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채형 인간
사과집 지음 | 라이스메이커
공채형 인간
사과집 지음
라이스메이커 / 2019년 1월 / 250쪽 / 13,800원
1장. 그렇게 회사원이 된다
세련된 돼지
맨날 처먹고 회식하니 살이 찌는데 돈도 버니까 돈을 모두 옷 사고 구두 사는데 탕진한다. 그러다 보니 나랑 잘 어울리는 스타일도 찾아가는 것 같고 점차 세련되어지는 것 같은데 스트레스를 또 먹는 걸로 푸니 나는 점차 세련된 돼지가 되어가는 것이다.
정신승리의 오류
1. 회사에서 실수를 할 때마다 혹은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릴 때마다 ‘지금 하는 이 실수는 내가 앞으로 저지를 수많은 실수 중 아주 작은 것에 불과하다’ 내지 ‘이 실수는 훗날 내가 저지를 다른 실수로 잊혀질 것이다’라고 이상한 방식으로 정신승리를 한다. 하지만 그런 실수가 쌓여 흘러넘칠 지경이라 이제 다른 변명거리가 필요하다
2. 나의 실수와 멍청함에 위로가 되는 건 남의 실수와 멍청함뿐이라 갓 들어온 신입사원에게 나는 신입 때 이렇게 멍청한 실수도 했으니 넌 뭘 해도 나보다 잘할 것이니 실수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나의 경험담을 들려주는데 말하면 말할수록 이 회사에서 나를 왜 뽑았나 하는 의문이 든다.
조언에 관하여
1. 오늘은 우리 팀에 신입사원이 왔다. 이것저것 알려주는데 내가 뭐라고 누굴 가르치나 민망하다가도, 지금 이 순간 누구보다 내 말을 경청하고 목말라하는 한 사람이 있다는 게 고맙고 짜릿하다. 그래서 선배들이 그렇게 말을 많이 하나 보다. 후배에게 적당히 말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지.
2. 누군가에게 조언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내 경험이 절대적인 정답이 아닐 확률이 높고 정답이라고 할지라도 우선 자기 방식으로 망해보는 것 또한 그 사람 인생의 한 부분을 구상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조언보다 ‘내가 어떻게 내 멋대로 내 인생을 망쳐 왔는지’에 대해 말해달라고 한다면 정말 자세하게 알려줄 수 있다.
까막눈
확실하지 않는 정보는 모르는 게 낫다. 근원과 세부 사항을 알기 전 정보는 가십과 뜬소문에 불과하다. “어 나도 그 얘기 들어서 아는데” 하고 말을 전하는 순간 그 정보는 나에게서 떠나 완전히 다르게 재가공되거나 변환된다. 루머는 사람을 들뜨고 허세 가득하게 만들 뿐이다. 회사에서 알아야 할 정보는 학습을 통한 실무적 지식 정도다. 회사의 소식을 마지막으로 듣는 까막눈이 되는 게 이것저것 애매하게 다 듣는 것보다 낫다.
독일 자동차 회사의 휴가 전략
1. 여름휴가를 갔다 돌아오니 100개가 넘는 메일이 쌓여 있었다. 휴가 중간쯤부터 회사 갈 생각에 초조해지기 시작했고, 휴가 끝물엔 사내 메일을 확인하고 회신할 내용을 구상하기까지 했다.2. 뉴욕대에서 심리학을 가르치는 애덤 알터 교슈는 그의 테드 강연에서 독일의 자동차 회사 다임러의 훌륭한 휴가 전략을 언급했다. 장기 휴가로 자리를 비운 사람에게 메일을 보내면 “지금 휴가 중이니 나중에 답장하겠습니다”라는 문구 대신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자동 회신이 간다. “지금은 휴가 중이니 보낸 메일을 삭제했습니다.” 이런 ‘휴가 중 메일’ 시스템은 휴가 중 수신한 메일을 자동으로 지워줄 뿐만 아니라, 발신자에게는 대체 담당자 연락처를 자동으로 발송해준다.
“이 사람은 당신이 방금 쓴 메일을 영원히 보지 못합니다. 2주쯤 후엔 다시 메일을 보내든가,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보내시든가요.”
3. 회사의 일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휴가를 가면 마냥 즐거울 수 없다. 휴가 이후엔 그때까지 미루고 외면해온 일을 대면해야 하기 때문이다. 해도 해도 줄지 않는 일, 이런 상황에서 휴가는 ‘힐링’이 아니라 도피가 된다. 업무에서의 무한궤도는 사람을 탈진시킨다. 직장 생활이라는 장기 레이스를 위해서는 중간중간 리스타트할 수 있는 정지 신호가 필요하다.
