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도 둥근 해가 뜰까요?
나하나 지음 | 사과나무
내일도 둥근 해가 뜰까요?
나하나 지음
사과나무 / 2018년 12월 / 174쪽 / 11,500원
1장 유치원 화재
불이 나던 날
우리나라의 10월 기후는 ‘시원함’, ‘선선함’입니다. 그러나 나는 한국의 가을을 ‘뜨거움’으로 기억합니다. 1989년 가을에 나는 여섯 살 유치원생이었습니다. 퇴계로에 있는 교회 부설 유치원에 다녔습니다. 나는 2층 다람쥐 반에, 나보다 한 살 어린 내 남동생은 1층 기린반에 다녔습니다. 유치원 화재 사고가 나던 그해 엄마는 셋째를 임신하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아침마다 남동생과 나에게 노란 유치원복을 입히고 남매가 나란히 손잡고 유치원에 들어가는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셨습니다.
불이 나던 날 아침, 나는 동두천 할머니 집에 있었습니다. 엄마는 유치원에 가야 한다며 나를 데리러 아침 일찍 할머니네로 왔습니다. 할머니는 “꿈자리가 좋지 않은데 꼭 아이를 데려가야겠냐?” 했지만 잦은 유치원 결석이 마음에 걸린 엄마는 서둘러 나를 집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손녀딸과의 헤어짐이 내심 서운했지만 할머니는 어쩔 수 없이 다음 만남을 기약했습니다.
유치원 친구들이 내 청재킷과 청치마가 예쁘다며 구경했습니다. 나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여느 날처럼 친구들과 소꿉놀이를 하며 놀았습니다. 그때 문틈으로 연기가 들어왔습니다. 순식간에 교실은 연기로 뒤덮였습니다. 뿌연 연기 속에서 선생님과 친구들을 애타게 불렀습니다. 연기가 새어 들어왔던 문이 불타고 있었습니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습니다.
우왕좌왕 울고 소리 지르면서 숨을 곳을 찾는 우리를 보호하고 이끌어주는 어른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다람쥐 반 담임 선생님은 우리 6세 반 아이들이 죽어가는 동안 아이들을 버려두고 교실 문을 잠그고 도망을 갔습니다. 겁에 질린 아이들이 선생님께 매달리고 소리 지르자 선생님은 그렇게 행동했습니다. 이후 선생님은 처벌을 받았습니다. 선생님 역시 경험해 보지 못한 두려움 속에서 용서받지 못할 실수를 했다며 울부짖었습니다. 나와 가족들은 선생님을 용서했습니다.
사고 당시, 나는 교실 바닥 가장 밑에 기절하여 깔려있었다고 합니다. 그 밑에 깔려 불길을 피한 덕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합니다. 1989년 10월 16일 퇴계로에 있던 서울침례교회 부설유치원 화재 사건입니다. 6명의 아이가 숨지고 나는 생존 아이 7명 중 하나입니다.
우리 엄마
아래층에는 남동생이 다니는 기린 반이 있었습니다. 동생네 반은 마침 체육시간이어서 교실 밖으로 나가 운동장 수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화재 소식을 듣고 만삭의 배를 부여잡고 유치원으로 달려오는 동안, 멀리서부터 무서운 검은 연기를 보면서 심장이 요동쳤다고 합니다. 6세 반 딸아이와 5세 반 아들아이가 동시에 참당한 사고를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유치원 출입구에 도달할 무렵, 엄마는 더 이상 당신의 몸이 말을 듣지 않아 그 자리에 주자앉아 떠오르는 대로 무작정 주기도문과 머리에 맴도는 성경 구절을 반복 암송하며 호흡을 이어갔다고 합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내 딸을 머리카락처럼, 눈동자처럼 보호해 주세요.” 내가 기절해 불 속에 쓰러져 있는 동안 엄마는 불타는 건물 앞에 주저앉아 머리에 맴도는 암송을 가슴속으로 외치며 울부짖었답니다.
