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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지 마 내일도 이 길은 그대로니까

박은지 지음 | 강이북스
흔들리지 마 내일도 이 길은 그대로니까



박은지 지음

강이북스 / 2014년 12월 / 216쪽 / 13,000원





#1 길 위에서 만나다



시간이 공존하는 골목

문득 고개를 들어 본 달에서 붉은 빛이 돌았다. 빛을 뿌리며 옅어져야 할 테두리도 둥근 모양이 흩어지지 않고 또렷했다. 그날 홍대 동교동 골목길은 북적이긴 해도 그리 소란스럽지 않았다. 카페 내부보다 테라스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더 많고, 술집은 문을 활짝 열어 거리와의 경계가 막연했다. 누군가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소리를 밤공기가 부드럽게 머금었고, 누군가는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 시간이 사람만의 것은 아니다. 우리의 시선보다 조금 더 낮은 곳에서 그들의 시간은 그들의 속도와 방식대로 흐른다. 그리고 가끔 시선을 돌리다 보면,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서 걷고 있던 고양이의 꼬리를 발견할 때가 있는 것이다. 서울에서도 유독 홍대에는 고양이 밥그릇을 두고 있는 가게가 많은 편이고, 직접 찍은 고양이 사진을 빼곡하게 걸어놓은 카페들도 흔하다. 지인의 고양이, 오가며 마주친 고양이, 밥 먹으러 오는 길고양이, 그러다가 묘연이 닿아 키우게 된 고양이들. 내 자리 네 자리를 다투지 않고 공존하는 장소에서 계절은 머뭇대지 않고 흐른다.

그날 골목의 카페에는 고양이 한 마리가 마치 처음부터 자기 자리라는 듯 태연하게 문 앞에 배를 깔고 있었다. 보아하니 평소에도 밥 먹으러 오는 카페인 모양이었다. 밥 먹기 전인지 후인지 모르겠지만, 빈 밥그릇을 옆에 두고 익숙하게 자리를 잡은 삼색 고양이는 종종 고개를 돌려 카페 안을 들여다보았다.

침묵의 소리

도시에서는 침묵의 소리도 시끄러울 때가 있다. 깊은 새벽 어디쯤에 웅크려도 한낮에 왕왕거리던 소리의 여운이 남아 있다. 조명을 켜지 않아도 당신이 또렷하게 보이는 시간, 그때의 외로움은 필연적으로 소란스럽다. 수많은 사람과 엄청난 주파수가 거미줄처럼 엉겨 있다. 그 진득한 소리가 사람을 외롭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어디를 향해서랄 것도 없이 울리는 방향 잃은 소리들. 나는 그 소란 한가운데에 오도카니 홀로 있다.

이 시각, 목소리를 들어줄 이가 아무도 없는 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새벽에는 대부분의 소리도 잠이 들고, 역설적으로 그것만이 고독을 위로해 준다. 문득 고개를 돌려 마주치는, 아직 잠들지 않은 몸집 작은 동물의 침묵은 파동을 만들지 않고 고여 있다. 자그마한 생명체들의 부드러운 고요함. 나의 어수선하고 부산한 파장을 서서히 감싸오는 그 느낌은 생경하면서도 친숙해 나를 안심시킨다. 운이 좋으면 그 끝에 작은 속삭임마저 따라와 귀를 간질여줄 것이다. 그러니 괜찮다, 하고.

약해지는 연습

그들은 좀처럼 애처로운 눈빛을 보이는 일이 없다. 언제든 달아날 수 있도록 한껏 경계하고 있는 눈빛, 얕보이지 않겠다는 그들의 의지를 매 순간 맞닥뜨리면 나는 그 단단함에 도리어 속이 상한다. 네가 혼자서도 잘할 수 있다는 건 알아. 하지만 좋아하는 마음 때문에 손을 내밀고 싶어지는 마음도 있는 법이다.

힘을 빼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에 대해 배우는 건 어쩌면 혼자만의 힘으로 단단하게 서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다른 이의 도움을 받는 것은 일종의 빚을 지는 일이라고 나는 여겼고, 어떠한 신세도 지지 않으려 노력해 왔다. 그리고 때로는 그게 도리어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했다.

상대에게 어떠한 도움도 바라지 않는 마음, 울타리 안에 당신을 들여놓지 않겠다는 고집은 결국 기대었다가 상처받지 않겠다는 의지와 다를 바 없다. 마음을 다쳤다고 칭얼거리고 어리광 부려주면 좋을 텐데. 기댈 줄 아는 것도 강해지는 것만큼이나 연습이 필요하다.

