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들이 난세를 만든다
강철수 지음 | 소담출판사
바보들이 난세를 만든다
강철수 지음
소담출판사 / 2018년 10월 / 320쪽 / 13,800원
나라를 거져 넘긴 사람들
영국, 프랑스는 바다를 끼고 마주보고 산다. 한국, 일본도 똑같다. 두 나라는 오랜 세월 치고받고 뺏고 죽이던 앙숙이자 라이벌이었다. 그런데 현재의 두 나라는 어떤가. 바다 밑으로 길까지 만들어 사이좋게 오가며 사이좋게 선진국이다.
왜 한국과 일본은 그렇게 못 했을까. 영국, 프랑스와 다른 점. 한국은 침략을 받기만 했고 한 번도 일본 본토를 공격한 적이 없다. 우리 민족이 너무 평화를 사랑해서일까. 그래서 2천 번도 넘게 외세 침략을 받았을까.
수나라, 당나라, 청나라… 열거하기도 벅찬 북방 제국들이 이 땅을 먹자고 세세년년 군사를 보냈다. 전쟁을 잊고 편히 잠을 잔 날이 많지 않다. 그런데 이상하다. 그렇게 오랜 세월 시달렸으면 북쪽을 향해 눈을 흘겨야지. 왜 우리는 반대 방향에 있는 일본을 미워할까.
‘일제 36년’을 날수로 계산하면 36년이 아니고 34년 11개월 17일이다. 수천년 역사를 자랑하는 대한민국이 고작 35년도 안 되는 그 짧은 기간에 북방의 2천 번 침공을 능가하는 무엇이 있다는 것일까. 한국에 관심 있는 일본 노인들을 만나면 요즘도 은근 우쭐댄다. “우리 일본이 조선에 기찻길 깔아주고 다리도 놓아준 거 아시오? 서울 한강철교 아직도 튼튼히 잘 서있죠?” 사실이다. 철도, 다리뿐인가. 학교도 일본이 많이 지었다. 언뜻 들으면 참 고마운 일본. 선의의 통 큰 외교였다면 환대하고 업어 모셨을 것이다. 그러나 철도는 전쟁 물자를 실어 나르려고, 학교는 일본어를 가르치려는 식민 지배의 서곡이었다.
왜 우리는 그것을 몰랐을까.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 나라 문무대신 고관대작들이 솔선수범 대문을 활짝 열어주었다는 사실이다. 일본 군대는 군가를 부르며 이 나라 심장부를 걸어 들어왔다. 하기야 상감마마까지 한통속이었으니 말해 무엇하랴. 그렇다면 절대로 침략이 아니었다는 일본의 변명이 거짓말이 아니네?
임진왜란 때 조선은 일본의 총포에 방선이 뚫렸었다. 200년 후 조선을 일본의 줄기찬 잔 펀치에 무너졌다. 일본은 총을 등 뒤로 감추고 치밀한 전방위 회유와 겁박성 강온 외교로 야금야금 한반도에 흙발을 대다가, 어느 날 통째로 삼켜버린 것이 치욕의 1910년 국권침탈이다.
일본은 정말 다 갔는가
조선이 광복되고 서슬 퍼런 일본 순사도 일본군도 물러갔지만 일제 잔재가 동시에 씻겨나간 것은 아니었다. 일본에 빌붙어 이득을 취하던 친일 뻔뻔이들은 일본 패망을 한없이 아쉬워했다. 웃지 못할 촌극이 전국 곳곳에서 벌어졌다. 지방 소도시 ○○시장통. 작은 극장 앞에 장날도 아닌데 사람들이 잔뜩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바닥에 꿇어앉은 30대 남자들 여럿이 삥 둘러 에워쌌는데, 손에 몽둥이가 들려있었다. 포위당한 남자는 일본인이 운영하던 극장의 영사기사였다. 사장이 극장을 내놓고 일본으로 가버리고 동네 사람들이 ‘일본 놈한테 붙어먹던 기생충일 때려죽이자’고 나선 것이었다.
