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모자 지음 | 첫눈
숨
모자 지음
첫눈 / 2018년 2월 / 240쪽 / 13,000원
초콜릿 장식
그의 책장에는 언제나 크리스마스 향초와 고양이 모양의 초 덮개, 돼지 모양 초콜릿이 놓여 있었다. 도대체 유통 기한이 있는 걸 왜 장식해 놓는 거야, 물으면 그는 유통 기한이 끝나는 날 먹을 거니까 건드리니 마, 하고 대답했다.
“네가 무슨 중경삼림의 금성무야? 유통 기한 끝나길 뭐 하러 기다려. 그럴 거면 금성무처럼 본격적으로 유통 기한 똑같은 초콜릿이라도 모으든가. 달랑 하나만 책장에 세워 둔 이유가 뭐야.” “내가 금성무였으면 안 헤어졌겠지. 그리고 못 모아. 노르웨이에서 파는 거래.” 우리나라에서 샀다면 천 원이나 줬을까 싶은 흔해빠진 초콜릿을 그는 끝내 먹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는 특이한 인간이었다. 어린왕자에 나오는 여우를 사랑했고,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보아뱀 도자기 인형에 반지를 걸어 두었다. 매끈한 보아뱀의 목선과 어울리지 않는 투박한 반지는 그의 것이었으나 이제는 그의 것이 아니었다. 의미를 잃은 반지를 그의 목을 조르는 대신 보아뱀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커다란 머그컵에는 몇 년이 지난 스타티스 꽃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는데, 그의 집에 찾아갈 때마다 꽃은 조금씩 줄어들어 있었다.
심심할 때마다 조금씩 버리는 거냐고 묻는 내게 그는, 이제는 너무 말라서 가까이만 가도 꽃이 떨어진다고 말해 주었다. 그 정도면 버릴 때도 됐지 않느냐고 물어도 아직 버릴 때가 되지 않았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그는 내가 아는 인간 중에서 물건의 쓰임과 버림을 가장 모르는 인간이었다.
그는 수집하는 걸 좋아했다. 한번 빠지기 시작하면 이상할 정도로 집착했고 정이 떨어질 때까지 모으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돈이 되는 물건을 모으면 재테크를 하나 보다 생각하고 넘어갔을 테지만, 수집품의 대부분은 시간이 지날수록 쓸모가 사라지는 잡동사니에 불과했다. 이를테면 새끼손가락보다 짧은 몽당연필이라든가 다 쓴 펜 같은.
“다 쓴 펜을 모아?” “응.” “왜 그런 걸 수집해?” “다 쓴 펜이 생겼거든. 기념으로 간직하려고.”
다 쓴 펜이 생겼다는 말이 내게는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펜은 구매한 순간부터 잉크가 떨어질 때까지의 모든 시간 동안 그의 소유였다. 그런데 그는 펜의 생명이 끝나고 죽는 순간에 이르러서야 다 쓴 펜이 생겼다고 말했다. 그것은 마치 키우던 금붕어의 시체가 생겼어, 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려왔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의 소유였던 것이 끝에 이르러서야 그것을 수집하는 것이다. 나는 이해할 수 없는 그의 물건들은 하나둘 생겨나서 차근차근 사라지거나 커다란 상자에 담겨 밀봉되었다.
엊그제 산책을 나갔다가 잔디밭에 버려진 신발 한 짝을 봤거든. 때가 타고 너덜너덜하게 찢긴 신발이었어. 얼핏 봐서는 구두굽 같았는데 뒤집혀 있어서 정확히는 모르겠다.
