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산책
최종옥 지음 | 책이있는마을
지혜산책
최종옥 지음
책이있는마을 / 2015년 2월 / 360쪽 / 15,000원
함께 가니 아름답지 아니한가 - 상생
진정한 성공이란: 『커쇼의 어라이즈』
지난달 19일(한국시간) 류현진의 소속팀인 LA다저스는 콜로라도 로키스와의 경기에서 8-0의 승리를 거뒀다. 이 경기에서 LA다저스의 특급 좌완투수 클레이튼 커쇼는 콜로라도 타선을 상대로 15탈삼진을 기록하며 무피안타 무사사구 무실점을 기록하며 노히트노런의 대기록을 달성했다. 그가 노히트노런을 기록하자 류현진은 손뼉을 치며 축하해줬다. 팀 동료인 라미네스의 실책으로 퍼펙트 게임을 놓쳤지만 커쇼는 오히려 라미네스를 위로해주는 훌륭한 인성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그의 더욱 위대한 점은 오로지 자신의 성공과 꿈을 달성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20대의 나이에 아내와 함께 봉사활동을 지속해오고 있다는 것이다. 많은 선수들이 시즌 후 달콤한 휴가를 즐기거나 다음 시즌을 준비하는 동안 그는 매년 아내와 함께 잠비아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휴가를 즐기고 자기관리를 한다. 1988년생으로 올해 나이 26세에 불과한 커쇼가 자신의 직업과 인생에서 이처럼 가치 있는 삶을 사는 모습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중학교 3학년 시절 TV에서 오프라 윈프리 쇼를 보는데 유독 내 시선을 끄는 장면이 있었다. 아프리카를 찾아간 오프라 윈프리의 모습이었다. 극심한 가난으로 기아에 허덕이는 아프리카 아이들을 오프라 윈프리가 무릎을 꿇고 포옹하는 장면이었다. 그때 나는 심장이 멎을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아프리카의 절박한 상황에 비해 나는 정말 안전한 곳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꼈다. 그 순간 내 안에서 뭔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을 돕고 싶다는 열망을 내게 심어 주셨던 것이다. 그날 내 마음속에서는 번쩍하는 불빛이 일어났고, 그 불빛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그 후 고등학교 클래스메이트인 엘런과 결혼했다. 아내 엘런과 함께 잠비아 땅을 밟은 지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엘런은 냥가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집에 있을 때는 벌레 한 마리도 못 잡던 엘런이 갑자기 지저분한 슬럼가도 마치 자기 집 드나들듯 아무렇지도 않게 활보했다. 내가 엘런과 함께 잠비아를 방문한 목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고아들을 위한 일일 캠프를 여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잠비아 그린힐 학교에 아이들을 위한 교실을 짓는 일이었다. 나는 아이들 한 명 한 명에게 글러브를 끼는 방법과 사용법을 가르쳐 주었다. 아이들의 흥분된 표정을 보면서 내가 얼마나 야구를 사랑하는지 다시금 떠올렸다. 나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이용해서 이 아이들과 소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엘런이 아프리카 고아들을 위해 헌신하는 동안 나는 아이들에게 야구를 가르쳤다. 엘런의 열정과 나의 열정이 합쳐지면서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그날 하나님은 우리 두 사람이 평생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힌트를 주셨다. 우리는 ‘어라이즈 아프리카(Arise Africa)’라는 복음 단체와 손잡고 <커쇼의 도전(Kershaw’s Challenge)>이라는 잠비아 고아 후원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내가 시즌 중에 삼진을 하나 잡을 때마다 프로그램에 후원금이 적립된다. 앞으로 고아들에게 집과 쉼터가 되어 줄 수 있는 고아원을 설립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다. 고맙게도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노력에 동참해주었다. 아프리카에 도움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널리 퍼지고, 거기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벅차오른다. 엘런과 나는 지금 아프리카를 향한 큰 꿈을 공유하고 있다.
