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행복하세요?
신명진 지음 | 로크미디어
지금 행복하세요?
신명진 지음
로크미디어 / 2015년 3월 / 262쪽 / 12,800원
제1부 작은 아이 신명진
소금 기차에 흘려보낸 눈물
나는 소래포구에서 나고 자랐다. 5살이던 어느 날이었다. 집 앞에는 염전에서 생산된 소금을 운반하는 철길이 있었다. 이 동네 아이들에게 철길은 근사한 놀이터였고 내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날은 철길이 아닌 기차에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형들은 이미 기차 위로 올라가 중심을 잡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나도 기차의 외벽을 만지며 위로 올라갔다. 그 순간 기차가 덜컹 움직였다. 위에서 뛰놀던 아이들이 우르르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하지만 나는 그저 당황해 팔만 휘저었다. 그 순간의 선택이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기차에 매달려 있던 손이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미끄러졌고 나는 바퀴 밑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 기억이 기차놀이의 마지막이었다. 그렇게 소금 기차는 내 양다리와 오른손을 먹어버렸다.
두 번째 다리와 팔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아파서 울고, 그 참담함에 울고, 어머니 아버지의 절망이 전해져 올 때면 어린 마음에도 그것이 사무쳐 울었다. 어머니는 나를 업고 옥상에 올라가 하염없이 우는 날을 반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의 특별한 한마디가 우리 가족에게 변화를 불러 일으켰다. “새끼 하나 제대로 못 보고 병신을 만든 주제에 왜 이리 옥상에 올라가! 허구한 날 옥상에 올라가 죽을 생각만 하지 말고 우리가 명진이 손과 발이 될 생각을 해야지!”
그 후 손과 발이 되어주겠다는 아버지의 결심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의사는 열여덟 살이나 되어야 힘을 가지고 걸을 수 있을 거란 절망적인 대답만을 내뱉었지만, 아버지는 어차피 냉혹한 사회 속에 내던져져야 한다면 하루라도 빨리 내가 자립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그 후 아주 작은 희망이었지만 근력을 키운다면 의족을 통해 걸을 수 있다는 말을 믿고 부모님은 매일같이 재활 운동을 도왔다. 단 하루도 빼먹지 말라며 재활 운동을 할 때엔 누구보다 엄격하게 나를 감시했다.
상처가 된 지팡이
모진 재활훈련 결과 두 다리를 잃은 지 1년 7개월이 흐른 뒤에야 누구의 도움 없이 내가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지팡이에 의지해서 걸었지만. 밖을 나서서 걸을 수 있게 되자 어머니는 나를 유치원에 보냈고, 새로운 친구도 생겼다. 그러던 어느 날 자연 관찰을 테마로 논두렁으로 체험학습을 갔다. 논 주변에 살고 있는 동물들과 곤충들을 직접 살펴보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던 그때, 단체 사진을 찍기 위해 모두가 우르르 이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이들이 움직이는 쪽에는 나무토막들이 야트막하게 쌓여 있어 지팡이를 짚고 이동하기에도 어려운 일이 될 것만 같았다. 꽤나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선생님이 달려와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런데 그날 이후로 작은 변화가 생겨났다. 내가 선생님의 편애를 받았다고 생각한 탓인지 몇몇 아이들이 질투 어린 시선으로 나를 놀리기 시작한 것이다. 두 명의 친구들이 내가 지팡이를 짚고 걸어가는 모습을 흉내 냈다. 그날 이후로 유치원은 내게 즐거운 공간이 아닌 싸우고 이겨야 하는 공간이 되었다. 겨우 나를 일으켜 세워준 지팡이였지만 그 지팡이가 내게 상처가 되어가고 있었다. 참을 수 없는 모욕감, 녀석들에 대한 분노를 이기지 못해 나는 지팡이를 던져버렸다. 그리고 다시는 지팡이를 짚고 다니지 않기 위해 걷기 연습을 시작했다.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쉽게 의족에 의지해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지팡이에 의지하지 않고 걷고 있다. 어쩌면 그때 그렇게 자극을 받지 못했다면 평생 지팡이를 던져버릴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안락함을 포기하지 않으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 이것은 지금도 내게 강렬한 교훈으로 남아 있다.
