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읽는 하늘과 바람과 별
윤동주100년포럼 지음 | 스타로고
사진으로 읽는 하늘과 바람과 별
윤동주100년포럼 엮음
스타로고 / 2017년 3월 / 216쪽 / 12,000원
가족
윤동주 삼 형제는 모두 시인
윤동주 형제는 모두 시인의 DNA를 타고났다. 남동생 일주와 막냇동생 광주와 함께 삼 형제인데 이 세 사람이 모두 시인이었다. 맏형 동주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고, 둘째 일주는 평생을 건축학과 교수로 봉직하였지만 훌륭한 시집을 남긴 시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생전 일주는 젊은 나이에 순절한 ‘형님’의 고결한 이미지에 흠이 될까 당신이 ‘시인’이라고 알려지는 것을 무척 조심스러워하였다. 막내 광주는 해방 후 한국으로 내려오지 못하고 그곳에 남았지만, 꽤 활발한 문학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다들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다. 윤동주 시인은 1945년 29세의 나이로 일본 후쿠오카 감옥에서 옥사했고, 둘째 윤일주 시인은 간암으로 1985년 58세 때 세상을 떠났다. 또한 막내 윤광주 시인은 폐병으로 1962년 연변에서 30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그중 윤일주 시인은 1927년생으로, 형 동주와 열 살 차이다. 해방이 되자 대학 진학을 위해 1946년 두만강을 건너 남한으로 내려와 서울대 공대 건축학과에 입학했다. 졸업과 동시에 해군에 입대해 장교로 근무했으며, 해군 장교 시절인 1955년 6월, 종합 문예지 《문학예술》에 두 차례에 걸쳐 「설조」와 「전야」가 추천되어 시인으로 데뷔했다. 윤일주가 시를 쓴 기간은 20년 정도 되지만 작품 수는 65편, 과작인 편이었다. 누이동생 윤혜원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우리 일주가 한평생을 건축가와 대학교수로 살았지만 사실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동시를 썼어요. 순전히 동주 오빠 영향이라고 봐야겠지요. 동주 오빠는 열 살이나 아래인 일주를 아주 좋아했어요. 그래서 일주에게 동시 짓는 법을 가르쳤고, 동생에 관한 시 「아우의 인상화」와 「오줌싸개 지도」를 쓰기도 했어요.”
막내 윤광주 시인은 1933년생으로, 맏형 동주보다 열여섯 살, 둘째 형 일주보다 여섯 살 어리다. 가족들이 죽거나 형제들이 월남하는 바람에 고향 용정에 남은 건 아버지와 단 두 사람뿐이었다. 그나마 겨우 서른 살 나이로 용정에서 사망했다. 윤광주 시인은 가난과 질병으로 대학 진학을 하지 못하였다. 그는 독학으로 문학 공부를 하고 시인이 되었다. 1954년에 시 「그때면 알겠지」를 《연변문예》에 발표하여 연변 문단에 데뷔한 후부터 1962년 사망할 때까지 작품 활동을 하였다. 일찍 병사한 데다가 대다수 작품들이 유실되어 현재 10여 편의 작품만이 남아 있다.
윤동주 여동생 윤혜원
오늘날 우리가 116편에 달하는 윤동주 시인의 시를 읽을 수 있는 것은 거의 여동생 윤혜원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나와 있는 윤동주 시집들에 실려 있는 116편 중 윤혜원이 가지고 온 작품은 85편으로, 윤동주의 초기와 중기에 쓴 작품들이다. 윤동주보다 일곱 살 아래인 그녀는 고향 용정에서 초등학교 교사로도 근무했다. 윤혜원은 스무 살 때인 1948년 오형범과 결혼하였고 그해 12월에 월남하면서 위험을 무릅쓰고 용정 고향집에 남아 있던 윤동주의 육필 원고와 노트 3권, 스크랩북, 사진 등을 가지고 내려왔다.
윤혜원 부부는 1984년 호주로 이민을 떠나 그곳에 살면서 윤동주 시인에 관한 일이라면 중국 용정, 서울, 일본 등을 가리지 않고 오가면서 오빠를 기리는 일에 평생을 바쳤다. 2011년 12월 10일 호주 시드니 자택에서 88세를 일기로 작고하였다.
소년기
평양 숭실중학 시절
윤동주는 19세 때인 1935년 9월 1일, 은진중학교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평양 숭실중학교 3학년 2학기에 편입한다. 만주 지역 학제와 평양의 학제가 차이 나서 1년이 늦어지게 된 것이다. 4학년에는 한 학기 먼저 은진중학에서 편입한 친구 문익환이 있었다. 1936년 ‘신사참배’ 거부 동맹휴학 사태로 학교 문을 닫게 되자 윤동주는 숭실중학교를 자퇴하고 고향 용정으로 돌아가 광명학원 중학부에 편입하였다. 이 학교에서 2년 동안 중학 과정을 마친다.
