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로 떠난 허수아비
임판 지음 | 문학공감
바다로 떠난 허수아비
임판 지음
문학공감 / 2018년 12월 / 288쪽 / 13,000원
가을 하늘
밤사이 내린 빗물이 잇달아 강으로 모여들자 물살은 더욱 급해져 나는 강 아래쪽으로 빠르게 떠내려갔다. 내 몸은 강 여기저기에서 바위들에 부딪히기도 했고, 바위가 없는 곳에서는 강둑을 스쳐 지나가기도 했다. 수면 아래에서는 물고기들이 물장구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넉넉해진 수량을 즐기는지 물고기들은 이리저리 재빠르게 헤엄치면서 바위들에 부서진 거친 물결들과 함께 내 몸을 간질였다.
떠내려가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게 전부였다. 물결에 흔들리는 내 시선을 따라 가을 하늘은 그네를 타듯이 흔들렸다. 가을 하늘, 나는 가을에 태어났다. 엄밀히 말해서 나는 가을에 태어난 게 아니라 가을을 위해서 태어났지만, 어쨌든 가을은 내가 가장 아끼는 계절이었다. 물결 따라 그렇게 춤추는 가을 하늘에, 구름들은 수를 놓고 참새들은 떼를 지어 구름을 훼방 놓고 있었다.
하늘은 내게, 사람들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때로는 사랑하는 연인이었고 때로는 자랑스러운 친구였다. 물론 하늘 전체가 내 것은 아니었다. 사실 하늘은 내게는 언제나 밀짚모자 아래에서만 존재했다. 눈을 치켜떠도 밀짚모자 위의 높고 청명한 하늘은 볼 수 없었다. 그것은 액자 바깥의 그림처럼 마음속에서 상상으로만 그려졌다. 그런데 오늘은 가을 하늘이 통째로 내 눈앞에 무한히 펼쳐졌다.
가을 하늘이 눈에 가득 들어오자 나는 내 처지도 잊은 채 물 아래서 마음껏 헤엄치는 물고기들이 가소롭게만 느껴졌다. 우쭐해진 나는 거친 물결에 떠내려가면서도 두려움 없이 느긋하게 하늘을 감상했다. 물살은 더욱 거세졌다. 가을을 떠나보내는 비가 여러 시간 내린 까닭이었다. 수많은 작은 개울들에서 흘러온 황토물이 연달아 강에 합류했고, 그 덕에 내 몸은 점점 더 높이 떠올랐다. 참새나 매가 기류를 타고 하늘을 날듯이 나는 물결을 타고 하늘을 날고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나를 물속에 던져버린 그 아이가 미웠다. 그 아이는 나를 기둥으로 떼어내 괴롭히다가 갑자기 물속에 던져버렸다. 아무 이유도 없이 그냥 재미삼아 그랬다. 하지만 가을 하늘이 다 열리고 내가 자유로워졌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그 아이가 고마워졌다. 강둑 위에 올라선 키가 큰 나무들과 창공에서 군무를 추는 새떼들이 내 눈앞의 액자에 드나드는 것을 보면서, 나는 혼잣말로 그 아이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앞으로 어디에 도달할지, 어느 들판에 세워져 낱알을 지켜야 할지, 그런 건 아무 상관 없었다. 하늘은 아름답고 물살은 즐거울 뿐이었다.
가을 하늘 말고도 내 기대를 부풀린 건 바다였다. 벼에 낫질을 하면서 사람들이 바다에 대해 얘기할 때면 궁금증은 절로 자라났다. 여름이 되면 그들은 나는 그대로 내버려둔 채 바다로 떠났었다. 반쪽밖에 보이지 않는 하늘이라 하더라도 하늘은, 그리고 산과 들은 언제나 내 친구들이었지만, 바다는 아니었다. 눈, 비를 맛볼 수 있고 폭풍과 우박도 익숙했지만, 바다는 내게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다. 아니 본 적이 없으니 상상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단지 바다라는 그 이름으로만 존재했다.
강물에 몸을 맡기고 있을 때만 해도 나는 사람들처럼 내 뜻대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또 내 삶의 주인이 되고 싶다거나 하는 욕심을 가질 이유도 없었다. 자기의 인생과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고 싶다는 그런 생각들은, 내게는 사람들만이 가지는 일종의 교만처럼 보였다. 주어진 삶, 사람들이 세워준 기둥 위에 올라서 들판을 바라보는 삶, 가끔은 참새들에게 인상을 찌푸려 속임수를 쓰는 그 정도만으로 충분했다. 그러니 그때만 해도 나는 진정한 의미의 ‘나’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세상을 바라보며 즐기면 되지, 굳이 나는 이렇고 나는 저렇고 하는 생각조차 할 이유가 없었다.
