할 거라면. 사랑, 졸업하고 싶다. 불가능하니 염원하고 있겠지만.

너무 아껴서 산천초목이 질투한대도

“얘야, 사람이건 물건이건 너무 사랑하고 아껴서는 안 된단다. 산천초목이 질투하기 때문이지. 사랑할수록 담담해지거라. 사랑할수록 따듯한 거리를 유지하거라. 네 몸처럼 사랑하고 애착을 두다가는 영영 헤어지는 수가 있단다. 사랑하되 너무 사랑하진 말아라. 그리워하되 너무 그리워하진 말아라. 하늘이 질투한단다. 산과 나무, 바다가 질투한단다.”

이만희 원작, 류은종 장편소설 ‘약속’에 나오는 구절이다.



내 어머니와 가장 친한 친구인 원우 이모는 원우가 다섯 살 때 사별하셨다. 그리고 평생 먼저 간 남편을 그리워했다. 이모는 가끔 내게 “너무 사랑하지 말라.”고 충고해주었다. 나는 그 말의 진의를 잘 몰랐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이모는 어느 날, 길거리에서 사주를 봤다. 점쟁이는 내년에 이별 수가 있으니 조심하라고 했다. 당시 이모부는 해외 발령을 앞둔 시점이었기 때문에 이모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친구인 내 어머니 입장에서는 그 부부가 매우 불안했다고 한다. 이모와 이모부는 천지가 질투할 정도로 매우 사랑했기 때문이다.

가장 행복할 때 찾아오는 불행은 사람을 더욱 고통스럽게 한다. 그런데 결국 우려하던 일이 일어난 것이다. 덜 사랑했다면, 덜 아팠을 것이다. 너무 많이 사랑하고 기대었기 때문에, 그 존재가 사라졌을 때 ‘내 존재 또한 공중으로 흩어질 것 같은’ 아픔을 경험한다. 하지만 우리가 사랑 앞에서, 관계 앞에서 담담해질 수 있을까? 나는 결코 그럴 수 없을 거라고 장담한다.

상처받기 싫다면 은둔해라. 그럴 수 없다면 멋지게 나아가야 한다. “너무 사랑하지 말라.”는 충고는 그 사랑도 아픔도 뼈에 새길 만큼 체험해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연인들이여, 사랑하자. 두려움도 아픔도 없는 둘만의 세상을 향하여.

한 톨의 틈도 남기지 말고, 살아있을 때 사랑하자. 산천초목이 질투하는 운명의 주인공이 되더라도.

그 사람이 내 마음에 앉을 때

“그 사람이 내 마음에 앉는 건, 어느 뜻밖의 순간”이라고 시작하는 이승환의 노래가 있다. 정말 그렇다. 시작이 그렇다.

누군가에게 빠지고,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나와 닮아서 좋아지기도 하고, 나와 너무 달라서 동경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뜻밖의 인연이 과해지고, 집착 가도를 달리면 한순간에 어그러지고, 또 죽도록 미워하는 사이가 되기도 한다. 헤어진 연인에게 가지는 애증이 이런 경우가 아닐까.

호감을 느끼고 그 사람을 알아가는 과정은 즐거웠다. 상대도 나도 서로를 하나로 느낄 정도로 합일하는 과정은 경이로웠다. 그런데 그 순간은 영원할 수 없다. 언젠가 멈추어야 하고 굴곡도 거쳐야 한다.

폭포수 아래로 떨어지는 거친 물살을 견뎌내야 매끄럽고 단단한 수석이 된다. 수석이 되어도 영원하지 않다. 산들바람 자연도 수련을 거치는데, 하물며 우리는 변화무쌍한 감정을 가진 나약한 사람이다. 수련의 과정을 즐겁게 받아들인다면, 인생은 절대 우울하지 않다. 생각해보면, 오늘 좋아 죽고 못 사는 내 옆의 사람은 언젠가 내가 죽도록 미워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절실한 사랑이 뒤틀리면 화(火)가 되어서 나를 괴롭힌다. 이렇게 괴로울 걸 왜 사랑했나, 왜 가까워졌나 싶겠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참 기쁘지 않은가. 고맙지 않은가.