활활 타오르는 건물 옆 운동장 한쪽에 모여 있는 체육복 입은 5세 반 아이들 속에서 남동생을 발견하자마자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쓰러졌습니다. 내 동생은 무사했습니다. 엄마는 이날의 충격으로 셋째 아이를 조기 출산하게 되었는데 그렇게 태어난 막내 여동생은 다리가 휘어져 버려 태어나자마자 응급 수술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세상에 태어나 아빠, 엄마, 언니, 그리고 오빠의 사랑과 관심을 받아야 할 막내 여동생은 가족의 따뜻한 품이 아닌 차디 찬 수술대 위에서 다리 수술을 받고 인큐베이터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 후로 엄마는 오랜 시간 화병, 실어증, 마음의 병을 안고 살았습니다. 다친 나 때문에, 다리가 휘어져 태어난 동생 때문에, 당장 필요한 수술비 때문에 엄마는 하루를 힘겹게 겨우겨우 버티는 중이었습니다. “물… 목 말라요….” 말할 수 없는 통증과 갈증 때문에 희미하게나마 정신이 들 때면 막내 여동생을 안은 채 나를 어루만지는 슬픈 엄마의 얼굴이 보였습니다. 연기를 많이 마셔 물을 마실 수 없는 딸아이에게 딱히 엄마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나는 참담하게 많이 다쳤지만 눈, 눈썹, 그리고 머리카락만큼은 타지 않은 채 구조되었습니다. 불 속이라면 머리카락부터 타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내 모습을 보고 소방대원과 목격자들 모두 기적 같은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작디 작은 나를 불구덩이에서 꺼내 들어준 소방대원의 땀과 눈물 덕분에 나는 머리카락을 그대로 보존한 채 숨을 쉬고 있었답니다.
2장 혼자 견디는 날들
모나미 볼펜
더 이상 한국에서 치료를 이어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 부모님은 값비싼 입원비와 수술비를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바로 밑 남동생과 갓난 여동생은 친척집으로 이웃집으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부모님은 여전히 바빴습니다. 병실에 누워 있는 나의 병원비를 마련하는 일뿐만 아니라 다른 부모님들과 함께 화재가 난 교회 유치원을 상대로 소송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시간과 돈 그리고 체력이 턱없이 모자랐습니다.
엄마의 지인 분이 우리 가족에게 미국 어딘가에 화상 아동만을 위한 화상 전문 병원이 있다는 얘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나는 그런 병원이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그 병원에서는 재워 주고, 먹여 주고, 무료로 수술을 해주고 무상으로 교육까지 시켜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날로 엄마는 여기저기 전화해서 그 병원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한 손에는 모나미 볼펜을, 한 손에는 수화기를 들고 이야기하는 엄마의 목소리에 희망이 느껴졌습니다. 아주 오랜만에 들어보는 엄마의 들뜨고 흥분된 목소리였습니다. 엄마는 없는 병원도 만들어낼 판이었습니다.
내가 모나미 볼펜을 기억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집에 유독 볼펜이 많았기도 하지만 엄마는 신앙과 모나미 볼펜의 작명 배경 때문입니다. 모나미 볼펜의 정식 이름은 모나미 153입니다. 성경에서 베드로가 예수님 지시대로 그물을 던졌더니 153마리의 물고기가 잡혔다는 내용에서 착안해 붙인 숫자라고 엄마에게 여러 번 들었습니다.
엄마는 그 볼펜만을 사용했습니다. 모나미 볼펜의 기적인지, 예수님의 은총 덕분인지, 엄마의 간절함 때문인지 알 길이 없지만, 엄마는 기어코 그 병원을 찾아냈습니다. 미국 하와이에 있는 슈라이너스 화상 아동 병원입니다.
3장 하와이 병원 생활
슈라이너스 병원
하와이 슈라이너스 병원은 1923년 설립되었습니다. 가정형편이 좋지 않거나 혹은 장기 치료가 필요한 전 세계의 화상 아동을 대상으로 무료 수술 지원과 무상 교육을 제공하는 병원입니다. 미국에는 총 22개의 슈라이너스 병원이 있는데 당시 하와이에 갔을 때는 이보다는 적은 수의 병원이 있었고 그중에서도 화상을 전문으로 하는 아동 병원은 텍사스 주와 하와이 주 단 두 곳뿐이었습니다. 슈라이너스 병원은 화상으로 고통 받는 아이들에게 교육과 치료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신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와이 공항에 내렸을 때의 첫인상은 태양이 무척 뜨거웠지만 바람이 불어 시원하게 느껴졌습니다. 수녀님은 야자수 나무 향이 좋다고 했습니다. 수녀님이 공항 면세점에서 파는 마카데미아 초콜릿을 한 상자 사서 한 알씩 내 입에 넣어주셨습니다. 수녀님은 종아리까지 오는 치마에 검정 스타킹을 신고 있었습니다. 겉옷을 벗어 들기엔 짐이 많아 수녀님은 땀을 닦으며 걸었습니다. 수녀님 어깨에는 수녀님 가방과 내 가방이, 한 손에는 초콜릿이, 남은 한 손으로는 내 손을 잡은 채로 모든 일을 척척 해내셨습니다.
병원에 도착하니 병원 사람들이 우리를 반겨주었습니다. 수녀님은 사람들을 한 명 한 명씩 껴안고 볼 뽀뽀를 하며 반가워하셨습니다. 수녀님이 오랜만에 병원에 오셨던 모양입니다. 간호사 선생님이 나를 가리키며 정말 오랜만에 한국 아이가 왔다고 했습니다.
