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징비록
이재운 지음 | 책이있는마을
소설 징비록
이재운 지음
책이있는마을 / 2015년 2월 / 384쪽 / 13,800원
전쟁의 시작
1591년 8월 5일, 풍신수길의 외아들 학송(쓰루마쓰)이 죽었다. 아들의 장례를 마친 풍신수길은 전국의 성주, 도주들에게 소집령을 내렸다. 8월 중순, 오사카성으로 휘하의 모든 영주들이 몰려들었다.“천하를 통일하기 위해 조선과 명에 출정코자 한다. 내가 직접 조선에 들어가 명나라의 심장을 단숨에 끊어버리겠다. 전쟁이 끝나면 명과 조선의 땅덩어리를 뚝뚝 떼서 여러 성주들에게 나누어 주고자 한다. 그리고 서쪽에 사는 일본 백성들은 조선으로 이주시키고, 동쪽에 사는 사람들을 서쪽으로 옮겨 이제부턴 넓게 살도록 해 주지. 조명일(朝明日) 세 나라가 일본이라는 한 나라로 통합되는 거야.”그리고 풍신수길은 조선에 출정할 것을 구체적으로 선포했다.
“조선은 겨울이 추운 나라다. 그러므로 명년 봄, 일제히 부산으로 상륙하여 여름이면 요동, 가을이면 북경까지 점령해야 한다. 준비에 차질 없도록 만전을 기하라.”풍신수길은 작전 본부를 나고야로 정하고, 10월부터 대규모 축성 작업을 명령했다. 군비 마련을 위해 금화, 은화를 주조하고, 48만 명분의 전투 식량을 비축했다. 군사 30만을 징발하고 이 가운데 16만을 선발대로 삼아 조선 침공군으로 정했다.
임진년의 봄
풍신수길이 조선 정벌을 꿈꾸던 그 무렵 조선은 무기력하게 임진년을 맞았다. 1592년 1월 1일 임진년 새해. 양력으로는 2월 13일이다. 임금 선조는 근정전에서 문무백관의 신년 하례를 받느라 떠들썩했다. 대신들은 임진년 한 해도 태평성대가 될 것이라면서 두루 덕담을 늘어놓았고 왕은 태평성대를 자화자찬했다.“과인이 보위에 오른 뒤 나라는 더욱 평안해지고 백성들은 살기 좋아졌소.”
그러다 보니 이 무렵에는 전쟁의 ‘전’ 자만 꺼내도 불충한 사람으로 몰렸다. 전쟁을 걱정하는 말을 한마디라도 꺼내는 사람은 겁쟁이, 졸장부, 반역자다. 같은 날, 일본 교토의 취락제에서 전국 제후들의 신년 하례를 받은 풍신수길은 전쟁 날짜를 처음으로 못 박았다.“3월 1일, 조선으로 진격한다.”
조선으로 상륙하는 전투병은 15만 8천여 명, 그러고도 나고야에 예비군 8만 8천 명을 남겨 두기로 했다. 거기에 후방 경비 병력 1만 2천 명, 수군 9천 명도 편성했다.
이 무렵 한양성은 한창 전쟁 준비 중인 나고야와는 완전히 딴 세상처럼 돌아갔다. 그러나 전쟁의 조짐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조정이라고 이러한 분위기를 전혀 모르지는 않았다. 4월이 되기 전까지 조선이 취한 조치는 꽤 여러 가지였다. 좌의정 유성룡이 나서서 가리포 첨사로 있던 이순신을 전라 좌수사로 옮기게 하고, 하삼도, 즉 경상 감사·전라 감사·충청 감사 세 명을 교체하여 성을 수축하고 군기를 다스리게 했다. 또 여진족을 물리치는 데 명성이 높은 북방의 장수 신립과 이일, 두 사람을 불러 내려 하삼도를 감찰하게 했다. 하지만 왜구를 과소평가해 무기 점검도 건성건성 하고, 둔전과 둔전병 숫자도 대충 훑어보고 말았다.