사색이 된 영사기사가 목숨만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응징자들은 단호하게 몽둥이를 쳐들었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잠깐!” 하고 소리쳤다. 응징자들이 멈칫했다. 가만히 중년 신사가 걸어 나오며 조리 있는 어조로 영사기사를 변호했다. “이 사람 죽이면 안 돼! 이 사람 죽이면 우리는 앞으로 영화 못 봐.” 응징자들은 잠시 고뇌에 빠졌다. 결국 영사기사는 변호인 잘 만나 목숨을 건졌다.
일본인들은 모두 떠났지만 도처에 일본이 남아 있었다. 일본은 결코 모두 가지 않았고, 우리도 모든 것을 떠나보내지 못했다. 지금이야 막상 전력을 자랑하는 세계적인 강군 대한민국 국군이지만, 광복 후 한국군은 솔직히 군대랄 수도 없었다. 탱크가 다 무언가. 변변한 대포, 번듯한 기관총 하나 없었다. 자주포는커녕 비슷하게 그린 그림도 없었다. 일본군이 쓰던 병영, 그들이 버리다시피 남겨준 녹슨 검과 총. 신병 훈련도 거의 일본식이었다. 물통과 식판도 한동안 그대로 썼다.
짬밥(잔반), 총기 수입(총기 손질) 같은 엉터리 일본 말이 고쳐지지도 않고 수십 년간 그대로 썼다. 일본 말을 한다고 무슨 범죄는 아니지만 제대로 알고 써야 품위를 잃지 않고 이상한 사람 취급을 당하지 않는다. 지라시(전단지), 산마이(조연배우), 잇빠이(가득), 가오마담(얼굴마담), 히야시(차게 함), 마치 우리말같이 섞어 쓰지만 모두 한글 학자들이 불쾌해하는 단어다.
그런데 이 말만은 제발 쓰지 말기 바란다. 땡깡이라는 일본말로, 중년 남녀들이 TV에 나와 아무렇지도 않게 ‘떼를 쓰다’는 의미로 쓰는데, 땡깡은 떼가 아니다. 간질 환자가 간질을 일으킨다는 말이다. “일본의 조선강점기 36년은 하느님의 축복이었다”라고 말해 오해를 산 장로님이 있었다. 그것은 아마 일본에 주권을 한때 빼앗겼으나 그것을 계기로 백성들이 눈을 떴다. 내 조국의 소중함을 알았고 불같은 독립 의지로 뭉쳐 싸울 수 있었다. 그런 내용을 전하려 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전 재산을 털어 독립 자금을 보태고 목숨까지 잃은 이의 후손한테 ‘축복’까지는 저항이 따랐을 것이다. ‘광복돼서 나라 찾고 자존심은 찾았지만 당장 삶이 나아진 게 뭐냐’는 사람도 있었다. ‘삶이 아무렴 어때. 광복되니 그냥 마냥 즐겁다’는 이도 있었고, ‘그까짓 돈, 그까짓 집, 그까짓 회사, 다시 만들면 되지!’ 하는 사람도 있었다. 한국인들은 실제로 그렇게 했다.
세계 최빈국 GNP 100달러도 안 되던 거지 나라로 분류되었던 대한민국이 GNP 3만 달러,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 그야말로 꿈이 현실이 되었다. 시련이 먼저 있고 나중에 축복이 온 것일까. 갑자기 배가 부르고 마음이 풀어지니 거듭 대인의 풍모를 보이고 싶다.
“일제 삼십 몇 년, 그리 유쾌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의미는 있었어. 일본 녀석들 욕심이 조금 과하고, 과격했지. 하지만 수뇌부 윗대가리들이 나빴지. 일본 국민이야 무슨 죄. 따지고 보면 슬픈 피해자들이지, 뭐.” 그런데 참 알 수가 없다. 그렇게 통 크게 훌훌 털어버리면 간단할 것 같은데…. 사람 좋게 용서해버리면 될 것 같은데 그게 그렇지가 않다. 우리가 원래 그렇게 뒤끝 있는 민족일까. 그러나 민족성하고 결이 다른 무언가가 분명 있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밝혀내기로 했다.
