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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이 내 인생을 살렸다

이요셉, 김채송화 지음 | 북오션



웃음이 내 인생을 살렸다

이요셉, 김채송화 지음

북오션 / 2015년 7월 / 296쪽 / 14,000원





웃음엔 털어버리는 힘이 있다

핏덩이인 나를 버리고 간 엄마: 나는 아주 재빨리 머리를 감는 버릇이 있는데, 그런 버릇이 생긴 이유를 서른여섯 살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내가 일곱 살 되던 해에, 나를 버리고 갔던 엄마가 나를 찾으러 왔다. 엄마가 냇가에서 머리를 감으며 놀고 있는 나를 데리러 온 것이다. 엄마를 보는 순간 ‘엄마가 나를 또 버리고 갈지 몰라’ 하는 생각이 스쳤고, 나는 아주 재빨리 머리를 감았다. 그 이후로 초스피드로 머리를 감는 버릇이 생긴 것이다. 그렇게 나는 7년 만에 엄마를 만났다.

엄마를 만났으니 ‘그리움 끝, 행복 시작’인 줄 알았다. 그런데 현실은 내 기대를 완전히 빗나갔다. 엄마랑 살면서 새 아빠가 두 번이나 바뀌었고, 새 아빠는 툭하면 나에게 손을 댔다. 심지어는 겁탈을 하려 했던 적도 있었다. 어느 날엔 어린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없어 칼을 들이댔다. 그러자 잠시 후에 경찰이 와 새 아빠가 아닌 나를 잡아갔다. 엄마가 나를 신고했단다. 엄마가 겁탈을 당할 뻔한 딸을 신고하다니… ‘엄마라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 편인가?’ 하는 생각에 괴로웠다.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엄마는 아가씨들을 데리고 술집을 운영했는데, 나는 밤이면 다락방에 숨어 있었고, 낮에는 학교를 다녀와서 식모 노릇을 했다. 언니들은 잠을 자고, 나는 언니들이 먹은 술병을 치우고 옷까지 빨았다.

내가 살아온 얘기를 들으면 사람들은 이렇게 묻곤 한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살았어?” 나는 그렇게 살아야 하는 줄 알았다. 그것이 내 인생인 줄 알았다. 살면서 웃으면 큰일 나는 줄 알았고, 살면서 숨소리를 내면 죽는 줄 알았다. 모든 사람들이 나처럼 밤마다 숨어 사는 줄 알았다. 어쩌면, 나는 세상에 필요 없는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엄마는 허구한 날 내게 화풀이를 했다. 기분이 나쁘면 내 머리채를 잡고 벽으로 던지고, “니년이 내 팔자를 망쳤어”라며 두들겨 팼다. 또 엄마는 매일같이 “나와 똑같은 인생을 살라”는 저주를 퍼부었다. 지옥 같은 삶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은 일찍 결혼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스물세 살에 목사와 결혼을 해서 예쁜 딸을 낳았다.

그런데 핏덩이 같은 딸을 사랑할 수가 없었다. 딸에게 젖을 물리려면 화가 치밀어 올라왔다. ‘어떻게 이런 핏덩어리를 버리고 갈 수 있어? 그게 엄마야?’ 나도 모르게 솟구치는 분노는 아무것도 모르는 딸을 방바닥으로 밀어내게 했다. 그러지 말아야지 골백번 후회를 하면서 나도 모르게 그렇게 했다. 아이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남편이 다른 여자랑 이야기만 해도 엄마의 목소리가 환청으로 다가왔다. ‘니년 남편이 다른 여자랑 있으면 놓아줘, 이년아.’ 미칠 것 같았다. 무엇이 나를 이 수렁에서 해방되게 할 수 있을까? “오, 하나님. 저를 해방시켜주세요, 제발.” 나는 매일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어느 날부터 남편은 신문과 우유 배달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나를 한국웃음연구소에서 진행하는 웃음치료 세미나에 보내주었다. 그 일을 계기로 나는 웃을 수 있었고, 어둠의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또 내가 누구인지 깨닫고 새로 태어날 수 있었다. 나는 지난 36년 동안 웃어서는 안 되는 사람인 줄 알았다. 웃으면 나쁜 일이 일어날 줄 알았는데, 세미나 기간 동안 웃어도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엄마의 속삭임은 모두 거짓이고 속임수였던 것이다. 세미나 기간 동안 세미나실의 출입문을 통과할 때마다 나는 외쳤다. “나는 지금 행복을 선택한다!” 15초간 웃어야만 출입문을 통과할 수 있는 생활웃음법을 남들보다 더 크게 외치고 더 길게 웃고 온몸으로 웃어대면서 즐겼다. 심화과정 세미나까지 마친 나는 집에 돌아와서도 계속 웃는 연습을 했다. 그러자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기 시작했고 꿈이 생기기 시작했다. 살고 있는 집을 팔아 상가를 하나 마련했다.

