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타는 남자, 버스 타는 여자
박정규, 신혜숙 지음 | 마음지기
자전거 타는 남자, 버스 타는 여자
박정규, 신혜숙 지음
마음지기 / 2014년 10월 / 416쪽 / 16,000원
<자전거 타는 남자>
1장 시간의 걸음걸이
자전거가 준 인생의 선물
자전거를 타면 또 다른 시력이 생긴다. 빠르면 볼 수 없는, 느려야 볼 수 있는 것들을 보게 된다. 철길 건널목의 기차 시간표, 다리 위에서 내려다본 다리 아래의 풍경들, 멍멍이 친구의 낮잠 풍경, 길 위에 펼쳐진 떠나가는 계절의 뒷모습 등. 자전거로 인해 같은 풍경을 낯설게 보고, 일상 속 숨은 풍경을 찾는 일은 커다란 설렘이자 즐거움이다. 나이가 들어서 시력이 안 좋아진다는 것은 그동안 바라보고 있던 익숙함에 눈이 권태를 느껴서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너무 가까이 있어서 소중한 것들의 가치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점에서 자전거 여행은 떠남으로써 소중한 것들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볼 수 있게 하는 힘이 있다. 단순히 그 나라의 유명한 관광지나 유적지를 둘러보는 것이 아닌, 현지인들의 문화와 삶 속으로 들어갈 때 진짜 여행이 되는 것.
자전거에 필요한 것들을 차곡차곡 담은 짐 꾸러미 하나만 실으면 지구촌 어느 곳이든 갈 수 있다. 순수한 아이들, 청년들, 현지인들의 일상에 함께 머무르다 보면, 그동안 닫혀 있던 눈을 통해 또 다른 세상을 보면서 마음과 눈이 정화된다.
그러고 보니 나는 자전거 하나로 참 많은 인생의 선물을 받았다. 대중교통 수단으로는 가장 느리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속도는 가장 빠른 자전거 덕분에, 세계 여행을 하는 동안 온정이 살아 있는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고, 스펙 하나 없는 내가 여행의 경험을 기반으로 취직을 해서 자전거공방 매니저가 되고, 나의 담당 기자였던 사람과 결혼을 하고, 지금도 계속해서 많은 사람들과 값진 만남을 이어 가고 있으니 말이다. 내게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통로가 되어 준 자전거가 나는 정말 좋다.
2장 희망을 선택하는 삶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다
나의 삶에 변화의 씨앗을 심어 준 체 게바라. 군대 미니도서관에서 그를 처음으로 만났을 때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꾸자”라는 그의 말이 심장을 세차게 두드렸다.
두 번째 만남은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를 보면서였다. 음식과 날씨에 적응하지 못해 지독한 몸살을 앓던 인도의 싸구려 숙소 철제 침대 위 어둑한 조명 아래서 이 영화를 봤다. 강아지를 몰래 여행에 데려갈 만큼 마음이 여린 체 게바라가 천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병 환자들을 위해 강 속으로 자신을 내던지던 모습, ‘불의에 대한 용기’를 가진 한 인간으로 성장해 가는 모습에서 강한 매력을 느꼈다.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다”라고 하는 그의 한마디가 수백 수천 단어를 합한 것보다 더한 무게감으로 거센 소나기처럼 나에게 쏟아졌다. 누구보다 부족함이 많고 빈틈투성이인 나 같은 사람도 변화할 수 있다는 한줄기 희망이 내 마음을 환히 밝혀 주었다.
그 후 미국 횡단을 하고 나서 한 재미동포 청년의 집에서, 3년간의 여행을 마친 후 한국의 집에서 다시 체 게바라를 만나고, 특별한 청년들의 한 모임에서 또다시 그와 만났다. 내게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 그의 존재, 그의 말이 오늘도 나의 마음을 두드린다. 역사는 탁월한 리더들의 말과 글로 쓰인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말하는 이들의 피와 땀으로 한 자 한 자 새겨졌다는 생각을 다시금 해본다.
작은 불빛 하나로
자전거로 중국을 종단할 때, 청두의 어느 산속 터널 앞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제법 긴 터널 안에는 아무런 조명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가지고 있던 라이트도 고장이 났고,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터널 안은 칠흑 같은 어둠의 세상이라 혹시나 자동차가 갑자기 달려온다면 큰 사고로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한 걸음도 터널 안으로 움직이지 못하고 애만 태우고 있었다.
