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전과
김정훈 지음 | 북뱅
연애전과
김정훈 지음
북뱅 / 2014년 9월 / 272쪽 / 13,800원
1 국어
정독과 속독, 그리고 다독 - 책은 변하지 않지만 사람은 변하는 법이다
새로운 이성을 만났을 때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는 “몇 명이나 사귀어봤어요?”다. 얼마라고 대답해야 평균에 속하는 걸까. 장기 연애의 기준은 도대체 몇 년이며, 몇 명이랑 사귀어봤냐는 질문에 만날 만큼 만나봤다는 그는 대체 얼마나 많은 여자와 잠을 잔 것일까? 한 남자 친구와 6년이나 사귀어봤다는 그녀. 차라리 1년씩 6명을 만난 게 더 나은 게 아닐까? 이처럼 답이 없는 질문에 집착하는 사람은 의외로 많다.
밥을 빨리 먹는 사람이 있고 천천히 먹는 사람이 있다. 한 번 산 옷을 오래 입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단골집이 생기면 그곳에만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매번 새로운 장소와 메뉴를 찾아다니는 사람도 있다. 이런 행동들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드물지만, 유독 연애에서는 각종 기준을 정해 시비를 따지려 한다. 정의할 수 없으므로 그 형태가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이 사랑이다. 개인의 관철된 기준만으로 상대의 사랑과 연애를 판단할 순 없다.
책을 빨리 읽는 사람이 많이 읽을 수는 있겠지만, 모든 속독자들이 다독 습관을 가진 건 아니다. 물론 정독이 최고의 독서법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독서 전문가들은 책마다 독서 방법을 달리 하는 것을 추천한다. 사람을 만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럴 필요 없는 상대를 필요 이상으로 깊게 알려 하든지, 느린 진도를 원하는 사람에게 빠른 스킨십을 강요해선 안 된다. 적절치 못한 선택으로 상처를 받아본 사람들은 늘 궁금해한다. 사람을 만나는 데 정독과 속독, 다독 중 어느 것을 선택해야 좋을까? 또 하나, 가장 대표적인 질문이 있다. 마음에 드는 사람에겐 언제쯤 사귀자고 해야 좋을까?
정답은 감정이 도무지 주체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을 때다. 배고픈데 밥은 언제쯤 먹어야 하나요? 졸린데 잠은 언제, 얼마나 자야 좋을까요? 배가 아픈데 화장실에 언제쯤 가야 하나요? 등과 같이 터무니없는 질문에는 ‘못 참을 만큼 힘든 순간’이라는 하나의 답밖에 없다. 인간의 삶은 언제쯤 마지막이 찾아올지 모른다. 그래서 타이밍을 궁금해하는 것은 일종의 숙명이란 생각도 든다. 저마다 삶의 길이가 다르듯, 모든 건 ‘케바케(case by case)’다.
그런 답은 나도 하겠다고, 힌트라도 달라는 사람에겐 적어도 세 번의 만남 후엔 고백을 반드시 하길 추천한다. 억지로 할 말을 하지 않고 참는 건 오히려 역효과다. 사귀기 전 작업단계의 모습과 사귄 후의 모습이 같은 사람은 거의 없으니, 지나치게 오랫동안 고민하는 것은 절대 추천하지 않는다.
책의 활자는 변하지 않지만 사람은 변한다. 한 사람을 제대로 파악하는 깊이가 시간과 비례한다는 생각은 그래서 위험하다. 사람은 어제와 오늘의 선택이 다르고, 어제의 표현과 오늘의 행동이 다를 수 있다. 오래 사귀는 형태만 유지할 뿐인 스킨십도 없는 커플보단, 서로에게 이끌린 지 하루 만에 뜨거운 키스를 나누는 이들이 차라리 보기 좋다.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의 데이트는 필요 없다 생각하는 커플이 1년 동안 쌓아온 친밀도보다, 매일을 함께 동거하듯 보내며 100일간 사귄 커플의 그것이 더 깊을지도 모른다. 물론 연애기간이 짧았던 사람을 만난다는 건 마치 유통기한이 얼마 되지 않는 요구르트를 산다든가 내구성이 엄청 약해 보이는 옷을 사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수 있다. 하지만 내구성 문제는 그렇다 치더라도 유통기한이 짧은 게 성격적 결함을 반드시 동반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지나치게 긴 유통기한은 무관심을 유발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뒤통수를 치곤 한다.
나는 며칠 전 유통기한 지난 라면을 끓여 먹은 적이 있다. 그 텁텁한 맛보다 놀랐던 것은 ‘어떻게 우리 집에 있는 라면이 유통기한이 지날 때까지 몰랐던 거지?’ 하는 사실이었다. 무관심은 이별의 가장 큰 원인이다.
