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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 사람이다

한윤정 지음 | 인물과사상사



집이 사람이다

한윤정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17년 12월 / 364쪽 / 17,000원



아무런 사치 없이 사치스런, 창밖 살구꽃 피는 ‘목수의 집’ - 건축가 김재관의 ‘살구나무집’나는 목수다: “난 요즘 집수리에 재미를 붙였다. 집수리 하면 무언가 촌스러운 느낌이 들거나 동네에서 흔히 보던 간판을 떠올린다면 내가 말하려는 그것의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내가 하는 일 역시 여느 집수리쟁이들처럼 현장 인부들의 숫자를 헤아려 점심밥을 시키고, 삼립빵과 컵라면의 가격 차이를 따져 새참을 준비하고, 내일 사용할 벽돌을 미리 주문하고, 새벽 인력시장에 기별해 젊은 사람이 아니면 되돌려 보내겠다며 눈을 부라리는 집수리 목수인 것이다.”(《SPACE》 2011년 8월호)

건축가에서 수리업자로 변신을 선언한 김재관 무회건축사무소장의 선언은 농담처럼 들리지만 진지하다. 거기에는 전인적 존재로서 건축 가상이 더는 통하지 않는 시대 흐름에 대한 통찰과 함께 개인 삶의 변화에 대한 결의가 담겨 있다. 좀 더 그의 말을 들어보자. “요즈음 내 명함에는 건축가 대신 목수라는 직함이 찍혀 있다. 그동안 지향했던 건축가적 삶을 더 이상 지속하지 않겠다는 것으로 내 삶의 경로를 수정한 것이다. 이러한 결정은 내가 소유한 재능 혹은 자질이라고 불리는 결코 유쾌하지 않은 언어를 뼈아프게 수긍할 수밖에 없었던 경험과 ‘내 생각’이라고 부르던 건축에 대한 관념조차도 내 몸에서 자란 것이 아님을 알고서다.”

이전의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교회 건축의 일인자였다. 1989년 건축가 곽재환의 맥건축에서 일을 시작해 1997년 자신의 무회건축사무소를 열자마자 제주도 강정교회 설계를 맡았고, 이 작품으로 한국건축문화대상을 받았다. 나중에 해군기지 건설 논란으로 유명해진 강정마을의 오래된 교회를 그는 과감하게 노출콘크리트로 신축했다. 교회 하면 매끈한 대리석이나 스테인드글라스, 뾰족한 첨탑을 연상하던 신자들에게 뭉툭하고 소박한 느낌의 건물을 안겼다.

이후 교회 설계 주문이 이어졌다. 부천 성만교회, 파주 새힘교회와 풀향기교회 등 10개를 지었다. 겸허와 절제, 주변 환경과의 조화, 햇빛ㆍ바람ㆍ나무 같은 자연의 도입이 그의 교회 건축이 가진 특색이다. 그러나 “맥락 없는 한국 교회 건축을 혁신하여 일가를 이루어보자.”는 생각을 10여 년 만에 접었다. 교회 특유의 권위주의, 설계를 둘러싼 성직자나 신자들과의 의견 대립도 힘들었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계몽적 건축관에 지쳐갔다. 훌륭한 건축을 통해 사람들을 고양시키겠다는 생각은 종종 능력의 한계에 대한 열등감으로 이어졌다.

변화의 계기는 한국건축가협회가 2009년 개최한 ‘일일 건축설계사무실’ 행사에서 찾아왔다. 거리에 파라솔을 펴고 앉았는데 시민들이 정작 물어보는 내용은 ‘정화조 고칠 줄 아느냐’, ‘집을 가장 싸게 짓는 방법은 무엇이냐’ 등이었다. “사람들이 건축에 대해 품고 있는 생각은 이런 것이구나.”라는 깨달음이 왔다. 그때 서울 서초동에 사는 율리아나 아주머니가 나타났다. 영어교사인 그는 자신의 단독주택을 고치기 위해 수첩을 빼곡히 채워가며 몇 년째 준비 중이었다. “건축가를 만난다는 생각에 잠을 못 이루었다.”는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집을 고쳐 주기로 했다. 처음에는 설계만 했는데 시공비가 예상보다 늘어나 고민하는 건축주를 보고 아예 시공까지 맡았다. 2011년의 일이다.

