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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불빛들을 기억해

나희덕 지음 | 마음의숲


저 불빛들을 기억해

나희덕 지음

마음의숲 / 2020년 02월 / 268쪽 / 13,800원



1부 점



건천(乾川)이 소리를 내기 시작할 때

만물에 대한 글썽임: 어릴 때 유난히 울음이 많았다. 슬프거나 아프지 않을 때에도 공연히 눈물을 글썽거리기 일쑤였다. 노을빛을 우두커니 바라보다가 눈가에 물기가 맺혔고, 심중의 말을 간곡하게 몇 마디 꺼내려 해도 울먹임이 앞을 가로막았다. 너무 아름답거나 간절한 것을 보며 어린 나이에 왜 환희보다 아련한 슬픔을 느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그 툭하면 터지던 울음이 내가 문학이라는 불꽃을 지피는 데 주된 연료였을 거라는 생각은 든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감상적 낭만주의자라는 뜻은 아니다. 나는 내 문학이 만물에 대한 글썽임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식하면서부터 오히려 그 눈물을 말리고 식히기 위해 애를 썼다. 그래서인가. 언제부턴가 웬만한 일에는 울지 않게 되었다. 견디기 어려운 치욕이나 슬픔 앞에서도 울음은 속에서만 아우성칠 뿐 좀처럼 목을 밀고 올라오는 일이 없어졌다.

홍사용의 <나는 王이로소이다>는 다소 장황하고 과장된 시이기는 하지만, 삶이 얼마나 슬픔으로 점철된 것인가를 보여주며 그것을 잘 다스리라 이른다. 어머니는 어린 아들의 귀밑머리를 단단히 땋아주면서 “오늘부터는 아무쪼록 울지 말아라” 말한다. 그날부터 눈물의 왕은 “어머니 몰래 남모르게 속 깊이 소리 없이 혼자 우는 그것”이 버릇이 되었다. 이처럼 누구에게나 자의든 타의든 마음의 물줄기를 감추어야 하는 시기는 찾아오게 마련이다.

따라서 눈물이 말랐다는 것은 세상사에 무심해져 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밖으로 흐르지 못함으로써 내면으로 더 깊이 숨어버린 물줄기 같은 게 있는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은 저마다 마음 속에 건천(乾川)을 하나씩 품고 사는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다. 슬픔을 섣불리 표현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자신의 슬픔에 덜 열중하게 될 때, 시인으로서는 다른 존재의 울음소리에 좀더 귀 기울일 수 있게 된다.

세상의 소리들을 잘 듣기 위해서: 꽤 오래전 일이다. 1박 2일 일정으로 열리는 문학 행사에서 아름답고 화사한 한 여성 시인을 보았다. 먼발치에서 바라보았을 뿐 그녀와 인사를 제대로 나눈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밤에 술자리가 길어지면서 술에 취한 그녀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며 몸부림쳤다. 나는 그녀가 왜 우는지 알 수 없었지만 짙은 화장기 아래 숨어 있던 아픈 영혼을 보아버린 느낌이었다.

그녀를 간신히 숙소로 부축해 들어와 재우고 나서 나는 우두커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뜨거운 기운이 목을 밀고 올라왔다. 내 안의 마른 물줄기가 갑자기 격랑을 만났을 때처럼 수압이 높아지면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잠든 그녀의 등 뒤에서 나는 영문도 알 수 없는 울음을 쉽게 그치지 못했다.

그 낯선 사람의 아픈 삶을 속속들이 알지도 못하면서 나는 왜 그녀의 슬픔이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강렬한 느낌에 사로잡혔던 것일까. 흔히 시인을 곡비(哭婢)에 비유하듯이, 그날의 경험이 내게는 우는 자로서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일종의 통과의례 같은 것이었다.

이제 생각해보니 내 시의 팔할은 슬픔이나 연민의 공명(共鳴)에서 시작된 게 아닌가 싶다. 내 안의 슬픔이 다른 슬픔과 만나 서로 스미고 어루만질 때 흘러나오는 언어. 또는 존재와 존재가 서로 삐걱거리고 뒤척이며 내는 소리들. 시는 그런 다양한 울음소리를 받아 적은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니 시인이 가장 귀 기울여야 할 것은 만물이 내는 울음소리의 섬세한 리듬과 결이 아닐까.