숭실중학 네 친구 - 윤동주, 문익환, 이영헌 또 한 사람
은진중학에서 함께 숭실중학으로 편입한 단짝 네 명이 교복을 입고 찍은 사진에 대해 잘못 쓴 글들이 인터넷에 퍼져 있다. ‘광명중학 시절’ 사진이라고 소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사진 속 인물도 잘못 설명하고 있다. 앞줄에 앉은 안경 쓴 학생이 정일권 전 총리라고 되어 있는데 사실은 윤동주 친구 이영헌 목사이다. 이 사진을 찍은 때 역시 광명중학이 아니라 평양 숭실중학을 다닐 때이다.
윤동주와 문익환은 참 각별한 사이였다. 문익환은 일제 강점기 시절 좋은 세상은 보지도 못하고 젊은 나이에 죽은 윤동주에게 평생 미안한 마음으로 살았다. 50대 후반에 ‘늦봄’이라는 아호를 짓고 시인으로 데뷔한 문익환은 시 「동주야」에서 윤동주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시로 쓰기도 하였다.
너는 스물아홉에 영원이 되고
나는 어느 새 일흔 고개에 올라섰구나
너는 분명 나보다 여섯 달 먼저 났지만
나한텐 아직도 새파란 젊은이다
너의 영원한 젊음 앞에서
이렇게 구질구질 늙어가는 게 억울하지 않느냐
- 문익환 「동주야」 부분
문익환 목사는 1943년 윤동주가 일본 교토 시모가모 경찰서에 체포되던 무렵 학병을 피하여 만주 봉천신학교로 전학하였다. 해방 후인 1946년 귀국하여 1947년에 목사 안수를 받은 다음 평범한 목사로 활동하다가, 친구 장준하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자 민주화투쟁과 통일운동에 헌신하게 된다.
앞줄에 앉아 있는 이영헌은 함경북도 명천 출신이다. 그는 문익환 목사와 윤동주 시인의 은진중학교 동창으로, 두 사람보다 먼저 평양 숭실중학에 진학하였다. 문학적 재능이 뛰어나 윤동주와 문익환이 숭실중학에 편입했을 때는 학교 문예부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평양 숭실중학을 졸업한 이영헌은 일본 신학대학과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를 졸업한 후, 평북 의산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부터 대현교회 목사, 숭실대 부교수, 장로회신학대학 교수 등으로 평생 목회 활동과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였다. 2005년에 향년 87세로 별세하였다.
청춘
연희전문 시절
연희전문 진학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윤동주는 문학을 공부하고 싶어 했지만 아들이 의사가 되기를 바랐던 아버지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부와 외숙부 김약연 선생이 본인의 취미대로 나가게 두라고 아버지를 설득하여 윤동주는 연희전문 문과로 진학할 수 있었다.
과연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연희전문에는 훌륭한 스승들과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최현배ㆍ김윤경의 조선어 시간을 비롯하여 손진태의 역사 시간, 이양하의 영문학 강의 등을 들으며 윤동주는 민족의식과 한글에 대한 자부심을 키울 수 있었다.
윤동주와 정병욱
연희전문 3학년 때 윤동주는 기숙사에서 정병욱을 만났다. 정병욱은 이 사실을 「잊지 못할 윤동주의 일들」이라는 글에서 밝히고 있다. 윤동주와 정병욱은 기숙사를 나와 종로구 누상동 9번지 등에서 하숙을 함께하기도 했다. 정병욱은 윤동주의 2년 후배이다. 나이도 다섯 살이나 적다. 하지만 윤동주는 평생 그에게 하대하지 않고 ‘정형’이라고 부르며 존중하였다.
윤동주는 일본 유학을 떠나기 전에 정병욱에게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필사본을 건네주면서 잘 보관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정병욱은 윤동주에게서 받은 필사본 시집을 전남 광양 본가에 잘 보관해 두었다가 해방 후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세상에 나올 수 있게 하였다.
생전에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출간되지 못한 이유
1941년 12월, 윤동주는 연희전문 졸업을 앞두고 그동안 쓴 시 19편을 묶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자필 시고집 3부를 만들었다. 이 3부 가운데 하나는 자신이 갖고, 한 부는 영문과 이양하 교수에게, 나머지 한 부는 후배 정병욱에게 주었다.