좋아했고 동경했고 사랑했기 때문에 미워졌다. 그 언젠가 행복이 없었다면 이런 상실감을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한때는 나의 전부였던 그 사람이 떠나가더라도, 지금 내 옆에 없더라도 그 사람 때문에 나를 괴롭히지 말아야 한다. 미워도 저주하지 않아야 한다.

미움은 애정의 또다른 표현이다. 아직 애정을 가졌다면 멀리서 축복해주자. 선한 마음은 언젠가 나에게 행복으로 다시 돌아온다. 오늘 내가 절실하게 사랑하는 사람은 언젠가 내가 죽도록 미워할 사람이다.

즐겁게 조금만 멀어지자. 하지만 또 모르겠다. 반대의 상황이 일어날지. 오늘 내가 미워하는 어떤 사람이 열렬히 좋아지는 기적이 일어날지도. 새 바람이 불어오면 마음을 닫았던 우리의 마음에 또 누가 들어올지도. 어느 뜻밖의 순간은 항상 있다. 뜻밖의 순간은 그 사람이 내 마음에 앉는 순간. 그 순간이 내게 오지 말라는 법이 없다.

우리 인생의 어떤 페이지

책을 읽다 보면 어딘지 모르게 페이지를 넘기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그 페이지는 나를 잡아끌고,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나 넘어가야 하는데, 다음 장으로 넘어가야만 하는데, 왈칵 눈물을 남기거나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그런 느낌 주거나 문득 생각나는 사람 있어서, 나는 다음 페이지를 들추지 못한다.

그런 페이지가 있었는데,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그 페이지를 넘겨버리고 말았다. 책은 이전의 페이지로 다시 돌아갈 수 있지만 내 시간의 페이지는 그리로 되돌릴 수 없어, 지금 나는 조용히 이 자리에 서 있다. 살아있지만, 숨을 쉬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내가 살아있다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사실이다.

우리를 멈추게 하고, 또 달리게 하는 그 페이지를 향하여, 그 페이지를 만나러…. 인생의 페이지를 묵묵히 넘기고 있다.

2부 바람 불지 않는 이별이란 없었다



무엇을 놓쳤기에, 돌이킬 수 없어졌을까

사건에는 전조증상이 있고, 전쟁에도 있다. 어떤 일이 일어나기까지 우리는 많은 것을 놓치고 지나간다. 결국은 리스크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엄청난 일들이 인간의 삶에 직격탄을 날린다.

‘인생은 한 방’이라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한 방에 눈 녹듯 해결되는 일은 거의 없다. 사실은 이별에도 전조증상이 있었는데, 남의 이별이 아니라 내 것이어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을까 곱씹어 보았지만 쉽사리 이유를 가늠하기 어려웠으므로 진단명도 내려받지 못한 불치병 환자처럼 바닥 깊이 고통스러웠다.

확인하고 싶었다. 누군가,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좋아하는 일을 99가지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싫어하는 일 1가지를 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눈치를 살피던 나의 불안한 눈빛들이 쌓여가며 이별의 석탑을 완성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게 얼마나 공을 들인 탑이건 나는 컨트롤 Z(컴퓨터에서 실행 취소를 의미하는 단축 키)를 눌러버리고 싶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시작할 수 있다면, 석탑을 다시 만드느라 허리가 휘어도 좋았고 지문이 다 닳아도 좋았다.

돌이켜진다면 절대로 놓치지 않을 것이다. 남의 이별처럼 분석하고, 태풍의 눈처럼 고요하게, 그 중심부에서 심장을 향해 이별을 저격할 것이다. 환자복을 입게 되더라도, 집요하게 진단명을 받아낼 것이다. 그리고 끝끝내 완치 판정을 받고 다른 이름의 석탑을 완성할 것이다. 단 한 번 돌이킬 수 있다면.

들리지 않겠지만 생일 축하해

이별을 실감하는 날은 매일 매 순간이기도 하지만, 그 타격감이 큰 날은 ‘생일’같은 특별한 날이다. 내 생일에는 그래도 괜찮다. 제법 괜찮은 세상에 사는 덕분에 제법 많은 사람이 반강제적으로 내 생일을 알게 되고 반쯤은 등가교환의 법칙에 따라 ‘기프티콘’으로 성의의 축하 인사를 나눠주곤 하지 않던가.