하와이는 예나 지금이나 대표적인 아름다운 휴양지로 알려진 곳입니다. 그 아무리 아름다운 곳일지언정 어린 나의 마음은 외로웠고 몸은 아팠습니다. 부모와 떨어지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습니다. 열흘 정도의 적응 기간이 끝나고 수녀님은 한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가족과 떨어져 지내면서 내 몸에는 가시가 하나 둘 자라고 있었습니다. 병원 침대에서 눈을 뜨는 게 무서웠습니다. 수술방 침대는 왜 그렇게 차가운지, 병원은 왜 그리 캄캄한지, 다른 생김새의 사람들, 다른 언어, 다른 음식, 낯선 곳에서의 생활로 내 마음에도 화상 같은 통증이 시작되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가시가 나를 찌르고 있었습니다. 몇 밤만 자면 엄마, 아빠를 만날 수 있다는 말로 시작된 병원 생활이 2년을 넘겼습니다.
처음에는 영어를 모르니 마음이 아프다고 표현할 길이 없어 가슴을 움켜쥐고 소리만 질렀습니다. 식판을 엎고 물건을 던지고 침대 밑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커서 내가 이 병원으로 봉사활동 다니며 들은 이야기인데, 그때 내 환자 차트에는 “짐승처럼 포효한다.”라고 적혀 있었답니다. 시간이 지나서 하는 말이지만 나는 솔직히 그 차트 평이 마음에 듭니다. 더 심한 말이 적혀 있을 줄 알았는데 간단명료해서 다행입니다.
당시만 해도 하와이에는 원주민이 많이 살던 시절이라 주민들은 윗옷을 입지 않은 채 맨발로 거리를 활보했습니다. 병실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샤카(알로하 인사의 손 모양)로 인사해 주었고 수달이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침실엔 항상 커다란 도마뱀이 돌아다녔는데 하와이에서 도마뱀은 행운을 상징합니다.
병실 하나에 침대 6개, 6명의 또래 친구들이 함께 지냈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언어와 문화를 존중하며 누군가 수술을 받고 온 날에는 그 친구 곁에서 서로를 껴안고 함께 잠을 자곤 했습니다. 병원에서 캄보디아, 베트남, 아프리카, 말레이시아 등 저개발 국가의 아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지뢰를 밟고 화상을 입은 아이, 학대 받고 화상을 입은 아이, 사연도 제각각이었습니다.
슈라이너스 학교
병원 학교생활에도 점차 적응해 갔습니다. 1학년 담임인 코메나카 선생님과 함께 철마다 꽃을 심고 아침저녁으로 새 모이를 주었습니다. 우리가 직접 재배하여 따먹는 토마토는 신선했고 우리가 주는 모이를 먹으러 찾아오는 새들도 병원 정원은 늘 북적거렸습니다. 두음법칙을 적용하지 않은 내 이름은 라하나였습니다. 코메나카 선생님은 내 이름이 좋다며 영어 이름 말고 그대로 사용할 것을 권유했습니다. 한창 엄마의 손길이 필요할 나이에 이곳에 와서 오랜 시간 머물 걸 생각하니 마음 아팠던지 선생님은 유독 나를 신경써 주고 엄마처럼 잘 따랐습니다.
하와이 병원에서 받은 가장 큰 수술 중 하나는 ‘집게 손 만들기’입니다.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만큼 불에 녹아버린 오른손을 외형적으로, 기능적으로 개선할 수 있게 손 모양을 집게 모양으로 만들어주는 수술입니다. 내 오른손은 손가락이 다 타버려 손바닥만 남아 있었습니다. 손가락을 만들기 위해 뼈 이식 수술을 해야 하는 것은 물론 1년 가량의 물리치료를 필요로 하는 큰 수술이었습니다.
이미 수술에는 도가 터서 얼마나 아플지 알기에 이번 수술만큼은 피하고 싶었습니다. 수술 못지않게 회복 과정도 힘들었습니다. 1년 정도 물리치료를 받았습니다. 분명 이 손가락을 들어 올렸는데 다른 손가락이 움직였습니다. 손가락은 세 개뿐인데 왜 다섯 손가락이 아픈 것 같은지 답답하기만 했습니다. 오른손을 사용할 수 없어 왼손이 분주해졌습니다. 왼손도 뼈 이식이 필요한데 손가락을 만들어 줄 뼈가 모자라 의료진은 발가락을 떼어 이식하는 수술을 제안했습니다. 오른손에 비하면 왼손은 내 눈에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왼손은 손가락 두 개가 짧고 모양이 뒤틀렸습니다. 오른손 수술을 해보니 그 고통이 끔찍해 왼손은 그냥 이대로 살고 싶어졌습니다.
