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리현동 신 대가족 이야기
김승일 외 지음 | W미디어
사리현동 신(新)대가족 이야기
김승일 외 지음
W미디어 / 2018년 8월 / 310쪽 / 14,000원
결혼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시작의 시작 - 류대희
워킹맘으로 서른넷인 나는 두 아이의 엄마이자, 학생들의 학교 엄마이자, 철없는 이 집의 둘째 딸이다. 남들이 보면 ‘딸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누가 봐도 며느리지’라고 하겠지만, 이 집에서 내가 하고 있는 행동을 보면 누가 봐도 딸인 줄 안다. 그렇게 맘 편히 살게 된 것은 축복이고 행운이며, 감사할 일이다. 하지만 다들 예상하고 기대하는 것처럼 매 순간이 기쁨은 아니었다. 이런 대가족이 전원주택에 모여 오늘 하루를 살아내기까지 우리는 각자 참 많은 눈물을 흘렸다.
캠퍼스 커플인 우리 부부는 대학생 때는 서로 다른 곳을 봤었다. 야외에선 늘 사진기를 끼고 다니고, 암실에서 현상과 인화 작업에 몰입했던 나와는 달리, 같은 사진동아리에 있으면서도 남편은 동아리실에서 본 기억이 별로 없다. 무늬만 사진동아리이고, 출사(出寫) 뒤풀이 술자리 때만 나타나는 그였다. 졸업 후 교직생활을 하며 교사 스노보드 동호회 시즌방에서 다시 만난 그는 여전히 밝고 해맑았다.
지금 뚜렷하게 기억에 남는 건 강원도 스키장에서 서울 강남 가는 버스를 함께 타게 되었을 때 무지하게 좋았고, “밤에 산책할 사람?” 하고 술 깰 겸 빈 슬로프에 나가자 했을 때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고, 한 게스트가 시즌방에 와서 나에게 치근덕댔을 때 “에이, 형, 왜 이래요?” 하면서 나를 방으로 데려가 안심시키며 안아준 채로 누워 잠든 그의 품에서 나는 잠을 전혀 이루지 못했었다는 것이다.
꿈 같은 시즌방 생활 후, 교육청 영어 캠프 강사로 차출되어 방학 중에도 날마다 일해야 했던 날들 가운데 문득 생각났다는 듯 나는 그에게 먼저 문자를 보냈고, 그도 살갑게 답장을 주었다. 그런 날들이 계속된 후 우리는 밤에 한 시간이 넘도록 통화를 했다. 하루는 영어 캠프 일과 신규교사로서의 고충이 있었는지 내가 힘들단 기색을 내비치며 ‘치맥’이 당긴다 하니 그는 단숨에 당시 내가 살던 양재동으로 와주었다. 그리고 “가슴 뛰는 일이 뭐예요?”라고 서로 물어보며, 그의 고백을 끌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그때 세상에는 우리 둘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그렇게 우리의 시작이, 시작되었다.
가슴 뛰게 하는 일 - 김지양: 지금으로부터 1년 전, 결혼 6년차. 만 5주년을 앞두고 나는 문득 ‘우리의 삶을 한번 정리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기록으로 남긴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많은 노력과 그만큼의 삶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시작해보기로 했다. 나중에 우리 아이들에게 엄마 아빠의 삶을 이야기해주고 싶기도 하고, 이 과정에서 나 또한 더욱 성숙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이와 더불어 가족들이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는 우리 가족이 함께 살아가야 할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게 해주는 계기가 될 것이다.