그가 없어도 나는 제법 괜찮은 생일을 보낼 수 있노라 위안 삼을 수 있다. 그런데 상대방의 생일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그 사실이 번개처럼 뇌관을 관통한다면 기분이 참 이상하다. 내가 사라진 그의 삶에 그가 특별한 날을 맞이했다. 태어나줘서 감사한 그의 삶인데, 그의 생일을 나는 축하할 수 없다. 직접 축하해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할 것 같다. 어쩌면 영원히.

그래서 그날은 아침에 일기를 썼다. “항상 기억될 것만 같아, 슬픈 오늘을 혼자서 축하하고 기념해봐. 여기 이 아침에, 다짐 같은 일기를 적고 하루 동안 당신 생일이라는 걸 잊어보려 해. 내 마음도, 지나간 우리의 시간도 바람결에 흔들리는 엉성하게 세워진 촛불 같다. 당신이 오늘 저녁 선물 받은 케이크 위에 놓일 연약한 촛불처럼 말이야. 부질없는 나만의 축하, 위태롭고 보잘것없어서 당신에게 닿지 않겠지만. 절대로 들리지 않겠지만. 사랑해. 생일 축하해. 태어나줘서 고마웠었어.”

기억은 한쪽으로만 흐른다

어린 시절 주말 늦은 밤이면, 내 마음을 들었다 놨다 했던 외화가 있다. ‘판관 포청천’이라는 대만 드라마인데, 송나라의 실제 정치가였다는 ‘포청천’의 엄중한 판결을 보는 재미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백미는 악인이 ‘개 작두형’에 처할 때였다.

똑같이 사형선고가 떨어져도 ‘용 작두’에 처형당할 때와 ‘개 작두’에 목이 날아가는 것을 다르게 그린 이 드라마는, 진정한 악인이 악인으로 ‘제대로’ 평가받을 때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했다. 포청천이 “개 작두를 대령하라!”라고 명할 때, 우리는 알 수 있었다. 형에 처할 때 그 사람의 인생과 죄를 명백히 단정할 수 있었다.

인생이라는 무수한 길을 걸어가는 우리는 여러 관계의 많은 사람을 만나고 영향을 받으면서 살아간다. 그러다가 이어질 듯 끊길 듯 관계의 매듭이 지어지고, 인연이 끊기면 한 번쯤은 상대방에 대해 단정짓게 된다. 어떤 스승이었는지, 어떤 부모였는지, 어떤 동료이며 상사였는지. 서로에게 감정의 크기가 어떠했었는지까지도.

판단 짓고자 하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마치 판관 포청천이 ‘용 작두’와 ‘개 작두’를 구분하는 것처럼. 어쩌면 연애도 그러하다. 상대에 대한 내 사랑이 얼마만큼이었는지, 우리가 사랑한 것인지 그저 연애 상대로 만나는 사이였던 것인지. 아니면 그 중간 어디쯤 위치해, 감정의 고귀함도 함께 그렸던 미래도 딱 그 중간쯤이었는지.

내 경우는 연애가 끝나면 후련했고, 사랑이 끝나면 아팠다. 그리고 헤어지고 나서 시작되는 사랑도 있었다. 그래서 끝나봐야만 알 수 있다. 기억이 어떻게 단정 지어질지도 관계가 매듭지어져야 알 수 있다. 연인 사이가 아닌 다른 인간관계에서도 호감과 사랑이 달랐다는 것은 기억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기억은 늘 한쪽으로만 흐른다. 기억은 애정과 비례하기 때문이다.

뇌리에 남지 않은 순간을 행복했노라 고백하는 사람은 없다. 그리하여 모든 사랑은 흔적을 남기고, 기억의 극대화를 누린다. 기억이야말로 따지고 보면 불공평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나는 이따금 기도한다. 나와 맞닿아있던 많은 사람의 기억이 나를 미화하고 왜곡하여 여기 숨 쉬는 나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담아두기를.

우리의 마지막이 매듭지어졌을 때, 나에 대한 기억이 그들의 삶 어딘가 남아있다면 조금이라도 따스했기를. 혹여 나보다 내 글을 기억해준다면, 추운 겨울 시장 모퉁이에서 파는 달콤한 팥죽처럼 뜨겁고도 애잔한 알맹이가 있던 존재로 마음 한구석에 담기기를.

