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으면 장례식에 누가 와줄까
김상현 지음 | 필름
내가 죽으면 장례식에 누가 와줄까
김상현 지음
필름 / 2020년 01월 / 252쪽 / 15,000원
제1장
가끔 이런 말들이 필요할 거예요너는 모난 사람들을 볼 때면 저 사람은 왜 저런 걸까 궁금해했었지. 그렇게 둥글기만 했던 네가 몇 번의 인간관계를 앓고 나서 닳고 닳은 탓일까. 이제 네가 모난 사람이 된 것 같다고 자책을 하더라. 욱하는 일들도 여럿 있었지만, 마음속에 꾹꾹 눌러 담아서 그런 걸까.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관계를 위해서 참았기 때문에 그런 걸까. 눈물 꾹 참고, 웃어 보이며 아무렇지 않은 척해서 그런 걸까.
그런 너에게, 애써 둥근 사람일 필요는 없다고 말해주고 싶다. 가끔 화를 내고, 가끔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살아도, 가끔 눈물을 흘리더라도 너를 예뻐하는 사람이 참 많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러니 그래도 된다고 꼭 말해주고 싶다.
넌 아주 재주가 있단다. 그렇단다.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그런 것들 말이야. 믿기지 않는다는 말은 꺼내놓지 않아도 된단다. 나를 바라볼 때 그 눈은 어떻고. 어쩔 땐 눈이 부실 정도로 반짝거리는 탓에 쳐다보기도 힘든 걸. 바람이 불어오면 쓸어 넘기는 머리는 어떻고. 오물조물 맛있는 걸 먹을 때 움직이는 입꼬리를 보면 나도 모르게 널 따라하게 되더라. 아, 그 입꼬리. 웃을 때면 더 예뻐지는 걸 알고는 있니. 자주 웃을 일이 생겼으면 좋겠다. 너와 나를 바라봐 주고 있는 이 계절이, 우리의 아름다움을 기억해줬으면 싶어.
너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걸, 또 누군가의 자랑이자 위로라는 걸, 꼭 기억했으면 한다. 언제나 잘될 것이라고 믿고, 함부로 뱉은 말에 더는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누구도 아닌 너만의 인생을 살아가며, 비교하거나 스스로를 깎아내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너만의 색깔을 찾아가며 다른 사람들을 보고 부러워하지 않고 새로운 것들을 계속해서 해 나갔으면 싶다. 새로운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 줄 알며 미련을 두지 않았으면 좋겠다.
참 예쁘단다. 널 바라보면 행복해진단다.
넌 아주 재주가 있단다. 그렇단다. 정말로 그렇단다.
제2장
주고받음주는 게 있어야 받을 수 있다. 오는 게 있어야 갈 것도 생긴다는 말. 모든 관계는 ‘주고받음’이 있어야 유지된다는 어느 동료 작가의 말이 뇌리에 맴돌았다. “연락을 안 해서 서운하다. 연락 좀 해라”라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고 흔히 듣는 말이지만, 정작 본인이 먼저 연락을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적어도 내가 겪어낸 관계에 있어선 말이다.
하지만 그 작가는 달랐다. 실제로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이었다. 본인이 생각날 때면, “생각나서 전화했어”라며 그저 안부만 묻고 전화를 끊곤 했었다. 처음엔 다른 의도가 있는 건 아닐까 하고 의심하기도 했다. 아무 이유 없이 안부를 묻는다는 건 지나온 내 삶에 비춰 볼 때 생소한 경험이었기에. 놀랍게도 그건 그 사람 자체, 본성, 기질이었다. 그저 생각나서 안부를 묻곤 전화를 끊는 그런 사람이었다. 나라는 사람을 목적 없이 궁금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관계를 겪어내는 과정 안에서 받는 것이 익숙한 사람을 많이 보게 됐다. 보통은 그런 사람들과는 인연을 이어가야 하는 것일까 하는 의구심이 가득해지기 마련. 그 역시 받기만 하는 사람들을 마주할 때면 누가 됐든 인연이 오래오래 이어지지 못한다고 했다. 공감되는 말이었다. 받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은 대부분 표현에 서툴렀다. ‘고마워’와 ‘미안해’라는 말을 입에 담는 걸 어색해한다. 그들은 고마운 것들을 고마워하지 못하고, 미안한 것들을 미안해하지 않았다. 관계가 이어지는 건 결국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과 마음이 연결되는 거라고 생각을 해서 그랬던 탓일까. 그들과 함께 하는 동안엔 마음이 더욱 좁아지고 주는 걸 망설이게 됐다.