시와 소설 - 답장을 하고 싶게 만드는 문자 보내기
남녀가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또 스킨십을 하는 것은 대화의 확장이다. 이렇게 다양한 종류의 대화 중 가장 빈번하게 이뤄지는 건 뭘까. 그건 바로 문자로 나누는 대화다. 요즘 같은 1인 1스마트폰 시대, 데이터 무제한의 시대, 언제 어디서든 채팅 수준의 문자 전송이 가능한 시대에는 전화보다 문자로 하는 대화의 양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따라서 문자를 보낼 때의 센스는 매우 중요해졌다.
이미 뭔가로 가득 채워져 있는 방은 들어가기가 싫다. 채팅 창을 가득 채우고 있는 활자를 보는 것만큼 답답하고 부담스러운 일도 없다. 참여하고 싶은 마음을 이끌어내는 메시지와 그렇지 않은 메시지는 분명히 다르다. 대화의 과정에는 전달하는 사람과 수용자가 존재한다. ‘쿨 미디어와 핫 미디어’라는 개념은 이것과 관계된 이론 중 하나다. 수용자의 참여도가 높은 미디어를 ‘쿨 미디어’, 그렇지 않은 미디어를 ‘핫 미디어’라고 구분 짓는데, 예를 들면 TV는 쿨 미디어, 라디오는 핫 미디어에 속한다. TV를 보면서 다른 일을 할 순 없지만 라디오를 보면서는 그럴 수 있는 이유는, 미디어마다 수용자의 참여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맛깔스러운 음식이 있고 그것의 맛을 표현해야 할 때, 초보는 현란한 어휘를 사용하여 자신의 능력을 뽐내려 한다. 그러나 고수들은 상대방도 알지 못하는 구체적이고 전문적인 단어를 사용하는 게 아니다. 그들은 상대가 공감할 정도의 적절한 예시와 그것들을 섞어 절묘한 문장들을 만들어낸다. 하나부터 열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하려는 초보와는 달리, 상대의 대화 참여를 이끌어낸다. 상대의 두뇌를 회전시키기 위해선 피가 빠른 속도로 순환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빠른 혈액순환이 심장에 자극을 전달할 것이라 결론짓는 건 지나친 상상일까.
한 가지 추가해야 할 사항은 완벽한 미장센을 위해선 대화가 이루어지는 장소나 시간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연애 이야기와 같은 진지한 이야기가 늦은 밤에 어울린다는 건 대부분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상대방과 데이트를 하기 위해선 연애에 대한 담론 대신 음식이나 맛집 이야기를 밤에 나누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식욕이 자극된 상대방이 다음 날 그걸 먹기 위한 데이트를 신청할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세련된 분위기, 자유로운 분위기, 추억에 잠기는 분위기, 유혹하는 분위기 등 그날 이뤄질 것 같은 대화 분위기에 맞는 다양한 장소까지 추가로 섭렵해놓은 당신은 이미 고수의 반열에 올라섰다.
2 수학
경우의 수, 확률 - 조금 의심하는 것과 많이 의심하는 것의 차이란 없다
사랑에 빠지면 모든 노래의 가사가 자신의 이야기인 것만 같다. ‘한 사람을 위한 마음’이란 노래 중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라는 가사는 대부분의 연인들이 공감하는 부분이다. 연인의 행동에서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하면, 반드시 그에 걸맞은 일들이 눈으로 직접 확인되곤 한다.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을 나만 겪는다며 자책할 때가 있다. 발생할 확률이 극히 드문 일을 하필 내가 겪게 되었다는 생각에 더 재수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일들이 발생할 확률은 결국 1/2이라는 아주 큰 숫자다. 로또에서 1등할 확률, 즉 45개의 번호 중 1등 당첨 번호 6개를 고를 확률을 수학적으로 계산해보면 1/8,145,060의 결과가 나온다. 그렇지만 내가 1등에 당첨될 확률은 결국 1/2이다. 일어나거나, 일어나지 않거나, 두 경우밖에 없다. 인연을 만나게 될 확률이 하늘에서 깃털 하나가 지상에 분필로 그어놓은 선에 떨어질 확률과 같다는 이야기도 그렇다. 선에 떨어지거나 선 밖에 떨어지거나. 만나냐 만나지 않느냐란 문제밖에 없다. 상당히 심플하다.