그 후 5년 동안 김 교수네, 정현이네, 재훈이네, 상도동집, 유진이네, 건우네, 제주횟집, 철민이네 등 10건을 고친 집수리업자로 살았다. ‘건축가의 역할이란 건축주들이 꾸는 꿈, 그들의 의식 속에 있으나 정확히 이야기할 수 없는 꿈을 해독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교회 건축에 비해 가정집 건축은 ‘너절하고 치열한 극사실주의’였으며, 도면 위에서 깔끔하게 이루어지는 신축 설계와 비교해 조건과 변수가 많은 집수리는 ‘서슬이 퍼런 검으로 겨루는 진검 승부’임을 느꼈다.

무회마을을 그리워하다: 그가 수리한 집 가운데는 2015년 입주한 자신의 집도 있다.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8번 마을버스를 타고 종점에 내려 찾아간 그의 명륜동 집은 북악산 비탈이었다. 초행이라면 약간 현기증이 느껴지는 경사의 골목을 따라 들어선 다세대주택들 가운데서도 맨 꼭대기였다. 외관 은 서울 시내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붉은 벽돌의 3층 건물이었다. 아들 내외가 사는 1층, 무회 건축사무소인 2층을 지나 3층으로 올라갔다. 주인의 살림집인 그곳에서는 뜻밖의 풍경이 펼쳐졌다.

담장 없이 집과 축대 위로 이어진 산비탈이 코를 맞댔고 바닥에는 공사장에서나 볼 수 있는 비계가 깔려 있었다. 집과 산비탈 사이 좁은 통로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자 야외 식탁이 나왔다. 식탁 옆 넓지 않은 땅에는 커다란 살구나무가 있었다. 날이 좋으면 식탁에서 밥 먹고 차 마시고 고기 굽고 술 마시면서 이야기할 수 있다. 겨울에는 식탁 옆에 매단 무쇠 화로에다 장작을 피운 뒤 작은 잉걸불을 집 안 작은 화로로 옮겨간다. 집과 산, 안과 밖의 구분이 없는 게 이 집의 얼굴이다.

집 안은 객실이 분리된 옛날 기차 안처럼 느껴진다. 직사각형 대지에 들어선 집은 가로가 18미터인 데 비해 세로는 1.2~2.4미터로 한 층이 12평에 불과하다. 그래서 넓은 평상, 식탁 겸 거실 역할을 하는 탁자와 의자, 칸막이 친 주방, 붙박이 장롱이 일렬로 들어섰고 안쪽으로 침실과 화장실, 다용도실이 붙어 있다. 이 공간들을 관통하는 긴 복도에는 남향으로 큰 창이 2개가 나 있어 서울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내장재는 평범한 소나무다. 주방의 칸막이 재료는 포장박스를 만드는 데 쓰이는 하얀 플라스틱이다. 물건은 거의 없다. 아무런 사치도 없었으나 사치스러웠다. 그중 백미는 집 한쪽의 넓은 평상이다. 작은 한옥 사랑방을 연상시키는 그곳에는 좌탁과 그림, 화로와 목침, 이 집의 상징인 살구나무를 볼 수 있는 창이 있다. 이 동네를 산책하던 주인은 높은 축대 위에서 깃발처럼 날리는 살구나무를 보고 한눈에 반해 이 집을 샀다.

살구나무집의 원형은 김재관 소장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무회마을 시골집이다. 충북 옥천군 청성면 장수리 무회마을, 그가 유학자였던 할아버지, 공무원이던 아버지와 함께 살던 집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서울로 유학 오면서 그 집을 떠났다. 삼양동 학교 소사의 집 다락방에 혼자 하숙했는데 첫날 자다가 연탄가스를 마셨다. 아침에 일어나니 머리가 아프고 속이 메슥거려서 마당으로 나가 수돗물을 틀었더니 희뿌연 거품에서 소독내가 확 끼쳤다. 모든 사람이 마음속에 간직한 이상향으로 돌아가기를 꿈꾼다면, 김재관 소장에게 그곳은 무회마을이다. 장난꾸러기이던 그를 감싸주고 한문을 가르쳤던 할아버지가 계시던 사랑방, 할머니가 큰 항아리에 깨끗한 물을 찰랑찰랑 채워두시던 부엌, 집 뒤가 바로 산으로 이어지던 마을, 명륜동 집은 무회마을의 재현이다. 건축사무소 이름을 ‘무회’로 지은 것도 그런 집을 짓고 싶어서였다.

