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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워지는 것도 사랑입니까

황경신 지음 | 소담출판사



지워지는 것도 사랑입니까

황경신 지음

소담출판사 / 2018년 9월 / 276쪽 / 13,800원





눈을 감으면


나에게는

충분하지 못한 햇살과

완전하지 못한 빛과

가지지 못한 사랑이 있다



눈을 감으면

따뜻한 태양이 나를 간질이는

오월의 부드러운 잔디

위에 누워

너와 함께

행복한 내가 있다





아직 끝내고 싶지 않다


어디로부터 왔는지 모른다, 어째서 이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이름 알지 못하는 곳에 처음 이를 때마다 가슴이 뛰고 어지러웠다.

무엇을 찾고 있는 건지 그것을 찾을 때까진 알 수가 없다고,

그것을 찾는 일은 어쩌면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직 이 여행을 끝내고 싶지 않다.



모든 불빛을 나는 동경한다. 그들 하나하나의 삶과 역사를 질투한다.

그들도 나처럼 사랑하고 떠나가고 세상을 헤매인다.

왜 자신이 반짝이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고 한탄하기도 한다.

깊이를 알지 못할 강으로 뛰어들기도 한다.

그렇다고 여행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끝이 나버리는 여행 따위는 없다.

그것이 여행의 슬픔이고 기쁨이다.

이름 모를 강가에서 나는 어렴풋이 깨닫는다.

나의 여행 역시 이제 막 시작된 건지도 모르겠다.





아주 사소한 것까지


아주 사소한 것까지 나는 기억하고 있다

지친 듯 흐트러진 머리카락

쏟아지며 반짝이는 햇살

부신 눈을 가늘게 뜨고 나비를 쫓던 시선

긴 언덕에 몸을 누이고 너, 알지 못할 노래를 흥얼거렸지

너를 사랑하게 되면 다른 세상을 보지 못할 것 같아

나, 서둘러 너를 떠나보냈지, 그 이후에도

아주 사소한 것까지 나는 기억하고 있다

이렇게 말하면 너는 울겠지



우리에게 기억이란 이미

눈물 뒤에 남겨진 몇 알의 소금에 불과한 것

오래된 레코드에 남아 있는 달콤한 음성 같은 것

아직도 나는 너의 기억으로 두려워하고 있다

이렇게 말하면 너는 울겠지

봄이 오는데

이제 곧 봄이 오는데





나는 아직도 사랑 때문에 괴롭다


나는 아직도 사랑 때문에 괴롭다

만나지 못하는 사람 때문에 괴롭다

제발 사랑이 떠나가도록 매일 빌어도

사람은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용서하라, 내 눈이 어려 내일을 알지 못하고

단 한 번에 목숨을 던질 수 있다고 믿는다



나의 애원에 귀 기울이지 마라

너는 그저 살아가면 되는 것

지금까지 그래 온 것처럼

사랑이 깊어질수록 어두워가는 세상

이제 곧 나는 모든 것을 잃고

어둠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이렇게 하찮은 존재로 태어났어도


내 삶의 이력은 너무도 보잘것없어

그대에게 건네줄 가난한 낙서 한 조각 가지지 못했다

내 마음 얇고 딱딱한 종이와 같아

그대의 근심 한 점 고이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날개를 펴고

추운 겨울을 가로질러 남쪽으로 간다



그리고 나는 끝없이 되묻는다

이렇게 하찮은 존재로 태어났어도 그대를 사랑할 수 있나

파란 성에처럼 맑고 단단한

하늘인 그대를





나를 발견해줄 때까지


너의 창에 불이 켜지고 다시 꺼지는 사이

나는 길 밖에 서서 작은 가지를 뒤척인다

네가 눈물을 닦고 다시 웃는 사이

나는 네 마음 밖에 서서 망설인다

겨울 속 얼어붙은 기억에게 손을 흔들고

너는 다시 떠나버리려는 걸까

나는 숨을 죽이고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한다

네가 뒤돌아서서 나를 발견해줄 때까지





숨을 죽이는 이 연약한 사랑이


내가 지금까지 사랑에서 한 일이라고는

이별을 서두른 것밖에 없다

추억은 내 꿈을 침식하고

서투른 맹세는 후회를 남긴다

내가 그들에게서 사랑을 구하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내가 원하는 것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하고 흔들림 없고 아낌없는 그들의 사랑은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다, 내가 이별한 것은

사랑이 아니었다, 그러나 부드러운 바람에도

숨을 죽이는 이 연약한 사랑이 지금 내 손에 있다

쉽게 상처받고 흔한 눈물을 흘려도

그 뿌리는 심장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든다

이 차디찬 이슬이 언젠가는 달콤해지리라

우리가 따뜻해진다면, 이 심장이 뜨거워진다면





유리벽 너머에


유리벽 너머에 그대가 서 있지.