의심도 마찬가지다. 90퍼센트 의심하는 것과 5퍼센트만 의심하는 것의 차이는 없다. 그냥 조금 궁금할 뿐이야, 라는 말을 가벼이 여기면 안 된다. 너를 절대 믿을 수가 없단 말과 결국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e메일이나 SNS의 비밀번호를 공유한다든지, 서로의 휴대폰을 전체 공개하는 일이 많은데, 그것은 웬만하면 피하는 편이 좋다. 그냥 알아만 놓는 것일 뿐 매일 들여다보진 않겠다는 다짐을 지키는 사람은 드물다. 의심이란 난치병이라서 면역력이 약해질 때쯤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낸다.
호기심은 인간의 문명을 이만큼이나 발달시킨 근원이었지만, 반대로 파멸의 원인이 분명하다. SNS를 통해 감상한 단편영화 한 편이 있다. 모 대학 영화학과 학생들이 만든 그 영화에선, 반 친구 B의 비밀을 알고 싶어 하는 학생 A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러닝타임 내내 음산한 분위기로 전개되는 그 영화는, 결국 비밀을 밝히기로 한 B와 비밀을 알게 될 A가 약속을 하는 장면에서 끝이 난다. 상처를 낸 엄지손가락으로 도장을 찍는 둘의 모습. “이렇게까지 해야 해?”라고 묻는 A에게 B가 대답한다. “응, 나 에이즈야.”
상처 난 곳을 단순히 스친다 해서 에이즈에 감염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이 단편영화는 사람의 호기심에 대한 경각심을 느끼게 해준다. 누군가의 비밀을 털어놓길 강요하는 것은 그 사람을 이해하고 싶다는 이타적인 목표 때문만이 아니다. 자신의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한 이기적인 욕심도 포함되어 있다. 연인끼리 의심을 하고, 사실을 확인하려는 행위도 마찬가지다. 그 호기심의 끝엔 사실 파멸이 기다리고 있다 해도 우리는 끊임없이 의심하고 그 의심을 증명해내려 한다.
그 원인의 하나는 불안감이다. 사람이 사랑에 빠지면 통증을 덜 느끼고 다른 사람과의 유대관계가 좋아진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하지만 그 부작용으로 불안감이 증가한다고 한다. 사랑의 감정으로 인해 생성되는 도파민과 옥시토신 등의 호르몬은 마치 약물중독과 같은 효과를 준다. 그러나 이 같은 약물의 부작용이 바로 불안감 증가인 것이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안 나고,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연기는 자연스레 공기 중에 소멸되고 먼지는 새 옷에도 묻어 있는 법이다. 의심은 개인의 이기적 심리를 통해 생성된다. 그래서 상대방을 통해선 완전히 해소시킬 수가 없다. 어차피 모든 사건이 발생할 확률은 모두 1/2로 동일하다. 사람에 따라 다른 것도, 감정의 깊이에 따라 다른 것도 아니다. 벌어지지도 않은 일을 상상하려 들지 말자. 연애는 현실이다.
양수와 음수 - 마이너스 영역에 있다고 느껴지면 무조건 0을 곱하라
별것 아닌 연인의 표현으로 기쁨에 취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반대로 상대방의 절실한 노력과는 상관없이 점점 감정이 식어가는 걸 느낄 때도 있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원점을 기준으로 한 수직선이 있다. 연애를 시작한 남녀는 수직선 위를 움직이게 된다. 대부분의 남자는 양의 영역에서 시작하여 음의 영역으로, 여자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 남자의 연애는 초기에 뜨거웠다 점점 식어버리지만, 여자는 그렇지 않다는 말은 이 때문이다. 양의 영역에 위치한 사람의 감정은 상대가 무슨 행동을 하더라도 플러스 무한대로 수렴한다. 반대로 음의 영역에 있을 경우엔 작은 행동 하나라도 마이너스 무한대로 수렴해 이별을 맞이하곤 한다. 기준이 되는 원점은 연인들마다 다르다. 누군가에겐 100일, 200일과 같은 시간적 의미가, 다른 누군가에겐 첫 싸움이나 첫 섹스와 같은 사건이 원점 역할을 한다.
상대방을 향한 내 노력이 어디론가 새어나가고 있는 기분이 든다면, 그럴 때의 상대방은 100% 음의 영역에 위치해 있다. 마이너스 상태의 불안감을 벗어나기 위해 시도하는 모든 행동은 상대에게 비호감을 살 확률이 높다. 이럴 땐 괜한 노력보단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이 낫다. 음수에 아무리 큰 양수를 곱해봤자 더 큰 음수가 만들어질 뿐이다. 하지만 0을 곱한다면 상대도 0이 된다. 음수보단 0이 양수 쪽에 가까우니, 0이 된 순간부터 다시 노력하면 된다.