4. 정지 신호 없이 일한 사람이 보통 한 번에 정지를 하죠.
아무것도 하지 않는 휴가
1. ‘가족사랑휴가’라는 명칭의 1주일 휴가를 냈다. 오랜만에 장기 휴가를 내고서 여행도 가지 않고 가족도 사랑하지 않고 혼자 여유로운 휴가를 보냈다.
2. 회사에서 다들 이번엔 어느 나라에 갈 거냐고 묻는다. 아무 데도 가지 않는다고 했더니 “그래, 그런 시간도 필요하지…” 하면서도 늦지 않았으니 지금이라도 비행기표를 끊으라고 재촉한다. 직장인에게 장기 휴가란 쉽게 돌아오는 기회가 아니니까. 다만 이렇게 머리가 복잡한 상태로는 새로운 경험을 할 여분의 정신이 없다.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안식의 시간만이 절실하다.
3. 그렇게 며칠을 보냈다. 좋아하는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커피를 마시며 빈둥댔는데 휴가가 벌써 다 지나갔다. 회사에서 다이어리에 쓴 투두리스트를 하나씩 지울 때는 하루가 그렇게 길었는데 말이다. 좋아하는 일을 할 때 시간은 잘 의식되지 않는다. 지금 내 8평 원룸은 한나 아렌트를 인용하자면, 작은 비시적인 공간이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곳,
시계와 달력의 저편에 영원히 존재하는 완벽한 고요,
시간에 쫓겨 허덕이던
인간적 존재가 조용히 머무는 곳,
시간의 한복판에 버티고 있는 이 작은
비시적인 공간이여!
-한나 아렌트
2장. 공채형 인간입니다
공채형 인간
HR에서 일을 하며 점점 ‘공개 채용’에서 ‘경력 또는 상시 채용’으로 채용 트렌드가 변화하고 있는 걸 보면, 나는 내가 공채여서 간신히 합격했다는 생각이 든다. 겉보기에 나쁘지 않은 학력과 경력에 근사한 말로 잘 지어낸 자소서를 쓰고, 꾸며낸 사교성으로 어렵지 않게 면접을 통과하지만 실상 제대로 된 전문성은 없는, 여지없이 딱 공채형 인간. 요즘 시대에 걸맞은 융합형 인간이라거나 하이브리드형 인재라고 나를 꾸며낼 수는 있겠으니 그렇지 않다는 걸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나는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문제인 걸까, 아니면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하지 않아서 문제인 걸까. 전문성이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은 나를 계속 괴롭힌다. 이곳을 박차고 나갈 그 ‘스페셜리티’라는 게 나에게 있나?
전문성이라는 것이 꼭 하나의 업무만을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특히 이공계 출신이 아니라면, 특정 전문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인문사회대를 졸업한 사람이라면 더욱이 그렇겠지만 제너럴한 업무를 잘 수행하는 것도 경영지원을 담당하는 스텝 부서에서는 전문성이다.
어떤 직무든 그걸 하게 하는 나의 동기, 가치관이 제대로 있는지 고민하는 게 더 중요하겠다. 결국 이력서에 한 줄 추가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나의 가치관을 보여줄 수 있는 포트폴리오겠지. 지금 내겐 아무것도 없는 게 문제지만.
퇴사 불가능
어쩌면 나는 절대 퇴사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을 한다. 직장 생활을 욕하면서도 ‘걸쳐 있는’ 이 상태에 내심 만족하기 때문이다. ‘나 퇴사할 거야!’라고 말하는 것은 직장인이 뽑을 수 있는 마지막 칼자루다. 가슴 한편에 그 칼을 품고 사는 것만으로도 어쩌면 ‘퇴사’라는 단어는 내게 쓸모를 다했다.
용기를 내지 못하고 현재에 안주하는 것을 비관하면서도, 적당히 ‘걸쳐’ 있다는 소속감을 내심 뿌듯하게 여긴다. 시도하지 않는 것에 대한 적절한 핑계, 실패에 대한 안전장치를 쉽게 뿌리칠 수 없다. 믿는 구석이 있는 상태로 현재를 비관하는 위선적인 경계에 서 있는 나는, 소비를 노동으로 돌려 막는 것을 워라밸로 착각한 채 산다. 어쩌면 평생 이렇게 안 맞는 소속감과 적당한 취미 사이를 방황하게 되지 않을까?