미처 하지 못한 말

내가 사는 동네는 길고양이가 별로 없다. 그런데 몇 달 전쯤, 고양이 한 마리가 저녁 시간마다 모습을 드러내더니 마치 반려인과 잠시 외출한 것처럼 걸어가는 사람 곁에 태연하게 붙어 동네를 산책하고는 했다. 내심 반가운 마음에 마른 멸치를 몇 마리씩 집어다가 바치곤 했다. 개냥이 기질이 있던 그 고양이는 내가 부르면 대답까지 하며 다가와 발목을 꼬리로 감았다.

어느 날, 이게 만약 묘연이라면 받아들이겠다고 혼자 결심한 나는 ‘따라오면 평생 같이 살자’는 굳은 결의를 다지며 살살 고양이를 꾀어내기 시작했다. 내가 강아지를 키우고 있기 때문에 무작정 데리고 오는 게 능사는 아니었다. 기분 탓인지도 모르지만, 그날따라 고양이도 제법 갈등하는 것처럼 보였다. 평소에는 아파트 입구 안으로는 들어오지 않고 앞에 있는 화단과 길로만 다니던 녀석이, 복도까지 나를 따라와 기웃거리는 것이다. 고양이도 내심 나에게 마음이 있는 게 아닐까 싶어 나는 본격적으로 설득을 시작했다. 네가 원치 않는다면 강요는 하지 않을게, 하지만 너만 괜찮다면 난 너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어, 어때? 우리는 거의 십오 분가량을 그렇게 서로 마주 보았다. 고양이는 내가 별다른 몸짓을 하지 않았는데도 주춤주춤 몇 걸음을 더 걸어 들어오는가 싶더니 결국 돌아 나가 사라졌다.

그 후로도 몇 번을 더 만났지만, 언제부턴지 그 고양이는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갑자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사람을 잘 따라서 누가 데려갔는지, 애초에 이 동네 고양이가 아니었는지, 나는 마음에 걸려 며칠 동안 밤마다 집 앞을 서성거려야 했다.

사실 사람을 잘 따르는 길고양이는 곤란하다. 세상에는 호의적인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고, 또 호의가 꼭 좋은 결과를 초래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사랑도 때로는 폭력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서로가 같은 마음이 아니라면 결국 마음의 무게가 무거운 쪽이 상처받고 만다. 길고양이에게 그것은 마음의 상처이자 어쩌면 돌이킬 수 없는 신체적 상처일 수도 있다.

어디론가 사라진 고양이를 떠올리며 나도 내 주변에 쌓아올린 울타리를 슬그머니 어루만져 보았다. 사람에게 쉽게 마음을 열었던 그 고양이의 성향이 천성인지, 그간 좋은 사람을 만난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길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스스로 자신을 방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열쇠조차 없이 단단하게 걸어 잠근 울타리는 좋은 관계의 가능성마저 차단하고 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무나 내 울타리 안에 들여놓고 나면, 그들이 어지르고 상처 입힌 정원을 치우는 것은 결국 자신의 몫이다. 모두에게 마음을 꽁꽁 닫는 것은 외롭지만, 쉽게 마음을 여는 것은 위험한 것이다. 고양이에게 그 이야기를 미처 해주지 못한 게 나는 못내 마음에 걸렸다.

지친 하루

지친 우리에게는 어쩜 서로가 필요하지 않을까, 눌러 놓았던 생각이 또 슬그머니 치밀어 오른다. 우리 집으로 갈래? 말을 채 누르지 못하고 내뱉어버리면 고양이는 나를 빤히 올려다본다. 서로 더 이상 말은 하지 않아도, 우리는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

내가 이 생명을 책임질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은 없다. 그래도 나를 따라오면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평생 아껴줄게. 네가 날 책임질 수 있을까? 한순간의 결정은 너무나 많은 시간과 비용과 에너지를 좌우할 텐데. 널 믿을 수 있을까? 어쩌면 오히려 네가 나와 함께하는 삶을 택한 것을 후회하는 순간이 오지는 않을까?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그런 갈등.

길고양이의 수명은 고작 3~4년에 불과하다. 고양이가 타고난 수명이 10여 년이라는 사실을 떠올려 보면 말도 안 되는 시간이다. 그들의 삶이 고단한 것은 결국 그들의 땅 위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한 마리라도 나의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살게 해주는 것이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일단 결정하고 나면 되돌릴 수는 없다. 집에서 기르던 고양이를 다시 길로 내보내는 것은 그 고양이의 생존을 포기한다는 것과도 직결되는 문제이므로.

그러나 충분한 용기를 짜내지 못한 우리는 눈길을 돌리고 만다. 그래도 저녁 식사 한 끼 대접하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가방에서 주섬주섬 캔을 꺼내는 것으로 우리의 짧은 인연을 매듭짓는다.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을 때, 내가 필요한 순간에 눈을 감고 귀를 막지는 않을 것이라는 정도가 내가 이 길 위에서 할 수 있는 다짐이고 약속일 것이다. 터덜터덜. 너의 하루와 나의 하루가 그저 함께 저문다.