연애를 하는 사람이 가장 예민해지는 순간은 두 가지의 경우다. 작업 중인 이성을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을 때 그리고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과 헤어지고 싶을 때다. 상대방이 좋아하는 것을 하나라도 더 찾아내고 싶은 사람과, 헤어질 구실을 찾기 위해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사람은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신경이 곤두서 있다. 전자의 경우엔 조그만 당신의 실수가 커다란 발견이 되기도 하지만, 후자의 경우 그걸 빌미로 헤어짐을 강요당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상대방이 예민해져 있는 이유를 찾지 못한다면 되도록 움직이지 않는 편이 안전한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동굴 속으로 숨으려 할 땐 그냥 놔둬야 한다. 사람에겐 숨는 본성만큼이나 사냥 본성이 존재하므로 언젠가는 결국, 스스로 동굴에서 빠져나오게 되어 있다. 그 시간을 굳이 견뎌내서라도 상대와 헤어지기 싫다면 당신은 언제나 동굴의 입구에 서 있기만 하면 된다. 동굴에서 빠져나올 때의 사람은, 마치 처음 태어나는 포유류와 같이 처음 눈에 띈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법이다.
3 사회
윤리
에로스적 사랑의 필요성: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만물이 물, 불, 공기, 흙의 네 가지 원소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네 가지 원소 이외에 물질의 특유한 성질인 건, 습, 온, 냉이 배합되어 만물이 형성된다고 주장했다.
누군가 말하길,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헌신적인 아가페적 사랑, 정신적인 사랑인 플라토닉 그리고 육체적인 에로스적 사랑’으로 이뤄져 있다고 했다. 아가페와 플라토닉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으므로 그것의 가치를 그저 상상하고 숭배할 뿐이지만, 에로스적 사랑에 대해선 저마다 정해놓은 경계가 있다. 정신적 사랑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이뤄지는 육체적 사랑은 시한부적 쾌락만 줄 뿐이라는 걸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를 좋아하는 감정에 에로스적 영역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포함시키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껏 만났던 그 누구보다 매력적인 외모를 가진 그녀를 보면서도 스킨십을 하고 싶단 생각을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후회스런 과거에 대한 지나친 부정이었는지,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완벽한 기쁨을 위한 인내였는지는 모르겠다.
그녀가 “넌 날 좋아하는 게 아니야.”라고 이야기한 이유에는 이러한 에로스적 사랑의 부재가 컸다. 나를 좋아한다면서 나와 손을 잡고 싶고 포옹하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는 게 어떻게 사랑이냐 물었다. 그럴 땐 내 감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애매하기만 했다.
미래를 꿈꾸는 것은 좋다. 하지만 지나치게 현실과 동떨어진 미래만 상상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제대로 현실과 마주할 자신이 없는 사람의 자기 위안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때, 에로스적 사랑의 핵심은 단순한 스킨십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다른 두 가지 형태의 추상적 사랑과는 달리, 눈앞에 보이는 상대방을 제대로 마주하는 것이다. 서로의 감정이 잘 교류되는지 확실히 알 수 없는 다른 행위와는 달리, 나의 자극에 따른 상대의 미세한 반응도 확실히 인지할 수 있다. 그래서 가장 직접적이고 현실적인 사랑이라는 것에서 그 의미를 갖는다.
절대주의와 상대주의 - 내가 하면 로맨스, 남에겐?: 그녀는 남자친구와의 데이트에 나를 종종 불러냈다. 그럴 때면 나는 남자 편을 적당히 들어주며, 친구들이나 할 수 있는 장난이나 말을 그녀에게 건넸다. 남자친구가 보내는 따가운 시선을 느끼면서도 모르는 척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런 날엔 반드시 그녀에게서 전화가 온다. “왜 내 남자친구는 널 친구로 생각 못하지? 어떻게 그런 자리까지 함께하는 니 마음을 의심하냔 말이야. 넌 내 친구 맞잖아. 그치?”라며 남자친구의 이해심을 원망했다. “남자는 원래 그래. 이해해줘야지. 그런데 너도 참 속상하겠다. 좀 더 이해심이 있다면 네가 더 행복할 텐데.”라는 식으로 적당히 그 남자의 흉을 섞은 교묘한 위로를 했다. 그럴 때면 나를 진심으로 친구라 생각하는 그녀의 우정에 미안하기도 했다. 그리고 고민한다. 남자친구가 있는 그녀의 연락을 받아주는 것은 과연 옳은 일일까? 나중에 그녀와 사귄다 해도, 나 같은 친구가 또 있을 거라 걱정하진 않을까? 그럼 나 역시 그녀와 싸울 게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