자라지 않는 다리
어느 날 아버지가 자전거 한 대를 사오셨다. 소래에서 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움직일 일은 거의 없었다. 작업장이라고 해봐야 멀지 않은 곳이었고, 어머니는 자전거를 탈 줄도 몰랐기에 어머니를 위한 선물도 아니었다. “아빠, 갑자기 무슨 자전거야?” “아빠가 일하러 갈 때 쓰려고 그래.” 아버지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은 다음 날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학교에 가려고 일어났는데 아버지가 오늘은 태워다주겠다며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그날부터 아버지의 허리를 잡고 자전거로 등교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가 자전거에 앉아 계시는 게 아닌가. 어머니는 자전거를 못 타셨다. 그런데 그날은 자전거로 나를 등교시켜주시겠다며 자전거에 올라앉아 계셨던 것이다. “엄마, 언제부터 자전거 탈 수 있었어?” “너 태워다주려고 밤낮으로 연습했지.” 아들을 좀 더 편하게 등교시키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땅 위에 곤두박질치셨을 어머니를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88년 서울 패럴림픽
1988년은 88 서울 올림픽이 열린 해였다. 당시만 해도 올림픽 이후에 패럴림픽이 열린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패럴림픽 개회를 앞두었던 어느 날, 동사무소(지금의 주민센터)에서 개막식에 장애인들을 초청하기로 했는데, 내게도 참석을 해줄 것을 요청해왔다. 그래서 아버지와 함께 경기장에 갔다. 시간이 되자 개막식이 시작되었다. 그때였다. 독일 선수단이 입장하는 와중에 휠체어에 탄 한 선수의 모습이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는 사지가 절단된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며칠 뒤 9시 뉴스에서 나는 다시 그 선수를 만날 수 있었다.
그의 출전 종목은 수영이었다. ‘팔도 다리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수영을 할 수 있는 거지?’ 그것은 도전의 문제를 떠나 물리적으로 가능한 문제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몸을 앞으로 나아가게 할 아무런 활동 없이, 보조 없이 마치 물고기처럼 물속을 헤엄치는 그의 모습은 내게 장애가 단지 불편하고 특별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게 했다. 장애에 대한 새로운 각성을 하게 된 순간이었다.
소래의 아이들
몸을 움직이는 일이 불편했기 때문에 친구들과 어울리는 일에 어려움이 많지 않을까 어머니는 늘 걱정이 많으셨다. 하지만 그런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나는 친구들과 어울리는 일에 열성이었다. 물론 그건 내가 노는 일엔 빠지지 않으려 하는 천성이 개구쟁이였던 탓도 있다. 아무튼 고효범, 명창우, 김유용 이들 셋이 있으면 나는 잃어버린 팔과 다리를 얻은 듯 든든했다. 애석하게도 나의 친구 효범은 이제 세상에 없다. 언제까지고 내 곁에서 시답지 않은 농담을 들어주며 바보처럼 멍청이처럼 웃고 있을 것 같던 효범이. 함께하지 못한 많은 시간들이 여전히 애석하지만 소래를 누비며 우리가 나누었던 추억만으로도 너는 내게 충분하다고, 충분히 멋지고 훌륭한 녀석이었다고 전하고 싶다.
제2부 어설픈 열정으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아
친구가 없어
중학교에 진학할 무렵이 되자 교육청에서는 장애가 있는 나를 배려해 선택권을 주겠다며 먼저 연락을 취해왔다. 매년 우리 학교에서는 만수중학교로 진학하는 학생의 비율이 80%를 넘겼기 때문에 부모님의 결정은 당연히 만수중학교였다. 하지만 나는 좀 더 멀더라도, 또 친구들이 많이 없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야구를 좀 더 자주 접할 수 있는 학교로 진학하고 싶었다. 그러나 부모님의 뜻은 강경했다. 결국 부모님의 뜻을 따르기로 결정하고 만수중학교로 진학이 확정되었다. 매년 많은 졸업생이 만수중학교로 배정받았는데, 어쩐 일인지 그 해엔 단 한 명의 학생, 그러니까 나 혼자만 그곳으로 배정을 되었다. 이제부터는 가방을 들어주던 효범이도 자잘한 심부름부터 손발이 되어주던 창우나 유용이도 없이 무엇이든 혼자 해내야 했다.
몸도 성치 않은 애
그날은 모의고사를 보는 날이었다. 점심시간이 되어 시험 이야기를 하며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앞쪽에서 밥을 먹던 친구들이 서로 투닥거리기 시작했다. 늘 일어나는 일이라 신경 쓰지 않으려 했는데, 그만 녀석들이 먹던 라면 국물이 내게로 날아들었다. 날벼락이었다. 불쾌해진 내가 먼저 거칠게 녀석들을 나무라며 불쾌감을 표시했다. 그들이 사과할 줄 알았지만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녀석들 중 한 명이 내게 그대로 달려들며 주먹을 뻗었다. 서로 뒤엉켜 싸움을 벌였다.