불길 오르는 봉수대
1592년 4월 17일.
“박 주서는 얼른 봉화나 살피고 오게.”
도승지 이항복은 승정원 관리들을 야단치면서 오늘 새로 올라온 장계와 상소문을 챙겨 들었다. 평화 시에도 봉홧불 한 개는 꼭 올려서 국경이 무사태평하다는 사실을 알려야 하므로 매일매일 확인해서 기록을 남겨야 했다. 잠시 후 박 주서가 헐레벌떡 승정원으로 뛰어 들어왔다.“횃불이 두 개입니다.”
“어느 쪽이냐?”
“동남방입니다.”
“그러면 부산인데, 왜구가 또 나타난 건가? 이놈들이 그새 콩이 떨어졌나?”
도승지 이항복이 승정원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응? 세 개잖아? 세 개면 벌써 국경에 들어왔다는 건데?”
도승지는 허겁지겁 문서를 한 다발 들고 임금이 시무를 보는 보평청으로 뛰었다. 그런데 박 주서가 또 뒤따라오면서 외쳤다.“횃불이 네 개로 늘어났습니다.”
“뭐야? 그럼 다 쳐들어왔다는 거야?”
도승지는 보평청으로 뛰어 들어갔다.
후궁인 인빈과 자리에 누웠던 임금 선조가 한참 만에야 헛기침을 하면서 방에서 나왔다. 도승지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남산을 쳐다보았다. 봉수대에서는 횃불이 하나 더 늘어 다섯 개가 되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전쟁이다!”
도승지의 외마디 소리에 왕도 헐레벌떡 마루를 뛰어 내려와 남산 봉수대를 바라보았다.
“걱정 마라! 왜구 몇 마리가 배가 고파 밥 훔쳐 먹으러 왔을 거다.”
“전하! 그래도 왜구 몇 마리 가지고 봉화를 다섯 개나 올리겠습니까? 다섯 개 다 오르는 것은 생전(이때 이항복 나이 37세) 처음 봅니다.”“나도(당시 41세) 처음이야. 봉화가 올라가니 참 장관이군. 꼭 불꽃놀이 하는 것 같아. 인빈, 나와서 저것 좀 구경해! 200년 만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구경거리야.”모두들 넋을 잃고 활활 타오르는 봉화를 바라보았다. 도성 내의 대신들이며 백성들까지도 무슨 불꽃놀이라도 하는 줄 알고 손에 손을 잡고 몰려다녔다.
도승지는 일단 승정원으로 가서 사태를 더 지켜보기로 했다. 병조에서는 급히 기병을 불러 남산 봉수대로 가 사실인지 확인하도록 했고, 봉수에 이어 파발마를 타고 날아올 장계를 기다리기로 했다. 장계가 올라온 것은 이튿날 점심 무렵이었다. 도승지가 점심을 먹고 있는데, 승지 하나가 병조 판서 홍여순을 대동하고 식당으로 뛰어 들어왔다.“도승지, 참말 전쟁이오! 이거 큰일 났소!”
도승지는 숟가락을 던져 놓고 얼른 장계를 받아 쥐고 냅다 뛰다가 뒤를 돌아다보면서 소리쳤다.“병판 대감, 제가 전하를 찾아 모실 터이니 영상에게 전해서 비변사 당상들을 긴급 소집해 주시오. 병조에서는 전군에 비상령을 내려 주시고요.” 병조 판서가 신경질적으로 내뱉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빌어먹을, 비상령을 내릴 군대가 있어야 말이지.”