한부모가정, 기초생활수급자의 가정, 알코올중독 부모의 밑에서 자란 야생화 같은 아이들을 서른 명 남짓 데리고 공부를 가르치고 무료급식도 시작했다. 내가 그랬듯 아이들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나는 단지 이 아이들에게 가난과 불행이 운명이 아니라는 진리를 깨닫게 해주고 싶었다. “너희도 충분히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부모님을 통해서 알려줄 수 없으면 내가, 그것도 안 되면 하나님을 통해서라도 가르쳐주고 싶었다. 그 방법의 하나로 아이들에게 자신부터 사랑할 수 있는 웃음을 가르쳤다. 밥을 먹을 때 연구소에서 배운 것처럼 생활웃음법을 쓰기로 했다.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하, 하하, 하하하~!” 15초간 웃지 않으면 밥을 주지 않고 다시 생활웃음법을 시작했다. 아이들은 한 번에 먹기 위해 길게 온몸으로 크게 웃었다. 몇 달이 지나자 아이들의 변화가 눈에 들어왔다. 이야기할 때 눈을 마주치지 않던 아이들이 눈을 똑바로 보며 이야기를 나눴고, 감정이 없던 아이들이 감정을 표현했다. “원장님, 이 꽃, 아름답지 않아요?” 폭력적인 아이들 입에서 여태껏 듣지 못했던 말들이 나왔다. 그렇게 아이들의 언어가 바뀌고 표정이 바뀌었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꿈을 잃었던 아이들이 꿈을 갖기 시작했다. 꼴등을 도맡아 하던 아이가 1등을 하고, 한글도 모르던 아이가 학생회장이 되고 우수한 성적을 보이기 시작했다.

때론 지원금도 없고 너무 힘들어 복지관 운영을 그만두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느 날은 견디다 못해 보따리를 싸는데, 한 아이 아버지가 임종 전에 우리 부부를 봐야 한다고 연락을 해왔기에 달려갔다. “원장님, 감사혀요. 우리 아이들 부탁해요, 정말 잘 부탁해요.” 그 말에 우리 부부는 다시 짐을 풀었다. 버림받아본 사람들은 그 고통을 잘 안다. 내가 몇 번 버려져봤기에 아이들에게 그 상처를 절대로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아마 지나온 과거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 아이들을 절대로 가슴으로 품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웃음이 아니었다면 이런 희열을 느낄 수 있는 힘을 기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엄마가 아니었다면 나에게 이런 사랑의 힘은 없었을 것이다.

평생 써온 가면, 내 삶이 없었다: 1961년 4월 19일, 민주화혁명이 대한민국을 부패와 부정의 수렁에서 건져낸 날, 나는 태어났다. 그리고 2012년 4월 19일 생일날, 나는 한 세미나에서 나답게 다시 태어났다. 그동안 목표 없이 변명으로 일관된 삶을 살아온 나는 사람들 앞에 설 용기와 자신감이 없었다. 사람들한테 나를 들킬까 봐 싫었다. 그러나 2012년 4월 19일에 드디어 나를 둘러쌌던 껍질을 깨고 내면을 바라보면서, 진정한 행복 앞에서 지나온 과거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진리를 깨달았기에 이제는 나의 과거를 당당히 얘기할 수 있게 되었다.