“그런데? 비싼 신발이었어?” “딱 봤을 때 좋은 신발은 아니었어.” “근데?” “신발이 한 짝뿐이었거든. 찾아봤는데 주변에 다른 짝은 없었어.” “뜬금없이 뭔 소리야. 혹시 그 신발 주워왔어?” “아니, 그냥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짝을 버린 신발 한 짝이 갈 수 있는 곳은 고작 여기구나. 버려지는 것도 버리고 떠난 것도 결국에는 마찬가지구나. 얼룩지고 찢기고 외로워지는구나. 한 켤레의 신발은 헤어진 후에도 서로를 닮았겠구나.” “글쎄. 그건 잘 모르겠지만, 위안이 되는 건 혼자만 찢기고 헤지는 게 아니라는 거야. 안타까운 건 혼자만 찢기고 헤지는 게 아니라는 거고.”
사랑은 할 때도 잃을 때도 모순투성이 같다. 닮고 싶다가도 닮는 것이 두려운. 청승맞은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그에게 달리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버리고 버려지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었으니 해줄 말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괜히 심술궂게 말을 이었다. “그러게 누가 헤어지래?”
나의 말에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와 나의 대화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잘 알았지만 서로에게 필요 이상의 말을 하지 않았다. 아, 너도 그런 인간이구나. 정도의 시선과 거리를 유지했다. 내가 알기로 그는 이별 후에 울지 않았다. 가끔 반 발자국 정도를 다른 세상에 걸친 사람처럼 굴기도 했고, 딱딱하게 굳은 사암처럼 무거운 얼굴을 하고 나를 만나러 올 때도 있었으며, 대답이 유독 느리거나 멍한 표정을 짓는 날도 있었으나. 그것뿐이었다.
이별을 겪은 누구나가 그럴 법한 딱 그 정도였다. 그는 새로운 연애를 시작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딱딱하게 굳어 무채색이 된 그를 지켜보는 것. 그게 그의 이별에 대처하는 나의 최선이었다. 한 가지 알 수 있는 건, 그는 유통 기한이 지나도 초콜릿을 먹지 못할 거라는 것이다. 대신 그는, 변색되다가 변질되다가 썩어가다가 분해되기까지의 모든 순간을 수집할 것이다.
조용히 잠든 밤거리를 보고 있노라면 이따금 그가 떠오른다. 아마 그는 사막같이 쓸쓸한 밤거리를 홀로 걷다가 말하는 여우를 만났을 것이다. 넌 네가 길들인 것에 대해 언제까지나 책임을 져야 하는 거야. 여우는 말했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채색의 얼굴로.
비눗방울과 꼬마아이
안녕, 잘 지내지? 어제는 꽃구경을 갔다가 네 생각이 났어. 꽃박람회는 우리가 함께 갔던 그날처럼 맑고 따뜻했어. 발 딛기 어려울 만큼 많은 사람들이 꽃과 섞여서, 꽃구경을 간 건지 사람 구경을 간 건지 헷갈리는 날이었지. 사람이 너무 많아 사진 한 장 찍기도 어려웠는데 왜인지 제법 즐거운 날이었다. 오랜만에 나들이여서 그랬나 봐. 너도 잘 알겠지만 나는 집 밖에 나가는 걸 싫어하잖아. 그런데 어제는 뭐랄까, 밖에 나와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그만큼 밝고 따뜻하고 대기에 행복이 떠다니는 날이었어.
꽃박람회라는 게 사실 매년 거기서 거기잖아. 타지에서 놀러 온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비고, 죽 늘어선 가게는 이유 없이 비싸고, 매년 비슷한 꽃 장식과 작품들까지. 꽃박람회를 구경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흥미가 떨어졌어. 너도 알다시피 나는 꽃을 좋아하는 거지 박람회를 좋아하는 건 아니니까. 아, 꽃은 네가 더 좋아하던가. 너는 자주 꽃다발을 들고 걸었으니까 아마 그랬던 것 같다. 함께 걸으면 품에 안은 꽃다발과 가방 때문에 네 손은 정신없이 바빴지. 핸드폰을 보려 해도 손이 모자라 내게 꽃다발과 가방 중 하나를 맡기고 다시 돌려받고 하는 바람에 덩달아 내 손도 바쁘게 움직였어. 가끔씩 끊임없이 서로 물건을 주고받는 게 웃겨서 스탠딩 코미디를 하는 것 같았다니까.