현기증이 가실 무렵 그 사람이 보였다. 휑한 눈, 그리고 벼의 밑단처럼 뭉텅 잘려나갔다가 다시 자란 수염들이 코 밑과 턱 주위에 거뭇거뭇했다. 며칠이나 씻지 않았을까? 그는 평범했고 초췌했고 불쾌감을 느끼게 할 만큼 지저분했다. 그렇지만 그는 내 눈에 익숙한 농부들과는 달랐다. 특히 눈길을 끈 건 그의 공허한 눈빛이었다. 그는 허수아비인 나보다도 더 텅 빈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허, 너도 버려진 놈이구나.” 그가 툭 내뱉었다. 그는 한 손으로 나를 들고 몇 번이고 그의 다른 손바닥에 두들겼다. 물방울들은 내 몸 여기저기에서 허공 여기저기로 튕겨져 나갔다. 기대감의 상실과 불쾌감과 현기증이 허공 속에서 마구 엉키는 가운데 그의 말 한마디 때문에 여러 가지 의문들이 마음속에서 생겨났다. 그는 왜 나를 강에서 건져냈을까. 그는 이렇게 물살이 센 위험한 강 주변에서 혼자서 뭘 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그의 눈은 왜 허수아비의 눈빛을 지녔을까.
벼를 수확할 때 내보이는 만족스러운 눈빛이나 오랜 시간 일을 하고 난 뒤의 피곤에 싸인 눈빛, 새떼들이 나락을 망쳐 놓았을 때 보여주는 분노의 눈빛, 나는 농부들의 그런 눈빛들에 익숙했다. 사람들은 늘 감정에 충실했고 눈빛은 언제나 의미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게 사람과 허수아비의 다른 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얄미운 새떼들도 사람들이 오면 얼른 달아나지만 나 같은 허수아비는 무시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그는 그런 허수아비의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람에 의해 강물에서 건져졌다는 상황을 파악한 순간 나는 그런 의문과 더불어 이제껏 느끼지 못했던 한 가지 강렬한 욕망에 휩싸이고 말았다. 그것은 방금 전까지 내 눈앞에 펼쳐졌던 드높은 가을 하늘을 마음껏 즐기고 싶다는 자유에 대한 소망이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내가 내 스스로의 주인이기를 바랐다. 사람들처럼 내 몸의 주인이 되어 마음먹는 대로 원하는 곳에 갈 수 있기를, 그리고 내 시선의 주인이 되어 무엇이든 내 뜻에 따라 볼 수 있기를, 나는 그때처럼 간절히 바란 적이 없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는 나를 쥐고 걷기 시작했다. 내가 내 스스로의 주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그가 걷기 시작하면서 더욱 커져만 갔다. 그는 내 머리를 땅바닥으로 향하게 한 채 내 다리를 한 손으로 붙잡고 걸었고, 나는 그의 집에 이르는 내내 위아래가 뒤바뀌어 거꾸로 흔들리는 세상을 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산자락에 위치한 몇 개의 주택 중 하나로 향했다. 벽돌 담장이 둘러싸고 있는 철제대문의 이층집이었다. 담장 위에는 여러 개의 고정식 CCTV가 설치되어 있었고, 담장 너머로 감나무와 라일락나무, 대나무들이 보였다.
나는 사람들이 말하는 절망감이라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정말이지 나는 사람들처럼, 내 자신의 주인이 되어 내 뜻대로 살고 싶어.” 나는 또 한 번 되뇌었다. 세상에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을 듯싶었다. 자기 뜻대로 움직이고, 자기 자신을 위해 행동하며,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의지대로 살아가는.있는 그대로 세상을 보다
감나무 아주머니가 그렇게 인간의 자아가 질병이라는 어이없고 지루한 얘기를 반복하는 까닭에 나는 잠시 딴 생각을 하고 말았다. 사람이 CCTV와 본질적으로 다른 점은 시간이 아니라 의식이 아닐까? 사람이 스스로에게 주체적 존재인 이유는 스스로의 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치듯 말했다. “CCTV 아저씨는 의식이 없잖아요? 사람과 같은 존재라면 세상을 느끼는 의식이 있어야 되지 않겠어요? 그런 의식을 가지고 살아갈 때 비로소 나 자신의 주인이 된단 말이죠. 그런데 아저씨는 단지 세상을 바라보는 눈만 가지고 있을 뿐이잖아요? 느끼는 게 아니라 설계된 대로 그저 세상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란 말이에요. 그것만으로는 아저씨가 사람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없는 거죠.”