어릴 적 남편(나의 할아버지)을 일찍 여읜 할머니는 홀로 아버지를 키우고 장가를 보내셨다. 그런데 할머니는 그 설움을 시집온 엄마에게 다 쏟아내셨다. 내가 어렸을 때 할머니는 “니년 탓”이라며 엄마를 자주 구박하셨다. 아버지는 그 중간에서 고부간의 갈등을 못 견디고 늘 술을 드셨다. 그리고 집에 오면 엄마와 싸우셨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뿐만이 아니다. 어린 나를 앞에 앉히고는 술주정으로 일장 훈시만 하셨다. “태원아, 공부해, 공부. 알았어?” 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결심하고 또 결심했다. ‘아버지 같은 사람은 절대로 되지 않을 거야.’ 초등학교 시절, 참으로 나는 불쌍한 녀석이었다. 아무런 목표 없이 아버지의 꾸중이나 질책을 피할 목적으로만 공부를 하였으니까. 부담감이 커 공부를 잘해도 걱정, 못해도 걱정…… 걱정으로 무수히 많은 날들을 허비했다. 중고등학교를 상위 10퍼센트 이내의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매사 자신감이 부족하고 걱정이 많았으며 아버지의 질책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결국 나는 대학 입학고사에서 평소 실력만큼 결과를 거두지 못하고 고향에 있는 대학을 다녔다. 그런데 내가 성인이 되어서도 아버지의 질책과 훈계, 잔소리는 계속됐다. “태원아, 재수해. 그리고 서울에 있는 명문대를 가. 그게 네가 할 일이야.” 아버지의 계속되는 잔소리는 ‘나는 실패한 인생이구나!’라는 생각을 심어주었고, 되레 나를 공부와 멀어지게 했다.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날 요행수만 바라던 나는 1981년에 군에 입대하면서 깨닫기 시작했다. 인생은 장거리 경주이지 100미터 정도의 단거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요행수만 바라던 나는 인생이라는 장거리를 달리기에는 성취를 맛본 경험이 없는 인간일 뿐임을. 그러면서도 여전히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살지 않는 것을 유일한 목표로 삼았다. 먹고는 살아야 하니 방황 끝에 학원업에 종사하게 되었고, 친구의 추천으로 정계에 입문하게 되었다. 그런데 나에게는 사람 다루는 능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긍정적으로 살려고 노력해도 잘 안 되었다. 그러자 나 자신을 자책하는 일이 많아졌다. ‘내가 너무 못나서 그래, 나는 역시 무능해.’ 마음의 또 다른 깊은 곳에서는 이런 질문이 이어졌다. “나는 이 정도로 못난 놈이 아닌데, 내가 왜 이러지? …… 지금의 나를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게 너무 힘겨웠다. 그런데 정계에 입문하기 전에 긍정적인 사람이 되려고 이요셉 소장의 웃음 CD를 오며 가며 들었던 기억이 났다. ‘이요셉, 웃음치료, 그래 가자.’ 결정을 쉽게 못하는 나는 웃음세미나 시작일인 4월 19일 아침까지도 갈팡질팡했다. ‘웃으러 가는 데 뭔 비용이 그리도 비싼가? 에라, 모르겠다. 가자!’ 돈 내고 3일간 교육받으러 가는 건 처음이었다. 소장님의 강의 CD를 열 번 이상 들었기 때문에 거부감 없이 첫날부터 교육에 신나게 참가할 수 있었다. 또 자신감 넘치고 당당한 내 모습을 간절히 원했기 때문에 그야말로 목이 쉬어가면서 열정적으로 배웠다.

그런데 첫날밤에 생각지도 못한 숙제 -부모님께 감사 인사드리기- 가 주어졌다. 그래서 아침 일찍 어머님께 전화했다. “어머니, 저를 낳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모진 고통 속에 살아오신 우리 어머니도 이런 말은 처음 들었을 것이다. 쉰이 넘은 아들이 아침부터 전화질을 해서 사랑한다고 말하다니. 어머니는 잠시 침묵하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냐, 나도 우리 아들 사랑한다.” 그 순간 내가 얼마나 인생을 잘못 살았는지를 눈물과 함께 깨달았다. 내가 원하는 것만이 옳다는 생각에 나에게는 가리지 않고 지원해주기를 원했던 못난 놈이 나였다. 눈 딱 감고 인생의 숙제, 아버지에게 용기를 내어 전화를 드렸다. 아버지의 한마디는 나의 모든 설움을 녹여버렸다. “오냐, 나도 사랑한다.”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셨다. 단지 사랑하는 방법이 달랐을 뿐이다. 짧은 용서를 통해 나는 점차 변해갔다. 크게 웃고, 감사하고, 인생의 목표를 설정하고, 나의 장점을 쓰고, 긍정의 말을 하고, 용서를 하고 용서를 빌면서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았다. 그렇게 잠자고 있던 나는 서서히 깨어났다. 쉰이 넘어서야 나에게도 희망이 있고 꿈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내가 선택만 하면 행복하고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진정으로 행복해질 때 착해야 하는 탈, 남의 눈치를 봐야 하는 탈, 실패의 탈들을 벗어버릴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행복했던 2박 3일의 세미나를 마치고 나서는 웃음친구들과 아침마다 전화로 웃는 것을 실천했다. 그것이 벌써 1년 6개월째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크게 웃다 보니 어느새 나는 당당해져 있었다. 누가 보면 미친 놈 같다고 하겠지만, 나는 아침마다 행복을 선택했다.

드디어 2014년 총선이 있던 날, 나는 수정구 시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웃음을 만나기 전의 나라면 사람들 앞에서 한 소리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과거의 내가 아니다. 메가폰을 들고 동네를 누비고 다녔다. 그리고 진심으로 그들을 축복했다. 어느 후보자가 하듯 “기호 1번 김태원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이렇게 하지 않았다. 나는 한 집 한 집 가게 이름을 불러가며 축복했다. “김가게김밥 사장님, 축복합니다. 복 많이 받으세요.” “LA갈비 사장님, 축복합니다. 복 많이 받으세요.” 축복의 인사를 할수록 당선 여부를 떠나서 기쁨이 마음에 가득 찼다. 이것은 웃음의 효과이고 기적이었다.