한참을 고민하고 있다가 다시 짐 꾸러미를 뒤적이는데 엄지손가락만 한 작은 비상등을 하나 찾았다. 순간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 작은 불빛에 의지해서 터널을 지나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그런데 자세히 보니 이 불빛 덕분에 그래도 한 걸음 앞은 보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일단은 조심스레 터널 속으로 한 걸음 들어갔다.
몇 번이나 자동차가 고속으로 쌩하니 지나는 순간이 오면 소름이 돋았지만, 거북이걸음으로 한 걸음 한 페달 나아가기를 반복, 어느새 끝이 없어 보이던 터널의 끝에 도착했다. 그리고 온몸으로, 마음속으로 구석구석 빛이 쏟아졌다. 그때 알았다. 모든 것이 보여야 갈 수 있다는 생각이 오히려 어리석다는 것을……. 조금만 보이는 것이 오히려 더 안전하다는 것을…….
어떤 일에 도전할 때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전까지의 나의 모습을 돌아보며 너무 많은 걸 보려고 했던 건 아니었는지, 그래서 망설이다가 놓쳐 버린 것은 없는지 되짚어 봤다. 자! 이젠 조금 더 적게 바라보는 훈련을 하며, 다시 터널로 들어가야 할 시간이다.
3장 제법 괜찮은 출근길
몸의 잠재력을 깨우는 즐거움
아침에 자전거를 타고 집을 나서려면 귀찮음과 번거로움을 극복해야 한다. 자전거를 타지 않은 날이 길어질수록 귀찮음의 그림자도 길어진다. 하지만 집을 나서고 몸에 땀이 나기 시작할 무렵에는 역시나 자전거를 타고 나서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자전거를 타고 나와서 후회하는 경우는 없었다. 그렇게 귀찮음을 극복한 날이 많아질수록 미처 내가 생각하지 못한 신기한 일이 일어나곤 한다.
유난히 바람이 차가운 아침, 숨겨진 동네 아지트 골목을 지나면서 맞는 매서운 바람 끝에 봄이 머지않았음을 느낀다. 찬란한 태양은 오늘도 한강으로 출근. 기분이 좋아 있는 힘껏 페달에 힘을 실어서 바람에 바퀴를 올려본다. 집에서 일터까지 1시간 5분! 1년 만에 개인 최고기록 갱신! 야호! 몸의 잠재력을 깨우는 즐거움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운동 출퇴근을 시작한 후 한 달이 지났을 때의 변화? 신체적 변화로는 몸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 몸무게 1kg 감량, 오히려 버스를 타면 답답하고 멀미가 나는 경우가 있다는 것. 정신적 변화로는 새로운 변화들에 대해서 좀 더 유연해지고, 다른 사람들의 관심사에 조금 더 집중하게 된다.
또 다른 도전으로 철인3종경기(수영 3.8km, 사이클 180km, 마라톤 42.195km를 17시간 안에 완주해야 하는 경기)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운동은 운명을 바꾸는 행동이란 걸 다시 배우는 한 달! 내일부터는 새로운 마음으로 수영을 시작하려 한다. 결혼 전 울산에 살 때 친구와 함께 2개월간 수영장을 다닌 이후 몇 년 만에 다시 시작하는 수영이다. 처음으로 돌아가 기초부터 시작할 것이다.
모든 변화의 첫 시작인 운동을 통해서 또 한 번 삶의 전환점이 생길 거라 믿는다. 2월부터는 내가 흘린 땀방울이 누군가에게 작은 희망의 씨앗이 될 수 있도록 구체적인 방법들을 고민해 봐야겠다. ‘나, 너, 우리, 누군가’를 위해 열심히 헤엄치고, 페달을 밟고, 달리는 한 해가 되기를! 그저 페달을 밟고 달리는 행위는 사소하지만 그 결과는 절대 사소하지 않다. 한 페달 한 페달에 어떤 마음을 담느냐에 따라 미래는 변한다.
마음의 먼지 털어 내기
대중교통과 운동 출퇴근의 가장 큰 차이점은 같은 길을 다르게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할 때 내가 하는 일은 승하차 시 교통카드를 대는 일과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일밖에 없다. 하지만 운동 출퇴근 시에는 나의 온몸을 사용하므로 집중해야 하고, 스마트폰 대신 내가 오가는 길의 주변 풍경을 살피게 된다. 그래서 같지만 전혀 다른 길을 만나게 된다.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할 때는 얻을 수 없는 큰 선물과 감동을 덤으로 받게 된다. 이것이 조금은 번거롭더라도 운동 출퇴근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운동 출퇴근의 맛을 느끼고 나니 퇴근 시간도 설렘과 기대로 기다려진다. 종이 치기 무섭게 뛰어 나가는 학생처럼 한강으로 출발. 정체된 거북이 차량 사이를 추월하는 맛이 묘한 쾌감을 준다. 여유롭게 경치를 즐기며 중간에 바나나도 먹으니 괜스레 웃음이 난다.