마음도 역시 주고받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음이라는 건 주고받을 때 크기도 커지고 더불어 온도도 올라간다. 마음이 갔으면 상대방에 의해 다시 나에게 돌아와야 한다. 그래야 상대방에게 전해진 마음의 빈자리를 채우고, 더욱 크고 따뜻한 마음을 나눠줄 수 있기 때문이다. 받는 것에 익숙해져 그저 받기만 하는 사람은 마음을 닫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마음을 닫은 사람에게 마음을 전달하는 것만큼 힘든 게 있을까. 나는 배우지 않았는데, 힘들 수밖에.
마음을 주고받는 것, 결국 상대방을 생각하고 공감하고 배려하는 일이다. 동질성과 공감, 유대하는 것들이 사람을 심리적으로 안정적이게 만든다. 의지할 사람이 있다는 것. 주고받음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 내 모습 그대로를 받아줄 수 있는 사람. 무언가를 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사랑해줄 수 있는 사람. 비로소 마음에 안식처가 생긴 것이다. 나는 물론이고, 내 의견을 지지해줄 사람. 그런 사람을 내내 곁에 두고 싶다.
표현에 관하여‘표현’은 인간이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가장 유용한 수단이자 도구이지 않을까. 표현에 여러 범주들이 존재하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가장 바람직한 표현은 ‘감정’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중 마음을 인정하는 감정들이 더욱 그렇다. 마음을 인정하는 감정이란 무엇일까. 사랑하고, 고맙고, 미안한 감정이 그런 것들이라 생각한다. 주변을 둘러보니 사람들이 표현에 너무 인색하다는 생각을 했다.
대학 시절 어떤 선배는 조별 과제를 하는 내내 자신이 할 일을 나에게 떠넘겼다. 학기가 끝나고 방학이 찾아올 무렵, 선배는 나를 조용히 부르더니 고맙다고 했다. 그동안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했던 이유는 고맙다는 말을 하면 빚을 진 느낌이라서 잘 꺼내지 못했었다는 이유와 함께. 그가 미안하다는 말을 결국 꺼내지 못했던 건 미안하지 않아서였을까 아니면 미안하다고 이야기하면 자신이 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을까 하는 의문을 남긴 채로 그와의 인연은 그렇게 끊어졌다.
연인 간의 관계, 친구와의 관계, 부모님과의 관계, 직장 동료와의 관계 등 모든 관계에서 사랑하고, 고맙고, 미안한 순간들이 찾아온다. 나는 그럴 때마다 표현을 아끼지 않으려 한다. 특히나 사랑하고 고마운 일들이 그렇다. 나와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하는 그들에게 매순간 고맙다. 내 곁을 지켜주고 신경쓰고 기억해주는 그들이 고맙다. 그래서 작고 사소한 일에도 고맙다고 말한다.
자주 사랑한다고 이야기한다. 사랑은 유행을 타지 않으니까. 아, 언제든 말해도 촌스럽지 않다.
미안한 일들은 되도록 만들고 싶지 않지만 의도치 않게 일이 생기곤 한다. 나만 미안해지는 일이 있을 때는 상대방이 서운함을 느끼기도 전에 미안함을 전하려 노력한다. 어떤 부분이 미안하고 당신이 어떤 서운함을 느꼈을지, 앞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리라는 것에 대해 내가 품고 있는 문장들과 마음들로 미안함을 표현한다. 그럼 나의 미안함도 그의 서운함도 쉽게 풀리곤 했다.
언젠가 미안한 일이 생겼을 때, 미안하다는 말을 미루고 미뤘던 적이 있다. 끝내 표현하지 못했다. 자존심 때문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미안한 일이 생길 때마다 그때의 그 일이, 나의 행동이 떠오른다. 그 상황에서 나는 꾸밈없이 미안하다는 말, 그 말 한마디면 해결될 일에 숱한 변명과 뻔한 핑계들을 늘어놓기에 바빴다.
상대방과 나의 관계는 풀 수 없을 만큼 더욱 엉켜버렸다. 너무 꼬여버린 실은 가위로든, 입으로든 끊어내야만 한다. 그렇게 그와의 인연은 끊어지고 말았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에게 미안한 감정이 있다. 그러니 미안한 마음은 되도록 꾸밈없이 모든 걸 내려놓고 구체적이고 빠르게 표현하는 게 좋다. 결국 사랑하고 고맙고 미안한 감정은 솔직하게 내 마음 그대로 전달하는 게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간혹, 하고 싶은 말을 솔직히 표현한다는 의미로 포장한 채 주변 사람은 신경 쓰지 않고 모두 내뱉는 사람이 있다.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는 것과 무턱대고 내뱉는 건 엄연히 다른 개념이다. ‘나는 솔직한 성격이야’라는 자신만의 전제 하에 말을 무턱대고 내뱉는 것은 포장된 칼을 무작정 휘둘러 여러 사람을 다치게 하는 행동과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한다.