그렇게 말하고 보니 그 말이 너무도 당연하게 느껴졌다. 로봇이 자기 몸의 주인이 아닌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오리 사냥개가 비록 애완견일지라도 로봇과 달리 그 자신의 주인이라 할 수 있다면, 그건 세상을 느끼는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CCTV는 의식이라고 할 만한 걸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CCTV는 전혀 다른 차원의 얘기를 꺼냈다.
“흠, 내게 의식이 없다고? 이봐, 어린 허수아비 친구. 도대체 의식이 뭐라고 생각하지? 의식은 생각처럼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니야. 의식이라는 건 감각기관에서 얻은 감각정보를 처리하는 하나의 시스템일 뿐이야. 물론 너는 너무 어려서 이렇게 어려운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지? 우리 허수아비 친구를 위해 쉬운 얘기를 들려줄 테니 잘 들어봐. 이 얘기를 듣고 사람들의 의식과 우리가 가진 시스템이 얼마나 비슷한지 스스로 판단해 보라구. 그러면 의식이 대단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거야.”
CCTV의 친구는 도시에 설치되어 있었다. 그는 도심 한복판의 번잡한 사거리 교차로 위에 설치된 방법용 CCTV였다. 그는 초현대적 전자장치인 수백 메가 픽셀의 초고해상도 디지털 카메라를 장착하고 24시간 내내 일대의 거리를 감시했다. 수백 미터 떨어진 사람의 얼굴도 인식해서 분석했는데, 초고속 안면 인식 프로그램은 경찰청의 데이터베이스와 연결되어 있어, 대상자가 지명수배자인지 불분명한 경우에는 연락망을 통해 다른 CCTV와 연동하여 그 사람을 지속적으로 감시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는 거죠? 그래봤자 CCTV는 여전히 기계일 뿐이잖아요?” 나는 그가 하는 이야기를 다 듣지도 않고 툭 쏘아붙이고 말았다. 몇 번에 걸쳐 내 예상이 빗나가자 나는 점점 성마르게 변해가고 있었다. “흠, 아직도 모르겠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의식이란 게 뭐겠어? 사람들이 가진 의식 대부분은 시각에 기초한 거야. 눈을 통해 보는 사물의 정보가 그의 뇌 속에서 세상을 펼쳐 보이게 하는 거지. 의식한다거나 느낀다는 것, 그게 뭐겠어? 바로 시각기관과 같은 감각기관을 통해 세상을 파악한다는 걸 말하는 거야. 눈을 통해 보는 것, 귀를 통해 보는 것, 그게 바로 느끼고 의식하는 작용이고, 피부를 통해서 촉감이나 온도를 느끼는 것, 이런 것들도 느끼고 의식하는 거야. 다시 말해 의식한다거나 느낀다는 건 그런 감각기관을 통해 세상을 파악한다는 뜻일 뿐이야.”
나는 내가 아는 모든 상식들을 동원해 반격을 시도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눈으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만, CCTV는 그저 카메라를 통해 왜곡된 세상을 보는데 불과하잖아요? 사람들이 사람들의 눈을 닮은 구조로 만들었다고 해도, 카메라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사람들이 의도한 대로밖에 볼 수 없단 말이에요. CCTV는 사람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사람들이 만든 기계에 불과한 거죠.”
“흠, 그것 참 어리석은 생각이군. 허수아비 친구, 넌 그러면 사람들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단 말이지. 어떻게 있는 그대로 본다는 거지? 눈이라는 시각기관을 통해서 보는데 그 눈이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지, 아니면 자기 이익을 위해서 필요한 것만 보여주는지 그걸 어떻게 알지?” “사람들이야 특별한 목적 없이 세상을 보니까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죠. 하지만 CCTV는 사람들이 계획한 어떤 목적을 위해 존재하니까. 그 범위 내에서만 보는 거잖아요?”
“흠, 그럴까? 사람들도 어떤 목적을 위해 태어난 게 아닐까? 생명의 목적 말이야. 그렇기 때문에 그 목적 범위 내에서만 볼 뿐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는 없지 않겠어. 도대체 있는 그대로라는 게 있다면 말이야. 세상을 본다고 말하는 순간 세상은 있는 그대로가 아닌 거지. ‘있는 그대로’와 ‘본다’는 말은 그 자체로 서로 모순이야.”
나는 갑자기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그는 사람들이 말하는 ‘있는 그대로 본다’는 말이 사실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있는 그대로 본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보다’는 말과 ‘있는 그대로’라는 말이 그 자체로 동시에 성립할 수 없다니, 나는 이제 정말로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의 말대로 하자면 카메라와 마이크가 장착되고 정보처리 능력까지 갖춘 CCTV는 인간의 의식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나는 이렇게 그럴듯한 논리에 맞서본 적이 없었다. 그는 표면에 녹이 슬만큼 나이만 든 게 아니라 지나온 세월만큼 유식하고 철학적이었다.