1941년 11월 5일 완성한 「별 헤는 밤」을 포함하여 ‘자선(自選) 시집’을 묶어 졸업 기념으로 출판하려고 한 것이다. 처음에는 시집 제목을 『병원』이라고 하였다. 세상은 온통 ‘환자투성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 시집 원고를 받은 이양하 교수는 출판을 보류하라고 권하였다. 「십자가」, 「슬픈 족속」, 「또 다른 고향」 같은 작품들이 일제의 검열을 통과하기 어려울 것이며, 이 때문에 일본 유학을 앞둔 윤동주에게 큰 위험이 따를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윤동주는 스승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연희전문을 졸업한 후 용정으로 돌아온 윤동주는 다시 아버지와 시집 출판 문제를 의논하기도 하였지만 출판 경비 문제로 출판 계획을 접어야 했다. 그래서 결국 윤동주는 생전에 시집을 한 권도 가지지 못하는 시인이 되었다.
유학
도쿄 첫 번째 두 번째 윤동주 하숙집
윤동주가 릿교대를 다닐 때 하숙했던 집은 도쿄 시내 신주쿠에서 가장 근처인 다카다노바바 역 근처이다. 이 역에서 내려 역 앞 안내도에 나와 있는 도츠카 제2소학교를 찾아가면, 학교 담을 따라 왼쪽 골목 끝에 ‘일본 플라워디자인학교’가 있다. 이곳이 윤동주의 도쿄 첫 번째 하숙집 터다.
봄은 다 가고ㅡ 동경 교외 어느 조용한
하숙방에서, 옛 거리에 남은 나를 희망과
사랑처럼 그리워한다.
오늘도 기차는 몇 번이나 무의미하게 지나가고,
오늘도 나는 누구를 기다려 정거장 가차운 언덕에서 서성거릴 게다.
- 윤동주의 「사랑스런 추억」 일부
일본 플라워디자인학교 건물 골목에서 나와 다시 골목 안쪽으로 올라가면 길가에 쇠고리를 연결하여 내려뜨린 독특한 건물이 나타나는데, 이것이 일본 점자도서관이다. 이곳 역시 윤동주가 친구 백인준과 함께 하숙을 했던 장소로 알려져 있다. 당시 주소는 ‘도쿄 요도바시구 스와쵸 212이시가’ 댁이다. 릿교대 캠퍼스가 있는 이케부쿠로와 이곳은 꽤 먼 거리다. 그런데 왜 하필 다카다노바바에 하숙을 정하였을까? 아마 다카다노바바 지역이, 당시 조선 출신 노동자들이 가장 많이 밀집하여 사는 지역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추정된다. 윤동주가 시에서 ‘오늘도 기차는 몇 번이나 무의미하게 지나가고’라고 쓴 구절의 기차는 현재 JR 야마노테선 기차이다.
도시샤대와 윤동주ㆍ정지용 시비
교토 역에서 전철 가라스마선으로 갈아타고 이마데가와 역에서 내리면 바로 도시샤 대학이다. 1942년 10월 도시샤 대학에 편입한 윤동주가 1943년 7월 14일 시모가모 경찰서에 체포되어, 도시샤 대학을 다닌 기간은 일 년도 채 안 된다. 도시샤 대학을 선택한 것은 윤동주가 시적 스승으로 삼고 있던 정지용 시인이 다닌 학교였기 때문이다. 또 공초 오상순 시인의 모교이기도 하다.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 세 분이 이 학교를 다녔다는 사실이 특기할 만하다.
이마데가와 역 도시샤대 방향 출구로 나오면 정문에서 캠퍼스 가운데로 나 있는 길이 있고, 이 길가에 삼각형 지붕의 교회 건물이 있다. 이 교회 건물 오른편 안쪽으로 들어가면 윤동주 시비와 정지용 시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아래는 ‘윤동주 시비 건립 취지서’에 적혀 있는 내용 일부이다.
“그가 태어난 간도에는 그의 묘지가, 출신 학교인 연세대학교에는 그의 시비가 있지만 직접 탄압을 받고 옥사한 일본에는 윤동주의 흔적이 없습니다. 특히 그가 많은 시를 썼음에 틀림없을 교토에는…. 이러한 상황에서 도시샤 대학 한국 출신 동문들은 ‘같은 캠퍼스에서 공부한 우리 도시샤 동문, 동포, 학생으로서 이렇게 있어도 되는 것인가?’ 하는 반성 끝에 윤동주 시비 건립을 준비하였습니다.”
