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가까워지면 이별이 가까워진다
이록 지음 | 스마트비즈니스
사랑이 가까워지면 이별이 가까워진다
이록 지음
스마트비즈니스 / 2013년 5월 / 206쪽 / 12,000원
가까운 사랑, 먼 이별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답다
무지개나 별이나 벼랑에 피는 꽃이나
멀리 있는 것은
손에 닿을 수 없는 까닭에
아름답다
사랑하는 사람아,
이별을 서러워하지 마라
내 나이의 이별이란
헤어지는 일이 아니라 단지
멀어지는 일이다
시, ‘원시遠視’에서 - 오세영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곁에는 매일매일 따라다니는 그림자가 있었습니다. 그림자는 항상 곁에서 친구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는 그림자에게 잘해 주었고, 그림자는 말없이 그의 곁을 지켰습니다.
어느 날 질투 많은 바람이 그의 곁을 지나며 말했습니다. “왜 그림자에게 잘해 주세요?” “그림자는 항상 내 곁에 있어 주기 때문이지.” 그 사람이 대답하자, 바람은 시큰둥하게 말했습니다. “핏, 아니에요. 그림자는 당신이 기쁘고 밝은 날에만 잘 보이지, 어둡고 추울 때는 당신 곁에 있지 않았다고요.”
생각해 보니 그가 힘들고, 슬프고, 어두울 때에 그림자는 항상 보이지 않았던 거예요. 그 사람은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 그림자에게 말했습니다. “더 이상 내 곁에 있지 말고 가 버려!” 그 한마디에 그림자는 조용히 사라졌습니다. 그 후로 그는 바람과 함께 즐겁게 지냈습니다. 그것도 잠시, 바람은 그저 그에게 스쳐갈 뿐이었습니다. 혼자가 되어 버린 그는 다시 그림자를 그리워하게 되었습니다.
멀리 있어야 아름다움을 깨닫습니다. 이별한 후에야 소중함을 깨닫는 것이지요. “그림자야, 어디 있니? 다시 와 줄 순 없을까?”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어디선가 그림자는 조용히 다가와 그의 곁에 있어 주었습니다.
그림자가 말했습니다. “난 항상 당신 곁에 있었답니다. 다만 어두울 때는 당신이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왜냐고요? 힘들고 슬프고 어두울 때는 난 당신에게 가까이, 더 가까이 다가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너무나 가까이 있어서 당신이 볼 수 없었나 봐요.”
우리는 힘이 들 때 누군가가 자신의 곁에 있다는 것을 잊고 삽니다. 세상에 혼자 남겨져 있다는 생각 속에서 아픔은 배가되지요. 손에 닿을 수 없이 멀리 있는 것들은 모두 한때 내 몸 속에 스미도록 가까웠던 것들입니다. 무지개 같은 사랑도, 별처럼 빛나던 희망도, 벼랑에 피는 꽃처럼 아찔했던 젊은 날의 방황도. 기억하세요. 혼자가 아니란 것을. 너무나 가까이 있어서 보이지 않을 뿐이란 것을.
그대를 기대와 바꾸지 않기 위하여
그대 향한 내 기대가 높으면 높을수록
그 기대보다 더 큰 돌덩이 매달아 놓습니다
부질없는 내 기대 높이가 그대보다 높아서는 아니 되겠기에
내 기대 높이가 자라는 쪽으로
커다란 돌덩이 매달아 놓습니다
그대를 기대와 바꾸지 않기 위해서
기대 따라 행여 그대 잃지 않기 위해서
시, ‘사랑법 첫째’에서 - 고정희
시를 잘 쓰기 위해서 박제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두보의 시를 표본으로 삼은 사람은 시를 잘 쓰지 못하고, 원나라나 명나라의 시를 배우는 사람들은 시를 잘 쓴다.” 이상하지요. 시성(詩聖)이라고 불리는 두보의 시를 읽고 공부한 사람이 시를 잘 쓰지 못한다니요?