사실 커쇼가 봤던 오프라 윈프리 쇼를 수많은 사람들이 보았고 그런 비슷한 장면들을 우리 모두 여러 번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이 연민을 느끼는 것에 그치고 오로지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평생의 꿈으로 발전시킨다. 나보다 인생을 반밖에 살지 않은 젊은이의 원대한 꿈과 열정을 보면서 나의 지나온 삶을 되돌아본다. 나 역시 한때는 그러한 꿈을 가졌던 적이 있다. 그러나 당장 눈앞의 삶에 쫓겨 바쁘다는 핑계로 그 꿈을 잊고 살아왔다. 그저 교회에 정기적으로 헌금하는 것만으로 그 꿈을 대신하는 것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서 진정한 성공 그리고 정말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누군가를 도움으로써 용기와 희망을 주고 또한 그것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야말로 그러한 삶이 아닐까? 진정한 크리스천으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 커쇼는 겸손하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나를 지켜보는데 그들에게 신앙을 대놓고 전할 수는 없습니다. 그저 크리스천이 어떻게 사는가를 보여주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자신의 삶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커쇼와 같은 사람들은 이 메마른 세상에 단비를 뿌려주는 레인메이커(rain maker)이다. 해가 쨍쨍 내리쬐는 더운 여름날 쏟아지는 한줄기 시원한 소나기처럼, 계속되는 가뭄으로 타들어가는 대지를 적셔 생명을 소생시키는 비처럼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존재다. 커쇼의 삶을 통해 보다 많은 레인메이커들이 이 땅에 탄생하기를 기대해본다.
행복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 - 행복
나이가 든다는 것은 쇠퇴가 아니라 진보다:『행복의 조건』
그동안 동네에서 자주 뵙던 할아버지 한 분이 어느 때부터인가 잘 보이지 않아 궁금했다. 마침 그분의 아내인 할머니를 길에서 만나 “할아버지를 요새 통 뵙지 못했는데 혹시 어디 편찮으신가요?” 하고 물었다. 그러자 할머니는 “아니에요” 하고 힘없이 대답하며 표정이 굳어졌다. 그로부터 얼마 후 산책길에 만난 옆집 아저씨가 내게 다가오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507호 할아버지가 여자가 생겨 집을 나가서는 할머니를 상대로 이혼소송을 했다네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점잖았던 할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르며 요즘 우리 사회에 황혼이혼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는 보도가 피부에 와 닿았다. 물론 옆집 아저씨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그 노부부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만에 하나 그것이 사실이라면 수십 년을 함께해온 부부로서의 삶이 너무도 허망한 것 아닌가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일부 전문가들은 최근 황혼이혼이 증가하는 이유를 “평균수명이 연장되면서 보다 행복하고 건강한 노후를 보내기 위해 과거와는 달리 적극적인 태도를 갖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수십 년 동안 동고동락해온 배우자와 이혼을 하면 정말 더 행복하고 건강한 노후를 보낼 수 있을까? ‘100세 시대’로 불리는 오늘날 행복하고 건강하게 그리고 품위 있게 늙어간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 같다. 어떻게 하면 추하지 않고 멋있게 나이 들어갈 수 있을까. 하버드 의대 교수인 조지 베일런트는 그의 저서 『행복의 조건』을 통해 이러한 물음에 답하고 있다.
노년의 행복하고 건강한 삶은 사회적 성공이 아니라 50세 이전까지의 인간관계와 습관, 정신과 신체 건강에 의해 좌우된다. 일찍이 성인의 발달과정을 연구해온 사회과학자 에릭 에릭슨은 ‘성인의 발달은 쇠퇴가 아니라 진보’라고 말한 바 있다. 다시 말해 50세 이후의 삶은 아래쪽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바깥으로 뻗어나가는 길이며, 그것은 사회적 지평의 확장이다. 결국 성인의 성장발달은 30세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삶이 멈출 때까지 진행되는 과정이다. 성공적인 삶을 위해서는 삶의 불연속성에 효과적으로 대처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다음의 다섯 가지 요소가 중요하다. 첫 번째는 긍정적인 정신 건강, 두 번째는 성숙한 방어기제, 세 번째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는 사랑이다. 그리고 네 번째는 성인이 평생 계속해서 변화하며 성장한다는 교훈이며, 다섯 번째는 인간이 잘했던 일보다는 잘못된 일에 의해 더 많은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이 중 두 번째 요소인 ‘성숙한 방어기제’는 인간의 행복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성숙한 방어기제는 정신적인 회복탄력성이자 고난에 대응하는 긍정적인 정서이다. 성숙한 방어기제는 이타주의, 유머, 승화, 억제 등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타주의는 다른 사람이 바라는 것을 베푸는 미덕으로 즐거움을 느끼는 과정이고, 유머는 지나치게 심각하지 않은 태도로서 고통을 웃음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이며, 승화는 갈등과 역경을 예술적 창조로 해소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억제는 밝은 면을 봄으로써 인내하는 과정을 뜻한다. 이러한 성숙한 방어기제를 적용하면 불행했던 과거와 절망적인 중년기를 보냈더라도 노년에 이르러 풍요로운 인간관계를 유지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다.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사랑이다. 행복은 사랑을 통해서만 온다. 더 이상은 없다. 사랑은 인간의 삶에서 기쁨과 성공을 안겨주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며, 인생의 후반기에 잃어버린 사랑을 회복하는 것이 남은 인생을 행복하게 하는 요인이다. 행복한 노년을 위해서는 정신 건강과 신체 건강이 모두 필요하다. 자신과 자신의 인간관계를 돌보면서 사랑이 빈곤하지 않은 사람이 노년까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이다.
