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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나무라지 않는다

유영만 지음 | 나무생각



나무는 나무라지 않는다

유영만 지음

나무생각 / 2017년 11월 / 288쪽 / 13,800원





삶의 근본, 나무에게 배우다 - 근본(根本)을 파고들어야 본질(本質)을 만날 수 있다



나무는 비교하지 않는다

비교하면 불행해지지만 비전을 품으면 행복해진다: 나무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아간다. 소나무는 소나무대로, 참나무는 참나무대로 살아가고, 벚나무는 벚나무대로, 등나무는 등나무대로 살아간다. 수많은 나무들이 있지만 살아가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이렇게 각기 다른 나무가 숲을 이루며 자연스럽게 살아간다.

나무 열전이 펼쳐지는 숲에 가보면 나무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치열하게 살아간다. 송직극곡松直棘曲, 소나무는 곧게 자라고 가시나무는 뒤틀리면서 자란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해도 가시나무는 소나무를 부러워하지 않고 소나무의 흉내를 내려고 하지도 않는다. 소나무는 소나무, 가시나무는 가시나무다. 소나무는 소나무처럼 자라고, 가시나무는 가시나무답게 자라는 것이 자연이다. 어찌 이게 나무에게만 해당되는 사실일까. 자연의 모든 생명체는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살아간다. 다리가 긴 학은 학대로, 다기가 짧은 오리는 오리대로 살아간다. 다리가 짧은 오리는 다리가 긴 학과 자신을 절대 비교하지 않는다. 이렇듯 각각의 특성을 살려가며 개성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자연의 순환 원리이자 이치다.

등지고 살지 말고 등 대고 살자: 등 돌리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등나무가 속삭인다. 등신藤身처럼 살아야 갈등葛藤이 없다고. 등신藤身은 등나무藤 몸身을 의미한다. 등나무는 짙은 잎을 무성하게 만들어 사람들을 자신이 만든 그늘로 불러들여 쉬게 한다. 등신처럼 산다는 것은 등나무 몸처럼 자신을 희생해서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준다는 의미다. 갈등葛藤은 왜 생기는가. ‘갈葛’은 칡이고, ‘등藤’은 등나무를 의미한다. “등나무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감아 올라간다. 반면에 칡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감아 올라간다. 칡과 등의 감아 올라가는 방향 때문에 생긴 단어가 바로 갈등葛藤이다.” 그래서 등나무가 등지고 살지 말고 등 대고 서로 아껴주면서 살아가라고 타이르지 않는가.

봄날의 향기에 취해 주변을 보면 아까시나무가 유혹하는 아가씨처럼 행인의 발목을 잡는다. 아까시나무가 유혹하는 아가씨처럼 행인의 발목을 잡는다. 아까시나무는 언제부터인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온몸에 가시로 무장하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의 손으로부터 멀어지려고 안간힘을 쓰기 시작했다. 그에 반해 묵묵히 자기 길을 가는 사람에게, 지친 심신에게 말없이 그늘을 내어주는 느티나무는 오늘도 너무나 많은 교훈을 준다. 60년에서 길게는 120년 만에 오직 한 번만 꽃을 피우고 장렬히 전사하는 대나무의 삶은 그 자체가 대쪽 같은 삶이다. 그것도 모자라 대나무는 자신을 엮어 책을 만들었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환원주의자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에 불과하다’는 말버릇”이다. ‘~에 불과하다’는 나의 선입견과 편견으로 재단한 오판의 산물이다. 늘 보아 익숙해진 사물이나 현상일지라도 다른 눈으로 바라보려는 의도적인 노력이, 내가 지닌 편견과 선입견이라는 안경의 한계와 문제점을 깨닫게 한다. 나무도 마찬가지다. 나무들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바는 나무에 대한 나의 경험과 인식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소나무 하면 지조와 절개고, 대나무 하면 대쪽 같은 엄정함을 자동적으로 연상한다. 소나무는 지조와 절개에 불과하고 대나무는 대쪽 같은 엄정함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소나무와 대나무를 다르게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의 문은 닫히고 만다.

“博學而篤志박학이독지 切問而近思절문이근사 人在其中矣인재기중의.” “널리 배우고 뜻을 돈독히 하며 간절히 묻고 가까이에서부터 생각해나가면 인은 그 가운데 있을 것이다.”라는 뜻으로 『논어』 ‘자장편’에 나오는 말이다. 선입견과 편견으로 눈이 오염될수록 간절히 물어야 한다. 가까운 데 늘 존재하는 당연함에 의문을 품고 질문을 던져야 한다. 내가 안다고 믿는 신념이 생기면 더 이상 다른 관점에서 알려 하지 않고 기존의 믿음으로 대상의 본질을 재단해버린다. 앎은 거기서 그친다.