아내와 만나서 저녁을 먹기로 했는데 조금 늦을 것 같다. 100m 달리기 모드로 조금 서둘러 볼까? 그런데 아차차, 새로운 길로 갔다가 길을 헤매게 되었다. 공사 중인 다리 아래를 가로질러 비탈길을 기어올라 자동차전용도로로 진입. 이름 모를 풀에 손을 찔리기도 하다가 가까스로 목표 지점인 정류장에 도착했다. 버스를 타고 아내가 기다리는 중국집으로 직행한다. 온몸은 땀으로 흠뻑, 심장은 방금 긴 모험을 마친 것처럼 숨을 고른다.
자장면을 먹으며 아내는 내게 왜 달리느냐고 묻는다. 마음에 먼지가 많아서 먼지를 털어 내려고 달린다고 하니 아내는 “낭군님 정도면 정말 잘하고 있는 거죠. 뭘 그렇게 털어 낼 게 있다고 그래요”라고 말한다. 아내의 말에 나는 몸도 삶도 가벼워지려면 아직 멀었다고 이야기한다. 아내는 항상 나 자신보다 나를 더 높이 평가해 준다.
클럽의 다른 철인 회원들은 하루 훈련을 나가기 위해 1주일을 아내에게 잘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내가 이렇게 운동 출퇴근을 시작할 수 있었던 건 열린 마음으로 지지해 주는 아내가 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부족함이 많은 나란 사람을 믿어 주고 격려해 주는 아내의 내조가 새삼 고맙게 느껴진다.
4장 운동 출퇴근, 100일의 기적
자전거면 충분하다
장맛비의 우렁찬 발걸음 소리에 눈이 저절로 뜨인다. 빗길에 자전거를 타고 간다니까 아내가 위험하지 않겠냐며 걱정을 한다. 안전하게 조심히 타겠다고 안심을 시키고 집을 나선다. 비가 내리는 한강. 촉촉한 한강의 풍경이 가슴에 스며든다. 내심 폭우 속에서 달리기를 기대했는데 오는 동안 빗줄기가 많이 약해졌다. 그래도 한강 여기저기에 고인 물웅덩이를 힘차게 가르며 함성을 질러 본다. 마음의 먼지가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다.
자전거는 몸의 가능성을 가장 잘 이끌어 내는 도구이기도 하다. 오르막을 올라갈 때 심장이 터질 듯이 뛰고 거친 호흡이 입 밖으로 터져 나오는 느낌, 허벅지와 장딴지의 뻐근한 근육통, 내리막길에서의 하늘을 나는 듯한 자유로움과 급커브길에서의 짜릿한 스릴, 평지에서의 꾸준한 페이스 조절 능력 등은 자전거를 탈 때 자연스레 따라오는 신체적 반응들이다.
출근길 자전거의 매력에 도취되어 신 나게 바람을 가르며 페달을 밟고 있으니 마치 자전거와 합체한 듯한 느낌이 든다. 당산역 근처에서 버스를 추월하며 마음속으로 ‘이야호’ 혼자 파이팅을 외친다. 57분. 올해 최고의 기록으로 일터에 도착! 이쯤이면 자전거가 출퇴근 버스보다 교통수단으로서도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전거 안장 위에서 만나는 바람의 짜릿함을 경험한다면 만원 버스도 사라질 텐데…….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고, 대단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만큼 또 좌절하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해 주고 싶다. 자전거면 충분하다! 일단 페달을 밟아 보라. 자전거는 당신이 페달을 밟는 만큼, 살아 있는 모든 것들과 사랑에 빠지게 만든다.
우리는 가고 있습니다
운동 출퇴근을 하면서 버스비를 조금씩 모아서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어느새 100일이 다가왔고, 특별히 좋은 생각이 나지 않아서 아이디어 뱅크인 여대생 친구와 아내에게 긴급회의 신청을 했다. 이럴 때 아내가 함께 마음을 모아 주고 머리를 맞대어 함께 기획하고 준비할 수 있어 든든하고 큰 힘이 된다.
많은 돈은 아니지만, 하루에 2,000원씩 100일의 시간이 지나니 작은 프로젝트를 할 정도의 씨앗자금이 모였다. 무얼 해야 할지 선택의 폭이 너무 다양해서 고민하다가, 평소 우리가 도움을 받고 있었지만 미처 고마움을 전하지 못했던 버스 기사분들께 감사함을 표현하기로 했다. 정말 오랫동안 일상의 일부가 되어 버린, 너무도 당연한 나머지 무덤덤해진 존재들에게.