이곳으로 오기 전까지 그는 30평대 아파트에 살았다. 건축가이면서도 서울에서 단독주택에 산다는 게 불가능하게 느껴졌다. 더구나 산비탈의 집이란 상상하기 힘들었다. 보통 도시의 집은 산과 도로로 분리되어 있는데, 이 집이 산의 경사지에 자연스럽게 들어앉은 것은 옛날 더 위쪽에 있던 무허가 집들이 철거되었기 때문이다. 이 집은 수리의 결정판이기도 하다. 살릴 수 있는 자재는 모두 살렸고 다른 집을 짓다가 남은 재료를 썼다. 그는 건축에 미감이란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기능에 충실하면 굳이 배율을 따지지 않아도 그냥 아름답다.

이치를 닦다: 설계와 시공의 분리는 건축가의 숙명이다. 일정 규모 이상 건축물을 설계하면 사후에 감리할 뿐 시공에는 관여할 수 없다. 그러니 집을 어떻게 짓는지 모른 채 지을 수도 있다. 김재관 소장이 수리를 시작한 건 집을 샅샅이 분해하고 조립하면서 건축의 원리를 제대로 알고 싶어서였다. 처음 고친 율리아나네 집은 목재 패널로 담을 높이 쳐 사생활을 보호하는 대신, 창을 넓히고 물에 빛을 반사시키는 방식으로 실내가 어둡다는 단점을 보완했다.

그가 좋아하는 유진이네 집은 가장 흔한 자재인 시멘트 벽돌을 내장재로 사용했다. 접착용 시멘트를 쓰지 않고 맨 벽돌만 쌓으려면 정교한 기술이 필요해 직접 시공했다. 그는 “재료가 아닌 해석에 의해 집이 달라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비싸거나 특이한 재료를 선호하지 않는다. 흔히 쓰는 재료가 좋은 재료이며 헌 집에서 나온 자재도 쓸 만하다면 좋은 자재다. 주어진 비용과 조건 아래서 좋은 집을 짓는 일은 ‘알파벳 몇 개로 좋은 문장이 나오는 것’과 같은 원리다.

수리업자로 명성이 나면서 그에게 집을 고쳐달라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러나 이제 현장에서 수리를 지휘하거나 중간에 설계를 고치지 않는다. 집의 원리를 충분히 알았기 때문에 설계가 더욱 단단해졌고, “제가 현장에 가나 안 가나 마찬가지예요.”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수리는 한자로 풀어보면 이치(理)를 닦는(修) 것이다. 결코 촌스럽거나 궁기(窮氣)가 흐르는 단어가 아니다. 새로 짓는 것보다 훨씬 근본적이면서 어려운 일이다.

그는 수리의 가치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다. 개발이 한창이던 1970~1980년대 우후죽순처럼 지어진 단독주택, 다가구ㆍ다세대 주택은 수명이 다 되었지만, 부동산 거품이 꺼지면서 과거처럼 완전히 밀어버리고 새로 아파트를 짓는 재개발은 쉽지 않다. 고쳐서 살 수밖에 없다. 집은 당대의 경제ㆍ문화적 조건, 가족의 구성 등을 담고 있기 때문에 시대가 달라지면 그릇 역시 바뀌어야 한다. 수리는 공장에서 찍어낸 듯 비슷한 설계ㆍ공법ㆍ시공의 집들이 각자 개성을 얻는 과정이기도 하다. 새로 쓰기가 아니라 그동안의 역사와 경험을 토대로 한 이어 쓰기, 다시 쓰기가 집수리다.