초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덩치로 맞설 수 있었지만 더 이상 덩치로 싸움을 이길 수가 없었다. 결국 지켜보던 친구들 중 누군가가 선생님에게 달려갔고, 그제야 아이들은 우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분했다. 누가 봐도 내가 졌다. 사내 녀석 둘이 엉켜 싸우는 일은 흔한 일이지만, 아무래도 내가 장애인이다 보니 선생님은 일방적으로 약자를 괴롭힌 양 녀석을 나무라셨다. “넌 왜 몸도 성치 않은 애랑 다투냐?” 그러시곤 몽둥이로 녀석을 흠씬 두들기며 혼을 내셨다. 하지만 나는 녀석이 맞는 몽둥이질보다 더 큰 비애를 느껴야 했다. ‘몸도 성치 않은 애’. 선생님이 내뱉은 그 단어가 머릿속을 헤집었다.
어디까지나 나의 자격지심이었지만 그때엔 싸워서 졌다는 사실 못지않게, 나를 또래의 사내아이가 아닌, 보호하고 그렇기에 차별해야 하는 약자로 취급하는 선생님이 괜히 미웠다. 그때부터 나는 더 이상 싸우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설사 내가 싸워서 이긴다고 해도 그건 승리가 아닌 상대의 배려일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결국 그 뒤로는 결코 싸움에 휘말리지 않게 되었다.
실업계는 안 됩니다
중학교 3학년이 되었다. 나는 실업계를 가겠다고 말했다. 선생님은 당황스럽다는 표정이었다. 선생님은 아무래도 장애를 가진 사람에겐 선택의 폭이 넓지 않기 때문에 차라리 공부에 뜻을 두고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하신 듯하였다. 그러나 나는 계속해서 의족을 바꾸어야 하는 경제적인 부담을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고, 어쩌면 실업계로 진학해 그런 고민을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또 어릴 적에 배워둔 주산 실력을 살려 금융권으로 취직하겠다는 나름의 계획도 있었다. 선생님은 한번 생각해보겠다며 우선 실업계 학교에서 날 받아줄 수 있는지 문의하겠다고 했다. 며칠이 지났고 선생님은 어머니를 학교로 호출하셨다. 분명 내 진학 문제일 것이라 직감했다. 내 바람과 달리 결국 실업계 진학은 불가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결국 나는 야구부가 강세를 떨치던 인천고교로의 진학을 결심했고, 인천고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장애인으로 사는 게 쉬울 줄 알아?
인문계 고교로 진학했지만 여전히 공부는 관심 밖의 일이었고, 2학년이 되어서도 공부에 대한 열의는 좀처럼 생겨나지 않았다. 걱정이 되신 아버지가 친구의 딸이 개인 교습을 할 수 있도록 해주셨는데, 내겐 모든 일이 성가시고 귀찮게만 느껴졌다. 누나도 마지못해 수업에 나오는 형국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누나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을 해야 하지 않겠니? 하다못해 너한테 맞는 직업이 뭐일지라도 고민해봐야 하잖아. 누나가 너라면 장애에 비교적 제약이 없는 공무원 같은 걸 생각해보겠어. 생각해봐. 그리고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다. 앞으로 안 올 거야. 네 수업은 맡기 싫다, 이제.” 쌀쌀맞고 냉철한 조언이긴 했지만 그 시절 베짱이처럼 허송세월을 하던 내게 누나는 그 누구보다 솔직하고 현실적인 조언을 해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장애를 가지고 살아갈 사회는 분명 만만치 않을 텐데. 도대체 어째서 나는 그토록 안일하게 생각해왔을까. 그날 이후로 무엇을 하고 살고 싶은지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대학에 대한 열의도 불타올랐고, 진로 가이드를 보던 중 공무원과 관련 있는 대학 전공 중 행정학과라는 곳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남은 1년을 준비해보자는 생각으로 행정학과를 목표로 공부를 시작했다.
캠퍼스의 낭만, 사과대 그녀와 함께!
시험은 그야말로 망쳐버렸지만, 우여곡절 끝에 대구에 있는 작은 대학 행정학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 부모님은 크게 기뻐하셨다. 문제는 내가 집을 벗어나 홀로 생활해본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예상대로 기숙사 생활은 처음부터 만만치 않았다. 처음 식사를 하러 식당에 내려갔을 때 식판을 들고 어쩔 줄 몰랐다. 식판을 들고 밥을 담은 뒤 먼
저 자리 잡고 있던 형들 쪽으로 다가갔다. 다행히 형들도 별다른 거부감 없이 나를 반겨주었다. 그렇게 적응을 시작했다.