나 역시 최근 들어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결코 쇠퇴가 아니라 진보이자 성숙하는 것이며 나아가 지경을 넓혀 나가는 것이기에 ‘결코 추하게 늙지 말아야지, 품위 있게 나이 들어가야지’ 하고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15년 가까이 회사를 운영해오고 있는 지금 뒤돌아보면 젊었을 때는 어떻게든지 수익을 내고 돈을 버는 것이 삶의 주된 목적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젊은이들을 한 사람이라도 더 채용하여 그들이 가진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돕고, 또한 협력업체를 비롯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기회를 제공했을 때 돈으로는 따질 수 없는 뿌듯함을 느낀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또한 성공이란 무엇인가? 심리상담가이자 정신과의사인 스캇 펙은 “사랑이란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정신적 성장을 도와줄 목적으로 자신을 확대하려는 의지”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리더십 전문가인 존 맥스웰은 “성공이란 인생의 목적을 깨닫고, 최대의 잠재력을 발휘해 성장하며, 다른 사람에게 유익한 씨앗을 뿌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진정한 사랑과 성공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기나긴 인생을 살다 보면 때로는 걱정과 근심으로 불면의 밤을 지새우기도 하고 울컥하는 마음에 분통을 터트릴 때도 있다. 그러나 모든 게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고 했다. 사랑과 성공에 대한 위 두 사람의 정의를 마음에 담고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고난을 성숙을 위한 연단의 과정으로 생각하며 모든 사람들을 사랑으로 대한다면 우리는 훨씬 더 건강하고 행복하게 그리고 품위 있게 나이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세상을 떠날 때 자신이 잘한 일보다는 잘못한 일을 더 많이 생각한다고 한다. 세상을 떠나는 날 회한을 남기지 않도록 잘 살아가야겠다.
근본적 오류의 공리(公理) - 소통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기업문화: 『아웃라이어』
최근 대한항공의 ‘땅콩 회항’ 사건을 두고 사건의 당사자인 조현아 부사장과 대한항공을 성토하는 목소리가 높다. 물론 이 사건의 발단인 조현아 부사장의 행동은 어떤 설명으로도 이해하기 어렵고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이 사건을 단순히 감정적으로 대응하기보다는 냉철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 사건에 등장하는 인물은 3명이다. 땅콩을 봉지째 서비스한 승무원을 지적하고 기장에게 회항하라고 지시한 조현아 부사장, 상사인 부사장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한 기장, 그리고 리턴한 비행기에서 내린 사무장. 언론과 대다수 사람들은 이 세 명 중 가장 비난을 받아야 할 사람으로 조현아 부사장을 지목하고 ‘갑질’, ‘재벌 3세의 무분별한 횡포’ 등을 운운하며 강하게 질타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가장 비난받아야 할 사람은 바로 기장이 아닐까 싶다. 더 나아가 이러한 사태는 근본적으로 대한항공을 비롯한 소위 대기업의 경직된 기업문화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국토부 운항기술 기준’ 및 항공법에 따르면 기장은 비행기 문이 닫힌 시점부터 탑승 중인 모든 승무원, 승객 또는 화물의 안전에 대한 책임을 갖는다고 명시되어 있다. 그렇다면 기장은 부사장이 아니라 세상 그 누가 어떤 명령을 하더라도 자신의 판단에 따라 최대한 승객의 안전과 편의를 위해 행동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장은 정말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부사장의 지시에 따라 이륙을 위해 활주로로 향하던 항공기를 되돌려 램프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결과는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그렇다면 기장은 왜 조부사장의 지시에 대해 강력하게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상명하복이 철칙처럼 여겨지고 있는 대기업의 기업문화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말콤 글래드웰은 그의 저서 『아웃라이어』에서 1997년 탑승객 288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한항공 801편의 괌 추락 사건의 원인이 ‘경직된 커뮤니케이션 문화’와 ‘상사의 기분을 해치지 않으려는 완곡어법과 태도’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권력 간격 지수’는 특정 문화가 위계질서와 권위를 얼마나 존중하는지 나타내는데 대한항공 801편의 사고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비행기 기체에 이상이 있음을 발견한 부기장이 이를 기장에게 제대로 알리지 못해 어이없게 사고가 났던 것이다. 부기장이 상사인 기장에게 명확하게 ‘노(No)’라고 말했어야 하는 상황에서 부기장은 권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이를 기장에게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던 것이다.