3장. 나와 사람들 그 사이 어디쯤
나는 이타적인 사람이 아니다
‘원하지 않는 호의를 베풀지 말자.’ 퇴사 후 추가한 버킷리스트 중 하나. 나는 그렇게 이타적인 사람이 아니다. 내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 섣불리 퍼주지 말자. ‘지키지 못할 약속’이 아니라, 지키고 스스로 빡칠 약속을 너무 많이 잡는 게 나의 문제다. 관계에서마저 미래를 담보로 현재에 이익을 얻으려 한다. 결국 고통받는 건 미래의 나…. 주문처럼 반복해서 외운다. “나는 이타적인 사람이 아니다. 빡치지 않을 약속만 하자.”
오지랖에 관하여
어떤 사람은 사생활에 관해 질문하는 것을 예의 없는 행위로 여기기도 하지만, 나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여러 상황을 고려해보면 오히려 그런 관심이 자연스럽고 적절한 듯하다.- 데이비드 소로, 『윌든』
1. 나의 과한 오지랖 혐오에 대해 경종까진 아니고 작은 종을 울리는 구절. ‘그렇게까지 싫어할 필요가 있어?’ 물론 이런 생각은 오지랖 당하는 사람이 가져야 괜찮은 생각이다.
2. 처음 만난 사람과 어떻게 대화를 시작했는지 가물가물 하긴 한데…. 보통 누군가가 던진 적절한 오지랖 질문을 시작으로 구체적 사례를 더해 서로의 세계를 설명한다. 첫 만남에 바로 죽기 전 이루고 싶은 인생의 최대 목표 같은 이야기를 나눌 순 없잖아요. 그런데 돌이켜보면, ‘오지라퍼’에게 입 싸고 참견 많다 흘겼으면서, 그 오지랖에 편하게 대화의 물고를 틀고 혜택을 보기도 했던 것 같다.
위로부적격자
나 자신을 위로할 수 있는 건 나 자신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타인에게 수없이 위로를 받고, 타인을 수없이 위로한다. 나의 위로 인생사를 돌이켜보면, 비슷한 아픔을 가진 사람은 비슷한 대로 다른 사람은 다른 사람대로 이질감을 항상 느꼈는데 말이다.
나와 같은 아픔을 전혀 경험해보지 않았을 사람에게 위로를 받을 때는 종종 벽에 대고 이야기하는 기분을 받는다. 내가 겪은 비참함을 경험해보지 않았을, 해사한 꽃같이 살아온 그의 위로는 분명 따뜻하지만 원론적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위로받을 때면 난 ‘넌 이런 적 없었잖아’ 하고 이내 그의 꽃같은 삶에 혼자 피해 의식을 느끼고, 자기 연민 속으로 더 깊숙이 침잠한다.
나와 비슷한 사람에게 위로받는 것은 더 까다롭다. 우리는 서로의 아픔을 너무 잘 알고 있고, 너무 잘 이해한 나머지, 서로를 피하고 싶어진다. ‘너와 이야기할 때면 나의 아픔이 보여, 너한테서까지 내 모습을 보고 싶진 않아.’ 공감이 과한 나머지 불필요한 감정이입에 더 피곤해지기도 한다.
이쯤 되면 위로부적격자 판정을 받을 법도 싶다. 나에게 진정한 위로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나 자신뿐이라는 믿음은 아직 변함없다. 하지만 이 말이 타인과의 위로가 전혀 필요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타임과의 위로라는 단계가 있어야만, 나를 더 잘 알고 스스로 위로할 수 있다.
이별 후 호프집에서 친구의 시간을 축내가며 밤새 술을 마실 때나, 힘든 일상에 지칠 때 남자친구와의 구구절절한 새벽 전화를 떠올려보자.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말로, 울음으로, 웃음으로 털어놓음으로써 자아를 옭아매는 감정의 족쇄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관조적으로 나 자신을 수습할 수 있게 된다.
나 혼자 속으로 곪아가고 있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아픔을 진단조차 할 수 없다. 그러나 위로를 받기 위해서는 누군가에게 나의 상황을 기승전결에 따라 설명해야 하며, 이 과정에서 우리는 나 자신을 3인칭으로 돌아보게 된다. 힘들지만 하나하나 적절한 단어를 골라 타인에게 나를 객관적으로 설명하려는 노력, 그 안쓰럽지만 소중한 의식을 통해 우리는 나 자신을 더 잘 알게 되는 게 아닐까.