이름하여 ‘오라이 프로젝트’. 간식을 사서 포장을 하고 간식 꾸러미를 만들어 가득 둘러메고 빗속으로 출동! 마음을 전하는 작은 메시지가 담긴 50개의 간식 꾸러미를 영등포에서 일산으로, 일산에서 신촌으로 정류장을 이동하며 기사분들에게 선물했다. 반사적으로 어디에서 주는 거냐고 물어보는 분, 목적을 의심하는 분, 말없이 거절의 손짓을 보이는 분, 함박웃음을 지으시며 고맙다는 분, 버스 노선만큼 다양한 반응들을 보다 보니 묵직한 가방이 어느새 비워졌다.
해는 저물었고, 빗줄기는 세차게 바닥을 두드리고 있었다. 작은 생각과 실천, 그리고 함께해 준 지인들 덕분에 첫 번째 오라이 프로젝트는 무사히 마무리됐다. 누군가에게 작은 마음을 전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어색했고 번거로운 과정이었다. 하지만 그 수줍고 불편한 짧은 시간을 극복하고 나니, 드린 것보다 더 큰 선물을 우리가 이미 받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5장 찾아가는 봄은 뜨겁다
여행이 남겨 준 선물
여행 후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 있다. 여행을 통해 무엇을 얻었고, 삶이 어떻게 달라졌냐는 것이다. 여행을 통해 얻은 것과 달라진 것을 한마디로 이야기한다면 ‘타신감’, 즉 다른 사람을 믿는 믿음이 생겼다고 말하고 싶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세상에는 선하고 좋은 사람들이 더 많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고, 그 믿음을 증명해 보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여행을 하면서 낮에는 자전거를 타다가 해 질 무렵 나도 남들과 같이 퇴근하자는 생각에 용기를 내어 현지 가정집 문을 두드렸다. 물론 거절도 많이 당했다. 하지만 초췌하고 불쌍해 보이는 나그네를 집 안으로 초대해 준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들에게 “당신의 희망 세 가지는 무엇입니까?”, “당신을 위해 기도해 드리겠습니다”라고 말을 건네는 ‘희망 인터뷰’를 하며 그들의 삶을 좀 더 가까이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위험한 지역이라는 사람들의 편견이 있는 낯선 동네에서도 열린 마음으로 나그네를 환대해 주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만났다. 스스로 만든 감옥 속에서 의심과 경계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간혹 있었지만, 대부분은 열악하고 어려운 환경에서도 희망을 간직하고, 그 희망을 지켜 내기 위해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전 세계 90% 이상의 사람들이 가족들에게 필요한 하루의 온기를 지키기 위해 땀 흘리며 살고 있다”고 이야기한 캐나다 자전거 여행자의 확신에 찬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당장 내일 끼니를 염려해야 할 만큼 넉넉지 못한 궁핍한 환경 속에서도 자신의 먹을 것과 쓸 것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며, 지친 나그네를 따뜻하게 품어 준 그들은 마음만큼은 누구보다 부자였다. 오랜 친구를 기다린 양 반가운 얼굴로 반겨 주는 그들을 보면서, 위험하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 마음이 만들어 놓은 경계심과 편견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으로 사랑하고 대접하는 법을 배웠다. 나그네의 손을 잡아 준 많은 사람의 얼굴이 떠오른다. 한여름 밤 예고 없이 불쑥 찾아온 나그네를 넉넉한 웃음으로 반기면서 모기를 쫓기 위해 집 안 돌바닥에 모닥불을 피우던 쿠바의 19세의 젊은 농부 요엘, 동네 구멍가게를 운영하던 콜롬비아의 야네스는 나의 몸살기운을 눈치채고 따뜻한 담요와 감기약을 챙겨 주었다. 예쁜 두 딸이 있는 화목한 가정으로 나를 초대해 준 아르헨티나의 인쇄업자 하비에르, 집에 있는 TV를 팔아서 맛있는 요리와 과일을 대접해 주고 헤어질 때 눈물을 보이며 장문의 편지를 내게 건넸던 중국의 왕매이 커플, 집이라고 하기엔 상상 이상으로 열악한 곳에 살면서도 나를 초대해 주고 큰 가마솥에 따뜻한 밥과 고기를 볶아 대접해 주었던 중국의 공핑……. 이들에게 나는 크나큰 사랑의 빚을 졌다. 여행이 남겨 준 사랑의 빚은 살면서 계속 갚아 나가야 할 가장 큰 숙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