예의 선언에서 그는 ‘자신의 영토라고 믿었던 곳에서 소출을 얻지 못한 자의 쓰디쓴 절망’과 함께 ‘그것에 상응하는 자유’를 얻었다고 했다. 오케스트라 지휘자처럼 각 영역을 조율하고 통합하던 근대적 의미의 건축가 시대는 조금씩 저물고 있다. 그들이 도시를 캔버스로, 설계를 예술작품으로 여기는 사이에 사람들의 감각은 달라졌다. 거대하고 기묘한 초국적 건물 대신, 시간이 축적된 작은 공간에서 안정과 행복을 찾아가고 있다. 김재관 소장은 이런 시대 변화를 예민하게 감지한 건축가다. 도시의 재개발이 아니라 재생이 화두인 지금, 낡은 집을 본격적인 설계 대상으로 삼은 건축가는 그가 처음이다. 오래된 집을 진지하게 재설계하며 집수리란 단어의 맥락을 바꿔놓았다. 그렇다면 다음 건축적 목표는 무엇일까? “그런 건 없다.” 그는 자유인이다.

아들의 손끝에서 아버지의 아흔 넘은 고택은 작품이 되었다 - 설치미술가 최인준의 ‘자이당’ 스스로 기쁨을 짓는 곳: 아버지와 아들은 집으로 통했다. 아버지가 가꾼 고택이 아들의 손에 의해 현대 예술작품으로 거듭났다. 광주광역시 남구 양촌길의 최승효 고택 자이당(自怡堂). ‘스스로 기쁨을 짓는 곳’이라는 이곳의 이름은 최승효ㆍ최인준 부자의 삶을 대변한다. 두 사람에게 집은 단순한 거처가 아니라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자 예술 자체였다.

광주 MBC 사장이던 최승효(1917~1999)는 1921년 지어진 고택의 가치를 알아보고 1965년 이 집을 사들인다. 대구사범학교를 나온 그는 광주에서 현대극장과 호남TV를 운영하다 MBC를 인수해 1968년부터 1982년까지 사장을 지냈다. 그는 방송국 바로 옆에 있던 자이당을 구입한 뒤 대대적으로 수리했다. 워낙 튼튼하고 아름답게 지어졌으나 해방과 6ㆍ25전쟁을 거치면서 주인이 바뀐 집의 상태는 폐가나 마찬가지였다. 3년에 걸쳐 최고의 목수와 자재를 들여 손본 끝에 집은 옛 영화를 되찾았다. 고서화 수집가였던 그는 이 집을 박물관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넓은 다락에 고서화를 가득 보관했으며 이웃 양옥을 한 채씩 사 들여 집을 넓혀갔다.

그런 그가 1999년 세상을 떠났을 때, 4남 5녀의 자식 가운데 3남인 최인준이 집을 관리하겠다고 나섰다. 유일한 예술가였던 그의 심미안은 이 집이 방치되거나 남의 손에 넘어가는 일을 용납하기 어려웠다. 원래 미술을 전공하고 싶었으나 부친의 반대로 연세대학교 화학과에 들어갔던 그는 2년간 광주 MBC에서 PD 생활을 하다가 1984년 뉴욕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때 비디오아트의 창시자인 백남준을 만나 그의 추천으로 뉴욕 인스티튜트 오브 테크놀로지(Institute of Technology)에서 첨단 예술인 컴퓨터 아트를 전공했다.