늙은 라일락나무
CCTV의 말대로 사람이 가진 의식이나 CCTV의 의식이나 다를 바가 없다면 의식만이 인간의 조건은 아닐 듯 싶었다. 게다가 주어진 프로그램에 따라 행동할 뿐인 CCTV가 주체적 존재라 한다는 건 수긍할 수 없었다. 기계에 불과한 CCTV보다는 차라리 허수아비인 내가 사람에 더 가까웠다. 나는 스스로의 삶의 주인이 되는 데에는 CCTV와 같은 그런 기계적 의식 외에 틀림없이 다른 무엇인가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병들어 쇠약한 할머니의 목소리가 느닷없이 내 생각을 가로질렀다. 얼마나 오랜 세월을 살아왔는지 껍질은 온통 뒤틀려 있고, 두 갈래로 갈라진 큰 줄기 중 하나는 받침목에 간신히 몸을 버티고 서 있는 늙은 라일락나무였다. “에고, 난 이제 살날도 얼마 남지 않았어. 그래도 이 몸은 아직까지 꽃을 피우고 싶은 게야. 4월 봄볕이 들면 말이야. 연보랏빛 꽃을 멋지게 피운단 말이지. 그 향기가 얼마나 사람들의 마음을 달구는지 알아? 무식한 영감들은 값싼 향수 냄새를 풍기는 아카시아와 혼동을 하더라구. 하지만 이 몸은 아카시아와는 달라. 이 몸은 말하자면 귀족 출신이라구.”
라일락나무가 사람과 같다니, 그건 사람 모습을 하고 있어 내가 사람과 가깝다는 얘기보다도, 사람과 같은 눈이 있어 CCTV가 사람과 같다는 얘기보다도, 몇 배는 더 이상한 얘기였다. 라일락나무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굵은 받침목이 버텨주고 있었지만, 늙은 가지들은 수액이 전부 말라 버려 건드리기만 해도 부서져 가루가 될 것처럼 보였고, 또 먼지와 이끼가 수없이 쌓여 말라비틀어진 껍질 골 사이에 엉켜 있는 모습은 바람도 없는 어느 날 스스로 쓰러져 생을 마친다 하더라도 전혀 이상할 게 없을 것 같았다.
“이 몸은 꽃을 피운다구. 꽃을 피우면 사람들은 나를 아름답다고 치켜세우지. ‘천사처럼 아름다운 꽃이야, 이런 향기를 평생 간직하고 싶어’ 이렇게 야단법석을 떨면서 말이야. 비록 내가 늙기는 했지만 내가 피우는 꽃들은 얼마나 예쁜지 모를 거야. 사람은 오직 인정받으려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는 존재거든. 사람들은 오로지 남들에게 인정받으려 산단 말이야. 인정받기 위해 돈을 벌고, 인정받기 위해 성형수술도 받고, 인정받기 위해 텔레비전 오디션에도 나가고, 또 인정받기 위해 값비싼 보석으로 치장을 하기도 하지. 사람들에게는 그게 전부야 전부.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 그게 다라구.”
라일락나무의 얘기를 듣다 보니 어느 해 가을 벼 타작을 하러 나온 주인아주머니가 생각났다. 그녀는 일하기 편한 작업복 차림에 머리 위에는 햇빛을 가리기 위해 차양이 넓은 낡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일터에 전혀 어울리지 않게도 알이 굵은 진주목걸이를 목에 걸고 있었다. 김 씨 아저씨는 수시로 핀잔을 주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영롱하게 빛나는 진주들을 자랑스럽게 내보이면서 작업을 계속했다. 라일락나무의 말이 옳았다. 사람들은 인정받기를 원했고 인정받는 기쁨으로 살아갔다.
생각해 보니 내게는 그런 욕망이 없었다. 나는 새들이 날라 와 나락을 쪼아 먹으려 할 때 있는 힘을 다해 참새들을 노려보며 그들을 쫓아냈고, 그런 내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수확의 즐거움을 더 크게 누렸지만, 그렇다고 해도 나는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또 나를 만들어 들판에 세워 준 주인아저씨나 다른 어느 누구도 내게 참새를 쫓아내줘 고맙다고 칭찬을 해준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면 사람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는 비결은 나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욕망이었다.
댓잎 떨어지는 소리를 듣다
나는 라일락나무의 얘기들을 되새기면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스스로의 삶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남들에게 인정받는 삶을 추구하는 것일까, 아니면 남들이 뭐라 하던 스스로의 길을 가는 것일까? 그러나 생각하면 할수록 나는 더 혼란스러워졌다. 만일 라일락나무의 말대로 타인과 사회의 인정이 사람들의 존재의 조건이라면,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고 홀로 주체적으로 존재할 수는 없다는 뜻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