어제 본 꼬마아이와 아이의 부모도 그랬어. 우리가 길거리에서 물건을 주고받던 것처럼, 비눗방울 놀이를 하는 아이는 계속해서 아빠에게 비눗물이 담긴 분홍통을 건넸어. 아마 통이 거슬려서 비눗방울을 만들기 어려웠나 봐. 아빠는 아이에게 통을 받아들고선 자기 손에 있는 카메라를 엄마에게 건네줬어. 카메라를 받아든 엄마는 아이의 사진을 찍었고.
아이는 참 예뻤어. 포동포동한 볼살이 빠지지 않아서 비눗방울을 불면 볼이 씰룩였어. 분홍색 셔츠와 작은 청바지가 어울렸고 키가 아빠의 허리에도 닿지 않아서 손을 높이 들어야 엄마 아빠의 손을 잡을 수 있었어. 양 갈래로 묶은 머리는 길이가 짧아서 머리를 묶어줄 때 고생을 많이 했을 거야. 엄마가 머리를 묶어줄 때까지도 아이는 잠에 취해서 눈을 감고 휘청거렸을 테고, 그만큼 조그만 아이였어.
비눗방울을 부는 것보다 손에 든 막대에 더 관심이 많은 꼬마아이. 아빠가 분홍색 통에 담긴 비눗방울을 막대에 듬뿍 묻혀서 아이에게 건네면, 아니는 막대에 묻은 비눗물을 보느라 걸음을 멈췄어. 비눗물이 아이의 손을 타고 흘러내리는 바람에 엄마는 계속 휴지로 손을 닦아줬고. 엄마와 아이를 보는 아빠의 입꼬리가 씰룩거렸어. 아빠가 비눗물이 담긴 통을 놓치기 전까진 말이야. 아이를 보느라 정신이 팔린 아빠가 그만 통을 바닥에 떨어뜨렸거든. 바닥에 떨어진 통은 내용물을 바닥에 다 쏟아냈고 통을 놓친 아빠는 아이의 눈치를 보았어. 혹시 울지 않을까 하는 난처한 웃음을 지으면서.
왜 그토록 진부한 표현들이 있는지 몰랐는데 꼬마아이를 보니 알 것 같아.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아빠와 막대와 빈 통을 번갈아 응시하는 아이의 눈동자는 정말이지 흑진주 같았어. 입을 오므리고 동그란 눈동자를 굴리는 모습이 디즈니 만화에 나오는 공주랑 똑 닮았더라고. 가까이 가서 귀를 기울이면 눈동자 굴러가는 소리가 들릴 것 같았어. 그런데 신기하지. 아빠가 통을 놓치는 바람에 비눗물이 죄다 바닥에 쏟아졌는데 아이가 울지 않더라. 조막만 한 손으로 막대를 쥐고 아빠를 쳐다보고 다시 바닥에 떨어진 빈 통을 보고, 그리고 손에 들린 막대를 보고. 아이의 시선은 계속 움직였어. 아이는 마치 지금 일어난 일이 자기랑은 전혀 상관없다는 표정이었어.
만화영화의 주인공이 길을 걷다 넘어지거나 산책을 하다가 강아지나 고양이를 보는 것 같은 그런 표정. 마치 우와, 비눗물 담긴 통이 떨어져서 비눗물이 바닥에 다 쏟아졌어요, 라고 말할 것 같은 표정. 사람들은 그들을 스쳐 지나가고 비눗물은 점점 바닥에 번지는데, 아빠는 멋쩍게 웃고 아이는 까만 눈동자를 굴리고 나는 한참 동안 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지켜봤어.
