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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소 진짜 나로 사는 기쁨

윤재윤 지음 | 나무생각
소소소 진짜 나로 사는 기쁨



윤재윤 지음 최원석 그림

나무생각 / 2019년 1월 / 288쪽 / 13,800원





1장 小 작아야, 날아오른다



누구에게나 신이 있다



얼마 전 지인인 A의 부고를 받고 깜짝 놀랐다. A는 나보다 두 살 아래로 중견 회사를 경영하고 있었는데 별명이 건강 전도사였다. 건강해야 인생을 제대로 살 수 있다면서 운동을 열심히 하고 섭생에도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활력이 넘치고 성품이 쾌활해 만나면 항상 풍성한 기운을 얻곤 하였다. 빈소에서 그의 마지막 삶을 듣고 보니 안타까웠다. 그는 몇 년 전 암에 걸렸고, 이어 전신마비 증세까지 생기자 극심한 우울증에 걸려서 사실상 삶을 포기한 상태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기 넘치던 사람이 절망 속에서 떠나다니. 건강과 활력이 그의 삶의 중심이었는데 이것이 사라지자 견디지 못하였던 것 같았다.

A의 죽음을 보면서 김명주 변호사가 생각났다. 김 변호사는 암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고 2년여 투병하다 세상을 떠났는데 그는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나 삶을 누린 것 자체가 참으로 감사하다.”면서 마지막까지 삶을 긍정하였다. 사람마다 상황이 다르겠지만 자신이 중심으로 믿는 것이 삶의 태도를 결정한다는 점은 차이가 없는 것 같다. 두 사람에게는 죽음 앞에서 삶의 중심이 드러났지만, 일상생활에서도 삶의 중심이 삶의 방향과 내용을 결정하는 것이리라. 신학자 앨버트 놀런은 이러한 삶의 중심이 바로 신이라고 말한다. “누구에게나 신이 있는 법이다. 누구나 무엇인가를 자기 삶의 으뜸으로 삼는 것이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돈, 권력, 위신, 자아, 출세, 사랑 등등. 각자의 삶에서 자신의 의미와 활력의 원천으로 작용하는, 무의식적으로나마 자기 삶의 최고 가치로 여기는 어떤 것이 있게 마련이다. 누구에게나 신으로 만드는 무엇인가가 있는 법이다.”

신에 관한 존재론적 논의에 대비하여, 사람을 실제로 움직이는 근본적인 믿음 체계를 ‘작용적 신학(operational theology)’이라고 부른다. 누구나 자기 삶을 움직이는 신과 같이 절대적인 힘을 의식하지 못할 뿐이지, 결국 신 없이 사는 사람은 한 명도 없는 셈이다. 돈에 집착하는 사람은 돈을, 성형수술을 여러 차례 한 사람은 외모를, 여러 모임을 허덕이며 쫓아다니는 사람은 인맥을 신으로 삼고 사는 셈이다. 이를 얻으면 신나서 들뜨고, 얻지 못하면 우울해하며 고통 받는다. 이를 얻기 위하여 다른 것 들을 희생하고 전전긍긍하면서 지내는 것이 우리네 삶의 흔한 모습이다.

평소에는 신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지만 중병, 사업 실패 등 삶의 위기 앞에 서면 신이 모습을 드러낸다. 노인들은 쇠약해지는 신체와 삶의 끝을 보면서 자신의 신을 만나게 된다. ‘지금까지 나의 삶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던 것이 무엇인가?’ 자문한다. 이어서 ‘앞으로 어떤 것을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삼고 살아야 할까?’라는 질문이 따라온다. A는 이 질문을 받고도 건강과 활력이라는 오래된 신을 버리지 못하였고, 김명주 변호사는 ‘삶이 선물’이라고 가르쳐준 신을 새롭게 만났던 것 아닐까.

참된 신은 두 가지 본질을 갖고 있다. 어떤 경우에도 변하지 않는 영속성이 첫째요, 그를 믿고 따를 때 그 열매가 좋은 것이 둘째다. 많은 사람들이 돈, 건강, 체면, 안락을 신으로 삼아 살고 있다. 이들 자체는 삶에 필요하며, 가능하면 노력해서 갖추고 사는 게 좋다. 문제는 이것이 최고의 가치, 신의 위치를 차지할 때 생긴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도 노쇠를 피할 수 없고,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정말 많다. 이런 것들은 언젠가 사라지는 유한한 것이기 때문에 이를 절대적인 신으로 받아들이면 절망은 피할 수 없고 단지 언제 그 시간이 오느냐만 문제될 것이다. 또한 돈과 안락함이 삶의 기쁨과 성장을 가져오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이런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힘이 빠져버리는 거짓 신인 셈이다.

