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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소재원 지음 | 마레
그날



소재원 지음

마레 / 2014년 10월 / 304쪽 / 12,000원





순정



봄은 언제 왔는지 모를 만큼 빠르게 시간의 공간을 지나쳐 갔다. 사람들이 여름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 가운데 소록도는 아직 봄을 보내지 못하고 있었다. 차가 병원 앞에 멈춰 서자 유소영 기자는 차에서 내렸다. 병원의 어두운 분위기와 다르게 꽃향기가 그녀의 코를 자극했다. 어두운 분위기의 병원 건물과는 전연 어울리지 않는 천연각색의 꽃이 사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병원이 바다 바로 앞에 자리 잡고 있어서 한눈에 소록도의 전경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세상에!”라는 감탄사가 절로 터져 나왔다. 병원 안으로 들어선 그녀는 접수실로 향했다.“512호 서수철 할아버지 모시러 왔어요.”

잠시 후 간호사가 512호의 문을 열었다. 유소영의 눈에 더운 날씨에도 긴 양복과 장갑, 중절모를 깊게 눌러쓴 서수철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간호사가 그에게 부산을 떨었다.“할아버지, 오늘 멋지시네! 나들이 간다고 쫙 빼입었네. 참 인터뷰도 한다고 그랬나?”

유소영은 서수철과 함께 병원 현관을 나와 따뜻한 햇살이 있는 곳으로 나왔다. 그제야 그녀의 눈이 그의 손으로 향했다. “할아버지 손에 들려 있는 거, 편지 뭉치예요?”

“그래요, 편지요. 내 그 사람 만나면 주려고 하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 나이 올해 아흔둘이요. 국립소록도병원은 1916년에 지어졌고 자혜병원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소. 소록도는 어린 사슴이라는 뜻이요. 내가 들어왔을 때가 1941년이었지. 열아홉 살 때였소.”“할아버지, 여긴 어떻게 오시게 된 거예요?”

“내 열여덟 살 때였소. 일본놈들이 온 동네 그릇들을 다 빼앗아 가서 총알을 만들었었소. 그때 내 아비가 쇠그릇을 내놓지 않았었지. 사람 죽이는 총알 만드는 데 내줄 수 없다고 말이오. 그래서 순사에게 끌려가서 호되게 매질을 당했고. 나는 징병을 당했고.”

***



혼례를 두 달 앞둔 서수철은 순사에게 두들겨 맞아 골병이 든 아버지를 두고 징병을 당했다. 풍년이면 온 동네가 기뻐하고 흉년이면 조금씩 나누는 평온한 고장이었다. 그곳에서 아버지 친구 오씨 집안의 둘째 딸 순덕과 혼례를 약속했다. 어린 시절부터 서로를 유별나게 챙겼던 걸 아는 두 집안의 아버지는 천생연분이라며 혼례를 축복하고 기다렸다. 순덕이 어려서부터 몸이 약한 것을 알고 서수철은 일찌감치 의원이 되기로 마음먹었다.“내 그 뒤로 의원의 길을 걸었소. 그 사람을 위해서 말이오.”

“원래 어린 시절 꿈은 뭐였나요?”

“순정이란 말 아오?”

“알죠.”

“나는 그때 그 사람의 남편이 되는 게 꿈이었지. 주렁주렁 자식들도 낳고 오순도순 살아가는 모습이 내 꿈이었소. 그리고 그때는 순정이 존재했소. 순.정.”

***



한편 유소영의 남편 한기준은 경기도 광주에 위치한 나눔의 집에 도착했다.

“오순덕 할머니를 모셔 가기로 한 한기준입니다.”

사무실 바로 옆에는 지은 지 꽤 되어 보이는 벽돌집이 서 있었다. 아홉 명 남짓, 오갈 곳 없는 ‘위안부’ 할머니들이 살고 있는 보금자리였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현관으로 들어가자 소파에 앉아 있는 할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직감적으로 오순덕 할머니임을 알 수 있었다.“할머니, 안녕하세요. 한기준 기자입니다.”

“그분, 건강하오? 소록도에서 다친 곳은 없소? 내 한센병에 걸렸다는 건 오래전에 알았는디 손가락이 아예 없는 거요? 다리는 멀쩡하오?”“제 아내가 지금 모시러 갔는데, 지금도 정정하시다고 해요. 지팡이 없이도 걸으실 수 있고…”“그분 손은 어찌 됐소? 손가락은 남아 있소? 그분의 편지를 받아봤는데 필체가 불편해 보여 늘 궁금했소.”한기준은 침묵했다. 아내에게 들은 바로는 왼쪽 손의 반지손가락과 새끼만 남아 있다고 했다.

***



오순덕이 열다섯이 되던 해 서수철이 청혼을 했다.