도승지 이항복이 경상 좌수사 박홍이 보낸 장계를 읽어 올리자 왕은 주섬주섬 옷을 주워 입으며 곧 만춘전으로 나갈 테니 대기하라고만 했다. 도승지는 하는 수 없이 만춘전으로 발길을 돌렸다. 국가비상사태라고 하여 병조에서 보낸 하인들이 부리나케 급보를 전했지만 비변사 당상들은 한참이 지나서야 뭉그적거리며 나타났다.비변사는 독립 기구가 아닌 전시 때 자동 구성되는 임시 기구인 만큼 다른 직에 있는 대신들이 겸직을 하는 성격이다. 이 중 도제조, 제조, 부제조를 비변사 당상이라고 하여 군무를 총괄하는 최고 위원 노릇을 했는데, 이날 소집된 회의에는 이들이 거의 참석했다. 왕은 미시가 다 되어서야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타났다.“전쟁은 무슨 전쟁이겠소? 대마도 왜구들, 올해 치 쌀하고 콩은 받아 갔다오?”
대신들은 또 벌 떼처럼 웅웅거렸다.
“옳지! 쌀이 적다고 시위하는 거군요?”
“쌀 좀 더 얻어 가자고 군대 2만 3천 명(장계에 적힌 일본군 제1군 병력, 곧 소서행장 휘하 군이다)이 떼를 지어 와? 이건 전쟁이야! 뭘 좀 알고 떠들어!”상황이 급반전한 것은 왕이 또다시 인빈을 만나러 돌아가고 난 뒤 동래 부사 송상현의 피 묻은 장계가 날아들면서부터였다.
- 신 동래 부사 송상현, 급박한 전황을 아뢰나이다. 부산 첨사 정발과 휘하 군사는 이미 전멸하고, 다대포 첨사 윤흥신이 적과 싸우다 전사했습니다. 신은 죽음으로써 적을 막겠으니 부디 근왕군을 일으켜 이 왜군을 무찔러 주십시오. 신 송상현, 이제 전하가 계신 북녘을 향해 마지막 절을 드리면서 최후까지 싸우겠나이다.
송상현의 장계 한 장으로 비변사 회의장의 분위기는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듯 숙연해졌다. 더구나 송상현의 명을 받들어 이 장계를 가지고 적의 포위망을 뚫고 나온 군사는 동래성이 함락되는 광경을 목도했다는 말까지 전했다. 도제조 이산해는 그제야 팔을 걷어붙이고 대책을 세웠다. 이 순간에도 남쪽에서는 목숨을 건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일본군 제1군의 공격으로 부산진과 동래성이 무너진 뒤에는 전투랄 것도 없었다. 소서행장과 대마도주 종의지가 이끄는 제1군이 승승장구하는 사이 4월 18일에는 가등청정이 이끄는 제2군 2만 2천여 병력이 부산에 상륙하고, 흑전장정이 이끄는 제3군 1만 1천여 병력이 다대포를 거쳐 김해에 상륙했다. 왜란 발발 5일째, 선조를 비롯하여 만춘전에 모인 비변사 당상들, 즉 조정 대신들은 시시각각으로 들이닥치는 장계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부산진, 서평포, 다대포, 동래부, 김해부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앞다투어 올라왔기 때문이다.국왕이라면 백성의 재산과 목숨을 지킬 의무를 져야 하건만 왕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수수방관했다. 왜적이 몰려온다는 급보가 빗발쳤지만 그저 변방의 소동으로밖에 인식하지 않았다. 순변사 이일이 오죽하면 왕궁이 있는 한양성에서 군사 3백 명도 모으지 못했을까. 막상 전쟁이 나니 병부(兵簿)는 가짜이고, 무기고는 텅 비어 있었다.
불타는 한양성
4월 23일,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한 지 겨우 열흘이 지났지만 적의 기세는 파죽지세였다.
“자, 순변사 이일 장군이 한양을 떠나셨다니 그분이 내려올 때까지는 아무도 꼼짝하지 말고 기다리기만 하시오.”경상 감사 김수다. 결국 싸우지 말자는 얘기다.