대한민국 광명의 암흑시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일본을 극도로 싫어했다. 대통령 가까이서 모셨던 이들 말에 따르면, 일장기만 봐도 경련을 일으킬 정도였다. 한때 거리의 당구장 아크릴을 단속하던 시절이 있었다. 빨간 당구공 표시가 ‘일장기’를 연상시킨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어이없어 했다. 아마도 측근 누군가가 대통령 마음을 지나지게 헤아린 것이 아닌가 싶지만, 증거는 없다. 그렇게 따진다면 빨간 앵두나 사과, 잘 익은 토마토도 숨겨놓고 팔아야 하는 것 아닌가.
이승만 시절, 학교마다 ‘방공 반일’ 구호가 나붙었다. 아이들은 뜻도 정확히 모르면서 구구단 외우듯 복창했다. 공산당 다음으로 나쁜 나라가 일본이라고 배웠다. 일본을 하도 미워해 축구를 하러 온 일본 국가대표님 입국도 막던 쓴웃음 짓게 하는 그 시절.
어째 좀 수상쩍다. 세상이 이상하게 돌아간다 했더니 마침내 정국혼미, 나라가 다시 흔들려 요동치고 있었다. 여야 정쟁보다 대통령을 에워싼 고관대작들이 문제였다. 1950년대 후반기 역사는 그때를 이렇게 적고 있다. “진정한 애국 일꾼보다, 그저 한자리 해먹겠다는 소인배들이 경무대 주변에 파리 때처럼 들끓었다.”
무능한 간신들에 둘러싸인 노쇠한 대통령의 비운일까. 사람들이 다 자기 같은 줄 알고 아무나 등용한 인선의 실패였을까. 아무리 그렇더라도 그는 참으로 인복이 없었다. 그가 불러서 쓴 인물들이 대한제국 말엽 고종의 주변 인물과 별 차이가 없었다. 백성들은 끊임없이 개혁과 쇄신을 주문했지만 “소귀에 경 읽기” 이승만도 그의 측근들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백성들의 원성에 대통령한테 전혀 전달되지 않는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1960년, 부정선거를 발화점으로 마침내 국민봉기(4ㆍ19).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린 몇몇이, 몇백만 시민을 거리로 불러냈다. 결국 그 몇몇들이 나라를 망가뜨리고 자기들 명줄도 재촉했다. 당시 시위 군중을 향해 총을 겨누게 한 장관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말해 많은 기자들을 놀래 자빠지게 했다. “총은 쏘라고 준 것이다!” 일본 국민들은 늘 전쟁을 끌어안고 살았다고 한다면, 한국 국민 역시 참으로 등골 으스스한 시대를 살았다. 그러나 이승만의 영결식 때, 다시 시위 군중만큼 인파가 몰려나와 눈물을 흘렸다.
돈과 ‘빽’이 춤추던 시절
이 나라는 왜 늘 그럴까. 강인 무쌍, 청렴결백의 새 정부가 주야장천 칼을 휘두르는데도, 여전히 힘 있고 빽 있는 사람들 세상이었다. 가난한 시인은 세끼 밥도 못 먹었다. 이름 없는 문화 예술인은 쌀을 꾸러 가기 창피해서 그냥 집에서 굶었다. 국가는 선진국을 꿈꾸고 있었지만 문화 예술가들 사회적 대접은 후진국 밑바닥을 벗어나지 못했다.
취직하기 어려운 좋아하는 음악이라도 하려 하면 ‘딴따라 말년이 얼마나 비참한지 아느냐?’ 기를 죽였다. 그림이나 글을 쓰겠다고 하면 ‘굶어 죽고 싶어 기를 쓰냐’며 가족들이 펄쩍 말렸다. 타고난 재능으로 성공하는 사람은 ‘백만 명에 한 명이 될까 말까’ 하늘이 노래지는 불문율이 떠돌며 사람들을 절망시켰다. 특히 연예계는 바늘구멍이었다. 그저 제일은 금수저. 누가 뭐라고 우겨도 ‘빽’이 최고, 연줄이 있어야 무엇을 할 수 있었다. ‘빽’ 중에서도 군 장성 ‘빽’이 약발이 제일 잘 먹혔다는데, 내가 아는 군 출신은 모두 병장이나 상병 제대였다. 돈이 돈을 버는 세상인데, 그 돈도 연줄이 있어야 꾸어주었고, 은행은 특히 심했다. 은행이 그렇게 사람을 봐가며 차별을 하는 곳인지 보통 서민들은 아무도 몰랐다.
