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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할까 말까

정재흠 지음 | 동화출판공사



사랑, 할까 말까

정재흠 지음

동화출판공사 / 2018년 10월 / 288쪽 / 12,000원





사랑은 예측불허에서 빚어진 축제이다



잃어버린 반쪽 찾기

잃어버린 나의 반쪽, 이 반쪽은 원래 지금과 같은 인간의 모습이 아니다. 애초의 인간은 하나였다. 얼굴은 앞뒤로 있었고, 팔과 다리는 네 개였으며 몸은 원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이렇듯 최초의 인간은 앞뒤를 모두 볼 수 있어서, 이른바 결핍을 찾아볼 수 없는, 완전함을 갖추고 있었다. 인간은 그 힘과 능력이 점점 신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심지어 신들에게 도전하는 인간도 나타났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제우스는 고민에 빠졌다. 오만방자한 인간을 모두 없애자니 누가 신에게 제를 지내줄 것인가. 이는 신과 인간의 구분이 없어져버리는, 끔찍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타락한 인간을 반으로 쪼개기로 했다. 그럼으로써 인간의 힘은 약화되고 개체수는 늘어나 신의 경외하는 인간이 더욱 많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우스는 의도대로 되는가 싶던 인간들이 차츰차츰 소멸되어갔다. 마침내 급속도로 멸종의 위기에 빠져들었다. 물론 둘로 나뉜 인간은 자신의 반쪽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잃어버린 반쪽을 결합해 불완전성을 극복하려는 시도였다.

타락함에서 온전함으로의 회복을 노린 것이다. 그런데 막상 자신의 짝을 찾아 부둥켜안은 인간들은 정작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다시는 떨어지지 않으려고만 발버둥을 쳤다. 다시 헤어지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위기감, 두려움이 그들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일터에 나가지 않고 심지어 먹는 일도 잊은 채, 서로 부둥켜안고만 있었다.

이러다 일간 멸종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에 제우스는 두 번째 개입을 시도했다. 인간 생식기의 위치를 바꾸어버리는 일이었다. 당초 인간의 생식기의 위치를 바꾸어버리는 일이었다. 당초 인간의 생식기는 바깥에 달려 있었다. 그러므로 서로 성행위를 하지 못해, 남자는 땅에다 사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소위 자궁외임신으로, 땅이 임신하여 땅에서 인간이 쏟아내는, 출토인이 배출된 것이다. 제우스는 인간의 생식기를 바깥에서 안으로 둘려주었다. 남녀의 온전한 성적 결합을 돕기 위해서였다. 그런 연후에야 비로소 남자는 여자 안에 생식을 했고 여자는 자궁임신을 할 수 있었다. 오늘날 남녀 애정행위인 섹슈얼리티가 생겨나는 순간이었다.

한편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끼리 만난 인간들은 생식과는 관계없는, 여분의 쾌락으로, 또 깊은 우정으로 즐거움과 기쁨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런 연후에야 인간은 비로소 반쪽과의 포옹을 풀고 각자의 일터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때부터 인간은 다양한 문화 활동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렇듯 온전함으로의 회복운동은 잃어버린 반쪽 찾기는 야속하게 대부분 우연을 가장해 다가온다. 신이 주관하기 때문이다. 예측이 불가능하다.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이며 비합리성을 갖는다. 한마디로 명료하게 설명하기가 어렵다. 영화 <세렌디피티>의 잃어버린 반쪽 찾기의 여정은 그래도 힘들고 고되다. 운명의 가닥이 잡힐 듯 말듯 가늠이 잘 서지 않는다.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들떠 있던 젊은 청춘, 조나단과 사라는 각자 연인의 선물을 사기 위해 쇼핑을 하던 중, 같은 선물을 동시에 고르게 되면서 첫 대면을 한다. 선물을 양보하는 조나단이 고마웠던 사라는 조나단과 함께 세렌디피티라는 카페에 들어가 차를 마시며 여느 젊은이들처럼 수다를 떤다. 카페이름이 신기해 보였던 조나단이 사라에게 묻는다.