한 기자가 마더 테레사에게 “수녀님은 무어라고 기도하십니까?”라고 물었다고 한다. 그 질문에 테레사 수녀는 조용히 고개 숙이고 “저는 듣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의아해하며 기자가 다시 물었다. “그러면 수녀님이 들을 때, 하나님은 무어라고 말씀하십니까?” 이 질문에도 역시 그녀는 “그분도 들으십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기도는 고백과 발언의 양식임이 분명하지만 말하는 것 못지 않게 듣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이야기다.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하나의 답을 내놓아야 한다면, 먼저 세상의 모든 소리들을 잘 듣기 위해서라고 대답하고 싶다. 특히 살아있는 존재들이 내는 울음소리를 나는 좀더 가까이 다가가 듣고 싶다. 사물과 자연을 통해 누군가 얘기하고 있는 것을, 아니 사물 자체가 말하거나 울고 있는 것을 잘 듣고 있으면 그 속에는 이미 시가 흐르고 있다.

그 소리들을 받아 적어서 한 편의 시로 완성하고 문예지에 발표하고 시집을 묶는 행위는 어찌 보면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시인이 가장 충실하게 살아 있는 순간은 만물의 울음소리를 자신의 몸으로 온전하게 실어낼 수 있는 때다. 마음 속의 건천이 소리를 내기 시작할 때, 죽은 것처럼 보이던 존재가 되살아나고 보이지 않던 것도 보이기 시작한다.

시는 마른 폭포 같은 것: 언젠가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작은 폭포를 찾아 강원도 산길을 올라간 적이 있다. 어느새 인가도 사라져버리고 가파른 산길에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이 길로 올라가다 보면 폭포가 나온다고 했는데, 물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길을 잘못 든 건 아닐까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마침 한 노인이 바위에 앉아 있기에 그 폭포에 대해 여쭈어보았다. 노인은 더 올라가도 폭포를 볼 수 없을 거라고 했다. 몇 해 전 물줄기가 시름시름 새기 시작해서 이제는 마른 절벽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이 숨어버렸다니! 나는 그 소리도 형체도 없는 폭포를 보겠다는 일념으로 지친 걸음을 재촉해 올라갔다. 얼마쯤 올라갔을까. 물이 거의 마르다시피 한 계곡에 홀연 서 있는 절벽을 보았다. 절벽에는 아직 풀포기들이 드문드문 자라고 있었다. 풀포기들은 마치 절벽 속으로 사라진 물줄기를 따라들어간 푸른 발자국들처럼 보였다. 물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난 오래도록 그 절벽 앞에 앉아 물소리를 들었다. 더 어두운 곳에 닿아 측량할 수 없는 높이로 곤두서 있는 물소리를. 더 깊이 울게 된 물소리를.

시가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이란 그 마른 폭포와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러면서 정지용의 시론을 되새기게 된다. “안으로 열(熱)하고 겉으로 서늘옵기란 일종의 생리를 압복시키는 노릇이기에 심히 어렵다. 그러나 시의 위의(威儀)는 겉으로 서늘옵기를 바라서 마지 않는다.”이 말처럼, 눈물을 다스리는 힘이 없이 슬픔을 제대로 노래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울음을 터뜨리려는 힘과 울음을 다스리려는 힘의 팽팽한 긴장, 겉으로는 서늘한 듯하면서 안으로는 뜨거운 슬픔의 샘에서 길어올린 진폭과 파동을 지닌 언어. 시의 위엄은 바로 그런 내면의 싸움을 통과한 언어에 의해 얻어질 수 있는 것이리라.

여기 비추어볼 때 그동안 내가 써온 시는 얼마나 진정성을 지닐 수 있을까. 뒤돌아보면 수많은 슬픔의 물줄기가 실핏줄처럼 뻗은 채 도란거리고 있다. 저 젖은 길들을 과연 내 발로 걸어오기는 한 것일까. 바라건대, 저 실핏줄들이 모여 언젠가는 슬픔의 강물 하나 만들어낼 수 있기를. 넓게 흐를수록 더 깊이 숨어서 우는 건천이 되기를.

나는 너를 듣고 싶다

아지랑이와 먼지: 옛날에 들었던 얼음나라 이야기에서는 모든 말이 입에서 나오는 순간 허공에 얼어버린다. 한번은 말얼음을 보자기에 싸서 이웃나라에 가던 사신이 그만 보자기를 땅에 떨어뜨려 얼음이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얼음조각들을 간신히 주워들고 이웃나라에 도착한 일행은 그것을 뜨거운 물에 녹였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 소식인즉 얼음나라의 잔치가 연기되었다는 것인데, 그걸 모르고 찾아갔다가 며칠 굶고 돌아왔다는 이야기다.

이윽고 얼음나라에 봄이 찾아와 아지랑이가 피어나고, 그 사이로 어떤 소리들이 들려왔다. 꼬르륵, 꼬르륵……. 그들의 배고픔조차 너무 늦게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작가도 제목도 기억나지 않지만, 말에 관한 상징을 품고 있는 이 이야기 덕분에 봄이 오면 아지랑이가 피워올리는 말에 귀 기울이게 된다. 햇빛을 받은 말들, 따뜻한 물 속에 녹기 시작한 말들의 수런거림을.

