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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는 시대가 부른다

남주홍 지음 | 북오션



선비는 시대가 부른다

남주홍 지음

북오션 / 2017년 2월 / 376쪽 / 17,000원





런던의 안개비 - 자전적 성찰



열두 고빗길의 삶, 도전과 성취

깊고 차가운 눈물: 1967년 순천중학교 3학년이던 해 부모님이 운영하시던 식당이 영업부진으로 문을 닫았다. 그리고 나만 빼놓고 모두 서울로 이주해 버렸다. 나는 당시 졸업반이고 우등생이었기 때문에 친척집에 잠깐 맡겨놓은 상태였다. 곧이어 상경한 내게 주어진 선택은 상업고등학교에 들어가 졸업 후 바로 취직해서 가족생계에 보탬이 되라는, 그야말로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래서 결국 ‘상고 중의 경기고’라는 명문 덕수상고에 진학해 3년 후 조흥은행에 취직했다. 부모님이 아주 조그마한 영세시장의 구멍가게를 하고 계셨으니 그나마 내 적은 봉급도 큰 도움이 되었겠지만, 정작 내 자신은 은행 말단직원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내가 창구에서 돈을 세고 있는데 대학 다니는 중학교 동창 3명이 찾아와 말했다. “우리 데이트 나왔는데, 돈 좀 빌려줘.” 내 눈에 불이 났다. 한 맺힌 눈물이 났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나는 초라함을 느꼈고, 잠시나마 부모가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날 비가 많이 왔고 그 빗물에 섞여 난 한없이 울며 걸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야간대학이라도 진학해서 다른 길을 모색해 봐야지. 그렇게 해서 나는 1972년 건국대학교 야간대학 정치외교학과를 들어갔다.

주경야독은 정말 힘들었다. 더 큰 문제는 졸업 후에 있었다. 설사 학위를 딴다 해도 소속 직장인 은행에서조차 학력을 인정해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대기업에 대졸자로 지원해 봐도 명문대학 출신들에게 서류심사에서부터 바로 밀릴 것이 너무 뻔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나는 전형적인 “아웃사이더”였다. 이 유리천장을 깨뜨리기 위해 고민한 끝에 행정고시 준비로 일단 탈출구를 찾으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후두암으로 쓰러졌다. 구멍가게 2층 단칸방에서 제대로 치료 한번 못 받아보고 어머니는 그렇게 비통히 돌아가셨다. 집안이 풍비박산이 되었다. 당장 나의 학업과 고시공부가 중단되었다. 은행일 외에 다른 부수적인 일거리를 찾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동생들 학비와 생활비의 압박이 밀려왔다. 하지만 이대로 호구지책에 연연하다가 죽을 수는 없다는 각오로 유학을 결심했다.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1977년 2월 야간대학 졸업과 동시에 유학시험에 합격하여 은행을 사직하고 영국 유학을 떠났다. 스코틀랜드 최고(最古)의 대학인 에버딘에서 1979년 9월 전략학 석사를, 그리고 영국 정치학의 대명사인 명문 런던 대학교 LSE에서 1983년 6월 국제정치학 박사를 취득했다. LSE에서 2년간 과정을 마치면서 나는 미국 하버드대의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나의 담대한 도전은 적중해 하버드대 국제문제연구소 소장이자 국제정치학계 거물인 사무엘 헌팅턴 교수가 나의 제안을 수락하고 약간의 장학금을 받는 객원 연구원 자리를 내주었다. 1981년 5월의 일이었다.

유학 4년 만에 석사를 마치고 박사과정 전반을 LSE에서, 그리고 후반은 하버드대에서 헌팅턴 교수의 강의와 지도를 받으며 마칠 수 있게 된 것은 어쩌면 운명 같은 일이었다. 회고하건대, 지나온 나의 고비고빗길마다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이 나를 돕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하버드행이 나의 인생진로를 또 한 번 크게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하버드대에 연수 중이던 전 주월 한국군사령관 채명신 장군과의 교분이 인연이 되어 그의 강력한 권유와 천거로 한국의 국방대학원에서 교수직을 제의해왔다. 그때 나의 감회는 뜨겁다 못해 사뭇 비장했다. 더욱이 내 논문은 LSE 1983년도 최우수 논문으로 선정되어 최고 역사의 케임브리지 대학 출판부에서 출간해 전 세계 도서관에 배치되고, 지역 연구교재로 활용하게끔 되었다.