윤동주의 마지막 사진 - 교토 시 우지강 아마가세 구름다리
1942년 4월 18일, 윤동주가 교토 도시샤 대학으로 옮길 무렵 처음으로 미군 폭격기가 일본 본토 폭격을 시작하였다. 이에 일본 당국은 1942년 5월 8일 각료회의에서 조선에서도 징병제도를 실시한다고 결정하였다. 부족한 병력을 조선인 징병으로 보충하려고 한 것이다. 이 때문에 1943년 7월 윤동주는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을 결정해야 했다.
1943년 초여름 어느 날, 윤동주가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도시샤 대학 같은 과 친구들은 송별회를 열었다. 그리고 기념사진 한 장을 남겼다. 교토 우지 강의 아마가세 구름다리 위에서 도시샤 대학 영문학과 남학생 일곱 명과 여학생 두 명이 찍은 사진이다. 송별회를 마친 후라서 그랬을까? 윤동주의 표정은 매우 우울해 보였고 미소마저 희미했다. 잠시나마 함께 공부하며 정을 나누었던 일본 친구들과의 우정을 버려야 한다는 운명이 야속해서였을까?
2006년 6월호 《현대문학》에 윤동주 연구가 야나기하라 야스코의 특별기고로 이 사진이 ‘시인 윤동주 최후의 사진’이라는 설명과 함께 실렸다. 야나기하라 씨는 “이 사진은 윤동주 시인이 일본 유학 중에 찍은 유일하고도 최후의 현존 사진으로 짐작된다.”고 밝히면서 함께 사진을 찍은 여학생인 기타지마 마리코와 모리타 하루의 증언을 토대로 윤동주 시인의 마지막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강변에서 식사를 한 후 바위에 걸터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노래 한 곡 불러 주지 않겠어?’라는 급우들의 청을 받고 윤동주는 ‘아리랑’을 불렀다. 조금은 허스키한 목소리로, 애수를 띤 조용한 목소리가 강물 따라 흐르고, 모두들 조용히 듣고 있다가 노래가 끝나자 모두 박수를 쳤다. 윤동주가 주저하지도, 사양하지도 않고 노래를 불렀던 것은 급우 전원이 자신의 송별회에 참석해준 데 대한 감사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옥(獄)
후쿠오카 형무소 - 윤동주 시인이 숨을 거둔 곳
윤동주 시인이 숨을 거둔 후쿠오카 형무소 근처에 최근 윤동주 시비가 세워졌다는 보도가 있었다. 윤동주 시비는 형무소 건물과 바로 이웃 후쿠오카 니시 공원에 있다고 지점까지 보도하였다. 그러나 현지를 샅샅이 뒤졌지만 윤동주 시비는 없었다. 90세쯤 되어 보이는 노인이 윤동주 시비가 있는 곳을 안다면서 그 공원 이름은 ‘모모치니시 공원’이라고 하였다. 노인이 알려 준 모모치니시 공원을 찾았더니 후쿠오카 구치소 옆에 있는 작은 공터였고, 역시 시비는 없었다. 윤동주 시인이 죽어 간 후쿠오카 형무소는 지금 ‘후쿠오카 구치소’로 명칭이 바뀐 채 그 자리에 있다. 후쿠오카 구치소 바로 옆은 모모치 해변이다. 독방에 갇혀 자유를 잃은 윤동주 시인은 사방이 조용해지는 밤이 되면, 매일 밤 들려오는 그 파도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그 소리는 우리가 상상하는 젊음과 낭만의 해조음이 아니라 억울한 죄목으로 갇혀 있는 청년 시인의 가슴을 사정없이 후벼 파는 고통의 소리였을 것이다. 이곳에서 윤동주 시인은 바닷물을 인체에 주입하는 생체실험의 대상으로 이름도 알 수 없는 주사를 맞다가 그 독 때문에 죽었다. 그토록 기다리던 조국 해방을 몇 달 앞둔 1945년 2월 16일에.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만난 윤동주 - 독립지사 김헌술 선생의 증언
김헌술 선생은 독립훈장 ‘애족장’을 수훈한 독립지사이다. 1924년생이니 윤동주 시인보다는 일곱 살 어리다. 일본 교토 제3중 재학 중이던 1941년 5월 ‘독립운동’ 모의 혐의로 체포되었다. 1943년 6월 교토 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살이를 시작하였다. 윤동주 시인이 1944년 여름 이곳에 수감될 때보다 먼저 윤동주 시인의 감방 바로 건너편 108호실에 수감 중이었다. 이하는 김헌술 지사의 증언이다(경향신문사 발행, 정경문화, 1985년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