“순덕아, 내 이제 열여덟이다. 의원이 됐고 다른 건 몰라도 네 몸에 대해서는 다 알아냈다. 열이 많은 너인지라 그렇게 아픈 것이다. 다른 환자들에게는 그저 그런 동네 약방 의원이겠지만 너에게만큼은 명의라고 불려도 될 만큼 공부했다. 이제 혼인을 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다른 거 바라는 것 없다. 내가 이제 네 몸을 고칠 수 있으니 그저 오래오래 살아서 한집에서 한솥밥 먹으면서 살아 보자. 그 이외에는 내 절대 바라지 않을 것이다. 내 너에게 순정을 바칠 것이다.”그의 말이 그녀에게 최면을 걸었나 보다. 아득한 정신이 서슴없이 소리를 내게 만들었다.

“오라비, 내 모든 순정을 오라비를 위해 바치겄소.”

사랑한다는, 영원히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거대한 의미의 단어, 바로 순정이었다. 적어도, 그들에게는 그랬다.

***



“그런데 할머니, 70년이 넘는 시간이잖아요. 떨어져서 계신 지… 그런데도 보고 싶으세요?”“암만, 보고 싶지.”

“어떻게 사나 궁금해서 그러시는 건가요?”

“순정이요. 그분에게 난 순정을 바쳤소. 비록 몸은 군인들에게 더럽혀졌지만, 내 마음만은 그분에게 모든 걸 바쳤소. 내 모든 순정을 가져간 분이시오. 내 그래서 살았소. 그분을 만나야 내 죽을 수 있소. 그래서 악착같이 살 수밖에 없었소. 나를 내치더라도 용서를 빌어야 했고. 내 순정을 가진 분이시니. 사랑은 서로의 마음의 떨림이 하나가 되지만 순정은 영혼의 떨림이 하나가 되는 순간이오.”



이별



“할아버지, 그런데 어떻게 한센병에 걸리신 건가요?”

“징병을 당한 뒤 만주에서 서양 놈들과 밤낮으로 총칼을 들고 싸웠지. 싸우기 싫어도 싸워야 했어. 전진하지 않으면 일본놈들의 총이 가차 없이 우리를 쏘아 버렸응게. 전진하면 그나마 살 확률이 백에 하나는 됐지만, 멈춰 있으면 그대로 머리통에 총알이 박혀 버렸으니께. 죽어라 뛰었지. 그러다 서양 놈의 총에 팔을 맞았는디 그게 화근이었던 거여. 스스로 살점을 도려내 총알을 빼냈는디, 아마도 그때 몹쓸 균이 들어갔던가 봐. 차라리 그때 죽었어야 했어. 죽어버려서 이 몹쓸 병을 끝내야 했당게.”

***



아홉 달이 넘어가면서 한쪽 살점이 검붉게 변하기 시작했다. 1년이 지날 무렵 그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절망을 온몸으로 받아 내야 했다. 의원이라 그는 곧 자신의 병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의 병을 알게 된, 계급이 가장 높은 군인이 그를 향해 사격 신호를 내리려는 순간 의무실에서 의사가 뛰쳐나와 일본군을 저지했다. “안 돼요! 피가 튀거나 하면 위험해요! 전염성이 강하니 쏘지 마시오.”

의사의 말을 들은 군인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총부리를 거뒀다.

“다행히도 소록도라는 곳에 조선총독부가 문둥이들을 가둬 놓는 시설을 만들었소. 이곳에 있으면 전염이 될 수 있으니 빨리 그곳으로 보내야만 하오.”

***



한기준은 오순덕 할머니와 함께 현관을 나섰다. 정면에 ‘못다 핀 꽃’이라는 이름의 소녀상이 눈에 들어왔다. 소녀상 아래로 억울한 삶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던 할머니들의 동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루에 수십 명을 상대했어. 어떤 날은 서른 명이 넘는 사내들의 땀내를 맡았으니까. 아래가 헐고 아파도 치료할 수 없었지. 그래도 한 놈이라도 대충 넘어가면 안 됐어. 그랬다가는 당장 모가지가 날아가니까. 끌려오자마자 죽은 아이도 있었어. 아이가 보내달라고 하자 일본놈이 큰 칼을 빼어들고 가차 없이 베어 버렸어. 그놈들은 몸에서 떨어져 나간 아이의 목을 주워들고 낄낄댔어.”그녀가 설움을 목 안으로 넘기며 눈물을 보였다. 그녀의 눈물은 슬픔이 아니었다. 증오, 원망, 서러움을 포함한 절망 그 자체였다. “나는 살아야만 했어. 그분을 보려면 죽을 수 없었어. 해서 매일매일 찾아오는 사내놈들을 빠짐없이 만족시켜야 했어. 더럽혀지더라도 그리 죽을 수 없었어. 비겁하지만 수치스럽지만, 그래도 나는 살.아.야.만.했.어.”