국제외교안보 전문가 ‘걸프 스타’의 탄생: 나는 1983년 8월 귀국하여 가을학기부터 국방대학원에 부임하였고,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공부하며 가르쳤다. 그래서였을까, 어느 날 갑자기 또 한 번의 발전적 변신의 기회가 찾아왔다. 1989년 11월 초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독일이 급속히 통일 과정에 들어가면서 우리를 흥분시키더니, 1991년 초 미국이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에 대한 응징으로 전격적인 군사개입을 하며 걸프 전쟁이 터졌다. 그리고 남한과 북한이 총리급 회담을 전격 실시하고 〈남북기본합의서〉를 만들어 이 급변사태에 적응하려 몸부림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즈음이다. 이러한 대변혁기를 맞아 내게도 많은 외부 특강과 TV인터뷰 및 해설, 그리고 신문기고 요청이 들어왔다.

특히 걸프전을 생방송으로 MBC에서 명쾌하게 해설한 것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면서 나는 졸지에 ‘스타’가 되어 버렸다. 한마디로 그간 갈고닦은 외교안보 전문 연구 역량이 ‘대박’이 난 셈이었다. 심지어 당시 TV 앵커들은 나를 ‘걸프 스타’라는 별칭까지 붙여 호칭하며 뉴스해설을 하게끔 만들었다. 이 현상은 한참 뒤 2001년 9ㆍ11테러와 아프간 전쟁 그리고 2003년 3월 이라크전쟁 때도 이어졌다. 그 후 연평해전과 천안함 폭침 및 연평도 포격전, 그리고 연이은 북한의 미사일 도발 및 핵실험 등의 해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인들에게 조언 기회가 생기고 정부에서도 각종 자문을 구하는 등 바쁜 일정 속에 당시 김영삼 민자당 대통령후보 측에서도 큰 관심을 보였다.

마침내 1992년 5월, 나는 김영삼 후보의 외교안보 보좌역으로 발탁되어 국방대학원 교수직을 떠나게 된다. 말단 은행원에서 영국 유학생으로, 하버드대 연구원을 거쳐 국방대학원 교수로, 그리고 이제 집권당 대통령후보 핵심참모로 합류했으니 15년간 5번째 창조적 변신을 한 셈이다. 그리고 김영삼 대통령이 1993년 2월 취임하자 나는 국가안전기획부 특보(안보통일 보좌관)로 부임했는데, 이는 6번째의 변신이었다. 주로 대북정보 분석과 정책조언 등을 맡았으며 정보기관의 역할과 임무, 그리고 공작 사항들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우고 실전 경험을 쌓을 수 있는 매우 소중한 기회였다.

이 경험으로 나의 외교안보관이 더 현실적으로 다듬어지고 수준 높은 정보판단 능력까지 갖추게 될 수 있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더욱이 이 기간에 한중 수교와 한러 수교가 단행되었고, 이어 북핵 위협과 전쟁소동, 남북정상회담 합의와 김일성 사망, 미ㆍ북 간 〈제네바 합의문〉에 의한 핵동결 등 우리 안보의 결정적 전환기에 있었기 때문에 내겐 중요한 현장 위기관리 역량을 쌓을 수 있는 시기였다. 1995년 12월, 나는 차관급인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사무차장직으로 옮겼는데, 이는 7번째 변신이었고, 이 직책에 2년 3개월을 복직했다. 이 기간 동안 나는 수백 회의 국내외 외교안보 연찬 특강을 실시했고, 또 수만 명의 인적 네트워크를 넓힐 기회가 주어졌다. 엄청난 자산이 아닐 수 없었다.

‘김정일의 천적’: 1998년 2월 말 김대중 정부 출범과 더불어 평통을 떠났다. 그리고 그간의 나의 활동상을 지켜본 여러 기관과 대학에서 바로 다양한 보직의 제의가 들어왔고 나는 경기대학교 통일안보대학원 교수직을 택했는데, 이는 8번째의 변신이었다. 이 대학에서 정년을 맞이할 때까지 공직 진출로 휴직과 복직을 거듭하며 19년간 봉직했다. 한편 나는 대학에 있으면서도 그간 쌓은 안보통일 부문의 실전 경험을 바탕으로 앞서 언급한 각종 전쟁과 위기 시마다 대국민 TV 해설을 도맡아 했다. 그리고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퍼주기식 지원의 대북 햇볕정책의 위험성을 지적하고, 북 지도부가 이를 악용하여 한편으로는 핵무기 개발 자금으로 삼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남 통일전선 공작을 강화하여, 우리 내부의 남남 갈등과 한미 간의 이간책을 도모할 것이라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경고했다. 나의 이러한 경고는 당시 광범위한 국민적 공감대를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북한이 5차례나 핵실험을 하고 대남 총력 공작에 나서면서 정확히 현실로 드러났으니 더 이상 재론의 여지가 없다. 대표적인 보수논객인 조갑제 선생은 한 칼럼에서 나를 ‘김정일의 천적’이라고까지 치켜세웠다. 김정일의 노련한 맞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으나, 이후 황당하게도 이것을 빌미 삼아 햇볕론자들은 나를 ‘반통일세력’이라며 온갖 비난과 공격을 해대는 상황이 벌어졌다.