나의 신은 무엇인가? 참된 신인가, 거짓 신인가? 나의 신을 믿음으로써 내 생명이 풍성해지는가, 아니면 삶이 불안정하고 어두워지는가? 지금 멈추어 서서 자신을 깊이 살펴볼 일이다.

클린턴의 돌멩이



빌 클린턴이 대통령으로 재임한 지 2년이 지난 1994년 초 큰 위기를 맞았다. 미국의 최대 교역국 중 하나인 멕시코가 국가부도 상황에 처한 것이다. 페소화 가치가 급락하고 외환보유고는 바닥이 난 상태여서 돈을 갚을 능력을 잃었다. 멕시코가 파산하면 불법 이민자가 대량으로 미국 국경을 넘어올 것이고 교역량이 줄어서 미국도 엄청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멕시코를 원조하여 파국을 막는 것이 시급했지만, 정치적으로는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국민들은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였고, 여론조사 결과 국민의 80%가 멕시코에 대한 원조를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돈을 빌려주었다가 멕시코가 소생하지 못하면 돈을 잃게 될 뿐 아니라, 대통령 재선의 꿈도 물거품이 될 것이 명백하였다.

그러나 클린턴은 단호하게 멕시코에 280억 달러를 지원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참모들조차 깜짝 놀랄 만큼 신속하고 대담한 결정이었다. 결국 그의 지원으로 멕시코는 위기를 벗어나 예정보다 3년이나 앞당겨 회생에 성공하였다. 정치평론가들은 이 결정을 “클린턴 재임 중 가장 인기 없고, 이해받지 못했던, 그러나 가장 중요한 외교 정책 결정”이라고 평가하였다. 그는 이에 관하여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한다. “대통령은 여론조사를 통하여 국민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특정한 시점에서 무엇이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인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여론조사가 먼 곳까지 내다보고 모퉁이까지 살펴야 하는 결정을 좌우할 수 없었다. 국민은 장기적으로 나라에 옳은 일을 하라고 대통령을 고용한 것이다. 멕시코를 돕는 일은 미국에 옳은 일이었다.”

클린턴이 치명적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성공한 대통령으로 남은 비결은 여론의 실체를 파악하고 이를 벗어나 먼 곳까지 내다볼 줄 아는 안목을 가진 데 있을 것이다. 여론이란 보이는 현상에 주로 영향을 받는 집단적 의식으로서 감정적일 수밖에 없다. 또한 여론은 현재 상태에 경도되기 때문에 사회의 장기적 비전을 형성하지 못한다. 여론이란 사람으로 치자면 수시로 변하는 감정과 같다고 하겠다. 자신의 감정만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미래에 대하여 생각할 여유가 없고 비전을 갖지 못한다. 사람이 제대로 살려면 감정의 변화에 유의하되, 이에 휘둘리지 않고 올바른 판단을 하며 자신의 삶 을 가꾸어 나가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회의 지도자는 여론을 주의 깊게 살피되, 여론을 극복하며 나아가는 비전과 용기를 가져야 한다.

이런 점에서 요즈음 우리 사회는 여론이 지나치게 강조되는 것 같아서 염려된다. 마치 감정이 잔뜩 올라 흥분한 상태에 있는 사람과 같다고 할까. 이번 총선에서도 여론조사가 핵심적인 도구가 되었다. 평상시에도 사회적 이슈가 생기면 냉정한 분석에 앞서 여론조사 결과부터 공표된다. 이렇다보니 정치 지도자들이 국가의 장래에 대하여 소신을 펴기보다는 여론의 향배에 따라 눈치를 보며 줄타기를 한다. 몇 년 전에는 정책 결정을 아예 국민 여론조사에 의하여 결정하자는 웃지 못할 제안까지 나오기도 했다. 여론에 지나치게 민감하게 되면 역사를 내다보면서 국민을 이끄는 지도자가 아니라 여론의 눈치만 살피는 근시안의 아첨꾼이 될 수밖에 없다.