아내와 나는 대학교 사진동아리 선후배 사이다. 아무리 떠올려 봐도 대학 때 그녀와 내가 쌓은 추억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다 같이 어울리는 자리에서 본 기억밖에 없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입대했다. 그리고 제대 후 학교에 복직했고, 대학 때부터 다녔던 스노보드 동호회에서 다시 활동을 재개했다. 그녀도 어느새 졸업을 하고 스노보드 동호회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어느 날 여러 회원들과 평창의 휘닉스파크 조강아파트에서 함께 숙식하며 활동을 했었는데, 그때 그녀의 다양한 모습을 보게 되었던 것 같다. 시즌이 끝날 무렵인 2월, 그녀가 살던 집 근처 양재동에서 치맥을 먹기 위해 만났다. 그리고 어느 정도 이야기가 무르익어갈 무렵 그녀에게 질문을 했다. “요즘 대희의 가슴 뛰게 하는 일은 뭐야?” 그녀는 자연스럽게 몇 가지를 늘어놓았다. 별로 기억에 없는 것을 보니 내가 듣고 싶은 말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런데 한참을 이야기해도 내게는 같은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내가 물었다. “나한테 가슴 뛰는 일은 안 궁금해?” 그랬더니 수줍게 웃으면서, “참, 그렇네요. 지양 오빠는 가슴 뛰는 일이 뭐예요?” 나는 망설임 없이 바로 대답했다. 필요한 건 눈맞춤. “너 만나는 거….” 아직도 발그레한 얼굴로 웃으면서 시선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몰라 하던 그녀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렇게 시작했다. 그날이 2월 5일. 매년 아내는 이 날을 기억한다. 나 또한 기억한다. 삶에 지쳐 웃음이 사라질 때도 그날을 생각하면 입가에 웃음이 생긴다.
결혼 준비 - 김지양
2년의 연애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부모님들께서 상견례 이야기를 하셨고, 기다린 보람 끝에 결혼을 준비하게 되었다. 결혼 준비를 하면서 좋았던 것 중 하나는 성당의 예비 신혼부부 교리였던 것 같다. 결혼식장은 한강 성당이었다. 결혼을 해서 가족이 된다는 것은 모든 슬픔과 기쁨과 어려움들을 기꺼이 함께한다는 것이다. 실제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는 어떤 화려함도, 영화 같은 삶도 없다. 그저 하루하루의 평범한 삶을 감사히 여기며 함께 어울려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가까울수록 더욱 가꾸고, 가족일수록 더 지켜주는 삶을 살아야 할 텐데…. 나는 아직 갈 길이 멀다.
나랑 결혼해 줄래 - 류대희: 연애를 시작하고 얼마 안 있어 부모님은 경남 창원에서 경기도 용인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셨다. 양재동 자취방에 있던 내 짐을 용인 집으로 다 옮겼었는데, 다시 그 짐을 응암동 신혼집으로 조금씩 옮겨야 했다. 그 사이에 첫 조카 시유가 태어났다. 얼굴이 상기되어 들뜬 목소리로 휴대폰을 가리키며 “나, 삼촌 됐어!”라고 하던 남편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출산 후 형님은 일을 쉬며 강원도 원주의 친정에서 시유를 보살피고, 아버님은 일을 하고 계셨고, 어머님은 형님 산후조리를 돕고 계셨고, 나와 남편은 서울에서 둘이 결혼을 준비하는 나날을 보냈다.
그리고 결혼식 전날, 은반지 위에 만들어 붙인 나무 반지와 함께 ‘결혼해줄래?’라는 말을 드디어 듣고야 말았다. 그동안 몇 차례 프로포즈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결혼해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효라고 툴툴거렸더니 이날 뒤에서 나를 살짝 안아주며 속삭였다. “사랑해, 나랑 결혼해 줄래?” “그래, 까짓 거 결혼해 주지 뭐!” 다음날 한강 성당에서 많은 지인들을 모시고 혼인 미사를 치렀다.