나무는 항상 우리 곁에 저마다의 자리에서 존재해왔다. 그러나 아무도 나무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벌거벗은 나무가 혹한의 겨울을 견디고 파릇한 새순을 틔워야 비로소 존재를 알아차린다. 무더운 여름 나무 그늘에서 쉬어가면서도 나무에게 고마움을 느끼지 못한다. 머리로 알려고 하기 전에 가슴으로 느끼면 대상은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며 우리에게로 온다. 나무 이름이 무엇이고 다른 나무와 무엇이 다른지를 논리적으로 알기 이전에 주변에 무심히 서 있는 나무를 찾아가 만져보고 느껴보자.

나무는 꿈을 꾸지 않는다

나무는 매 순간 최선을 다할 뿐이다: 우리 사회는 마치 꿈 강박증에 걸린 듯이 꿈을 꾸지 않는 사람을 죄인 취급하는 분위기다. 꿈 멘토라고 등장한 수많은 사람들도 청춘들에게 꿈을 꾸라고 강조한다. 과연 우리 모두가 그렇게 꿈을 꾸어야 하는 것일까. 고전 인문학자 고미숙은 “나무에겐 꿈이 필요 없다. 열매를 맺는 순간 떨어지고 말 텐데, 어떤 나무가 그걸 꿈꾸겠는가.”라고 했다. 그렇다. 나무는 꿈을 꾸지 않는다! 나무의 꿈은 열매는 맺고 씨앗을 뿌리는 데 있지 않다.

나무는 사계절의 변화에 따라 순리대로 매 순간 최선을 다해서 살아갈 뿐이다. “나무는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서 치열하게 살아갈 뿐이다.” 치열하게 살아내야 살아남을 수 있고 살아남아야 다음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나무는 목적 때문에 살지 않는다. 나무가 ‘되기 위해’ 씨앗이 자라는 것은 아니다. 무엇이 된 것들은 또 다른 무엇이 되기 위해, 영원히 무엇이 되지 않기 위해, 끝내는 미쳐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목적 때문에 생을 망쳐서는 안 된다.”

철학자 스피노자도 대표 저서 중 하나인 『에티카』에서 자연 만물은 스스로 필연성에 의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자연 안에 목적이란 없으며 그것은 인간이 꾸며낸 허구에 불과하다고 덧붙인다. 과연 모든 생명체가 저마다의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일까. 목적을 설정하고 그것을 달성하고자 수단과 전략을 모색하는 사고는 다분히 인간 중심적 사고방식이다. 본래 자연은 인간이 생각하는 것처럼 목적과 수단이 있지 않다. 자연의 생명체는 인간이 부여한 목적이나 목적의식과 무관하게 이미 저마다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목적론적 사고는 완성을 목표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관념이다. 하지만 삶은 영원히 완성될 수 없는 미완성의 여정이다.

목적을 위한 인생은 가정법 인생을 산다. 내가 만약 목표를 달성하면 그때 무엇을 하겠다는 다짐을 한다. 미래를 위해, 목표를 위해 지금 여기서 살아가며 느끼는 무한한 행복감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지금 여기서 하는 모든 일, 내가 보내는 매 순간이 모두 내 삶의 존재 이유이자 내가 살아가면서 느낄 수 있는 행복의 원천이다.이기적일 때 기적이 일어난다: “나무는 철저하게 이기적입니다. 나무는 자신만을 위해 몸부림치는 존재입니다. 결코 나무가 자발적으로 인간의 삶을 위해 일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기주의는 자기 이익만 앞세우고 남의 입장은 아랑곳하지 않는 몰상식한 생각과는 거리가 멀다. 이기주의는 자신의 분야에서 경지에 이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자세를 중시한다. 이기주의적 입장은 스스로 경지에 이르지 않고서는 남에게 도움을 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주장이다. 한 분야의 경지에 이르지 않고 남을 돕고자 하는 것은 그다지 도움이 안 될 수도 있고 심지어는 방해가 될 수도 있다.

나무처럼 한자리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며 본분을 다할 때 비로소 거기서 생기는 부산물로 다른 생명체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나무라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덕분에 단풍이 들고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리고 씨앗을 남기는 것이다. 단풍을 사람에게 보여주려고 나무가 치열하게 여름을 살아온 것은 아니다. 때가 되었기 때문에 단풍으로 자신을 불태우고 낙엽을 만들어 다시 자신이 몸담고 있는 땅에 떨어뜨린다. 단풍을 낙엽으로 만들어 되돌려주고 그것이 다시 자신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거름으로 작용한다. 치열하게 살아가는 이기주의자가 되어야만 무언가 결실을 맺을 수 있고 그 결실로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 있다.