클린턴은 임기의 마지막 밤을 백악관 집무실에서 작은 돌멩이를 들여다보면서 지냈다. 1969년 닐 암스트롱이 달에서 가져온 돌조각이었다. 참모들이 회의하다 종종 논쟁이 벌어져 흥분하면 그는 이 돌을 가리키며 “이 돌이 보입니까? 이게 36억 년 전에 만들어진 거랍니다. 우리는 모두 잠시 스쳐지나가는 목숨들일 뿐입니다. 마음 가라앉히고 일을 계속합시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는 그 돌 덕분에 “역사를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긴 안목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지도자의 생명은 역사를 의식하며 길게 보는 지혜를 갖고, 또한 여론을 넘어서는 용기를 갖는 데 있다. 자기가 믿는 바를 따르다가 여론에 부딪쳐 희생될 수도 있음을 알고 이를 감수할 각오를 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정치 지도자들이 국민 80%의 반대를 무릅쓰고 소신 있는 결정을 할 수 있을까? 요즈음 한창 바쁜 대권주자들에게 한강변에서 잘생긴 돌멩이를 주워서 하나씩 보내주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2장 素 세상에 단 하나, 본디 내 모습



왜 너답게 살지 못하였느냐?



어릴 때 어머니가 자주 하신 말 중에 “OO는 참 잘났다. ㅇㅇㅇ는 못났다.”라는 말이 있었다. 어머니 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어머니의 큰아버지였는데, 건장한 체격에 성격이 호방하며 일까지 잘하는 뛰어난 분이었다고 한다. 그분을 필두로 하여 어머니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꼭 품평을 하셨다. 주로 유능하고 남자다운지가 기준이었던 것 같다. 어머니는 생각 없이 느낀 대로 말을 하셨겠지만, 나는 어린 마음에도 그 기준에 따라야겠다는 압박감을 느꼈던 것 같다. 나는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편이지만 ‘내가 어머니 눈에 못 미치면 어떻게 하나?’ 은근히 걱정하기도 하였다. ‘잘나다’라는 말은 사전에 ‘얼굴이 잘생기고 똑똑하고, 뛰어나다’라고 되어 있다. 용모나 능력이 출중한 사람을 뜻하는데 이런 사람이 되기가 얼마나 어렵겠는가. 어머니는 당시 불안정한 상황에서 아이들이 큰아버지처럼 강하고 유능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런 말을 하셨을 것이다.

어머니의 이런 기준은 내 마음속에 내면화되었고, 이로 인하여 남몰래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명문 학교를 들어가니까 똑똑해 보이는 아이가 많아서 도저히 내가 잘났다는 느낌을 가질 수 없었다. 지금도 입학식 날 잔뜩 위축되었던 내 모습이 선명하게 기억날 정도이다. 이런 기분은 10대 시절에는 상당히 컸고, 점차 나아지기는 했지만 대학교 이후에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사회생활을 하면서 잘난 사람 문제가 나만의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보편적인 문제임을 알게 되었다. 특히 우리 사회는 학력, 재력, 용모를 비교하는 습성이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극심하다. 엄청난 사교육, 최고의 빈도를 나타내는 성형 수술, 자기를 과시하는 내용으로 가득 찬 소셜미디어(SNS) 등은 잘난 사람에 대한 욕구가 병적으로 강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몇 년 전 종교지도자 한 분과 식사를 한 적이 있다. 존경 받는 원로여서 가르침을 받을 생각에 큰 기대를 하였다. 그러나 이야기를 할수록 실망감이 커졌다. 그는 자신이 이루어놓은 큰일을 여러 번 거론했고, 얼굴에는 자기의 능력과 명예를 자랑스러워하는 의기양양함만이 가득하였다. 오랜 수행을 해온 종교인조차 이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씁쓸했다.

그런데 이 문제를 벗어난 생생한 실례를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만났다. 4살 된 손자와 2살 된 손녀가 주인공이다. 아이들이 웃고 울고 말하고 떼쓰는 모습을 보면 “이 세상에 나와 같은 존재는 나뿐이다!”라고 외치는 것 같다. 아이에게는 그 아이만의 특유한 무엇이 있다. 아무 일을 하지 않는데도 존재감과 자유로움이 넘쳐 나온다. 타고난 존재 자체로서의 존엄함! 천상천하유아독존의 의미가 바로 이것 아닐까. 이 아이들이 커서 얼마나 공부를 잘할지, 유능할지 알 수 없지만 그 존귀함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지 않은가. 이렇게 귀한 아이들이 자라나면서 가정과 학교에서 잘나야 한다는 기준을 강요받으며 자기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를 잊어버린다. 자신의 정체성이 외적인 조건에 의하여 규정되면 서 자기 존중감을 잃어버린다.