신혼의 달콤함은 너무나 짧다 - 김지양
우리의 신혼집은 응암동 풀옵션 복층 오피스텔이었는데, 그곳에서의 하루하루는 행복 그 자체였다. 물론 즐거움으로만 시작했던 오피스텔에서의 생활은 결혼 후 3~4개월 만에 찾아온 임신으로 인해 걱정거리가 되기도 했다. 그래도 그곳에서 임신해서 만삭인 아내와 함께 야간에 평소에는 먹지도 않는 맥도날드 패스트푸드를 시켜먹던 그때는 오피스텔의 크기만큼이나 작은 추억이었지만, 지금까지도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 류대희: 조카 시유는 내 피는 안 섞였어도 정말 사랑스러웠다. 출산휴가를 마친 형님이 복직하면서 어린이집을 다니는 시유를 뒷바라지하기 위해 어머님이 올라오셔서 우리도 더 자주 만나게 되었다. 시유를 보러 신혼집에서 걸어서 20분 걸리는 형님 집으로 가면 시유는 유난히 나를 반겼다. 시유가 까르륵거리며 숨넘어가도록 웃는 소리를 들으면 정말 행복해지고 힘이 났지만, 육아는 내게 아직 먼일 같았다. 거기다 나는 방학마다 세계를 돌아다니며 실컷 놀고 2년쯤 뒤에 아이를 갖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계획은 따로 있었나 보다. 어느 날 임신 사실을 확인한 후, 남편이 진심으로 기뻐하는 걸 보고 나도 안심이 되었다. 그리고 아들 유준이가 태어나기 전까지 신혼이 더 연장되었다. 남편은 세례를 받은 지 3년 만에 견진성사를 받았다. 유준이가 태어나기 전이었다. 바쁜 일정에도 견진교리 보강까지 받아가며….
출산, 그리고 전원 주택 - 류대희
유준이가 물건을 붙잡고 설 수 있을 때까지 자랐던 곳은 용인 외갓집이었다. 친정 부모님은 8개월간 물심양면으로 유준이를 키워주셨다. 남편은 학교 일이 바빠서 거의 주말에만 내려왔고, 난 일주일에 두 번씩 용인에서 서울로 학교까지 통근하는 불편함을 감수해가며 아이에게 얼굴도장을 찍었다. 그러다가 합가(合家) 이야기가 나왔다.
전원주택에 대한 목마름이 있던 남편과 형님 남매의 결단력이란! 집을 짓더라도 한 번 살아보고 지어보자는 생각에서 먼저 고양시 관산동에 전원주택을 얻게 되었다. 유준이를 매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덜컥 오케이를 하였지만, 주위에서 시부모님과 함께, 거기다 시누 가족도 함께 사는 게 말이 되냐며 말리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난 남편에 대한 믿음이 있었고, 시부모님의 성품을 잘 알고 있기에, 그리고 내겐 언니와도 마찬가지인 형님이 있어서 너무나 든든하기만 했다.
큰 마당이 있는 집에서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유준이가 더 자라서 사촌 누나 시유와 뛰어노는 모습을 매일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행복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시유와 유준이는 자주 투닥거리긴 해도, 안 보이면 서로 찾고 의지하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계절이 바뀔 무렵, 거실 소파에 앉은 형님이 둘째를 임신했다는 소식을 전해주셨다. 축하와 기쁨(우린 아이를 좋아하니까), 설렘(유준이에게 여동생이)과 걱정(아이 셋은 둘과는 또 다르므로), 그리고 뜻밖에 시샘(이제 모든 집안일은 내가 해야 하나?)…. 만감이 교차했다.
시샘의 결과였는지, 두 달 뒤에 내게도 둘째 유나가 찾아왔다. 유나의 존재는 먼 이국땅에서 알게 되었다. 겨울방학이라 아주버님이 시유를 돌보는 동안, 우리 세 식구는 시부모님을 모시고 숙부님이 계시는 멕시코에 한 달 간 여행을 가게 되었던 것이다.
날이 따뜻해지면서 마당에서 고기를 구울 일이 많아졌다. 그리고 봄에서 여름으로 계절이 지나가며 해가 길어졌다. 저녁을 먹고 나도 하늘이 어두워지기 전까지 제법 긴 시간이 남아, 유준이와 시유를 각각 손잡이 있는 유모차 자전거나 수레에 태워 동네 한 바퀴를 돌고 와서 씻기곤 했다. 볼록한 배를 안고서도 산책하는 것은 즐거웠다. 아이들도 이 ‘동네 한 바퀴’를 무척 좋아하고 기다렸다.