한 존재의 치열함이 다른 존재에게도 즐거움을 줄 수 있다. 존재의 완성은 대충 되는 게 없다. 존재의 완성을 향한 치열한 열정이 다른 존재에게도 기쁨을 선사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 한 존재의 완성을 향한 치열한 미완성이 다른 존재의 완성을 위한 여정에도 불을 붙일 수 있다. 내가 먼저 스스로 불타지 않고서는 다른 사람의 열정에 불을 붙일 수 없다. 존재의 완성을 향한 몸부림은 영원히 완성되지 않는 미완성의 연속이다. 완성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배움도 멈추고 성장도 멈춘다.

그런데 나무는 자신을 위해서는 꿈을 꾸지 않지만 더불어 숲을 이루기 위해서는 꿈을 꾼다. 나무는 다른 나무와 더불어 살아가는 숲을 꿈꾼다. 신영복 교수에 따르면 나무의 꿈은 명목이나 낙락장송이 아니라 더불어 숲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더불어 숲이 되기 위해 다른 나무와 더불어 이전과 다른 숲을 꿈꾼다. 숲은 온갖 생명체가 더불어 살아가는 생태 공동체다. 다양한 생명체가 저마다의 존재 이유를 가지고 경쟁하면서도 협동하고, 협동하면서도 경쟁하며 살아가는 아름다운 공동체다.

나무는 조급해하지 않는다

기회는 짧고 기다림은 길다: 자연에는 속도와 효율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모두 때가 되면 싹이 트고 잎이 나오며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다. 봄을 기다려야 싹이 나오고 여름을 기다려야 녹음이 우거지고 가을을 기다려야 단풍을 구경할 수 있으며 겨울이 되어야 삭풍을 견디는 나목을 볼 수 있다. 인간이 인위적으로 자연의 속도를 조절하여 봄에서 여름으로 가는 기간을 단출할 수 없으며, 여름이 길다고 바로 겨울로 가는 길을 개척할 수 없다. 그저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현대인은 기다리지 않고 바로 기대했던 일을 하려는 조급증에 걸려 있다. 통계에 따르면, 직장인은 3분마다 딴짓을 한다고 한다.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고 이메일을 보고 SNS 메시지를 바로바로 확인하고 답장을 보낸다. 속성만이 판을 치고 숙성할 기다림의 시간이 없다. 묵은지를 기다렸다가 먹는 그윽함이 없어지고 겉절이로 만들어 빨리 먹어버리려는 듯 속도는 빨라지고 삶의 밀도와 강도는 약해지면서 행복한 순간에서 느끼는 깊은 충만감도 없다. 효율은 높아지고 있지만 무엇을 위한 효율인지 의문이 들며 진정 우리가 원하는 효과를 달성하고 있는지도 확신이 서지 않는다.

가장 먼저 피는 꽃은 추운 겨울이라는 시련과 역경이 오기 전에 모든 준비를 마치고 꽃눈을 준비한 나무에서 나온다. 나무는 긴 기다림 속에서 언제 올지 모르는 짧은 기회를 위해 준비한다. 기다림은 길어도 기회는 재빨리 지나간다. 기회는 긴 기다림 속에서 인고의 시절을 보낸 덕에 누릴 수 있는 선물이다. 짧은 봄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긴 겨울의 준비 기간이 필요하다. 겨울은 그저 움츠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아니라 폭풍전야의 전운이 감도는 치열한 준비 기간이다.

기다림은 소리 없는 몸부림이다: 대나무는 어둠의 고독을 벗 삼아 땅속에서 5년을 기다리며 땅 위에서의 삶을 상상한다. 그냥 기다리지는 않는다. 땅 위에서 살아갈 날을 상상하며 소리 없는 몸부림을 치는 것이다. 모든 생명체의 씨앗은 씨앗 이후에 펼쳐질 꿈을 품고 몸부림치는 치열한 시간을 보내다 때가 되면 생명 활동을 시작한다. 기다림은 그래서 나를 다스리는 일이며 앞으로 펼쳐질 삶에 대한 그리움으로 견뎌내는 과정이다.

나무의 결실은 기다림의 산물이다. 결실은 그냥 기다리면 자연스럽게 나오는 ‘산물’이 아니라 치열하게 살아간 자에게만 주는 ‘선물’이다. 나무가 보여주는 모든 현상은 살아가면서 그때그때 보여주는 치열한 삶의 흔적이다. 새봄에 돋아나는 새싹은 엄동설한을 견디고 봄을 기다리며 만들어낸 선물이고, 한여름 보여주는 녹음방초는 작열하는 여름을 기다리며 햇볕과 함께 만들어낸 합작품이다. 만산홍엽의 가을 단풍은 긴 여름을 지나면서 가을을 준비해온 나무가 보여주는 사투의 흔적이다.