#2 당신과 나의 적당한 거리



우린 이걸로 됐어요

오늘도 이 골목을 지나가는 아가씨, 저 가게 단골이에요. 커피 한 잔을 시키고 얼마나 오래 있다 가는지, 옆자리에서 한참 자고 일어났다 싶은데도 아직 그 자리에 앉아 있죠. 물론 그런 손님이 한둘은 아니에요. 하지만 이 아가씨가 오면 나는 유난히 궁금한 마음에 슬그머니 몸을 일으켜 가게 안으로 따라 들어가 그쪽 의자로 건너가곤 해요.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그냥 가만히 있기만 하죠. 나를 쓰다듬거나 만진 적도 없어요. 어쩌면 내 몸이 지저분하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지만, 내 생각에 그건 아닌 것 같아요. 마치 어릴 때 헤어진 남매라도 보는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거든요.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나도 그 눈빛이 아주 싫지는 않아요.

이 카페 주인아저씨는 아가씨가 돌아가고 나면 가끔 혀를 차요. 뭔가 내가 모르는 걸 알고 있는 모양이에요. 주인아저씨는 투박한 손길로 나에게 사료나 생선 꼬리 같은 걸 나눠주곤 해요. 친절하지는 않지만 아마 착한 사람일 거예요. 처음 만났던 추운 겨울날, 바람 피할 곳이 없어 카페 앞에서 몸을 웅크리고 어찌할 바 모르던 나를 들어다 난롯가 옆에 눕혀주었거든요. 난 아마 겨울에 태어났나 봐요. 그래서 카페 단골 아가씨가 자꾸 궁금한 것인지도 몰라요. 소매 끝으로 나온 하얀 살결의 손목이나, 입고 다니는 긴 스커트의 보들보들한 끝자락이 무척 따뜻해 보여서요.

아가씨가 집으로 돌아가면, 나도 가게를 나와 다시 길로 돌아가요. 가게 아저씨는 이것도 인연이라는 둥 하는 소리를 토닥토닥 중얼거리며 나에게 밥을 주러 따라 나오죠. 이거 뭐, 삼각관계 같기도 한데요? 사실 언젠가는 그 아가씨의 무릎 위로 올라가 보들보들한 치마의 감촉을 느껴보고 싶기도 해요. 하지만 안 할래요. 시시콜콜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것이 아니라, 알 듯 말 듯하게 그저 눈으로만 대화를 나누는 정도의 거리 말이에요.

당신의 것, 혹은 당신의 것이 아닌

대학 동기의 결혼식에 가지 않았다. 축의금을 입금하고 축하 메시지를 보내는 것으로 갈까 말까 당일 아침까지 고민이던 고민을 털어냈다. 사랑은 남이 되는 순간 무색해진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시간이 끝에 닿으면 현실감은 모두 증발해 버린다. 너만 있으면 될 것 같았던, 내 세상의 전부였던 연애는 끝나고 나면 나를 갉아먹고 내 삶을 무너뜨린다.

그 시절에 우리는 온 힘을 다해 사랑했을 것이다. 그 당시 우리의 연애라는 건 사랑인 동시에 소유였다. 우리는 보통의 이십 대 연인들이 그렇듯 서로의 기상 시간부터 점심 때 먹은 학식 메뉴, 잠들기 전에 생각하는 것까지 모두 알려주고 알고 싶어 했다. 그러나 청춘의 화르르 타오른 사랑이 사그라지는 순간은 시시하기 그지없었다. 우리는 이별을 앞둔 많은 연인이 그렇듯 더 이상 긴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너무 많이 싸우느라 재만 남은 불꽃의 잔해에는 미래가 없었다. 상대를 소유하려는 마음은 사랑의 기본이지만 동시에 고통의 근원이기도 하다는 것을 이미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매 순간을 그와 공유하고 그러나 이해받지 못하는 일이 반복되자 나는 더 이상 나로서 존재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저, 혼자 있고 싶은 날이 많아졌다.

결혼식에 가는 대신 낯선 길에 접어들어 골목을 서성였다. 따가운 햇살 탓인지 사람도 별로 없고, 어디서부터 길을 잘못 들었는지 그 흔한 카페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목적지도 없고 덥기만 해 신경질이 나려는 찰나, 고개를 홱 돌리니 골목길 한가운데 앉은 고양이가 모델처럼 콧대를 높인 자세로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서 있고 고양이는 앉은 채로 잠시 대치했는데, 고양이는 나 같은 건 안중에도 없다는 듯 고고하게 시선을 돌렸다. 그래도 달리 할 일이 없는 내가 집착하며 계속 쳐다보고 있자, 뒤에서 미소 섞인 책망의 목소리가 들렸다. “쿠키!”