그대가 슬픈 건지 행복한 건지 나는 알 수가 없어.

그대의 맞은편에 내가 서 있지,

내가 슬픈 건지 행복한 건지 나는 알 수가 없어.

내가 원하는 것은 맞잡은 두 손, 마주 보는 두 눈,

슬픔과 행복을 함께 느끼는 심장인데.

우리들 아주 조금씩 어긋나버리는 시간 속에서,

만날 수가 없지.

불러도 불러도 대답이 없지.





그것도 참 기쁜 사랑이지요


얼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사랑이었지요

그대 단단한 얼음 위를 걸어 내게로 오길 바랐지요

꽁꽁 언 내 마음 망치로 깡깡 부수어서

그 아래 흐르던 내 사랑으로 목을 축이던 그대

마음은 그렇게 갈라졌어도 나는 기뻤지요



날이 갈수록 햇살 따스해지고

내 사랑 스르르 녹아 형체 없이 사라집니다

기슭에 머물러 있던 배를 타고

그대는 또 어디까지 나가버렸나요

흐르고 또 흘러도 먼바다에 닿지 못하는 내 사랑

한없이 가벼워져서 하늘로 날아오릅니다



잡을 수 없는 구름이라 하지만 그것도 사랑이지요

즐거운 그대, 머리 위를 떠돌고 있다 하지만

그것도 참 기쁜 사랑이지요





그 추억은 아름다워라


제대로 파헤쳐진 상처가

아물기 전에

소금을 뿌리고

따사로운 햇살에 내다 걸어

꾸득꾸득해지도록 말린 다음

해 질 무렵

서늘한 이슬 피해

처마 끝에 옮겨 단다



몇 날 며칠 지나

수분이 모두 빠져나간 상처를

단단한 기억이라 부른다

기억을 곱게 다림질하여

빈 서랍에 담아

캄캄한 어둠 속에 묵힌다



오랜 세월 흘러

어느 날 문득 꺼내어본

그 추억은 아름다워라





왜 그때가 아니었니


눈 아래 얼음 아래 강 아래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고기들을 보았어

그러나 밖은 한겨울

응결된 시간은 거스를 수 없으니

가장 낮은 곳으로 흐르고 있는

그 마음을 내게 얘기하지 마

왜 그때가 아니었니

차가운 풍경 속에 그대 남겨두고 떠나온 나는

이미 견고한 삶을 세웠으니

다시 거슬러 올라갈 수 없는걸

지금에 와서 뒤돌아볼 수는 없는걸





어째서 그렇게


어째서 그렇게 꽃처럼 피어났는지 그대 묻는다면

여름은 이미 뜨거운 햇살에 타버렸다 말할 텐데

어째서 그렇게 꽃처럼 향기로운지 그대 묻는다면

가을은 이미 바람에 묻어왔다 말할 텐데



나는 먼 골목 발자국 소리 헤아리며

천년 같은 밤을 기다리는데

방울방울 멍울처럼 꽃잎 떨어지고

꽃잎처럼 여린 약속 낱낱이 부서지는데





잊은들 잊지 않은들


그리 멀지 않은 과거의 풍경은

미처 마르지 않은 물감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당신이 그곳에 있을 때

당신의 부재는 치명적인 가혹이었습니다



파도처럼 흔들리는 풍경은

아득히 먼 과거를 향해 달려갑니다

당신이 그곳에 없을 때

당신의 존재는 치명적인 망각입니다



잊은들 잊지 않은들

무엇이 어떻다고 살지 않겠습니까

목숨처럼 무서운 사랑도

무엇이 어떻다고 잊지 못하겠습니까





먼 훗날 그대가 물으면


그 사랑이 어떠했냐고 먼 훗날 그대가 물으면 어떻게 할까

눈물은 모두 바람에 말라버렸다고 대답할까

그대가 허락하지 않았던 눈물 때문에

내 마음도 서걱서걱 말라버렸다고 대답할까

그리워한 시간들은 모두 모래알이 되어

그때부터 사막 하나 지니고 살았다고 할까

아직도 사막 언저리 어딘가에

그리운 그대가 서성인다고 할까



먼먼 훗날 그대 내게 그 사랑을 물으면 어떻게 할까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은 모두 그대에게 있으니