나무가 수풀이 되려면 기다려야 한다. 수풀이 삼림으로 발전하려면 더 오래 기다려야 한다. 거목도 묘목에서 시작했다. 묘목을 얻으려면 씨앗을 심어놓고 정성스럽게 가꾸어서 최소 1년을 기다려야 한다. 묘목이 제대로 된 나무가 되려면 또 몇 년을 기다려야 한다. 나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치열하게 준비하는 것뿐이다. 나무가 바람을 만들 수 없고 물을 창조할 수 없다. 빛나는 태양빛을 만들어낼 수도 없다. 나무는 주어진 환경이 만들어주는 물과 빛과 바람, 그리고 흙에서 자신의 씨앗에 새겨진 그림대로 철저하게 준비하고 기다린다.

노자의 무위자연 철학은 자연의 속도를 따라가면서 기다림의 삶을 살아가라는 메시지다. 때에 따라 계절이 물러가고 찾아오듯 자기의 할 일을 천천히 하면서 자연의 속도에 따라 살아가라는 메시지다. 나무를 비롯해 모든 생명체는 자연의 흐름에 따라 절기에 맞춰 꽃을 피우고 결실을 맺는다. 나무가 노력한다고 계절을 앞당겨 끌어올 수 없고 자연의 혜택을 조절해서 많고 적음이나 강약을 조절할 수 없다. 오로지 나무는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삶의 원리, 나무에게 배우다 - 원리(原理)를 파악해야 이유(理由)를 알 수 있다



뿌리: 뿌리의 깊이가 높이를 결정한다

아래로 뻗어야 위로 자랄 수 있다: 성장할 수 있는 ‘높이’는 성장하기 위해서 아래로 뻗은 뿌리의 ‘깊이’가 좌우한다. 아래로 파고드는 깊이 없이 쉽고 빨리 위로 성장하려는 사람은 어느 순간 높이 자랄 수는 있지만 높이를 지탱할 수 있는 깊이가 없어서 쉽사리 무너진다. 아래로 뿌리를 내리는 노력이 위로 성장하기 위한 가능성을 결정한다. 잡초의 생명력은 위로 자란 줄기의 높이보다 아래로 자란 뿌리의 깊이가 결정한다. 뿌리 깊은 나무가 되어야 뿌리 뽑히는 나무가 되지 않는다. 일단 뿌리가 뽑히면 나무는 더 이상 생명 연장이 불가능하다. 그만큼 나무에게 뿌리는 생명의 다른 이름이다.

뿌리 내리기를 포기한다면 성장의 가능성도 함께 포기해야 한다. 뿌리 없이 줄기 없고, 줄기 없이 가지 없으며, 가지 없이 꽃을 피울 수 없고, 꽃이 피지 않고서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열매의 풍족함과 풍요로움은 뿌리의 깊음과 힘겨움을 버텨내는 노고에서 비롯된다. 연못을 가득 채운 연잎도 ‘위로 밖으로’ 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래로 안으로’ 향하고 있다. ‘위로 밖으로’ 향하고 싶은 욕망이 강할수록 ‘아래로 안으로’ 파고들어 가려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낮추면 높일 수 있다. 낮춤이 높임이다. 아래로 숙여야 더 높이 치켜세울 수 있다. 아래로 파고든 깊이가 위로 치솟을 수 있는 성장 에너지를 결정한다. 그러나 파고들지 않고 치켜세우려고만 하면 금방 무너진다. 무너지지 않으려면 기초를 튼실하게 가꾸어야 한다. 기초는 기본이고 본질이며, 본질은 흔들리지 않는다. 확고부동한 신념은 파고들어간 깊이에서 나온다.

“나무든 풀이든 모든 생명체는 뿌리를 닮는다.” 뿌리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채 겉으로 드러난 실체의 본질을 결정하고 지배한다.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을 결정하는 셈이다. 지금 나의 모습도 지금까지 내가 파고든 뿌리가 만든 산물이다. 파고들기 전에 옆으로 뻗거나 위로 올라가다가 무너지면 다시 회복하기 어렵다. 파고든 깊이의 내공이 옆으로 뻗을 수 있는 넓이를 결정하고, 위로 올라갈 수 있는 높이를 결정한다.

나무는 위로 성장할 수 있는 원동력은 아래로 뻗은 뿌리 덕분이다. 나무는 위로 향하면서도 옆으로 몸집을 불린다. 사람도 위로 성장하면서 옆으로 살찐다. 그러나 위로 성장하는 키에 비해 옆으로 성장하는 몸집 불리기는 그다지 이미지가 좋지 않다. 몸집 불리기는 지나친 욕망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나무에게 높이 성장하는 것은 수직적 깊이를 전제로 이루어지는 시간적 성장이고 옆으로 몸집 불리기는 수평적 넓이의 확산을 통한 공간적 성장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나무는 위아래로 성장하는 동시에 옆으로도 성장하면서 나무로서의 존재 가치를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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