그 뜻은 이렇습니다. 시성이라고 불리는 두보의 시를 읽고 공부하는 사람은 다른 시는 거들떠보지 않는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원나라나 명나라의 시로 공부하는 사람들은 그 부족함을 알고, 여러 사람의 시를 읽어, 더욱 넓게 시를 알 수 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두보의 가치를 새삼 확인하는 것은 말할 나위 없고요. 남이 만들어 놓은 좁은 세계에 안주하지 않고 스스로의 세계를 넓히려는 의지, 그것이 박제가가 말하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사랑을 공부하고 익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랑은 공부하고 익히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터득하는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지요. 그러나 사랑이 자연스럽게 터득되는 것이라면, 왜 많은 사람들이 사랑에 실패하고 괴로워할까요? 왜 밉다고 너무 아프다고 가슴을 칠까요? 분명, 사랑하는 일은 시를 쓰거나 밥벌이를 위한 노동보다 더 귀하고 어렵습니다.
사랑은 어떻게 단련될까요? 부질없는 기대가 높으면 높을수록 사랑은 어려워진다는 것이 해답입니다. 사랑하면 기대하게 되고 기대가 높을수록 상대를 그 기대와 비교하게 됩니다. 어느 순간 높아진 기대 때문에 사랑이 상처를 입게 되지요.
자주 꺾이고, 자주 실패하고, 자주 절망하는 외로운 말들 속에 사랑과 기대가 앞자리에 놓이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꿈과 희망이 먼 훗날에 이루어진다면, 기대는 바로 눈앞의 현실입니다. 서로의 감정이 더 가까이 있다는 것이지요. 부질없이 기대하지 않기 위해 작은 기대를 귀하게 여기고 키워야지요. 작은 기대는 꿈과 희망의 씨앗이기 때문입니다.
기대라는 작은 씨앗이 자주 상처받고 발아가 되기 전에 숨을 눌러 버린다면 꿈과 희망은 없습니다. 거기에 해답이 있습니다. 작은 기대 하나 저버린다고 사랑까지야 무너지겠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말더듬이 소년이 부르는 노래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시, ‘얼굴’에서 - 박인환
벙어리 소녀가 있었습니다. 내 어린 시절 유일한 친구입니다. 항상 술에 취해 사람들 속에 섞이지 못한 아버지와 강가에 오두막집을 짓고 살았습니다. 말더듬이였던 나는 친구들의 따돌림에 항상 외톨이였고요. 삐비꽃 하얀 속살이나 뽑아 먹으며 할 일 없이 긴 강둑길을 걷는 것이 나의 하루였습니다.
봄, 강 물결은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물비늘에 햇살이 미끄럼 타면 강변의 들풀과 물새들이 눈부신 햇살 속에서 파닥였습니다. 그 눈부신 강변의 풍경 속에 소녀가 있었습니다. 아 아니, 아름다운 소녀가 있었습니다.
벙어리 소녀가 ‘너 참 귀엽다’라는 표정으로 하늘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키면 솜털 구름이 나의 귀여운 얼굴이 되었고요. 내가 ‘바-바람이 시-시원해’라고 하면 바람이 우리의 머리를 쓸어 주었습니다. 소녀는 강변의 모래에 꿈속에 보았던 천사를 그리기도 하고, 나는 서투르게 ‘ㄴ-너가 ㅊ-처-천사야’ 수줍게 말하며 얼굴을 붉히었습니다.
소녀에게 주고 싶어 꽃을 꺾으려고 하면 소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아픈 시늉을 합니다. 말 못하는 것들의 언어를 소녀는 온몸으로 알고 있었던 거지요. 나도 소녀의 언어를 배우고 싶어서 아 아니, 말 못하여 슬프고 아름다운 것들의 사랑을 배우고 싶어 소녀의 눈길과 손길을 따라 하기 시작했습니다. 소녀는 먼 하늘을 쳐다보거나 하늘을 비치고 있는 강물을 오래도록 바라보았습니다. 소녀의 눈빛이 하늘과 강물 빛을 닮은 이유를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소녀와 함께 있는 시간에는 나는 더 이상 말더듬이가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서툰 언어와 함께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가 화음을 이루어 노래가 되었습니다. 그 노래를 타고 햇살이 곱게 흩날리고요. 강변의 잔돌과 풀잎들이 얼굴을 비비며 서로 외롭지 말라고 다독입니다. 그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며, 세상을 빛나게 하는 아름다움은 스스로가 배경이 되어 더 빛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말더듬이가 더 이상 부끄러움이 아님을 가르쳐준 소녀가 어느 날 훌쩍 제 곁을 떠났습니다. 거짓말처럼 하룻밤 만에 오두막집은 비어 있었습니다. 술에 취한 아버지를 부축하며 언 강을 건너오다, 그만 얼음이 깨져 버렸던 것이지요. 살려달라는 벙어리 소녀의 비명은 그냥 거센 바람소리였고 강물소리였습니다.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끝내 손을 놓지 않았던 소녀는 그 깊은 강물 속으로 가라앉았고요.