“어떻게 이렇게 좋은 카페를 발견했어요?” “이름이 끌려서 오게 되었어요. 세렌디피티, 제가 좋아하는 단어 중 하나거든요.” “그래요? 왜죠?” “우연히 찾아 온 행운이라는 세렌디피티, 저는 모든 일에는 운명이 따르는 거라고 생각해요.” “모든 것은 운명이 미리 정해져 있다? 그럼 우리는 전혀 선택권이 없는 건가요?” “아뇨, 결정은 우리가 내리지만 그 결정은 운명이 보내는 신호에 따라 내리게 되고 우리의 행복도 결국 운명에 달렸다는 뜻이죠.” “그런가요? 그럼 우리도 혹시 모르니까 전화번호 좀…….” “뭘 혹시 몰라요?” “그렇잖아요. 이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나중에 다시 못 만나면 어떡합니까.” “만날 운명이면 또 보겠죠. 지금은 만날 시간이 아닐 뿐인거죠.”

조나단과 사라는 카페를 나선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지하철역으로 향하던 조나단은 목도리를 놓고 온 것을 기억해 내고는 카페로 되돌아간다. 선물로 산 장갑을 두고 온 사라도 카페에 앞서 도착해 있었고, 다시 재회한 그들은 작은 계시의 기쁨을 맛보고 저녁 시간을 함께 보낸다. 헤어질 시간, 조나단은 사라에게 다시 연락처를 적은 메모지를 조나단에게 건넨다. 그 순간, 지나가는 차량이 일으킨 바람에 메모지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만다.

좋은 우연은 여기까지구나라고 생각한 사라와 오늘 만남이 좋은 우연일 거라는 조나단과의 괴리는 여기서 다시 확인된다. 오늘이 진짜 운명의 만남이라고 말하는 조나단, 오늘이 정말 운명적 만남일까요, 라고 결론을 유보하는 사라, 이내 사라가 5달러 지폐를 조나단에게 건넨다. “이름과 전화번호 써요.” “5달러 지폐에?” “어서요.” “어쩔 거죠?” “당신 연락처가 적한 이 돈이 곧 가게 주인 호주머니에 들어갈 거예요. 그 돈이 돌고 돌아 우연히 내게 온다면 그때 전화할게요.”

조나단의 연락처가 적힌 5달러 지폐를 들고 가게에 들어가 껌을 사가지고 나온 사라를 보고 놀라는 조나단에게 사라는 이렇게 말한다. “정말 우리가 운명이라면 분명히 저 돈이 돌고 돌아 결국 저한테 오게 될 거예요.”

사라도 자신의 연락처를 마르케스의 소설 ‘콜레라 시대의 사랑’ 첫 페이지에 적은 뒤 헌책방에 팔겠다고 하고 그 책을 조나단이 언젠가 구입하게 된다면 운명이라고 생각하겠다고 한다. 이어 벌어진 사라의 마지막 운명테스트는 호텔 엘리베이터에서 벌어진다. 각기 다른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사라가 조나단에게 외친다. “같은 층을 누르면 우린 운명이에요.” “이해할 수가 없어요.” “이해하지 말고 그냥 믿어요.” “뭘요?” “운명이란 걸, 내 이름은 사라에요.”

두 사람이 똑같은 23층을 눌렀으나 조나단은 엘리베이터에서 꼬마의 장난으로 시간을 지체하게 되고 이후 이 둘은 영영 헤어지게 된다. 그리고 두 사람은 그날로부터 7년이란 긴 세월을 보내고서야 운명적 만남을 다시 이루게 된다.