예로 2008년 2월 이명박 정부가 나를 통일부 장관으로 내정(이는 9번째 변신이었음)했을 때 있었던 황당한 일을 들 수 있는데, 당시 김대중, 노무현 정권 때 실세를 떨치던 사람들이 ‘반햇볕론자’는 바로 ‘반통일주의자’나 마찬가지라고 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내가 쓴 『통일은 없다: 바른 통일에 관한 생각과 담론』이라는 책이 내용상 빠른 통일은 없고 오직 바른 통일론이 빠른 통일의 첩경이라고 밝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통일부 장관으로서 ‘부적격’이라고까지 일방적으로 매도했다. 당시 주요 방송매체와 언론들이 대부분 이전 정권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 있었기에 그러한 공격은 국민여론에 상당히 영향을 끼쳤다. 더욱 가슴 아팠던 점은 나의 가족에 대한 일이었다.

실제로는 가난한 시골농부 출신의 처가 쪽에서 토지수용으로 인한 대토보상을 받은 땅을 무슨 땅 투기를 했다며 과장하거나 왜곡하기까지 했다. 또 미국에서 공부할 때 태어난 딸의 미국국적까지 시비하고 나섰다. 이에 나는 결단을 내렸다. 신정부 출범에 더 이상 부담이 되어서도 안 되지만, 무엇보다도 가족이 입을 마음의 상처를 생각해 주저함이 없이 장관직을 버렸다. 이제 와서 해명해서 무엇할까마는 어쨌든 모두 하늘의 뜻이고 내 부덕의 소치이니 누구를 탓하겠는가.

또한 이 여론조작식 선전선동 뒤에 필히 북의 대남 공작요소가 부분적으로 개입되어 있을 것이고 이 역시 때가 되면 밝혀지리라 믿었기 때문에 억울하지도 않았다. 이는 훗날 내가 국정원 제1차장으로 부임하여 알아보니 바로 드러났다. 북의 사이버 공작 지도부가 댓글 전담팀을 운영하면서, 중국에 서버를 두고 ID 수십 개씩의 국내 네티즌으로 위장하여 여론몰이를 한 흔적이 잡힌 것이다. 이는 과거 동독의 정보기관 슈타지가 서독의 저명 학자와 정치인들을 반동독, 반통일주의자로 중상모략할 때 썼던 수법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다. 한마디로 북한은 내가 통일부를 맡으면 ‘남조선의 공돈’ 줄이 막힐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당시 북한은 햇볕식 남북협력기금은 아예 ‘자기들 예산’이라고까지 단정하는, 실로 기가 막힌 저들 내부의 대화까지도 있었음을 여기서 참고로 밝혀둔다.

나는 대학으로 복귀한 후 2010년 국제안보대사직(10번째 변신)으로 명예를 회복할 때까지 2년간 절치부심, 자중자애하며 조용히 지냈다. 국제안보 대사는 비록 대외직명 대사지만 우리 외교안보 정책에 조언할 수 있는 공식적인 직책으로서 정권 초에 부당히 희생양이 된 나의 능력을 아깝게 생각한 대통령의 결심으로 주어졌다. 이때 대통령을 수행해 제1차 핵안보 정상회의(워싱턴)도 참석하는 등, 일단 일을 맡기면 최선을 다하는 나의 천성 그대로 실력을 발휘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였는지 2011년 봄, 주 캐나다 대사(특명전권대사)로 나가게 되었는데, 이는 나의 11번째 혁신적 변신이었다. 그리고 캐나다 근무 10개월 남짓, 나는 새로운 소명을 받아 이번에는 국가정보원 제1차장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이는 12번째 변신이다. 국정원 제1차장직은 안보, 통일 전선의 실무 정보 총사령탑으로 보면 된다. 김정일이 갑자기 사망하자(2011년 12월) 대북 정보력 강화를 위해 내가 긴급투입된 것이 아닌가 짐작했지만, 과거 안기부 시절 김일성 사망 때 내가 담당했던 실무 경험도 감안해 대통령께서 적재적소라고 판단한 것 같다. 아무튼 지나온 열두 고빗길에 사연도 많고 풍파도 많았지만, 나는 고비고비마다 최선을 다해 적응하며 하늘의 뜻에 순응한다는 마음으로 발전적 변화를 거듭해왔다고 생각한다.