『장자』 <소요유> 편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아지랑이와 먼지. 이는 천지간의 생물이 서로 입김으로 내뿜어 생기는 현상이다.” 굳이 이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먼지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것은 단순히 과학적인 현상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과학적 해명 이상의 독해를 필요로 한다. 아지랑이와 먼지는 일종의 언어이다. 살아있는 존재들이 입김을 내뿜어 표현하는, 허공에 투명하게 떠도는 그 말들을 알아듣기 위해서는 마음의 귀가 필요하다. 그리고 눈과 코와 혀와 입술, 손으로도 들어야 한다.

침묵을 뚫고 도란거리기 시작하는 그 소리들은 아지랑이처럼 따뜻하고 아련하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찾아오듯 이따금 말의 해빙이 찾아오는 날. 굳게 닫혀 있던 입들이 열리고 말의 얼음조각들이 온기에 녹기 시작하면서 모락모락 무어라 말하기 시작한다.

부름켜와 나이테: 식물의 줄기나 뿌리의 단면을 보면, 수피와 목질부 사이에 부름켜가 있다. 그리고 굵은 나무에는 수십 개의 나이테가 있다. 그것은 세포분열의 흔적이지만, 좀더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나무가 비바람을 견디며 살아낸 역정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말에도 부름켜나 나이테 같은 게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말에서 켜켜이 쌓인 시간성을 느낄 때, 그 말은 한층 깊게 들린다.

이른 봄날 오래된 묵정밭을 일구기 위해 흙 속에 삽을 깊이 밀어 넣었다. 땅을 일구는 행위는 우선 푸성귀나 열매를 얻기 위해서지만, 그 푸른 목숨들이 자라는 동안 대화를 나눌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돋아난 새싹, 어제보다 넓어진 잎사귀, 하루하루 키가 자라고 굵어가는 줄기, 피어나는 꽃망울, 둥글게 맺히기 시작한 열매……. 시간이 지나간 자리마다 늘 새로운 이야기가 남겨져 있다.

그것은 아마도 흙이 풍부한 말의 지층을 품고 있어서이기도 할 것이다. 밭에 가서 나는 “삽날에 발굴된 낯선 흙빛,/ 오래 묻혀 있던 돌멩이들이 깨어나고/ 놀라 흩어지는 벌레들과/ 사금파리와 마른 뿌리들로 이루어진 말의 지층”(<한 삽의 흙> 중에서)을 눈이 부신 듯 우두커니 바라보곤 한다. 한 삽의 흙에는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오글거리고 있는지……. 빛에 마악 깨어난 한 세계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하루의 경작은 충분하리라. 그렇게 발굴된 말은 늘 현재형이다.

열매가 떨어질 때: 사람들이 말할 때 그 억양이나 발음에 유심히 귀를 기울여보면, 저마다 모양이 다른 것을 느낄 수 있다. 둥근 말, 각진 말, 길고 뾰족한 말, 짧고 뭉툭한 말, 우둘투둘한 말……. 귀로 듣는 말소리들이 마치 눈에 보이거나 손에 만져지는 것처럼 다양한 모양과 질감으로 변형되곤 한다.

나무 열매가 떨어질 때도 비슷하다. 발화의 순간을 오래 기다려온 나무는 가을이 되면 유난히 수다스러워진다. 가을밤 숲에서 열매가 떨어지거나 굴러가는 소리를 들으면 그 열매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을 듯하다. “열매는 번식을 위해서만이 아니라/나무가 말을 하고 싶을 때를 위해 지어졌다는 것을”(<저 숲에 누가 있다> 중에서) 알게 되면서부터 가을밤 내 발길은 자꾸 숲으로 간다.

신성한 숲을 지나며 어둠 저편에 보이지 않는 누군가 있다고 생각한 것은 상징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신이 나무 위에 앉아서 던지고 있는 둥근 말을 받아 적으려고 했다. 그들에 비하면 현대의 시인들에게 남아 있는 숲은 그리 풍요롭지 못하다. 그러나 가상의 숲을 손가락으로 내달리면서도, 조화가 꽂혀 있는 돌계단을 걸어내려오면서도 여전히 머나먼 숲을 향해 두리번거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울음소리를 따라: 말은 공기와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낯선 곳에 살게 될 경우 공기가 희박해지는 것처럼 고립감과 절박함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그 고립감은 다른 소통으로 이끌기도 한다. 너무 작거나 너무 커서 인간의 가청 범위를 넘어서는 소리들이 들려오는 것도 그런 때가 아닐까 싶다. 물리적 실재를 전혀 갖지 못한 환영이나 환청에 가까운 존재들이 말을 걸어오기도 한다.