하나하나가 군사 지휘관인 감사, 군수, 부사, 현감들이 거느리고 있는 군사가 불과 몇십 명밖에 되지 않는다. 게다가 순변사가 되어 경상도와 전라도와 충청도 삼도의 육군과 수군을 총괄하는 인수를 차고 내려온 이일은 직함만 거창하지 그의 수하 군사라고는 겨우 2백 명에 불과했다. 24일, 대구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일은 상주에 머물러 일전을 치르기로 결심했다. 휘하 병력 2백 명, 상주 목사 김해는 산으로 도망쳤고, 대신 판관 권길이 빈 성을 지키고 있었다. 이일은 곳간을 열어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며 군사로 삼았다. 굶어 죽으나 싸우다 죽으나, 배고픈 백성들로서는 선택할 수단조차 없었다.“군사가 되면 밥은 굶지 않는다.”
그 한마디에 칼 한번 써보지 못하고, 활 한번 당겨보지 못한 사람 수백 명이 군졸을 자원했다. 이일은 한양서부터 끌고 내려온 군사와 현지 백성을 합쳐 8백여 명가량을 데리고 군사 훈련을 시작했다. 그러니 이일의 부대가 이긴다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다.이날 밤, 생전 처음 해 본 군사 훈련에 지쳐 떨어진 군사들 앞으로 일본군 선봉이 밀어닥쳤다. 멋모르고 칼을 들었던 백성들은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졌다. 이들은 따뜻한 밥 한 끼를 목숨과 바꿨다.이일의 후퇴 명령을 받고 군사들은 산으로 들로 달아났다. 일본군은 이일을 향해 집중 사격했다. 이일은 갑옷을 벗고 겨우 농부의 옷을 구해 입고 허겁지겁 전장을 벗어났다. 겨우 사지를 빠져나온 이일에게 경상 감사 김수의 사위 박호가 뒤따라와 함께 죽자고 보챘다.“순변사님, 우리가 그토록 기다렸던 순변사님은 적의 척후병조차 막지 못하여 아까운 우리 군사들이 전멸했습니다. 쌀밥이라도 얻어먹을까 하여 몰려든 백성들만 졸지에 죽이셨습니다. 순변사님 책임입니다. 차라리 저하고 자진하십시다.”“뭐라고? 적을 하나라도 베고 죽어야지 이대로 자진할 수는 없다. 어서 신립 장군이 계신 곳으로 가자.”이일의 패전 소식이 한양성에 전해지자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명장 이일이 패할 정도면 조선 땅에서는 그들을 막아낼 장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살아남은 장수며 군사들은 최후로 도순변사 신립이 있는 충주로 모여들었다.
4월 26일, 신립이 충주에 도착했다. 도순변사 신립, 순변사 이일이 연합한 조선군은 충주 탄금대에 최후의 방어선을 쳤다. 충주 목사 이종장은 기마군 8천 명을 집결시켜 놓고 있었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신립이 한양에서 데리고 온 군사도 없거니와 경상도 각지에서 흩어진 군사들은 하나도 모이는 자가 없었다.
4월 28일 정오, 비가 내리는 가운데 소서행장 휘하의 1만 5천 명이 욱일승천기를 휘날리며 들판에 나타났다. 신립은 탄금대를 뒤로하고 벌판을 마주 보며 배수진을 쳤다. 8천 명 전원이 말에 올라 적이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공격!”
신립의 공격 명령에 따라 조선 기마군은 적진을 향해 돌격했다.
일본군은 멀리서부터 조선군을 향해 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조총 소리를 처음 들어본 군마들이 놀라 울부짖고, 비에 젖어 질척한 땅 때문에 말이 잘 달리지 못했다. 결국 신립, 김여물 등 조선의 맹장들이 이 한 판 전투에 모두 목숨을 잃었고 충주는 함락되었다.
왕은 충주에서 신립마저 패전했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몽진을 거론했다. 그러나 영중추부사 김귀영은 대신들과 함께 눈알을 부라리며 한양을 사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침내 왕은 삼정승과 고관들만 강녕전으로 불러들였다. 거기서 노골적으로 몽진을 거론했다. 영의정 이산해가 먼저 동의했다.“솔직히 말하자면 적을 막을 도리가 없습니다. 일단 물러나 길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이어서 이항복이 나섰다.