그 슬픈 광경을 지켜보던 강변의 작고 아름다운 것들은 말없이 속울음만 삼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 이후 나는 쉽게 늙었고 더 이상 말더듬이 소년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눈을 가진 것은 물고기라고 합니다. 울음소리가 없기에 세상에서 가장 슬픈 눈을 가졌다고 합니다. 물고기를 볼 때마다 그 소녀가 생각납니다. 지금도 뜻 모르게 슬퍼지는 날들이 많고, 뜻 모르게 속울음 우는 날들이 많습니다. 슬픈 것들은 그 속 깊은 곳에 울음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동그랗게 동그랗게 맴돌다 가는 얼굴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준다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가운 비碑ㅅ돌을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태양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 청년화가 L을 위하여
시, ‘해바라기의 비명’ 全文 - 함형수
몇 해 전, 여수에 있는 향일암에 갔었습니다. 향일암에 오르기 위해서는 가파른 산길을 올라 집채만 한 바위 두 개 사이로 난 바위굴을 지나야 합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바위굴을 지나고 나서야 만나는 향일암의 절경은 가슴을 먹먹하게 하지요.
향일암의 꼭대기는 거북의 등처럼 무늬가 새겨 있는 돌거북들이 유난히 많습니다. 바다를 향해 있는 거북들은 모두 소원성취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해를 바라본다는 향일암의 뜻처럼 태양을 바라보며 그 많은 돌거북들은 무얼 그리 간절히 바라는 걸까요?
그 돌거북에서 조금 떨어진 바위틈에서 우연히 조그마한 깡통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깡통은 많이 부식되었지만, 그 속에는 아직 읽을 수 있는 편지 한 장이 들어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때 많이 하던 10년 후의 ‘자신에게 편지 쓰기’는 아닌 것 같고 분명, 어떤 연인들이 사랑의 마음을 편지로 남겨 둔 것 같았습니다.
이름 모를 연인들이 남겨 놓은 사랑의 맹세가 나를 충분히 슬프게 했습니다. 나는 그때 사랑에 지쳐 있었고, 상처 입은 짐승은 언젠가는 꼭 다른 짐승에게 상처를 준다는 말을 머릿속에 심어 놓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사랑한다는 것은 상처받는 것을 허락한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사랑으로 상처받은 사람은 꼭 다시 다른 이에게 사랑으로 상처를 줍니다. 젊은 날의 사랑이 얼마나 은혜로운지 깨우치는 것은 먼 훗날입니다. ‘내 사랑 피카소’를 쓴 피카소의 젊은 날의 연인도 이런 말로 피카소를 회상했었지요.
“처음 피카소가 그림 공부를 위해 파리로 왔을 때 그는 젊었고, 열정적이었으며, 가난하였다. 그가 유명해지면서 나를 떠났지만, 그 후 많은 여인들이 피카소의 곁에 있었지만, 그들은 젊은 날의 피카소를 알지 못하리라. 그들이 나보다 피카소의 사랑을 더 많이 받았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젊고, 가난하고, 열정적이었던 젊은 날의 피카소는 나 외에는 아무도 기억할 수 없으리라.”
남도 끝자락에 있는 향일암이라는 조그마한 암자의 바위틈에서 발견한 어떤 연인들의 편지에는 상처가 없었습니다. 상처받지 않는 연인들의 맹세가 태양같이 태양같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준다는 말을 믿습니다.
뒤늦은 연애편지
사랑은 기다리는 게 아니라
한 발자국씩 찾으러 떠나는 거라고
그 뜨거운 연애편지에는 지금도 쓰여 있다네
시, ‘연애편지’에서 - 안도현
술에 흠뻑 취해도 아침이면 거뜬히 일어나던, 무모해 보이더라도 불꽃처럼 도전하던, 첫눈 내리는 날 만나자는 약속 때문에 달음질치던, 이제 그런 날들은 다시는 안 오겠지요. 그 젊은 날을 보내고 조금은 늙은, 조금은 철이 든 사내가 작은 용기를 내어 그대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사랑한다는 고백을 하지 못하는 것보다 그대가 내 사랑을 알지 못하는 것이 더 괴로운 일인 줄 알기에 이제야, 용기를 냅니다.