그리고 네 생각이 나더라. 처음에는 네가 꽃을 좋아해서 그런 줄 알았어. 그다음엔 바닥에 떨어진 빈 통을 보던 꼬마아이 때문인 줄 알았지. 알고 보니 그냥 네 생각이 난 거였어. 사람이 사람을 기억하는 데 이유는 별로 필요하지 않은 것 같아. 원래 사람은 다른 사람을 기억하면서 살아야 하잖아. 나한테는 기억해야 하는 사람이 너인 거지.
혹시 내가 비눗물이 담긴 통을 놓쳐버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조금 더 꼭 쥐고 있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지. 바쁘다는 핑계로 여기저기 정신이 팔렸거든. 다 의미 없는 일이었는데 말이야. 그래도, 까만 눈망울을 굴리는 아이는 평생 기억할 아빠와 엄마처럼 나도 널 기억할 거야. 너도 그렇겠지만. 안녕, 잘 지내. 어제는 꽃구경을 갔다가 네 생각이 났어. 그리고 오늘은 그냥 네 생각이 났어.
겨울 바다, 아이스크림
낙엽을 털어낸 가지에 서리가 내려앉은 어느 날, 나는 그녀와 함께 겨울 바다를 보며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었다. 어떤 아이스크림을 먹을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이스크림을 먹는 장소가 유리창에 습기 가득 찬 카페가 아니길 바랐다. 히터의 열기로 아이스크림이 금세 녹아내리는 자동차 안이 아니길 바랐다. 나는 아이스크림을 먹자는 이야기 대신 그녀를 데리고 강화도로 향했다. 겨울의 자동차는 유난히 덜덜거렸고 손이 차가운 그녀는 기어를 잡은 내 손 위에 살며시 자신의 손을 포개었다. 그녀는 목적지를 모르고도 내게 웃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바닷가에는 우리처럼 겨울 바다를 보러 온 여행객 몇몇이 전부였다. 그들이 남긴 발자국이 만을 따라 이어졌다. 겨울 바다가 쓸쓸한 이유는 다만 찾는 사람이 적어서일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전혀 쓸쓸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잠깐 바다를 보는 중에도 그녀의 머리카락은 바닷바람을 따라가려는 듯 찰랑였다. 코끝이 빨개졌고 손은 피가 통하지 않는 것처럼 차가웠다. 그런 그녀에게 나는 따뜻한 캔 커피가 아닌 차가운 아이스크림을 건넸다. 먼저 다 먹은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자는 말을 하면서.
스산한 느낌마저 드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우리는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오랫동안 냉동실에 갇혀 있던 아이스크림보다는 바람이 차가워서, 아이스크림은 시간이 지나면서 표면이 하얗게 얼어갔다. 찬 음식을 못 먹는 그녀는 절반을 남겼고 나는 사시나무 떨듯 떨면서도 끝까지 손에 든 아이스크림을 놓지 않았다. 유난하게 추웠던 겨울 바다에는 바보 같은 짓을 하는 우리를 보며 신기하게 여길 사람조차 없었다.
기억을 더듬어도 그날의 내가 그녀에게 무슨 소원을 말했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진짜 소원은 함께 겨울 바다를 보며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이었고, 내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소원은 이루어졌다.
기껏 폭우가 쏟아지던 어느 밤, 나는 그녀와 함께 갔던 바다를 다시 찾았다. 거리는 텅 비어 흔한 택시조차 보이지 않았다. 빗방울은 차창에 부딪혀 분산됐다. 달을 닮은 가로등 불빛이 빗방울에 닿아 갈피없이 번졌다. 비에 가려 표지판이 흐릿했다. 정체된 도로를 지나듯 천천히 강화도로 향했다. 나의 밤은 길었고, 내게는 찾아야 할 것이 있었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8월의 해변은 시끄러웠다. 세 시의 바다는 지옥의 입구처럼 캄캄했다. 번개가 섬광탄처럼 짧은 빛을 뿜을 때마다 바다는 개펄과의 경계를 잠시 잠깐 보여 주었다. 천둥이 치는 바다는 기괴했고, 기괴한 만큼 매력적이었다. 만약 그곳에 작은 쪽배라도 있었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단테를 따라 지옥으로 향했을 것이다. 사람을 홀리는 바다. 그게 폭우가 치는 바다를 향한 유일한 감상이었다. 수평선을 때리는 빗줄기가 우산에도 들이쳤다. 나는 수평선 아래 깊은 바닷속에 잠긴 것처럼 무거워지는 우산을 들고 해변을 걸었다.