기억과 죽음전방십자인대와 연골을 다쳐 병원에 한참 입원해 있을 무렵이었다. 병원에만 콕 박혀 있는 게 너무나도 답답해서 어떻게든 밖에 나가 무언가 하고 싶어졌던 나는 절뚝거리며 병원을 나섰다. 두 달 만의 외출이었다. 오전 열 시를 가득 채운 아름다웠던 공기, 눈이 내린 지 얼마 안된 거리, 분주했던 출근 시간이 지나 여유로워진 분위기. 내 오른쪽 무릎만 빼고 모든 게 완벽한 날이었다.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건,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일이었다. 영화관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빨리 볼 수 있는 영화를 골랐다. 픽사에서 만든 <코코>라는 애니메이션 영화였다. 멕시코가 배경인 애니메이션 <코코>는 기억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주로 보여줬다. 영화에서 보여준 죽음은 기억이 바탕이 되었다. 이승세계와 저승세계가 따로 나뉘어 있지만 저승세계에 있다고 해서 진정한 죽음을 맞이하는 건 아니었다. 영화에서 말하는 진정한 죽음은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을 때’였다.
줄거리를 간략하게 말하자면, 일 년에 단 한번, 저승에 있는 사람들이 이승으로 넘어와 각자의 가정에서 축제를 즐긴다. 이를 ‘죽은 자들의 날’이라고 부르는데, 우리나라로 생각하면 일종의 명절인 셈이다. 저승에 있는 사람들이 죽은 자들의 날에 축제를 즐기려면 이승세계와 저승세계를 연결해주는 다리를 건너야 한다.
하지만 아무나 다리를 건널 수는 없다. 이승에서 저승에 있는 그들을 기념해 줘야만 다리를 건널 수 있게 된다. 이승에서 죽은 자들의 날에 아무도 기념해주지 않는다면 다리를 건너지 못한다. 죽은 자를 기념하는 방식은 우리나라에서 지내는 제사와 비슷하다. 해골 조형물과 메리골드로 장식을 한 곳에 죽은 자의 사진을 놓고 축제 동안 즐길 수 있는 음식들을 마련해 놓는 것이다.
죽은 자들의 날에 저승에 있는 대상을 아무도 기억하지 않거나 기념해주지 않는다면 저승에서마저 사라지게 된다. 이렇게 기억되지 못한 사람은 진정한 죽음을 맞이한다.
영화가 끝나고 많은 생각이 찾아왔다. 죽음이 찾아왔을 때 나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장례는 어떻게 치러야 할까. 내가 죽어도 기억해줄 사람이 있을까. 나 역시도 아무도 기억해주지 못할 때가 진짜로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이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죽으면 사람들은 나의 어떤 걸 기억할까.
그러다 ‘김상현’이라는 내 이름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게 됐다. ‘서로 상(相)’에 ‘어질 현(賢)’. 둥글둥글 착하고 현명하게 살라는 의미의 이름이다. 윤숙, 미숙, 현숙, 인숙, 명숙. 다섯 딸을 키우며 힘든 일을 많이 겪어서였을까. 할아버지는 당신의 첫 손자 이름을 지어줄 때 세상을 둥글둥글 착하고 현명하게 살아가길 바랐던 것 같다. 지난 시간들을 돌이켜보니 이름 그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무엇이든 이름, 제목을 따라간다고 하던데 그 말이 진짜인가 싶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귀가 잘 안들리셨다. 그래서 대화를 해야할 땐 언제나 가까이서 큰 목소리로 말해야 했다. 할아버지는 귀가 잘 들리지 않아서인지, 목소리가 크셨다. 가끔 할아버지 댁에 놀러갈 때면 저 먼 곳에서부터 할아버지 목소리가 들려와서 반가울 정도였으니까.
나와 내 동생은 할아버지 댁에 놀러갈 때면 텔레비전을 맘껏 볼 수 있어서 좋아했다. 할아버지는 항상 자막이 있는 프로그램을 보셨는데, 나와 재현이는 나이도 생각도 어렸던 탓에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만 보면서 재밌어 했다. 할아버지는 자막도 없는 프로그램을 끝날 때까지 우리와 함께 보곤 하셨는데, 재현이와 내가 낄낄거리며 웃을 땐 할아버지도 덩달아 웃곤 하셨다. 그럴 때면 할아버지 귀가 안 들린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모두가 함께 웃고 있다는 생각에 더 크게 웃곤 했다. 그 모습을 할아버지는 좋아하셨던 것 같다.