종교와 철학이 가르쳐주는 것은 사람은 그 존재 자체로서 이미 존귀하고, 우리의 정체성은 자신의 능력이나 업적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지혜의 사람으로 알려진 유대인 랍비 주즈야가 한 말이다. “내가 죽어서 신에게 돌아갈 때, 신은 나에게 ‘왜 너는 모세 같은 사람이 되지 못하였느냐?’라고 묻지 않고 ‘왜 너는 주즈야답게 살지 못하였느냐?’라고 물을 것이다.” 위대한 인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되라는 것이다. 잘남이 아니라 나다움이 중요하다. 사회는 업적과 결과로 사람을 규정지으므로 이러한 분위기에 대항하고 거리를 두어야 한다. 어렵고 시간이 걸리겠지만 누구나 내적으로 자신만의 정체성을 새롭게 할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나답게 사는 것이야말로 온전한 삶의 출발점이기 때문에.

나그네 인생길



라디오에서 <하숙생> 노래가 흘러나왔다.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오랜만에 듣는 노래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최희준 특유의 부드럽고 따스한 목소리도 좋지만 새삼스레 가사가 빼어난 ‘시(時)’라고 여겨졌다. 이 노래가 불후의 명곡이 된 것은 무엇보다도 ‘인생은 나그네길’이라는 가사에 깊이 공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떠오르는 일이 있다. 나그네 인생길을 특별하고도 명징하게 체험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1989년 여름부터 1년 동안 미국 시애틀에 있는 워싱턴주립대학 로스쿨의 객원연구원으로 머물렀다. 10월의 어느 바람 부는 날이었다. 샌프란시스코 일대에 진도 6.9의 강진이 발생하였다는 뉴스가 나왔다. 도로와 건물이 무너져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TV에서는 지진 피해와 앞으로 발생할 지진에 대한 중장기 예측을 하는 뉴스가 계속되었다. 더구나 10년 이내에 시애틀 지역에 대지진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다는 예측까지 나오자 주민들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일부 주민들은 그곳을 떠나야 할 지 심각하게 고민했고, 집값도 폭락했다. 대학의 동료들도 극도로 불안해하였다.

그런데 나는 이러한 공포심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 그들과 동일한 시간과 공간에 있었지만 느끼는 것은 전혀 달랐다. 몇 달 뒤에 그곳을 떠날 단기 체류자였고, 그곳에 소유한 집도 없어서 장래의 지진이나 집값 폭락을 염려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주민들의 불안한 표정을 보면서 오히려 나그네의 자유로움이 무엇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그곳에 살고 있지만 그곳의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 몸은 그곳에 있지만 마음은 그곳에 속하지 않는다는 자유의 느낌은 강력하고 신비하였다. 외적인 조건과 환경에서 자유롭다는 것이 얼마나 강한 힘인지 처음 알았다.

어디서나 이런 식으로 살면 무서울 것이 없고 정말 좋을 것 같았다. 무엇을 갖고자 애쓸 것이 아니라,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는 비움이 삶의 가장 좋은 방법임을 절감하였다. 그런데 시애틀에서 1년만 살기 때문에 나그네라면, 지구상에서 수십 년밖에 못 사는 이생의 삶 역시 나그네 아닐까? 1년과 수십 년 의 차이가 본질적인 차이일까? 어차피 찰나와 같이 유한한 삶 아닌가! 당시 시애틀에서의 체험은 나그네 인생길을 처음으로 제대로 느껴본 것이었고 그 핵심은 자유로움이었다.

이와 같은 나그네 체험을 종교에서는 삶의 본질적 형태로 본다. 『구약성경』 <창세기>에 야곱이 이집트의 파라오를 만난 자리에서 “나그네 길에,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온갖 일을 다 겪은 130세의 노인이 자신을 단순히 ‘나그네’라고 칭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일컬어지는 아브라함은 더 큰 모험을 하였다. 고향에서 족장으로 편히 지내고 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장차 보여줄 땅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는다. 요즘 말로 하자면 서울에서 큰 회사를 경영하며 잘살고 있는 사람에게 가족을 이끌고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아프리카 험지로 떠나라는 말과 같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집을 나가 스스로 나그네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 후 나그네 정신을 잊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어림도 없었다. 조금만 중요한 일이 생겨도 마치 내가 영원히 사는 존재라도 된 양 그 일에 매달려 노심초사한다. 이 땅에 와서 수십 년 머물다가 저 멀리 떠나는 나그네일 뿐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잊고 만다. 환경과 조건을 좀처 럼 떨쳐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힘들고 신경 쓰이는 일이 생길 때마다 ‘100년 후’라는 말을 떠올리곤 한다. 지금 나와 같이 있는 사람 중에 100년 후에도 살아 있을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아무리 중대한 일이라도 100년 후까지 계속되는 일은 없다. 이런 생각을 하면 나그네 정신이 웬만큼 되살아나서 자유로운 숨을 쉴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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