의사 선생님님은 확고한 내 의견을 받아들여 기본적인 수술만 하고 왼손은 그냥 두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생긴 대로 살라.”는 말일 좋아합니다. 엄마와 코메나카 선생님이 내게 말했습니다. “오른손을 사용하지 못해도 왼손이 있으니 괜찮다. 다행이다. 양손이 안 되면 양쪽 발이 있으니 얼마나 감사하니.”
우리는 그렇게 위로하고 위로 받으며 애써 눈물을 참았습니다. 손가락의 형태가 전부 바뀌어버렸습니다, 연필 쥐는 법도, 가위질도 모두 다시 익혀야 했습니다. 그때 나를 버티게 해준 힘, 엄마가 나를 위해 종이 인형을 오려주던 순간을 떠올렸습니다. 하루 빨리 내가 손을 사용해야 엄마를 만날 수 있고 종이 인형도 오릴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이전보다 글씨가 더 예쁘게 써지고 가위질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손가락이라는 것이 생기니 피아노도 잘 쳐지고 더 이상 컵이나 접시를 놓치지 않게 되었습니다. 양손잡이가 되었습니다.
병원에서는 다양한 일정이 알차게 꾸며져 있었습니다. 학교가 끝나면 레크레이션이 열리는 큰 실내 공간에서 모이는데 외출하기 어려운 아이들을 위한 놀이시간 같은 것입니다. 전문 레크레이션 강사 선생님들이 있고 자원 봉사자 학생들의 재능 기부도 있었습니다. 피아노, 훌라, 노래, 요리, 컴퓨터, 그림, 마술, 종이공예 등 배우는 것이 늘어날수록 기쁨도 커졌고 내가 할 수 있는 공연도 늘어났습니다. 코메나카 선생님은 “너에게 장애가 있고 아픔이 있으니 더 열심히 배워서 베풀고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돼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배움’이 곧 나를 지키는 ‘힘’이라고 믿음이 생겼습니다.
4장 그리운 한국으로
가족 곁으로
큰 수술들이 끝나고 드디어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인천공항에 내렸습니다. 2년 전 울면서 가족과 헤어졌던 그곳입니다. 엄청난 인파 속에서 우리 가족만 시간이 멈춘 듯 가장 먼저 서로를 알아보았습니다. 가족과 만나 얼마나 좋았는지 모릅니다. 집으로 돌아가 엄마가 차려준 맛있는 밥을 먹고 동생들에게 그간 내가 모은 선물을 나누어주었습니다. 남동생은 나보다 키가 더 커져 있었습니다.
킷 선생님께 받은 만화 캐릭터 스티커를 자랑스럽게 내밀었는데 동생들은 그것들을 알지 못했습니다. 만화 주인공에 대해 열심히 설명했지만 동생들은 영어를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손짓, 발짓으로 더 설명하다 한국은 아직 둘리가 최고인 걸 깨닫고는 다른 선물을 꺼내 들었습니다. 한국에 돌아와 행복했던 나날도 곧 현실이라는 벽에 부딪혀 깨어졌습니다. 또 다른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입학식
한국말도 서툰 아이, 게다가 얼굴 곳곳에 심각한 화상 흉터를 가진 나를 한국 학교에서는 받아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특수학교에 보낼 것을 권했습니다. 우리 부모님은 단호했습니다. 당신의 딸은 결코 남들과 다르지 않고, 충분히 공부할 수 있다면 일반 학교에 입학을 밀고 나갔습니다. 나는 겨우 입학 허가를 받았으나 2학년이 아닌 초등학교 1학년이 되었습니다. 한국 학교에서는 외국의 병원 부설 학교의 출석 일수를 인정해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초등학교 1학년 입학식 날이 되었습니다. 그날 남동생도 다른 반에 함께 입학을 했는데 엄마는 내가 있는 교실로 들어왔습니다. 나는 아이들보다 나이가 한 살 많았지만 더 작고 마르고 약했습니다. 내가 교실에 들어서는 순간, 모두들 나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리고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좋은 기운이 아니라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었습니다. 내 짝꿍이 갑자기 자기 엄마에게로 가더니 내 옆에 앉기 싫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차마 엄마 얼굴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눈물이 날 것 같았습니다.
학교 생활은 즐겁기는커녕 괴로웠습니다. 화상 상처를 가진 나를 따돌리는 것은 물론 때리기까지 했습니다. 슈라이너스의 학교 생활과는 달랐습니다. 같은 반 40명 넘는 아이들 중 누구 하나 다친 아이, 아픈 아이가 없었습니다. 선생님들 중 누구도 장애를 가진 사람이 없었습니다. 내 말을 알아듣는 선생님도 없었고, 나를 안아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