***



서수철이 강제로 징병을 당한 뒤 그녀는 그가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천지신명께 빌고 또 빌었다. 그가 떠난 지 석 달째 되던 날 동네 이장이 그녀의 집으로 찾아와 아버지와 술잔을 나누며 치성을 마치고 돌아오는 그녀에게 말했다.“돈만 있으면 수철이를 구할 방도가 있는디. 하지만 동네 있는 돈 죄다 모아 봤자 50원도 안 나와.”“돈 있으면 된다는 건 알겄소. 그런데 돈을 어찌 번단 말이오.”

이장이 술잔을 털어 넣으며 말했다.

“일본군 군복 만드는 공장이 있는디 말이여. 거기 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하네. 동네 사람들이 우리 동네 계집들을 공장에 보내서 수철이 꺼내 오기로 벌써 결정혔어. 너도 같이 가거라.”석 달 만에 그녀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고맙소. 우리 동네 사람들도 다 고맙소.”

“뭘 그런 거 가지고 그러느냐. 우리가 남이여? 돈 벌어 오면 높은 사람헌티 말혀서 후딱 빼올 수 있응께 걱정하지 말고 내일 당장 출발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어.”

***



한기준의 턱 근육에 힘이 들어갔다. 그의 몸과 마음은 오로지 용광로와 같은 화뿐이었다.

“내 그렇게 이장 말에 속아 마을 처자들 일곱과 함께 가게 되었지. 한 명은 싱가포르로, 한 명은 대만으로, 한 명은 미얀마로, 그렇게 뿔뿔이 흩어지고 나는 만주로 끌려갔어.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모두가 죽었어. 매독에 걸려 죽기도 하고, 성병을 치료한답시고 수은으로 치료를 받다가 죄다 죽어 나갔어. 돈? 무슨 전표 같은 걸 주긴 했는디 끌려온 처자들 중 돈을 받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어. 그리고 ‘위안부’라는 걸 알고 끌려온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어. 진짜 매춘을 해야 한다는 걸 알고 제 발로 걸어 들어온 사람은 없었어. 정말 단 한.명.도.”



편지



유소영의 시선이 서수철의 손에 든 편지 뭉치에 머물렀다.

“혹시 할머니께 부치지 못한 편지를 전해 주시려는 건가요?”

“아니, 그 사람이 보낸 편지들이여.”

“편지를 보냈어요? 어떻게요?”

“어찌 됐든 받았어. 나도 보냈고.”

믿을 수 없었다. 억압된 생활 속에서, 감금과 같은 생활을 이어 가면서 편지를 전달할 수 있었다고? 편지 뭉치의 종이는 누렇게 변해 은은한 시간의 색을 입고 있었다.“여기에는 환자들만 산 게 아니여. 자식들도 살았제. 그리고 희한하게도 환자들 자식들은 죄다 잘생기고 어여뻤어. 병이 옮아서 그런 건지 모르겄는디, 모두가 고왔지.”그가 주차장에서 병원으로 들어가는 중간에 작은 로터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길을 중심으로 철조망이 세워져 있었어. 바다를 정면으로 왼편, 병원이 있던 곳과 우리가 생활하던 곳을 병사지대라고 혔지. 오른편은 직원지대라고 혀서 감시하는 놈들과 환자 자식들이 살았지. 아이들은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곳으로 끌려왔어. 그러고는 강제로 부모와 떨어져서 한 달에 한 번 이 길에서 만났어. 다섯 걸음을 사이에 두고 부모와 잠깐 만날 수 있게 해 줬었거든.”

***



소록도로 끌려온 서수철은 빠르게 적응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의 실수나 서툰 모습이 직원들의 눈에 포착되면 곧바로 응징의 폭력이 가해졌기 때문이다. 그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소록도는 잡초가 무성한 하나의 큰 산이었다. 허허벌판인 이곳을 대장인 원장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환자들은 소록도를 원장의 개인 정원으로 만드는 데 동원됐다. 추운 겨울날, “이곳에 길이 있으면 좋겠다”라는 원장의 말 한마디가 떨어지기 무섭게 환자들은 맨손으로 돌덩이처럼 딱딱한 땅을 파고 길을 닦아야 했다. 원장이 바뀔 때마다 노동시간은 늘어났다. 그전 원장보다 화려한 정원을 가지고 싶어 하는 탐욕은 노동 학대로 고스란히 이어졌다. 환자들에게는 하루하루가 전쟁터보다도 참혹한 생지옥이었다. 서수철은 같이 작업을 하던 무리들 중에서 강 노인을 만났다. 서수철이 이곳에 오고 나서 일주일 동안 배를 곯을 때 강 노인은 자신의 주먹밥 반쪽을 떼어 나눠 주기도 하고 신참인 그가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여러모로 도움을 주었다. 소록도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을 하게 되자 서수철은 허리가 좋지 않은 강 노인에게 침을 놔 주기 시작했고 그 후 두 사람은 급속히 가까워졌다. 강 노인은 서수철에게 늘 딸 자랑을 했다.“딸년이 쥐띠니 자네보다 한 살 어리고만. 무척 곱지. 그리고 환자가 아니라서 직원지대에 있는 보육시설에서 직원들과 생활하고 있다네. 내 이곳에서 나가게 되면 자네랑 같이 떠나고 싶네.”그는 노인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읽을 수 있었다.