4장. 삶이 완벽하지 않더라도
부러움은 질투의 충분조건
부러움은 질투의 충분조건이다. 국어사전에서 부러움의 정의는 “남의 좋은 일이나 물건을 보고 자기도 그런 일을 이루거나 그런 물건을 가졌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이 있다”이고, 질투는 “다른 사람이 잘 되거나 좋은 처지에 있는 것 따위를 공연히 미워하고 깎아내리려 함”이다. 전자가 막을 수 없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라면, 후자는 더 나아가 타인에 대한 악감정이 담긴다.부러움이라는 자연스러운 감정을 외면할 때 내면에 질투와 억울함이 싹튼다. 나의 감정을 계속해서 외면할 때 질투가 쌓이고, 이 질투가 쌓이면 ‘열폭’하다 혼자 무너진다. 부러움을 막을 수는 없지만, 질투를 덜 느끼는 사람은 될 수 있다. 다양한 타인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내가 느끼는 감정을 직시하는 것.
대부분은 자신을 남보다 우월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싶어하고, 그래서 가능할 때마다 그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코미디언 고 조지 칼린은 바로 이런 열망을 정확히 포착해냈다. “나보다 느리게 차를 모는 놈은 멍청한 놈, 나보다 빨리 모는 놈은 미친놈 아닌가?”- 리처드 H 스미스, 『쌤통의 심리학』
반복적인 활동의 중요성
사소하고 별 의미 업는 행동이 주는 안정감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들은 이미 그 행위 자체에 익숙해져 별다른 시간이나 노력을 들이거나, 심지어 생각할 필요가 없다. 이러한 행위를 몰두하면 머릿속에서 나를 옭아매던 잡다한 편린들이 쏴아 걷혀지고 잔잔한 파도 같은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
나에겐 신문을 오리는 것이 그런 종류의 일 중 하나다. 물론 신문을 읽는 것에는 어느 정도의 집중력과 사고의 활동이 필요하다. 신문 전체 중 관심 있는 분야를 형광펜으로 체크하며 빠르게 훑은 후, 더 읽고 싶거나 간직하고 싶은 기사를 머릿속으로 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다음 선택된 기사들을 오리는 작업은 경건하면서 단순하다. 이른 위해선 적당히 사용감 있는 커터 칼을 준비해야 한다. 새 칼심은 약간만 힘을 줘도 뒷장 두세 페이지까지 함께 잘라버리기 일쑤다. 적당한 칼과 칼자국이 남아도 상관없는 테이블을 준비한 후에야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그다음은 간단한다. 신문지를 휘적 넘겨가며 아까 봐둔 기사를 종이의 질감과 결을 느끼면서 커터 칼로 오리면 된다. 굳이 다단에 맞춰 자를 필요는 없다. 어차피 나만 보는 거니까. 신문지는 종이의 결이 수직이기 때문에 가로로 자르는 것은 세로로 자르는 것보다 조금 까다롭다. 이런 경우에는 그냥 커터 칼을 연필처럼 쥐고 죽 그어주는 게 제일 편하다. 가장 큰 고민에 빠지게 되는 순간은 앞뒤 페이지에 모두 간직하고 싶은 기사가 있을 때이다. 관심사가 편중되어 있어 보통 경제나 스포츠 면은 오리지 않는 반면 정치나 국제, 칼럼 부분은 종종 앞 뒷장 모두 끌릴 때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는 내일의 기사를 기대하며 올바른 선택을 내릴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그렇게 열심히 신문을 스크랩하는 이유가 뭔지 물어보는데, 나는 그에 대해 딱히 할 말이 없다. 오려낸 기사는 대충의 카테고리화를 거친 후 ‘그날의 이슈’로 요약된 포스트잇과 함께 클립에 집혀지는 게 전부이기 때문이다. 원래 포부는 그 기사들을 모아 격주마다 사설을 쓰는 것이었지만 이젠 그저 종이 수집가가 된 기분이다. 정치학도라는 명목상의 지위를 이런 식으로라도 유지하고 싶어서 일수도, 혹은 매달 12,000원을 내고 신문을 구독해야만 하는 명분을 부여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심지어 요즘에는 오리기 위해 신문을 읽는다고 느낄 때도 있다.
그럼에도 내가 계속 ‘오리는 이유’는, 그저 반복적인 행위가 주는 안정감을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신문을 읽고 게다가 오리기까지 한다는 것은 하루에 그만큼의 여유를 따로 떼어두는 이에게만 가능할 것이다. 각종 의미를 부여한 스케줄에 시달리다 보면, 이런 단순 반복의 작업이 주는 ‘즐거움’이 무척이나 그리워질 때가 있다. 나에겐 사각 사각 종이를 오리는 작업이 하루 중 가장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즐거운 시간이다. 내가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을 때 얻는 작은 안도감과 위로랄까.상실과 늙음
1. 늙어감에 대해 가장 인상 깊었던 말.
수많은 상실을 몸소 겪을 것이며, 계속해서 스스로를 뛰어넘어 성장하지 못한다면 결국 그 상실감에 압도당하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