7년이 흐른 후, 우여곡절 끝에 서로의 반쪽인 조나단과 사라는 운 좋은 우연으로 다시 재회한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한다. 이 영화에서처럼 운명적 만남의 주인공은 현실에서도 정말로 존재하는 걸까. 존재한다면, 혹시 나의 무의식 속에 있는 결핍을 건드린 그런 사람이 나의 운명적인 사람은 아닐까. 또한 하늘의 계시를 받은 조나단과 사라같은 운명적으로 만난 연인들은 그 이후 정말 행복한 삶을 누리며 살았을까? 이러한 물음은, 잃어버린 반쪽 찾기를 통해 온전함을 회복하려는 인간의 시도는 진실로 가능한 것일까, 로 달리 물을 수 있겠다.

신의 계시라는 확신으로 감격스러워 했던 조나단과 사라는 이제 둘의 구분이 끊어지고 합일되는 공간인 사랑이라는 단계로 진입하게 된다. 이 공간에 들어서는 둘은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듯 황홀감에 흠뻑 젖는다. 기쁨이 넘친다. 그러다 둘은 힘들고 어려운 일을 겪는다. 초조해진다. 두 사람은 가끔 돌출된 생소함에 당황해한다. 오해한다. 급기야 묻어 놓은 감정이 폭발한다. 마침내 이 세상이 끝나기라도 할 것처럼 둘은 죽자 살자 한바탕 싸움을 벌인다.

침묵의 시간이 흐른다. 마침내 화해의 손을 내민다. 그리고 깊은 포옹으로 서로의 사랑을 다시 확인한다. 하늘이 맺어준 조나단과 사라의 사랑 단계는 이렇듯 반쪽 찾기 여정보다 훨씬 험난하고 힘들다. 사랑은 마냥 친근함과 황홀함과 기쁨만 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은 황홀하지만 잔혹하고, 기쁘지만 갈등과 상처를 품고, 친근하면서도 동시에 낯설고, 안정성과 동시에 불안정성을 껴안는다. 그러면서 사랑은 투사된 상대방의 결핍을 기꺼이 포용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이러한 사랑에서 사랑에너지가 생성되고 발전되어 간다. 사랑은 그 에너지로 늘 과거와 다른 새로운 것들을 생산해낸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되고 힘들지만 희망을 갖는다. 잃어버린 반쪽끼리 합쳐서 하나가 되면 분명 삶의 열망은 커지고 강해진다. 결핍된(없음) 인간과 결핍된(없음) 인간이 사랑을 나누면 희한하게도 결핍이 매워지며 사랑의 역동성이 충만(있음)해지는, 말하자면, ‘없음+없음=있음’이라는 마법의 세계가 열린다. 그래서 지금까지 인간은 비록 온전함으로의 완전한 회복은 불가능할지라도 사랑으로 하나가 되려는 열망을 포기한 적이 없다.

제발 관심을 가져달란 말이야

결혼식 날짜가 다가오면 누구나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보게 된다. 결혼식장 예약 전쟁을 치르고 웨딩업체와 비용문제로 옥신각신하고 웨딩드레스 옵션 선택에, 신혼집 보증금 비용 마련하랴 신혼여행비 부담까지, 머리 싸매는 일련의 전투를 끝낸 후, 녹초가 된 몸을 일으키며 생각에 잠긴다. 결혼은 속박당하는 거라는데, 내 고유의 인생은 이제 끝장인가, 행복한 구속을 얻기 위해 자유는 박탈당해도 되는 건가. 뭔지 모를 불안감과 책임감이 엄습해 온다.

괜한 생각으로 마음은 외려 더 허전하고 씁쓸해진다. 그러다 사랑이 주는 미래의 대차를 대조해 본다. 예쁘고 사랑스러운 그녀, 그녀가 낳을 아이, 이글거리고 있는 사랑의 강렬한 에너지, 그와 평생 함께하는 기쁨, 평온함, 안락함 등, 사랑이 주는 혜택에 이르러서야 겨우 안도의 숨을 내쉰다.