“내 정혼자가 있소. 대신 마음 넓은 사내놈을 하나 알아봐 주겠소.”

노인의 얼굴에 실망이 가득 묻어나왔다.



***



오늘은 한 달에 한 번 환자들이 보육시설에 있는 자녀들을 만나는 날이다. 강 노인은 아침부터 설레는 마음으로 도포를 입고 얼굴은 깔끔한 새하얀 모시로 칭칭 감고 준비를 했다. 마침내 철조망 중간에 있는 문이 열리고, 잠시 후 하얀 저고리를 입은 곱디고운 처자가 강 노인 앞쪽으로 다섯 걸음 떨어진 곳에 섰다.“학순아, 어찌 잘 지내냐?”

“아버지, 건강하세요?”

“나야 잘 지낸다. 여기 이 청년이 의술이 뛰어나서 아팠던 허리도 금방 나았다.”

서수철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그녀가 답례의 인사를 보내며 말을 건넸다.

“아버지를 잘 부탁하오. 내 요즘 몸살기가 있는지 여기저기 아파오는데, 아프니까 아버지가 더 걱정되더이다.”“어디가 아픈 게냐? 얼마나 아픈 게냐?”

“가벼운 고뿔인가 봐요. 열이 좀 나고 목이 많이 부었어요.”

그녀가 말하는 도중 기침을 했다. 자세히 보니 안색이 창백했다. 10분도 안 되는 짧은 만남의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고 곧바로 다시 이별의 시간이 찾아왔다. 자녀들은 울음을 터뜨렸고 부모들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돌아오는 길에 노인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주변에 사람이 없음을 확인하고 서수철에게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아무래도 마음에 걸린다. 내 부탁 하나 들어줄 수 있겠느냐?”

노인은 서수철에게 밤에 몰래 빠져나와 딸아이의 병을 치료해 달라고 부탁했다. 환자들 숙소에 있는 변소 아래로 물이 흐르고 있어 오물이 쌓이지 않는다고 했다. 변소 아래로 내려가 스무 걸음만 가면 냇가가 나오고 거기서부터 사람이 다니지 않는 길을 따라 5분 정도 가면 철조망에 도착하는데 철조망 근처에 꽃나무를 심을 때 자신이 틈틈이 파놓은 구멍이 있다고 했다.“철조망 근처에 내가 표시를 해 둔 나무 밑에 편지를 묻어 두면 된다. 일주일에 이틀은 딸아이의 편지를 가지러 그곳에 간다.”서수철은 이틀에 한 번 강학순을 보기 위해 변소를 이용한 탈출을 감행했다. 탈출 후 두 번은 편지를 땅에 묻었지만 그녀가 편지를 읽지 못해 허탈하게 돌아와야만 했다. 세 번째 되던 날 드디어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인정 많은 아낙의 덕도 컸다. 직원들의 신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아낙은 그들을 위해 자신의 집을 기꺼이 제공했다. 아낙은 병이 나기 전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다. 비록 자식을 소록도에 보냈지만 부모는 아낙을 위해서 원장들에게 넉넉한 재물을 보내왔다. 그 덕분에 그녀는 인적이 없는 흙집에서 혼자 생활할 수 있었다.“부유한 집에서 태어났던 터라 좋은 지아비를 만나 혼인도 하고 토끼 같은 자식도 낳았다.”

그다음 말은 짐작할 수 있었다. 병마의 저주였다. 수십 년의 정과 가족이라는 단단한 울타리조차 쉽게 허물어 버리는 병이 찾아오고 나서 삶은 뒤바뀌었을 것이다. 세 번째 변소 탈출을 감행했던 날, 서수철은 아낙의 집에 도착해 주먹밥으로 허기를 채우고 곧 잠에 빠져들었다. 아낙이 깨우는 소리에 눈을 뜨자 그토록 기다렸던 노인의 딸이 주먹밥을 먹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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