바닷가에 그녀가 남긴 아이스크림이 아직도 남아 있지 않을까. 차가운 바닷바람 때문에 녹지 않은 채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이스크림을 찾으면 다시 소원을 빌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망연히 고개를 숙여 몇 시간이고 아이스크림을 찾았다. 그러나 걷고 또 걸어도 끝내 표면이 하얗게 언 반쪽짜리 아이스크림은 찾을 수 없었다. 바다에는 오래전 잃어버린 누군가의 추억 같은 것은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빈 바다가 쓸쓸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예전에는 경비원이 아니었을
남색 경비복을 입은 그는 파지와 페트병, 플라스틱이 담긴 자루 옆에 앉아 담뱃불을 붙였다. 허연 담배 연기가 그와 잠시 섞였다가 흩어졌다. 예전에는 귀찮게 분리수거를 할 필요가 없었는데 말이야. 하긴, 그때는 종량제봉투 같은 거 없이 그냥 쓰레기를 버렸던 것 같기도 하고.
그는 혼잣말을 하며 상의에 달린 포켓을 뒤집어 손으로 털었다. 잔일을 하는 동안 구겨진 담뱃갑에서 담배 가루가 쏟아져 나와 엉망이었다. 거친 손가락에는 담배 가루가 달라붙지 않았다. 예전에는 바지 주머니에 손만 넣어도 담배 가루가 온통 달라붙었는데 말이야. 그래도 그때는 손가락이 제법 통통하고 기름기도 있었으니까.
그가 한 달에 보름을 근무하는 오피스텔은 비교적 커다랗고 평범한 건물이었다. 일 층의 경비실은 그 모양새가 차라리 안내 데스크에 더 가까웠다. 경비실 앞으로 까맣거나 하얗거나 누런 외국인들과 피곤에 절어 있는 직장인들이, 혼자 사는 노인과 택배 기사가, 배달 음식을 든 배달원이, 키가 크거나 조금 작은 사람들이, 끝없이 그를 지나쳤다.
예전에는 점심을 거를 만큼 바빴었는데 말이야. 거래처 사람을 만나서 회의도 해야 하고 급하게 처리할 일도 많았는데, 그러고 보면 그때 나도 바로 옆에 누가 있는지 모를 때가 많았지. 표정 없이 사람들을 관찰하던 그는 문득 정신을 차리고 택배 보관 확인 서류에 날짜, 이름, 호수, 수량을 기계적으로 기입했다. 한 시간 후면 건물 내 순찰을 돌아야 하니까 빨리 서류를 정리하는 게 이로웠다. 또박또박 정자로 글씨를 쓰느라 종이와 맞닿은 손날이 매끈해졌다.
손바닥 끝에 생긴 굳은살을 만지작거리면서 생각해 보니, 회사에 가면 종일 책상 앞에 앉아 있을 아들도 같은 위치에 굳은살이 있었다. 늦게까지 일하고 있을 아들을 떠올리자 담배 생각이 절로 났다. 건물 내 금연. 빨간 동그라미와 작대기가 그려진 스티커만 없었어도 사는 게 조금 편했을 텐데. 그는 담배를 물고 서류 작성하는 상상을 하며 부지런히 펜을 놀렸다.
오피스텔에 사는 사람들은 그를 잘 쳐다보지 않았다. 낯이 좀 익은 이들은 우연히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칠 때면 어색하게 고개를 까딱였다. 간혹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 말을 걸어 주는 경우도 있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 역시 눈을 피했다. 전화를 받는 척하며, 급한 일이 생긴 척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