그런데 대부분의 로맨스 영화는 풋풋하고 달콤한 사랑만을 그려내지 경제적인 무게랄지 결혼이 속박이라는 고민 등을 애써 담지 않는다. 영화 <내 아내의 모든 것> 역시 그렇다. 영화는 초반부터 아름답고 상큼한 남녀 주인공의 매혹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서로에게 발산하는 사랑의 핑크 빛으로 관객의 호기심을 끌어당긴다. 일본이라는 낯선 곳에서 주인공 두현과 정인은 우연히 마주친다.

일본어를 배우기 위해 한국어 대신 서툰 일본어로 의사소통하려는 정인은 자연히 말수가 적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다소곳하며 수줍어하는 그녀의 모습에 두현의 마음은 두근거린다. 마침 지진으로 놀라 뛰어오는 정인, 두현에겐 지금이야말로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핸드폰 진동에도 놀라는 가냘픈 그녀, 알고 보니 완벽한 요리 실력도 갖춘 그녀, 맑은 눈망울, 다소곳한 매너, 달콤하고 고은 말솜씨, 게다가 섹시함까지 뭐 하나 빠지지 않는 그녀다.

그런데 그런 정인을 향한 두현의 환상은 결혼생활이 이어지며 여지없이 깨진다. 화장실에서 볼일 보는 와중에 그녀가 문을 벌컥 열어 제킨다. 두현이 당황하며 내 뱉은 말, “싸는 중이잖아, 지금.” 그녀의 가공할 짜증이 배가되어 되돌아온다. “싸면서 시집 읽는 것보다 싸면서 마시는 게 덜 이상한 거 알아? 싸면서 시집 읽는 거 좀 위선적이지 않아 차라리 먹고 싸는 게 좀 더 인간적이지.”

시간이 지날수록 24시간 붙어 다니며 하는 잔소리, 참견, 짜증은 가관이 아니다. 급기야 정인은 남편의 회사 회식자리에서 상사의 사모님과 설전까지 벌인다. 정인을 향해 상사 사모님이 훈계하듯 한 마디 던진 게 화근이었다. “와이프가 눈치가 아주 많이 없네.” “저희 와이프가 외동딸이라 그래요, 이해해 주십시오.” 이때 정인이 또 나선다. “외동딸이 어때서? 출생환경으로 사람 그렇게 판단하고 그럼 안 되지. 여기 외동딸이 나 하날까? 외동딸이신 분, 손 좀 들어봐 주시겠어요? 이거 굉장히 중요한 얘기야. 세상의 모든 외동딸들을 사회 소수자로 만드는 이야기라고.”

두현은 아내의 말을 주워 담을 수 없어 안절부절못한다. 연애시절 또 신혼 때 황홀하기만 했던 사랑의 콩깍지는 세월이 흐르면서 서서히 벗겨져가고 서로에게 숨겨져 있던 성격차이, 단점, 크고 작은 실수가 이 부부를 괴롭혔다. 결혼 후 7년이 흐른 지금, 아내의 그 어떤 말도 이젠 잔소리로 들려 권태롭기 짝이 없는 남편, 이 남편은 밖에선 제법 잘 나가는 건축사이지만 집에서는 아내의 기에 눌려 말을 제대로 못하고 살아간다.

지겨움과 권태는 부부에게 찾아오는 자연스러운 현상인가. 이 부부의 위기를 해결하는 방안은 실제로 존재하긴 하는 걸까. 이 대답을 구하기 위해 영화는 카사노바라는 캐릭터를 동원해 정인에게 큐피드 화살을 다시 쏜다. 카사노바가 노린 것은 바로 남편 두현이 그동안 간과했던 일들이었다. 아내를 전부 안다고 착각하며 아내와 그 어떤 대화도 시도하지 않았던 일, 아내와 함께하는 지겹고 지리멸렬한 일상을 깨려는 시도, 아내가 속사포로 쏟아 낸 불평과 불만의 이면을 들여다보지 않았던 일 등이었는데, 이에 대한 카사노바의 전략은 너무나 간단했다. 정인의 말을 들어주고 또 들어주는 일이었다. 심지어 사소한 이야기까지 세세히 듣고 있다가 가끔 공감한다는 어투로 맞장구를 쳐주면 정인의 마음은 활짝 열리곤 했다.