우리의 화음은 항상 엇갈렸지요. 내가 ‘라’를 노래하면 그대는 ‘도’입니다. 내가 다시 ‘도’를 부르면 그대는 ‘미’입니다. 언제나 우리의 어울림은 슬픈 단조의 화음이었습니다. 같이 어울리면서도 똑같은 음을 노래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유리창에 찍히는 눈발처럼 점점이 찍힌 우리의 음계는 사랑이었을까? 언제나 그대와의 입맞춤은 눈송이를 먹는 듯 차가웠지요. ‘사라지듯 사라지듯’ 우리 사랑의 리듬은 모렌도입니다.
겨울보다 빠르게 스쳐간 사람, 눈송이보다 빠르게 사라져 버린 노래. 내가 그대에게 사랑을 노래하면, 그대의 노래는 언제나 이별입니다. 차마 적을 수 없는 악보였습니다. 언제나 입술을 깨무는 건 나였지만 괴로운 것은 그대였지요. 짐짓 괴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그대의 마음속으로 한 번도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대에게 버림받았습니다. 참 잘된 거라고 비둘기 떼들 박수를 치며 하늘을 날았지요.
그대가 나를 깨끗이 잊은 후에야 알았습니다. 내가 그대에게 해 줄 수 있었던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즈넉한 일요일 오후, 세숫대야에 따뜻한 물을 받아 그대의 발을 씻어 주고 싶고, 봉숭아 끝물이 남아 있는 손톱을 깎아 주고 싶습니다. 제 다리 위에 그대의 얼굴을 올려놓고 귓밥도 파 주고 싶습니다. 햇살이 깔깔대며 ‘보기 좋네요’ 웃고 바람이 ‘토돗’ 노크하고 갈 것입니다.
몇 번의 사산(死産)한 씨앗을 버린 가을이 이악하게 빛날 때, 제 입술에서 뿌려진 말은 “다시 한 번 너를 사랑하고 싶다.”는 것이었지요.
내가 그대에게 해 줄 수 있었던 것은 눈길을 잡아끄는 화려한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빛나는 열매가 아니었습니다. 그대가 나라는 생각, 그렇게 쉬운 것이었지요.
ㅅ ㄹ ㅎ ㅇ
그리고 곧 날이 저물었다
처음 세상에 온 별 하나가
그 날 밤 가득 내 눈썹 한 끝에
어린 꽃나무를 데려다 주었다
날마다 그 꽃나무들 위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시, ‘첫사랑’에서 - 류근
없던 술버릇이 하나씩 생길 때마다 갈 수 없는 술집이 늘어나는 시인이 있었습니다. 갈 수 없는 술집이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시인은 슬펐고, 슬플수록 술을 푸는 날들이 많아졌지요. 시인이 ‘중경삼림’의 걸음걸이로 허공에 큰 선을 그으며 넘어지면 사람들은 모두 도덕주의자가 된 듯, 따가운 시선을 던졌습니다. 사람들은 시인을 볼 때마다 불현듯 ‘도덕’이라는 단어가 떠올려지나 봅니다.
지금이야 가난했던 날들을 이기고 건실한 실업가로 성공한 그지만,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시를 핑계로 인생을 형편없이 산다는 말을 자주 들었던 시인입니다. 가끔 가난했던 날들의 최고의 술안주였던 계란부침이 먹고 싶다고 불쑥 찾아오는 날들이 많지만, 지금의 그가 있었던 것은 그를 믿고 지켜 주던 한결같은 믿음, 첫사랑 때문입니다.
그를 키웠던 전부를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꼭,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혹여, 술집에 아는 사람이 없나 기웃거리던 초라한 시인의 이야기입니다.
늦은 가을날이었습니다. 친하게 지내 오던 그와 술 한잔하였습니다. 그와 친하게 지낼 수 있었던 이유는 그와 나와의 유일한 동질성 때문이었지요. 약한 자가 갖는 싸우지 못하는 선량한 자존심이 그와 나와의 유일한 무기였습니다.
얼근히 취한 시인이 탁자에 물건 하나를 툭, 던졌습니다. 귀가 닳은 오래된 통장이었습니다. 통장에는 1~2만 원 정도의 적은 돈들이, 일주일이나 열흘에 한 번씩 입금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입금인의 이름이었습니다. 입금인 난에는 일곱 글자가 채 넘지 않는 글들이 돈을 입금할 때마다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입금인 난의 글자들을 순서대로 읽으면 하나의 편지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