그 말이 그렇게 쓰일 줄 몰랐어

한 사람이 좋아지고 있었다. 그는 이미 ‘나’라는 사람을 모두 여행하고서 책을 써 내려가는 작가처럼, 이미 극장에서 엔딩 장면을 보고 나온 평론가처럼 나에 대해 잘 알았다. 내가 어떤 말을 어떤 뉘앙스로 표현하는지 모두 아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나의 ‘언어’가 중요한 사람이고, 그래서 ‘언어’가 통하지 않는 사람과는 쉽사리 친해지질 못한다. 반대로 나와 상대방의 언어가 통한다고 생각되면, 내 마음은 몇 계단을 뛰어넘어서 몇 계절을 앞서 나가서 상대에게 가 열려버린다. 남자인 사람에게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와 함께할 수 없음이 이다지도 아픈지 모르겠다.

존중. 그가 처음 그 단어를 사용한 것은, 내가 밥을 먹기 싫다고 했을 때였다. 그는 나의 뜻을 ‘존중’한다고 했다. 그때 나는 속으로 감탄을 연발하면서 “존중은, 내가 굉장히 아끼는 표현”이라고 말했다. 정말로 그랬다. 존중한다는 말 자체를 듣기만 해도 행복해지는 느낌을 받으니까. 그 또한 존중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고 했다.

“너의 뜻을 존중할게.”



누군가 내게 이런 말을 해주면, 나를 소중하게 대하는 그런 마음을 저절로 느끼게 되지 않던가. 마치 유아기에 엄마가, 잘 익은 사과를 반 잘라서 쇠숟가락으로 살살 긁어 떠먹여 주는 맛이라고 해야 하나? 적당히 달콤하면서도 포시락거리는 사과 한 스푼을 입에 넣으면, 씹지 않아도 이미 입을 벌리면서부터 엄마의 사랑을 느끼게 되니까.

그런데 나는, 좋아하던 그 말이 그렇게 쓰일 줄 미처 몰랐다. 당신의 입으로 그 말을 그렇게 들을 줄 알지 못했다. ‘존중’의 표현이 내 마음에 비수가 되어 꽂힐 줄 몰랐다.

“그만두자. 나를 존중해줘.”



내가 많은 가치를 두었던 그 말이 당신과 나의 단절이 될 줄 알았다면 진작 어디 던져버렸을 텐데. 파묻어버리고 다 찢어서 흔적도 남기지 않았을 텐데. 살면서 처음으로 언어를 전공하고 언어에 의미를 부여하는 내가 싫어지는 순간이었다. 그가 내뱉은 ‘존중’이 어떤 뜻인지 너무나 잘 알겠기에, 너무나 적확하게 와 닿아서.그를 존중하고, 나는 돌아섰다. 함께 있을 때 나를 웃게 하고 돌아서서 눈물짓게 하는 그 사람을 떠나서야 이런 생각을 한다. ‘존중’이라는 말을 그렇게 쓸 수 있었다는 것을. 내 입에 달콤하고 포시락거리는 사과 한 스푼을 넣어주기 위해 쇠숟가락에 짓이겨진 엄마의 붉은 손바닥을 떠올렸다. ‘존중’이라는 표현의 모든 이면을. 아픔을.

3부 가장 빛나는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



‘사의 찬미’는 ‘생의 찬란함’을 이기지 못해

‘사의 찬미(SBS, 2018)’는 조선 최초의 소프라노 윤심덕과 그의 애인이자 천재 극작가인 김우진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담은 드라마이다. 실존 인물들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었기 때문에 호기심이 일어서 보게 되었는데 배우들의 열연과 가슴 아픈 스토리, 영상미가 뛰어난 연출 때문에 오랜 여운이 남았던 드라마였다.

‘사의 찬미’는 말 그대로 ‘죽음을 찬미한다’라는 뜻이다. 그들은 왜 죽음을 염원하게 되었을까? 그들의 처지에서 생각해보고 싶었다. 지금의 관점으로 그들을 바라보면 물론 불륜이다. 어떻게 보아도 불륜은 미화되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현재를 사는 우리가 비난할 수 있는 시대는 아니다. 우리는 본인의 뜻과 의지대로 그 시기까지 조절해가며 결혼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고 그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현실에서 본인들이 원하는 그 어떤 것도 구현할 수 없었다. 그랬기에 목숨을 끊는 것이, 삶에서 ‘쉼’이 되는 것이었기에. 고통의 시대였다. 아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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