길가에 내놓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부채질을 하고 있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너도 인사 좀 하렴.” 하는 듯한 말투로 고양이 이름을 다그쳐 불렀다. “아, 길고양이 아니었네요.” 머쓱하게 물러나자 할머니가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양이 쿠키는 흥 하는 듯 길게 기지개를 펴더니 일어나서 내 앞을 지나쳐 갔다. 할머니의 무릎 위로 올라가나 싶더니 두 분의 시선이 직선으로 닿는 가게 앞으로 가 다시 자리를 잡았다. 두 분은 가끔씩 이름을 불러주기만 하고, 고양이는 껌딱지처럼 붙어 있지는 않지만 너무 멀리 가버리지도 않는다. 그 골목의 풍경은 그게 다였다.

보통 고양이는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고양이가 자신을 반려묘로 생각하는 어떤 이들과 믿음을 바탕으로 하나의 생활을 함께하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다. 그들은 어쩌면 적절한 사랑의 거리를 이미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당신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다움을 지켜보는 것, 당신의 시선이 닿는 곳에서 나답게 살아가는 것,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거리에서 사랑하는 법을 말이다.

나는 그와 헤어졌고, 서로 지나치게 겹쳐 있었기에 헤어질 때의 우리는 자신의 일부마저 떼어내야만 했다. 온갖 것을 다 쏟아냈던 그때의 사랑이 의미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상처는 우리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주었을 것이고, 우리는 조금 더 어른스러워지고 조금은 더 성숙해졌을 것이다. 그러니 다음 사랑은 그리 뜨겁기만 하지 않아도 좋았다. 다만 그와 내가 서로를 성급히 떠나버리지는 않을 것이며, 그저 같은 일상 속에서 함께 걷고 있다는 믿음을 주고받을 수 있기를 나는 바랐다.

예정된 상처의 덤덤함

이미 헤어진 연인이 그때의 자리로 돌아가 다시 만나면 어떻게 될까. 그 일을 겪은 수많은 이들이 조언하듯, 대부분의 경우는 한 번 더 똑같은 일이 반복될 뿐이다. 생각해 보면 징후는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말이야…….” 하고는 이어지지 않는 말의 공백이라든가, 도시락에 대한 사소한 다툼이 배려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로 넘어가는 순간이라든가. 결국 다시 만나 행복해진다는 3%의 확률에 우리는 들지 못한다는 사실을 기어이 경험하고 나서야, 시간을 되돌리려는 다른 연인들에게 한 번 더 생각해 보라고 또다시 조언하는 것이다.

고양이는 아픔을 겉으로 표현하지 않는 데 익숙하다고 한다. 야생에서 살았을 때, 아픈 것을 드러내면 공격의 대상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아픔을 견디는 데 익숙하지 않은 우리는, 그저 아픔이 반복되어 굳은살이 생길 때쯤에야 덤덤해진다. 마치 두 번째 이별을 맞는 연인들처럼. 이별도 경험이라 면역이 되면 무덤덤해지게 마련이고, 마침내 우리는 인정하고 만다. 이건 이미 예정된 상처이며 예고된 이별이라는 것을. 그러니 지난 이별에서 슬퍼하고 남은 여운만큼만 마저 슬퍼하면 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이 연애와는 완전히 이별하는 것이다.

그래도 마음이 아플 때면 잠자코 시간을 흘려보낸다. 어떨 땐 아무리 아껴 써도 부족했던 시간이, 어떤 날은 손가락 사이로 아무리 흘려보내도 너무나 많이 남는다. 충분한 시간이 상처의 고랑을 세차게 흐르고 나면 마침내 깊게 패인 마음도 편평하게 다져질까. 또다시 울 필요는 없다.

네가 보낸 우편

네가 나를 위해 해주는 무엇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나는 기뻤다. 멀찍이서 바라만 보고 있던 네가 단 한 걸음만 내게 가까워져도 우리의 사이가 산과 바다 하나만큼씩 좁혀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 사소한 걸음이 너에게 사랑에 가까운 것이었다면, 그게 나에게 도착했을 때의 부푼 형상은 내가 너에게 보여주고 싶은 사랑이었을 것이다. 네가 누군가에게 줄 수 있는 행복이 얼마나 커다란 것인지를 나는 말해주고 싶었다. 그건, 너와 내 사이에만 작용하는 이 특별한 빨간 실 하나가 진동하며 울리지 않으면 절대로 혼자는 이루어낼 수 없는 종류의 기적이었다. 혼자서 만들 수 있는 행복의 크기라는 게 존재한다면, 네가 만들어낸 그것이 나에게 도착했을 때는 애초의 크기보다 훨씬 더 많이 자라 있었다. 네가 나에게 더 가까이 오지 않아도 좋았다. 그저 네가 끝까지 눈을 떼지 않고, 네가 보낸 행복이 얼마나 커져서 도착하는지를 봐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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