내 눈까지는 가져가지 못해!
어느 날인가부터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지만 큰 질병이라고는 의심하지 못했다. 하지만 검사를 하던 의사는 심각한 얼굴로 당장 수술 일정을 잡아야 한다고 했다. 내가 태연히 일정을 미루자 의사는 답답하다는 듯이 다그쳤다. 병명은 망막박리로 지금 망막이 떨어져 나가고 있다고 했다. 검사를 받으러 왔다가 입원을 하고 수술 날짜를 조율하고 있으려니 어안이 벙벙해졌다. 부모님은 내가 병원에 입원해 수술을 해야 한다는 소식을 듣고 또다시 혼비백산하여 나를 찾아오셨다.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수술은 무려 8시간이나 이어졌다고 한다. 수술은 잘되었지만 의사의 말과는 달리 시력은 회복되지 않았다. 수술이 잘되면 예전의 시력이 회복될 줄 알았는데 그저 망막이 떨어지지 않고, 더 위험한 상황에 처하지 않게 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흥미로운 이야길 하나 더 할까 한다. 나는 또다시 같은 병으로 수술대 위에 누웠다. 남은 눈마저 망막박리 증상을 보여 수술을 해야 했던 것이다. 연속된 나의 불행이 정말이지 믿어지지 않았지만 놀라운 것은 그쯤 되니 더 이상 불행이 깊게 느껴지지 않았다. 절망이 정말로 찾아왔을 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내 모습을 혐오하기도 했다. 그러나 모두 내 손을 떠난 일이었다. 내가 얼마나 성실하든, 내가 나의 불행을 떨쳐내기 위해 얼마나 발버둥을 치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불행은 그렇게 관용을 베푸는 녀석이 아니다. 그래서 이젠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오히려 주어진 것들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왼손 하나로 뭘 할 수 있지?
3학년이 되면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본래 행정학과에 진학한 이유도 공무원이 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으니까 자연스러운 행보였다. 하지만 첫 시도는 보기 좋게 낙방. 실패였다. 4학년이 되어서도 시험은 좀처럼 합격이라는 명예를 안겨주지 않았다.
제3부 실패 속에서 살아가기
장애인이라서가 아니야 / 나의 첫 번째 도전, 운전면허!
졸업을 하고 결국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 수십 번 이력서를 쓰고, 또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내가 취직이 되지 못하는 것이 모두 내 장애 탓으로만 여겨졌다. 당연히 그렇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생각해보면 과연 내가 장애인이라서 차별 당했던 것일까? 물론 없지 않아 그런 이유가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내 실패의 원인은 좀 더 본질적인 데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내가 문제였다. 내 장애가 문제가 아니라 나라는 사람이 어디에서 빛을 발할 수 있는 사람인지, 어떤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열심히 한다면 어떻게 열심히 할 수 있는지를 조금도 고민하거나 심각하게 생각해본 일조차 없었으니까. 말하자면 나는 전투 장비도 갖추지 않고 그저 대학 졸업장만을 들고 취업 시장에 뛰어든 것이었다. 그래서 취업이 어렵다면 사소한 성취부터 해보자고 결심하고, 운전면허에 도전하기로 했다. 그 길로 면허 학원을 찾아갔다. 하지만 학원의 태도는 냉담하기만 했다.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이제는 익숙한 일이었다. 그런데 시험용 차량은 있지만 연습은 안 된다고 했다. 시험을 볼 수 있는 차량이 있다는 답변에 귀가 솔깃해졌다. 곧장 필기 응시를 접수했다. 운이 좋았던 모양인지 필기시험은 무난하게 합격하였다. 하지만 문제는 다음이었다. 장내 코스를 봐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나를 가르칠 차량이 없다는 답변만이 돌아왔다.
결국 수소문한 끝에 국립장애인 재활원에서 장애인들을 위한 운전면허 교육을 한다고 하여, 약 5일 동안 1시간씩의 교육을 이수했다. 강사들은 시험 날짜가 되어서도 여전히 내 실력이 부족하다며 큰 기대를 하지 말라고만 했다. 나 역시 마음을 비우고 시험에 응했다. 그래서였을까.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시험에 합격했다. 하지만 여전히 주행 코스 시험이 남아 있었다. 갈등하고 있을 무렵 주행은 교육기관이 아닌 면허증 소지자에게 받아도 된다고 했다. 결국 내 몸에 맞는 차량을 섭외해 10시간의 주행 수업을 받았고, 결국 주행 시험을 통과해 면허를 땄다. 나에게는 면허를 땄다는 기쁨보다, 걸림돌이 많은 내가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해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가슴 벅차도록 기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