기업문화가 이처럼 경직되게 된 책임은 과연 누구에게 있을까. 물론 가장 큰 책임은 기업의 최고경영자에게 있다. 조직 전체에 자유로운 의견 개진과 원활한 소통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최고경영자가 열린 마음을 갖고 그러한 문화가 정착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기업의 구성원들 또한 자신이 맡은 분야에 대한 책임감과 정확한 업무 지식을 토대로 자신의 의견을 기탄없이 펼쳐야 한다. 설령 상사가 잘못된 판단을 내릴 경우 사표를 쓰는 한이 있더라도 잘못을 지적해야 한다. 물론 몇 번 이야기해봤지만 무시되거나 불만분자로 낙인이 찍혀 이런저런 불이익을 당한 경험이 있다 보니 자연스레 입을 닫고 상사의 말에 무조건 수긍하고, 지시에 복종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상사들 중에는 자신의 결정에 대해 아랫사람이 무조건 ‘Yes’ 하기보다는 솔직하게 의견을 말해주기를 기대하는 사람들도 많다.
나 역시 15년 전 대한항공에 근무한 적이 있다. 당시 우리 부서에서 추진하고 있던 프로젝트에 대해 부서장과 담당 임원이 조양호 회장의 결재를 받기 위해 회장실에 올라갔다. 잠시 후 회장 비서실에서 나를 호출했다. 올라가 보니 담당 임원과 부장의 보고를 받은 회장이 역정을 내며 프로젝트 관련 상대 파트너가 제시한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으니 당장 파트너를 교체하라고 소리쳤다. 회장의 역정에 담당 임원과 부장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묵묵부답이었다. 당시 차장이었던 나 또한, 회사생활 12년 만에 처음으로 회장 앞에서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하니 속으로 무척 떨렸다. 하지만 차분하게 앞뒤 상황을 설명하고 지금 파트너를 바꾸면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에 대해 지적했다. 회장은 잠시 생각하더니 그러면 원래대로 진행하라고 말하며 담당 임원에게 그런 사정을 왜 사전에 이야기하지 않았냐고 질책했다.
사실 직장생활에서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상사 또는 오너 일가의 지시에 대해 입바른 소리를 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예로부터 기개 있는 선비들은 목숨을 걸고 왕에게 충언과 직언을 아끼지 않았고, 그들의 이름은 오랫동안 우리의 사표(師表)로 기억되고 있다. 가정이지만 만일 조부사장의 회항 지시를 받은 기장이 이는 항공법을 위반하는 행위임을 조부사장에게 주지시키고 절대로 지시에 따를 수 없다고 했다면 결과가 어떻게 됐을까? 아마도 항공기는 예정대로 이륙해 제시간에 인천공항에 도착했을 것이고, 언론의 주목을 받을 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이로 인해 해당 기장은 부사장의 지시를 이행하지 않았다고 하여 징계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기장은 적어도 기장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책임을 다했다는 긍지를 가질 수 있을 것이고, 진정한 기장으로서 동료들에게 기억되고 자녀들에게도 자랑스러운 아빠가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 조부사장은 당시 기장이 기장으로서 책임을 다해 자신을 말려주지 않은 것을 못내 아쉬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신의 지시를 거역한 기장에 대해 조부사장은 그 자리에서는 화를 냈겠지만 한국에 돌아와서는 기장에게 징계 대신 오히려 고마워했을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