그런데 합가한 지 1년 만에 남편은 그동안 마음에 두고 있던 해외 파견 근무를 신청했고, 임신 막달에 아르헨티나로 떠나는 남편의 짐을 싸게 되었다. 나는 곧 태어날 아기와 유준이를 데리고 관산동에 남아 있기로 했다. 아무튼 유나가 태어나고 이틀 뒤에 남편은 아르헨티나로 떠났고, 나는 산후조리원에, 유준이는 관산동에 있다가 때때로 친정 부모님이 용인에 데려가시고, 그렇게 이산가족이 되었다.
산후조리원 원장님은 혹여 내게 산후 우울증이 오지는 않을까 세심히 신경써주셨다. 그런 상황인데 먼 곳에 잘 도착했다는 남편이 “여기 또 파견교사를 뽑는다 하니 너도 얼른 시험 준비해.”라고 연락이 왔을 때는 어찌나 화가 나던지…. 하지만 나는 산후조리원에서부터 시작해 취미에도 없던 한국사능력시험 기출문제를 2쪽 모아찍기로 인쇄해 잘 보이지도 않는 작은 글씨를 눈을 비벼가며 공부했고,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동안에도 텝스 공부를 틈틈이 하였다. 그렇게 애쓰고 노력한 끝에 좋은 결과를 얻게 되었고, 나 또한 파견교사 원서를 넣었다. 그 이후로는 출산휴가를 얻어 쉬다가 육아휴직을 연이어 냈다.
남편과는 하루에 한 번씩 빠지지 않고 화상통화를 하였는데 화면 속 남편은 수염이 덥수룩해져 있었다. 한편 나는 어머님이랑 둘이서 애 넷을 데리고 씨름하던 날들도 더러 있곤 했다. 그렇게 날마다 전쟁 아닌 전쟁을 치르고 있던 내게 단비가 내렸으니, 파견교사 선정 공문이 왔다. 아르헨티나로 떠날 짐을 꾸리는 내 모습은 관산동 집을 벗어나면서 느끼게 될 자유를 떠올리며 무척 신이 났었다. 함께 짐을 꾸려주시던 어머님은 그런 나를 보고 어떤 마음이셨을까?
잠시 아르헨티나 좀 다녀올 게요 - 류대희
우리가 아르헨티나에 도착하고 2주 뒤, 친정아버지도 아르헨티나로 오셔서 엄마와 함께 루한 성지를 둘러보셨다. 부모님 두 분은 따로 오셨지만 나갈 때는 함께 출국하셨다. 1월 말의 일이었다. 엄마는 2월 중순에 다시 오셨다. 내가 한국학교에서 근무를 시작하면서 유준이가 한국학교 병설유치원에 다니게 되었고, 유치원 적응기간에 따라 아이들은 오전에 잠깐씩밖에 등원을 하지 않아 누군가가 유준이와 함께해야 했기 때문이다. 유준이는 외할머니 덕분에 유치원에 잘 적응했다. 유나도 베이비시터를 한 번 바꾸고 나서는 적응을 잘 하는 것 같았다.
한국에 있는 식구들과는 매일은 아니었지만 꼬박꼬박 화상통화를 했다. 관산동 집에서 사리현동 집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우리가 걱정할까봐 통화를 하는 중에도 어머님과 형님 내외는 힘든 내색을 크게 안 하셨다. 소송 문제에 집을 짧은 시간 안에 구하고, 엄청난 스케일의 리모델링까지 하시면서 성당에서 세례까지 받으셨다는 것을 나중에야 들었다. 죄송스럽고, 감사하다는 말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한 지붕 아래 세 가족
함께 살아야 하는 이유 - 이음전
60대 중반이 되어 새삼 가족이 함께 살아가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간단하지만 쉽지 않은 일. 그 이유 속에 우리 삶의 지향점이 있지는 않을까? ① 모두 함께 있어서 행복하다. ② 서로가 궁금해 할 일이 없다. ③ 우리 부부에게 직장이 생겼다. 건강만 챙기면 직장을 잃을 일은 없다. ④ 아들딸이 직장에서 아이들 때문에 걱정할 일이 없다. 아이들 문제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해결해준다.