“선친과는 좋은 관계가 아니었어요. 내가 미국까지 가서 무슨 예술을 한다고 하는데 그게 뭔지 아버지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죠. 그렇게 문화예술을 사랑하셨는데도 말이에요.” 그래서 부친이 별세했을 때 자이당이 더욱 각별했다고 한다. 자이당은 아버지의 분신이자 그가 남긴 예술 애호의 결과물이었다. 아버지가 30여 년간 거주했던 집은 다시 생활의 때가 묻어 여염집으로 변한 상태였다. 자질구레한 살림이 온 집안을 차지하고 한옥 한쪽에 입식 부엌이 들어왔다. 최인준은 이 집 자체를 하나의 예술품으로 꾸미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꿈꾸었던 대로 문화예술의 사랑방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일단 집안의 모든 물건을 다 들어냈다. 한옥에 어울리지 않는 편의시설도 뜯어냈다. 두 겹씩 달린 창호지 문을 떼어내 물에 불려서 닦고 새로 종이를 발랐다. 창문을 닦고 못을 뽑고 조금이라도 뜯기거나 뒤틀린 창틀과 마루를 모두 바로잡았다. 조명상가를 뒤져 타원형으로 생긴 한지 전등을 사다가 천장에 달았다. 마루, 바닥, 벽, 천장, 서까래, 기둥, 기와, 돌계단까지 그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1989년 광주시 민속자료 제2호로 지정받은 최승효 고택은 이렇게 조금씩 비워지고 다듬어졌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집: 자이당이 주는 즐거움은 두 가지에서 온다. 첫째는 자이당 자체이고 둘째는 자이당을 둘러싼 정원, 즉 최승효와 최인준 부자가 가꾼 3,000여 평의 환경예술이다. 자이당을 처음 지은 사람은 독립운동가이자 중국과의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은 재력가였던 최상현이다. 그는 살림집으로는 전국적으로도 찾아보기 힘들 만큼 웅장하고 기품 있는 집을 지었다. 양림산 동남쪽 끝자락에 앉아 멀리 무등산을 바라보는 정동향 집인 자이당은 정면 8칸, 측면 4칸, 팔작지붕의 큰 규모다. 집터를 닦는 대신 산의 지형을 살려 건물 뒤편으로 경사지가 이어진다.

이 집은 전통 한옥과 개화기 건축이 혼합된 양식이다. 앞뒤로 열린 대청을 제외하고 양쪽 방 위에 넓은 다락을 두었는데, 이곳에 독립운동가들을 피신시켰다고 전해진다. 다락 채광을 위해 둥근 유리창을 넣었다. 서향인 뒤쪽에도 앞쪽처럼 툇마루를 만들고 석양을 차단하기 위해 대청문 위에 따로 미닫이 창문을 달았다. 당시 이 집을 짓기 위해 백두산과 압록강 인근 목재를 채취해 3년간 바닷물에 담갔다가 말려서 썼다고 한다. 자이당이란 편액은 추사 김정희의 스승인 청나라의 담계 옹방강의 글씨를 집자했다.

최인준은 중학생 때 이 집을 처음 보았다. “아버지가 좋은 집을 샀다고 하는데 와서 보니까 ‘뭐 이런 집을 샀나’ 하는 실망감이 들었습니다. 당시 돈 있는 사람들은 좋은 양옥으로 이사 가는 게 보통이었거든요.” 아버지는 앞마당에 연못을 파고 댐 수몰지구의 고목들을 사다가 정원수로 심었다. 한옥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뒤에다 부엌과 창고로 쓰는 붉은 벽돌집을 지었다. 선친이 조성한 자이당의 정원은 한눈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과 전남대학교 학동캠퍼스가 있는 도심과 가깝고 뒤쪽으로 광주 사직공원과 담을 맞댄 이 집은 자동차가 들어가지 못하는 골목길을 두 번 꺾어야 나타나는 조촐한 나무대문으로 손님을 맞이한다. 쪽문을 열면 울창한 나무 사이로 기단 위에 세워진 자이당이 보인다. 돌계단과 대청을 훑은 눈길은 지붕으로 향하는데, 검은색부터 금색까지 다양한 색이 섞인 기와 위로 용마루를 한껏 높였고 추녀의 위세도 대단하다.

집 앞에는 잔디가 깔린 아담한 정원이 있지만 이는 일부에 불과하다. 전체 정원은 집을 꼭짓점 삼아 원추형으로 경사가 점점 높아지면서 넓게 뻗어 있다. 이곳을 최인준은 자신의 미감과 노력으로 새롭게 가꾸었다. 집 뒤에는 경사별로 4개의 산책로가 있어 앞마당과 순환도로처럼 이어진다. 가장 낮은 길은 구부러진 소나무가 지붕을 이루는 장독대길이고, 두 번째 길은 편백나무 향기와 함께 무등산을 바라볼 수 있는 길이다. 나무 데크를 깐 세 번째 길은 빨간 동백꽃이 송이째 떨어진 동백 나무길이며, 사직공원과의 경계를 이루는 옹벽 아래 오솔길에는 히말라야시다가 곧게 뻗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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