웃음엔 화합하는 힘이 있다

나를 망하게 해? 개새끼, 죽여버릴 거야: 1957년에 경북 포항의 작은 농촌마을에서 태어난 나는 어려운 가정형편을 고려해 공업고등학교 야간부 전기과에 입학하여,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공부를 했다. 그리고 진학의 꿈을 가지고 대학의 문을 두드렸지만 등록금이 없어 진학을 포기하고 말았다. 하지만 배움에 목말랐던 나는 공군 하사관에 입대하여 방송통신대학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백령도 오지에서 근무하면서 학업을 마치지 못했다. 군 생활 중에 아내를 만나 결혼을 하고 6년 만에 제대하여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사회에 나온 나는 오로지 한 가지 생각만 했다. ‘돈을 벌자. 그래야 사람들이 못 배웠다고 무시하지 않을 거야.’ 그래서 미친 듯이 일을 했다. 고생한 만큼 결과는 있게 마련인지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돈을 벌었다. 회사도 몇 곳 운영하게 되었고, 경주에서 웬만큼 알아주는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IMF가 우리나라를 강타하면서 나 또한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어느 날, 선배가 부탁을 했다. 급전이 필요하니 공장 네 곳을 담보로 대출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확실히 나올 돈이라 나는 선뜻 빌려주었다. 하지만 그 선배는 도망을 갔고, 평생 모은 내 재산도 모두 날아갔다. 나에겐 인생의 전부를 잃은 것과 같았다. 인생을 포기하고 싶었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이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하고 길을 떠났다. 정처 없이 떠돌아다녔다. 그런데 세상을 다닐수록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들끓었다. 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돈이 사라지자 모두 떠났다. 그들은 나를 좋아한 것이 아니고 돈을 좋아했던 것이다. 나에게 돈이 신이었던 것처럼 그들에게는 돈이 신이었던 것이다.

모든 것이 사라졌음에도 오직 나를 믿어주고 응원해주는 사람은 아내뿐이었다. 내가 인생의 바닥에서 헤매고 있을 때 아내는 살기 위해 이 일 저 일을 하며 생계를 꾸렸다. 아내는 화장품 외판을 위해 길거리를 누비고 다녔고 저녁이면 반시체가 되어 돌아왔다. 그래도 나는 분노에 휩싸여 정신을 못 차렸다. 어느 날 아내의 허벅지에 시퍼렇게 든 멍을 보았다. 내 모양이 거지꼴이니 자신 있게 물어볼 수도 없었는데, 알고 보니 하루 종일 화장품 외판을 하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다니다 생긴 상처였다. 그날 저녁에 한없이 울었다. 후회했다. ‘니가 지금 뭐하고 있노? 사지가 멀쩡한 놈이 지금 뭐하고 있는 짓인고?’ 2년여의 힘든 방황 끝에 사회에 적응하기로 했다. ‘이게 인생이라면 한번 부딪쳐보자.’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첩첩산중 많은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장 어려운 것은 내가 나를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는 것이었다. 이미 나는 다른 사람들과 어울릴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나를 믿어주는 오직 한 사람, 아내가 없었다면 어찌 됐을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새로운 곳에서 새롭게 살기 위해 10년 전부터 알던 친구의 도움으로 대구에 정착했다. 다시 한 번 죽어라 일했다. 생활은 노력한 만큼 조금씩 나아졌다. 그렇게 과거는 묻혀갔다. 하지만 나를 힘들게 했던 선배만큼은 생각할수록 울화통이 터져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사회에 대한 원망까지 쏟아졌다. ‘썩을 놈의 사회구조, 썩을 놈의 인간들.’ 억울함과 분노를 한편에 두고 살다가 어느 날 우연히 인터넷에서 글을 보게 되었다. ‘이요셉의 인생을 바꾸는 웃음전략’ 반신반의하면서 아내와 함께 한국웃음연구소의 웃음세미나에 참석했다. 그 세미나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 선배를 용서할 수 있었다.

그전까지는 그 선배를 만나면 단숨에 베어버리겠다는 생각에 차에 늘 낫을 가지고 다녔었다. 그런데 세미나에서 그것만을 위해 살아가는 불쌍한 나를 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 부부는 행복이 뭔지 알게 되었다. 돈이 절대로 행복이 아니라는 사실까지. 짧은 시간이지만 인생을 새롭게 태어나게 만든 기적의 시간이었다.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우리보다 더 어렵고 분한 사람이 많다는 사실도 알았고, 건강한 몸을 가졌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축복할 일인지도 깨달았다. 사회에 대한 분노를 풀어내고 선배를 용서하자 평생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 할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후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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