군사정권이 정치를 잘해서인지, 기업이 수출을 잘해서인지 국민소득이 늘었다. 깡패가 많이 잡혀가고 ‘조국 찬가’가 여기저기서 울려퍼졌다. 그럴수록 정직하고 투명한 사회가 돼야 하는데 수면 밑으로 더 많은 부조리가 용암처럼 흘렀다. 보통 사람 눈으로도 그것이 훤히 보일 때가 많았다. 어찌 보면 당연한데 참 신기했다. 힘 있는 사람 힘은 더 세지고, 국민소득에 맞춰 뇌물액수도 점점 올라갔다. 가끔 신문에 안 났으면 일반 서민들은 그런 큰돈이 세상에 굴러다니는 것도 몰랐다. 종종 배달 사고라는 것이 있었지만 곧 위험수당이라는 파생상품이 생겼다. 이래저래 돈 가진 사람들의 세상. 그들만의 리그였다.
바보라는 별명을 가졌던 전전 대통령 노무현은 “정의가 실종되고 부패 비리가 득세한 세상”이라고 했다. 당장 여기저기서 “자유민주주의 국가 부정이냐” 맞받아쳤지만, 딴 건 몰라도. “정의가 실종된 사회”는 분명 맞다. 무서운 것은 정의가 실종된 사회라고 함부로 떠들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골로 가는’ 세상이었다.
실제로 어떤 기원에서 큰 소리로 “당하는 놈만 억울한 세상”이라고 했다가 붙들려 간 남자도 있었다. 알고 보니 상수의 꾐수에 자꾸 대마가 죽어 짜증이 나서 한 소리였다. 6급 실력의 그는 매는 맞지 않고 금방 풀려났다. 그러나 그 웃기는 일 하나만 보더라도 당시 사회 감시망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것 같지 않은가.
일본인은 왜 친절할까
일본을 다녀보면 산이나 바다나 기암절벽, 우리나라랑 거의 똑같다. 일본이 정리가 잘돼 있고 깨끗하다 뿐, 도로 폭이 우리보다 좁다는 느낌뿐, 고속도로 요금징수, 톨게이트, 주차 시설, 식당과 자판기 전부 똑같다. 문화의 차라고 하지만 같은 쌀밥을 먹는다. 똑같이 된장국을 좋아한다. 일본인은 매운 것을 못 먹고 생마늘 같은 거 입에도 못 댄다는 소리는 거짓말이다. 고추장, 떡복이, 매운 김치 너무 잘 먹는다. ‘지고쿠 라멘’이라고 해서 들어가 먹었는데 과연 한국인이 놀랄 정도로 매웠다. 그래서 지고쿠 라멘(지옥 라멘)인가.
한일 양국이 인구절벽으로 고민하고, 특히 고령화 현상은 거의 두 나라가 판박이다. 공원에서 담소하는 노인들을 보면 여기서 일본인지 한국인지 얼른 구분이 안 된다. 간판 글씨만 바꾸면 그대로 서울, 부산, 광주다 싶은 거리가 너무 많다. 열심히 사는 중소도시 서민들, 고달픈 도시 서민, 어디를 가봐도 똑같이 먹고 사느라 바쁘구나.
길거리에서 큰소리로 전화하는 것까지 똑같을 것 같지만 그건 아니다. 일본도 목청 큰 사람이 많지만(특히 선술집 젊은 손님들) 전화 소음 서로 배려하자는 포스터가 곳곳에 붙어 있고, 구호로만 그치는 게 아니라 절대다수 시민들이 협조한다.
특히, 도쿄 같은 큰 도시에서 전차를 타보면 큰소리 통화는 고사하고 스마트폰 벤소리 하나 들을 수가 없다. 믿어지지 않아 알아보았더니 무음(진동)이 도시인 기본 에티켓이란다. 그거 하나 진실로 존경스럽다.