⑤ 식구가 많아 아이들 성격도 좋다. ⑥ 좋지만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다. ⑦ 아이들과 저녁에 헤어질 때 “내일 아침은 어떻게 만나?”라고 하면 아이들은 “웃으면서 만나요.”라고 한다. 아침에 아이들이 울면서 나오면, 들어가서 마음껏 울다가 웃고 싶을 때 나오라고 방으로 들여보낸다. 이제는 웃고 인사도 한다. “할머니, 안녕히 주무셨어요?” 이게 사는 보람이다.
사리현동의 10인, 이제 다시 시작이다
대가족 생활에 적응하기 - 김지양
우린 아르헨티나에서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아쉽기도 했지만 가족이 있는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홀가분하기도 했다. 2년 전 아르헨티나로 떠날 때도 정신없이 출발을 했는데 도착할 때도 여전했다. 양가 모든 가족이 다 나와서 우리를 맞아주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사리현동 집으로 향했다. 새로운 집에서의 첫날, 처음 보는 집인데도 아늑하게 느껴졌던 것은 가족이 함께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족은 그렇게 우리에게 안정감을 준다.
아이가 넷 - 류대희: 식구들이 관산동에서 사리현동으로 이사를 한 것은 우리가 한국으로 오기 반년 전의 일이었다. 지난 집 주인과의 소송이며 새집을 사고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하면서 한국에 있던 식구들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나는 얘기를 듣고 또 들어도 직접 겪어보지 않았으니 짐작이나마 겨우 할 수 있는 따름이다. 새집에 들어와 보니 곳곳에 엄청난 노력을 한 흔적들이 눈에 띄었다.
아이들은 첫날, 긴 낮잠 자듯 밤에 잠을 잘자주었다. 다음날인 일요일은 성당 가는 날. 우리 가족이 아르헨티나에 나가 있는 사이에 시부모님과 시누이, 조카들은 세례를 받고 심지어 어른들은 견진성사까지 받았더랬다. 몸이 녹아내리는 정도로 피곤했지만 온 식구가 함께 성당으로 향하면서 어찌나 행복하던지…. 둘째 날, 아이들은 금방 적응했는지 낮잠도 자지 않고 놀았다. 유준이와 시유는 몇 년을 못 보다 만난 연인처럼 꼭 붙어 다녔다. 이 날 오후엔 어린이집 상담을 다녀왔다. 그리고 셋째 날인 월요일, 아이들은 어린이집에 등원했다. 할머니가 등원을 시켜주는 연습을 해야 한다며, 시아까지 아이들 세 명의 손을 잡고 어린이 집으로 향하시는 모습을 보는데 여름인데도 코끝이 시렸었다.
아이가 넷이니 정신은 없지만 자기들끼리 잘 놀고, 그렇지 않을 때라도 대식구라서 내가 짐을 정리하거나 다른 일을 할 때에는 누군가 아이들과 놀아주고 먹여주고 있고, 머리도 묶어주고 옷도 예쁜 걸로 입혀준다는 것,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나는 학교 복직과 동시에 예쁜 1학년 아이들을 맡아 의도치 않게 복직 다이어트라는 것을 경험했으니, 한 달 만에 4㎏이 넘게 빠졌다. 남편은 나보다는 가까운 학교로 발령이 났다. 아침 출근길에 형님과 아주버님, 나와 남편 이렇게 네 식구의 카풀로 교통체증이 심한 서울로 진입하며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음을 실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