갈림길, 정거장에서 - 인생론 단상(斷想)



시대가 선비를 부른다

밤나무와 대나무: 퇴계 이황은 사대부 후학들에게 다음과 같은 금언(金言)을 남겼다. ‘대저 모든 일이란 하늘이 아니하는 것이 없으니 어찌 스스로 굳게 지키지 못하고 공명(功名)만을 추구할 것인가. 자연은 큰 스승이요, 배움은 큰 즐거움이니 자강불식(自强不息)하며 날마다 자신을 돌아볼 것이다. 벼슬이란 도(道)를 행하기 위함이지 녹(祿)을 먹기 위함이 아니니 오직 여건과 도리에 따라 나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벼슬자리가 도리어 사람을 해친다 - 『퇴계 어록 문집』’

하늘의 뜻을 알고 먼저 수기치인의 도(道)를 닦으라. 그렇지 않고 권세를 탐한 벼슬자리는 나라에도 불행이고 본인에게도 불행이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지고의 진리이다. 여건과 도리에 따라 벼슬길에 나서라는 계명은 바로 시대가 선비를 부르는 법이니, 무엇이 시대의 소명이고 세상의 흐름인지 가늠할 수 있는 안목을 먼저 키우라는 훈계이다. 이 무렵 퇴계의 어머니가 내린 당부도 사뭇 의미심장하다. “헛된 이름과 공명을 쫓지 말고 작은 벼슬에 그쳐서 분수에 맞게 살아라……. 네 뜻이 너무 높고 고상하여 세상이 널 몰라줄 수도 있다.” 퇴계의 뒤에는 이러한 위대한 모정이 있었던 것이다.

나랏일을 위한 능력을 갖추는 데도 몇 가지 주요 요건이 있다. 대저 무엇인가를 이루어 내는 자는 항상 세 가지 조건의 도움을 받는다고 한다. 하늘이 주는 때(天時)와 땅이 주는 이로움, 그리고 사람들과의 조화가 바로 그것이다. 이 세 가지가 균형을 이루면 치인치국(治人治國)의 준비가 됐다고 하며, 어느 하나라도 부족하면 아직 여건이 성숙되지 않았다고 본다. 아무리 때가 좋아도 주어진 입지(立地)가 있어야 하고, 또 아무리 입지가 좋아도 인덕(人德)이 반드시 따라야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천시불여지리(天時不如地利), 지리불여인화론(地利不如人和論)을 말한다.

고도로 동적(動的)인 지구촌의 세계화 시대에, 그것도 SNS가 모든 제도적 소통의 벽을 넘어서고 있는 오늘의 여건에서 위와 같은 정적(靜的)인 고전적 개념은 다소 현실성이 뒤떨어진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다 적극적인 관점에서 퇴계의 가르침과 함께 해석해 본다면, 아직도 우리를 크게 깨우치게 하는 점도 적지 않다. 우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격언을 보자. 천시(天時)는 스스로 자력갱생의 입지를 개척하고 주위의 신망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자에게 주어진다는 뜻이 아닌가. 즉, 기회는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퇴계의 가르침은 이 세 가지 요소가 인과관계를 맺고 있으니 무릇 나랏일을 생각하는 선비는 이 이치를 먼저 깨닫고 시대의 부름에 응해야 함을 깨우치고 있다. 다산 정약용도 『목민심서』에서 준엄히 훈도했듯이 목민(牧民), 즉 백성을 지도하는 자리는 함부로 구하려고 해서는 아니 된다. 모두에게 불행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시대가 선비를 부른다고 할 때 언급되는 또 다른 논리는 율죽론(栗竹論)이다. 밤나무(栗)와 대나무(竹)는 성장속도가 초기에는 매우 늦다. 움이 트기까지도 늦지만 무성하기까지도 비교적 늦은 편이다. 그러나 일단 줄기와 가지 형태가 갖추어지면 무섭게 자라기 시작해 그 결실의 용태를 당당히 자랑한다. 그래서 이를 일컬어 옛 선비들은 군자(君子)의 도(道)를 율죽론(栗竹論)이라고 불렀다. 더디 가더라도 옳게 가면 결코 늦은 것이 아니라는 수신(修身)의 도(道)를 말한다. 더디지만 끝내 자라고야 말며, 느리지만 결국 도달하고야 마는 이치, 군자는 그릇을 갖추고 때가 오기를 기다린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나는 공직에 머무는 기간 내내 퇴계의 어록과 다산의 『목민심서』 그리고 서애 류성룡의 『징비록』을 끼고 살았다. 외(畏)와 경(敬) 그리고 신(愼)은 이 위대한 조상들이 남긴 세 개의 키워드이다. 즉, 모든 일에 경계하고 또 경계하며 삼가고 또 삼가며 나아가 참고 또 참으라는 당부이다. 비록 그간 나의 행적이 많이 부족하고 크게 반성할 점도 없지 않지만, 적어도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성경책과 더불어 이 세 가지 선현들의 기록을 읽고 또 읽어 가슴에 새기려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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