나에겐 처음부터 사랑이 없었다고 할까

그대 사랑한 것은 거짓이라고 할까





지워집니다, 지워집니다, 되뇌며


나는 폭설 속에 갇혔습니다

병아리처럼 솜털처럼 여린 것이 그대 마음인 줄 알고

달아날 궁리도 못했습니다

하루 이틀 계절이 지나고 막다른 곳에 이르니

헤아릴 수 없는 사랑도 쉽게 지워집니다

지워집니다, 지워집니다, 되뇌며 나는

차고 단단한 결박 속에 갇혔습니다





미소만 짓고 있다


그 마음 흐트러진 지 수 해가 지나고

지울 수 없다 했던 흔적 까맣게 씻겨가고

우리 어떻게 헤어졌지, 더듬거리는데

그대는 여전히 미소만 짓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헤어질 이유는 없었는데

그저 불온한 젊음을 견딜 수 없었던 것뿐

고작 그것 때문이었어, 원망도 않고

그대는 조용히 미소만 짓고 있었다



겨울이라서 다행이야

그대도 알고 있잖아

욕망이라 부를 수 없는 마음 하나

숨죽여 호흡하며 살아 있는 것

나도 알고 있잖아

욕망이라 불러도 어쩔 수 없는 마음 하나

아직도 빛바래지 않고 움직이는 것





겨울이라서 다행이야


흔들리는 마음 조용히 덮어

빈 마당 한구석에 묻고

시린 바람에 얼려두자

드러나지 않도록 사라지지 않도록

시린 눈 속에 영영 얼려두자





그대 안녕하겠지


그곳이 어디라 해도

그대 안녕하겠지

그 마음 어떻다 해도

그대 아름답겠지



추운 가지 바람에 저항할 수 없어도

하늘은 푸르고 구름은 흘러

힘겨운 영혼 그곳에 다다를 수 없어도

상처는 푸르고 세월은 흘러



아무리 멀어도

꿈이라면 닿겠지

아무리 그리워도

목숨은 건지겠지





너도 어디로든 흘러가라


이것으로 이 불온한 인연은 끝이 났다

티끌만 한 우연도 남아 있지 않으니

외롭고 헛된 영혼은

길을 잃지 않아도 되겠지



한 천 년 지난 후에 다시 만나도

내 심장은 더 이상 그대 알아보지 못할 테니

상처투성이가 되어

운명을 거슬러 가는 일도 없을 거야



그러므로 사랑아, 너도 어디로든 흘러가라

칼날 같은 가을빛에 산산이 부서질 때까지





사랑일 수밖에 없는 사랑을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릴 나이는 지났지만

지금도 나는 기다리고 있지

사랑이라 부르지 않아도 사랑일 수밖에 없는 사랑을



물 흐르는 아픔과 꽃피는 고통을 알게 되었어도

나는 언제까지나 그리워하고 있지

짓밟히고 찢어져도 죽을 때까지 사랑인 사랑을



그러나 그대는 망설이듯 망설이지 않고

가까이 있는 듯 멀어질 뿐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고 끝나지 않는

늦은 겨울





눈 속에서도 얼지 않고


나는 흙내 나는 땅속에 다리를 내리고 두 팔을 뻗어

공기와 바람과 햇빛을 온몸으로 받아들입니다,

손끝에 작은 꽃봉오리 맺히고

몸에는 잎들이 피어나고

발끝에서 내린 뿌리는

땅속 깊이, 깊이, 비바람이 쳐도 달아나지 않고

목이 말라도 울지 않습니다



이곳은 세상의 중심

이곳은 세상의 전부



나를 다른 세상으로

옮겨갈 수 있는 유일한 그대를 위해,

눈 속에서도 얼지 않고

어둠 속에서도 깨어 있습니다,



어느 날 그대가 나의 꽃에

입을 맞추며 나의 잎을 쓰다듬고

부드러운 흙을 뒤집어

나의 뿌리를 파낼 그때, 비로소



난 다른 세상의 사소한 존재가 되어

그대 가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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