“전하, 일단 평양으로 물러나 사세를 지켜보되, 먼저 명나라에 구원군을 청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틀렸습니다. 한양을 털어도 군사라고는 겨우 몇천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나마 훈련이 되지 않은 오합지졸들입니다.”30일 새벽, 몽진을 반대하는 대신들의 눈을 피해 왕은 마침내 돈의문을 통해 한양을 빠져나갔다. 왕과 조정이 떠난 궁궐에는 성난 백성들이 난입하기 시작했다. 노비, 백정 같은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몰려와 여기저기 불을 지르고 창고 문을 열어 보았다. 그들은 특히 장예원 문서를 다 끌어내 불을 질러 버렸다. 노비문서를 태우기 위해서다. 이렇게 하여 한양성은 일본군이 들어오기도 전에 제 나라 백성들에게 함락되고 말았다.
경복궁 만춘전. 조선 국왕이 정사를 보는 정전이다. 마땅히 선조가 앉아 있어야 할 자리에 일본군의 총사령관인 청년장수 우희다수가가 앉아 있다.“우리 집 족보를 보면 내 조상은 백제인이라더군. 지금으로부터 천 년 전, 야수 같은 신라군과 당군이 신성한 백제 땅을 유린할 때 우리 선조들은 한을 품고 열도로 피신했어. 나라가 망한다는 건 참 슬픈 일이야.”스무 살밖에 안 된 우희다수가는 나이가 지긋한 휘하 장수들 앞에서 거드름을 피웠다.
“그런데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조선 놈들은 왜 항복을 하는 자가 없는지…… 왜 마지막 한 놈까지 죄다 덤비다가 다 죽느냐…… 정말 이런 전쟁은 처음 봅니다.”소서행장이 무심코 던진 이 말에 연석은 찬물을 끼얹은 듯 갑자기 조용해졌다. 다들 동감하는 말이다. 그랬다. 일본 같으면 장수가 잡히거나 성이 함락되면 그것으로 전쟁이 끝난다. 더 이상의 살육도 없고, 패잔병들은 완벽하게 엎드렸다. 여자들은 얌전하게 끌려와 알아서 오비를 풀고 기모노를 벗었다. 반항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데 조선은 다르다. 일본군을 맞는 조선의 대응은 두 가지다. 아녀자, 노비, 기생, 젖먹이까지 창을 꼬나들고 덤비다가 완전히 몰살당하거나, 아니면 기르던 강아지까지 챙겨 모조리 도망치는 것이다. 지금까지 항복하는 사람은 한 명도 보지 못했다. 부산진 첨사 정발 이하 마지막까지 싸우다 반은 죽고 반은 포로가 되었다. 동래성도 그랬다. 특히 장수들은 끝까지 싸우다 죽었다. 서생포, 다대포도 그랬다. 일반 군사들까지 목숨 걸고 대들었다. 아니면 죄다 불을 지르고 소, 염소, 개까지 끌고 도망쳤다. 그러다 보니 후군으로 들어온 우희다수가는 조선인 얼굴을 본 적도 드물다. 그저 푸르른 조선 강산을 유람하듯이 지나쳐 왔을 뿐이다.또 있다. 관리들이나 병사들은 그렇다 쳐도 늙은이, 어린이, 여자, 노비들은 또 뭔가. 일본 같으면 여자나 하인들은 싸움을 지켜보다가 남편이나 주인이 죽으면 이긴 쪽 장수한테 붙어서 살면 그만이다. 아무도 나무라는 사람이 없고 갈등도 없다. 슬플 것도 없고 창피할 것도 없고, 그냥 다들 그렇게 하는 천년 전통일 뿐이다. 그런데 조선은 아니다. 하다못해 첩이라 해도 그 원수를 갚기 위해 무슨 짓이든 다 한다. 동래 부사 송상현의 첩 김섬은 눈에 불을 켜고 일본군에 달려들다가 죽었다. 부산성의 기생들은 기왓장을 깨어 집어던졌다. 걷기도 힘든 노인들조차 돌을 나르고, 화살을 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