밥을 다 먹고 나면 한 톨의 밥풀도 남기지 않고 싹싹 긁어먹은 밥그릇을 할아버지께 보여드리곤 했다. 그럼 할아버지는 큰소리로 잘했다고 칭찬해주시며, 볼록 튀어나온 배를 만져주곤 하셨다. 약주를 하실 때면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 한 잔씩 따라드리기도 했다.
스무 살이 되던 해, 이제 다 컸다고 생각했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는 나를 아이처럼 바라봐주셨다. ‘돈을 벌게 되면 언젠가 할아버지에게 꼭 용돈을 드려야겠다’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갑자기’였다.
한 음주 운전자가 할아버지를 발견하지 못하고, 그대로 박아버렸다. 그리고 두려웠던 나머지 도망갔다. 할아버지는 그렇게 돌아가셨다. 영정사진도 찍어두지 못해 막내이모의 결혼식 사진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영정사진으로 썼던 우리 할아버지.
갑작스럽지 않은 죽음이 어딨겠냐마는 내가 겪은 첫 번째 죽음은 그렇게 갑작스러웠다. 갑작스럽게 죽는다는 건 주변 사람들이 죽음을 준비하지 못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는 나에게 많은 걸 알려주었지만, 자신의 마지막은 알려주지 않았다. 내 이름을 갖고 살아가는 동안 나는 그를 기억할 것이다. 그럼 그는 아직 진정한 죽음을 맞이하진 않는 거니까. 어디선가 나를 바라봐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겪은 첫 번째 죽음 이후, 여러 죽음들이 내 주변에 찾아오기 시작했다. 아파서, 사고로, 스스로, 갑자기 떠나게 된 사람들.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기억할 모습들을 더는 쌓을 수 없게 되니까. 어떻게든 기억하고 싶은 것들을 남겨두려는 마음에 슬픔도 같이 오는 모양이다. 기억은 점점 사라지니까. 사라진다는 것은 결국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니까. 기억하지 못한다는 건 결국 정말로 죽게 되는 것이니까. 더욱 오래 기억하고 싶은 마음에, 더욱 오래 기억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슬픔을 불러오는 건 아닐까.
죽음에 대하여 기억에 대하여 슬픔에 대하여 생각할 때마다, 나는 오래오래 살아남아서, 당신들 곁을 끝까지 지켜내고 싶은 마음인데……. 내가 죽으면 장례식에 누가 와줄까.
귀하게 지어준, 값진 의미를 부여한 내 이름 세 글자를 잘 쓰고 싶다. 이름대로 살아가지 못하더라도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다. 좋은 사람이 되어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제3장
당신만의 색깔로 살아가는 것집단의 힘이 개인의 힘보다 월등히 강한 우리나라. 우리는 타인과 비교하고 비교 당하는 게 너무나 익숙한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다. 인정의 욕구가 그 어느 욕구보다 상위에 속하지 않는가. 대한민국에서 개개인이 지니고 있어야 할 자존감은 무너지거나 떨어지기 쉽다. 판단의 기준은 ‘자신’이 아닌 ‘타인’으로 바뀐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게 된다. ‘다른 사람이 이상하게 보면 어떡하지?’라는 꽉 막힌 프레임 속에 갇혀, 타인의 의견이 전적으로 반영된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비교한다. 타인이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줄 때 비로소 자신이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나’의 존재를 타인으로부터 느끼게 되는 것이다.
집단의 힘이 강해지는 이유는 ‘획일화’ 때문이다. 모든 게 똑같은데 나만 다른 건 아무래도 눈에 띄게 마련이다. 눈에 띄는 건 불편하다. 집단에서 개인의 색을 드러내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고 여기게끔 만든다.
결국, 집단이 공존하고 유지될 수 있는 건 통일성과 획일화에 달려 있다고 믿는다. 개개인이 자유로워질수록 통제가 어려워지고 조직이 와해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타인에게 반복적으로 획일화된 기준과 잣대를 강요한다.
자신만의 기준을 적용하면, 나태하거나 이상한 사람으로 낙인찍히거나, 다른 사람의 걱정을 사게 될 거라 지레 짐작해버린다. 태어남으로 이미 충분한 가치를 입증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가치를 타인의 가치와 비교하고 그 수준에 도달하려 애쓴다. 애초에 다른 평가 기준이 적용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욱여넣어 맞추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