부부 싸움도 이웃에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창문을 꼭꼭 닫고 ‘조용히’ 싸운다. 그나마 요즘은 부부 싸움 구경하기 힘들다. 싸우면서 사느니 아예 갈라서는 것인지…. 요컨대 남에게 폐를 끼쳐서 안 된다는 것을 교통법규 이상의 철칙으로 삼고 살아간다.
특히, 타인에 대한 친절과 양보, 잠시 불쾌해도 참고 타인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려고 애를 쓴다. 일본인들이 하도 친절하다고 해서 나는 처음에 “장사 해먹으려면 당연히 친절해야 손님이 오지. 흔한 장삿속 웃는 얼굴일 거야”했는데 아니었다.
손님이 찾는 물건이 자기 가게에 없으면 그 손님을 수십 미터 떨어진 다른 가게로 모시고 간다고, 많은 경험자들이 두고두고 감탄한다. 혹시 친척이 하는 가게 아닌가 했는데 전혀 모르는 사이였단다.
내가 짖궂게 점원을 붙들고 “뭘 그렇게까지 하느냐, 선행하는 기분으로 그렇게 하느냐” 물었다. 그랬더니 선행은 전혀 아니고 손님이 우리 가게 아닌 데서도 돈을 쓰고 가면 이 지역이 그만큼 이득이 되고 결국 자기한테도 이득 아니겠냐는 것이다.
친절이 몸에 뱄다는 것은 이미 그 사람은 사회인으로 성공했고, 아주 탄탄한 생활 기반을 구축한 것이다. 세상은 친절한 사람에게 유익을 주기 때문이다. 친절을 모르는 무뚝뚝한 사람도 친절한 상점을 애용한다. 한국에도 친절한 사람이 많은데 나는 그것을 일본에 가서 깨달았다.
아! 청계천
‘도쿠가와 막부’ 에도시대 후반, 전쟁이 없는 세상이 되니 칼을 쓸 일이 없었다. 사무라이들은 대부분 실업자가 되었다. 칼잡이가 무직인 시대는 나라가 생기고 처음이었다. 고향으로 돌아가 개인 경호원으로, 혹은 장사를 하다가 가진 돈 다 까먹고 범죄자로 전락한 딱한 사무라이도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있다 해도 작동이 쉬운 다연발 소총에 권총, 물레방아식 기관총까지 반입되니 이미 칼잡이 종언 시대였다.
그러나 사무라이들은 낙심하지 않았다. 독서로 세상을 다시 읽으면서 세계를 공부했다. 그 시절 ‘에도’ 무가에 세계지도 없는 집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역시 빠르고 자세에 빈틈이 없는 사무라이들인가. 비교하기 불쾌하지만, 그 당시 조선은 세계지도는 고사하고 국내 지도 한 장 구하기도 별따기였다. 혹 잘못 소지했다가 첩자로 의심받기 십상인 세상이었다.
세월이 한참 지나 외국 선교사가 중국에서 가져온 세계지도 달랑 한 장이 최초이자 전부였다. 물론 돈을 주면 보따리 무역상들이 구해다 주겠지만, 조선 임금도 신하도 ‘우리끼리 지금 이대로’가 좋았다. 바깥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지만 알 필요도 없었다. 도대체 ‘정보’라는 것이 성가셨다. 덕분에 아무 힘없는 농민들은 그저 하늘만 바라보았다.
극심한 가뭄 때 나라가 신경 써주는 일은 기우제가 전부였다. 백성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농사가 잘돼야 많이 거둬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기우제는 국가의 펀딩이었고, 임금도 신하도 오직 거기 매달렸다. 도랑을 막아 물을 가둔다거나 빗물을 모은다거나, 작으나마 저수지를 어찌 해보는 것은 돈이 들고 귀찮았다. 전문가도 없었다. 있어도 선뜻 안 나섰다. 중매쟁이는 뺨만 맞지만, 괜히 난공사 맡았다가 돈은 커녕 죽을 수도 있었다. 그저 안전빵이 기우제였다. 돼지 대가리를 삶고 그저 하늘에 빌었다.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왔다. 비가 올 때까지 지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