늦가을 마른 덤불 속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는 누구의 것인가. ‘다른 말’에 대한 갈망이 여기까지 나를 이끌어왔으니, 그 울음소리를 따라 더 멀리 가리라. 들리지 않는, 그러나 사방에서 말을 걸어오는 존재들이여. 나는 너를 듣고 싶다.

2부 선



타인의 냄새

여름날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가장 힘든 것은 타인의 냄새다. 비라도 내린 뒤에는 땀과 비와 체취가 뒤섞여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냄새가 나기도 한다. 지하철이면 다른 칸으로 이동할 수 있지만 밀폐된 버스나 택시에서는 참고 가는 수밖에 없다. 그럴 때는 타인의 냄새가 그 존재 자체를 견딜 수 없게 만들어버린다.

후각은 오감 중에서 가장 수동적인 감각이다. 눈은 감을 수 있고, 입은 다물 수 있고, 귀는 막을 수 있고, 손은 뗄 수 있지만, 코는 차단하기가 어렵다. 코는 호흡과 후각을 함께 담당하기에 숨을 멈추지 않는 한 냄새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다이앤 애커먼이 쓴 『감각의 박물학』에 따르면, “인간은 매일 약 2만 3040회 호흡하고, 12입방미터의 공기를 마셨다가 내뱉는다. 한 번의 호흡에는 약 5초가 걸리고, 그때 냄새 분자들이 몸속으로 들어온다.” 인간이 직립보행을 하면서 후각이 현저하게 약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예민한 사람은 만 가지 이상의 냄새를 구별할 수 있다고 한다. 우리의 코는 그야말로 매순간 갖가지 냄새의 습격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냄새에 대한 반응 역시 가장 즉각적이다. 불쾌한 냄새가 나면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리거나 코를 틀어막고 ‘이게 무슨 냄새지?’ 하며 두리번거린다. 냄새는 어떤 소리도 없이 퍼져가는 침묵의 자극이자, 어떤 모습도 드러내지 않는 투명의 자극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체불명의 냄새에 대한 무의식적인 반응이 누군가에게는, 특히 그 냄새의 출처가 된 사람에게는 치명적인 모욕감을 줄 수 있다.

영화 <기생충>에서 냄새는 계층 간의 위계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기호로 등장한다. 박 사장 가족은 자신의 집에 드나들기 시작한 외부인들에 대해 독특한 냄새를 감지한다. 결국 기택은 자신의 냄새에 대한 박 사장의 태도에 순간 살인을 저지르고 만다. 그 장면을 본 후로 냄새와 계층의 관계를 자주 떠올리게 된다. 타인의 냄새에 반응하는 태도도 신중해졌다.

며칠 전 비가 쏟아지는 날 택시를 탔는데 택시 안에서 형언할 수 없는 냄새가 났다. 무심코 “무슨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라는 말이 흘러나왔지만, 얼른 입을 다물었다. 승객마다 이런 말을 던졌다면 그 택시 기사는 어떤 기분이 들까 싶어서였다. 입도 창문도 열지 못하고 한 시간 가까이 냄새의 감옥에 앉아 있었던 것은 운전대를 잡은 사람을 자극하고 싶지 않아서만은 아니었다. 타인의 냄새를 견디는 일에도 어떤 훈련이 필요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사, 집의 기억을 나누는 의식

우리가 평생 깃들어 살게 될 집의 수는 얼마나 될까. 아주 드문 경우지만 태어난 집에서 일생을 마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 년이 멀다 하고 이사를 다녀야 하는 사람도 있다. 전자의 사람에게 집은 존재의 유일한 근거지이자 가두리일 것이고, 후자의 사람에게 집은 생활을 꾸리기 위해 잠시 거쳐가는 처소에 가까울 것이다. 어느 쪽이든 집은 거기 깃들어 사는 사람의 영혼의 상태를 말해준다. 실제로 어린아이에게 집을 그려보라고 하면 그 아이의 심리 상태가 잘 드러난다. 행복한 아이는 온기와 활기가 느껴지는 안정된 집을 그리지만, 불행한 아이는 비좁고 싸늘한 집을 그린다. 그만큼 집은 우리 존재가 뿌리내리고 있는 삶의 중요한 터전이다.

그런데 현대사회로 올수록 집의 고유한 가치나 의미는 상당히 희박해진 듯하다. 이사철만 되면 전세 대란을 겪어야 하고 치솟는 전세금에 맞추어 해마다 집을 찾아다녀야 하는 서민들에게는 집의 의미를 운운하는 것조차 배부른 노릇일지 모른다. 또한 바쁜 일상에 쫓겨 가족들이 둘러앉아 밥 한 끼 먹기도 힘든 세상이니 집은 단순히 잠자리 이상의 역할을 하기 어려워졌다. 부평초처럼 직장 따라, 전세금 싼 동네를 찾아 이리저리 옮겨다닐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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