영화는 두현과 정인의 갈등에 이은 카사노바 등장, 그리고 이혼 결심으로 갈등을 증폭시키다가 마침내 극적인 화해로 급하게 엔딩 처리한다. 그리고 마침내 영화 말미네, 숨겨놓은 메시지를 정인의 입을 통해 꺼내든다. “자신의 공간을 침묵이 삼키게 두지 마세요. 살다보면 말이 없어집니다. 서로 다 안다 생각하니 굳이 할 말이 없어지는 거예요. 거기서부터 오해가 생겨요. 침묵이 길들여지는 건 무서운 일이예요. 그러니까 계속 말을 시키세요.”

오늘도 결혼을 앞둔 수많은 신혼부부가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한다. “나는 그대와 함께 결혼생활을 잘 할 수 있을까. 나는 그대를 지속적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 나는 그대의 마음속에 영원한 사람으로 간직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대를 내 마음속에 지속적으로 머물게 할 수 있을까.”



사랑과 우울증이 대립적이란 말



사랑과 우울증이 대립적이란 말

일찍이 우리는 디지털 시대를 맞이하여 편리성과 즉시성 더 나아가 완전성 추구까지, 아날로그 시대에선 상상할 수 없던 꿈의 낙원시대가 도래했다며 설레곤 했다. 디지털이라는 거대한 소통 창구를 통한 각종 정보 생산 및 교류의 가능성은 그대에게 든든한 벗처럼 믿음이 가게 했을 것이다. 그대가 택한 독신 혹은 비혼의 선택과정에는 그러한 시대적 분위기와 색깔, 흐름도 분명히 한 몫 하지 않았을까 싶다. 디지털 문화에서 자신감을 얻었을 테고, 그래서 자기를 격리하여 고독 속을 스스로 걸어가는, 그런 선택을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다. 홀로이고 싶은 욕구, 단순해지고 싶은 추구, 그것들을 스스로 실현하고자 하는 다짐이다.

인간이 혼자라고 생각될 때 느끼는 외로움, 고독감은 전통농경사회와 현대도시사회 중 어느 쪽 사람이 더 크게 느끼며 살았을까? 대체로 농촌생활에서 외로움을 덜 탔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전통시대에서의 농촌생활은 대가족을 이루며 살았던 까닭에 사람들에 부대끼며 살았을 것이고, 끝도 없이 발생하는 농사 노동이며, 친족이나 마을 부락사람들과의 잦은 커뮤니케이션 등으로 말이다. 이런 환경에서는 사람들이 외로움을 탈 틈이 별로 없었다.

그러니까 현대는 외로움을 타는 시대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산업화를 거친 근현대 시대에 농촌에서 도회지로 몰린 사람들에게 유난히 두드러지게 나타난 증상이라서 현대병이라 일컬어진다. 오죽하면 외로움과 함께 고독, 권태, 일상의 지루함 등을 모던소설에서 자주 차용할 정도이다. 이런 현대 병상들은 디지털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더한다.

오로지 모니터에서 사람을 만나는 것과, 쏟아지는 햇볕을 맞으며, 동네에서 뛰어 노는 아이들 소리를 들으며, 짖어대는 강아지 소리에 우리의 오감이 생생히 작동되는 환경에서 사람을 만나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그래서 현대병인 외로움, 고독감, 권태감, 일상의 지루함 등은 디지털 시대로 접어들면서 훨씬 다양해지고 복잡성을 띈다.

혹시 외로움을 탄다면 몸이 그대에게 경고를 보내는 사인이라고 보면 된다. 그대를 둘러싼 사회적 관계를 점검하라는 신호이다. 그러니까 이런 병상을 대비해 평소 자신만의 자기회복조절 방법을 체득해 놔야 하지 않을까 싶다. 만일 그대가 회복의 의지 없이 그대로 눌러 앉아버린다면 우울증이라는 고약한 병이 그대를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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