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으로 난 길
현길언 지음 | 자음과모음
사막으로 난 길
현길언 지음
자음과모음 / 2014년 8월 / 272쪽 / 12,000원
세철이 서울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은 실로 우연이었다. 그즈음 칙칙하고 습기 찬 무더운 날씨가 계속되고 있었다. 이런 계절이면 세철은 종종 이른 새벽에 서부두 방파제로 나가 영어 단어를 외운다. 이 방파제는 한밤에는 더위를 식히려는 산책객이, 이른 아침에는 공부를 하려는 학생들이 찾아드는 곳이다.
해가 뜨려는지 동북쪽 수평선 위에는 바다와 하늘이 온통 빨간 노을로 물들고 있다. 세철은 새삼 그 광경에 정신이 팔려 바라보았다. 그때 큰 군함이 느린 동작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순간 저 배를 타고 서울로 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리고 유원이를 배웅하기 위해 동부두 터미널에서 여객선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수건을 흔들던 일이 문득 떠올랐다. 몇 년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그녀를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오늘은 유독 그녀의 안부가 궁금했다.
유원이는 초등학교 때에 한국전쟁으로 피난 와서 세철의 고향집에서 1년 가까이 지냈다. 그녀는 전쟁 고아여서 의사인 규석의 아버지가 만든 보육원에서 어린아이들을 돌보면서 학교에 다녔다. 둘은 그때부터 친해졌다. 그런 그들이 다시 만난 것은 세철이 읍내 중학교로 진학해서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세철은 서울로 가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그리고 아침 식사 자리에서 숙모에게 서울을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그다음 날 세철은 생전 처음 제주 목포 간 연락선을 타고 섬을 빠져나갔다. 꿈에만 그리던, 그 서울로 직접 가게 된 것이다.
다시 만난 사람들
도시는 온통 사막이었다. 여름 저녁 무더위가 바로 사막의 열기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 중에 아는 얼굴이 하나도 없다. 고향에서는 문 밖에만 나가도 모두 아는 사람들이다. 같은 학교 학생이 아니더라도 나를 알아본다. 세철은 문득 외로움을 느꼈다.
서울역 광장 시계탑 앞에서 두 시간 넘게 기다렸다. 틀림없이 ‘7월 2일 19시 서울역 착 마중 바람 세철’이라고 전보를 쳤다. 손목시계를 봤다. 9시가 지나고 있다. 초조했다. 열차가 도착하는 기적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이 개찰구에서 쏟아져 나오자 마중 나온 사람들이 반가워했다. 그들이 유원이로 또는 형으로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걱정하지 않았다. 오늘 못 만나면 내일 아침에 주소로 찾아가면 된다. 파출소에 가면 길을 안내해준다는 말을 숙모로부터 들었다.
한편으로 형이 일부러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도 들었다. 내가 서울로 올라오는 것을 달갑지 않게 생각할 수도 있다. 유원이도 그럴 것이다. 제주에서 지낼 때와는 달라졌을 것이다. 벌써 2년이 넘었다. 그녀는 서울 일류 여고의 학생이고, 나는 시골, 그중에도 나라의 맨 끝 섬, 제주의 학생이다. 피난지에서 가졌던 마음이 지금까지 남아 있을까? 편지를 주고받기는 했지만, 내가 더 열심히 편지했기 때문에 마지못해 답장을 했을 것이다. 나 혼자만 유원이를 좋아하고 있는 걸까?
목포에서 열차를 타고 자리를 잡고 앉았을 때에는 꿈꾸는 기분이었다. 며칠 전까지도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일이다. 어떻게 이런 결정을 하게 되었는지 자신도 모를 일이었다. 주일 저녁 예배 후에 집으로 돌아와 공부를 하려는데, 유원과 마지막으로 수요 예배를 드리던 날이 생각났다. 그날 밤 목발을 짚은 형과 정 선생의 이중창을 들을 때의 그 감격, 예배 후에 유원을 초등학교 천막 숙소 앞까지 데려다주던 일이 바로 어제 일처럼 되살아나면서 가슴을 울렁거리게 했다. 그리고 부두 방파제에서 연락선 선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면서 울먹였던 자신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유원이가 보고 싶었다. 2년 반이 흘렀다. 여고생이 된 그녀는 어떻게 변했을까?
처음으로 목포로 가는 여객선을 탔을 때는 두렵기도 했다. 뱃전을 부여잡고 음식물을 모두 토해내다가 문득 이렇게 고생을 하며 서울로 가는 자신이 대견스러웠다. 제주를 빠져나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서울에 가서 아주 살까? 형도 서울에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마쳤는데, 내가 그러겠다고 하면 할머니는 거절하시지 않을 것이다. 역으로 마중을 나오겠지. 형이랑 정 선생, 유원이도 오겠지. 규석이는 나오지 말았으면 좋겠다. 차창 밖으로 지나치는 풍경을 보면서 그러한 생각을 되풀이했다.
광장은 어둑해졌고 사람들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지게꾼들, 목판 장사치들, 거지들, 할 일 없이 어슬렁거리던 사람들도 바지런히 움직였다. 전차가 몇 차례 지나갔다. 기적 소리가 들렸다. 개찰구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이상하다. 전보를 쳤는데 왜 마중을 나오지 않을까? 혹시 전보 주소가 잘못된 걸까? 아니면 마중 나오고 싶지 않아서인가?
세철은 땀이 촉촉이 젖은 편지 봉투를 바지 뒷주머니에서 꺼내 보았다. 마지막에 받은 유원의 편지도 꺼내 주소를 다시 확인했다. 배가 고팠다. 식당으로 가서 우선 저녁 요기라도 해야겠다. 세철은 전찻길로 향했다. 그때 중년 여자가 다가왔다. “마중 나올 사람이 안 나왔어? 길 건너에 깨끗한 하숙집이 있는데 가자꾸나. 거기서 저녁도 해주니까, 요기부터 하고…….” 숙모 나이쯤 된 아주머니가 측은한 눈길로 세철이를 쳐다보면서 친절히 말했다.
“형님이 마중 나오기로 했는데, 좀 늦나 봐요.” 세철은 증거를 보이듯이 형의 편지 봉투를 내보였다. “아마 전보를 못 받은 모양이지. 이제 한밤인데 찾아 나설 수도 없으니 우리 집에 가서 저녁 먹고 쉬었다가 내일 낮에 내가 우리 집 바로 옆에 있는 파출소에 말해서 찾을 수 있도록 해줄게.” 아주머니는 길 건너를 가리키며 앞장섰다. 세철은 못 이기는 척 뒤따라갔다. 전찻길 건너 남대문 쪽으로 가다가 오른편 골목으로 들어서는데, 웬 청년 둘이 아주머니에게 다가왔다. “우리 집에서 일 보는 아이들인데, 내일 아침에 이 주소 갖고 집을 찾아줄 게다.” 아주머니는 뒤를 돌아보면서 세철을 그 청년들에게 소개했다. 한 사람은 형 나이 또래인데 키가 훌쩍 크고 한여름인데도 군화를 신었다. 다른 한 사내는 키가 작달막하고 머리도 고등학생처럼 짧게 깎았는데 몸이 탄탄하게 보였다.
세철은 그들을 따라 골목길로 들어섰다. 거기에는 윗도리를 거의 벗은 여자들이 담배를 피우면서 히히덕거리고 있었다. 세철은 기분이 이상했다. “왜 안 따라와?” 앞서 가던 키 작은 사내가 눈을 부릅뜨고 노려봤다. “너 서울이 처음이니?” “처음은 아니야. 여러 번 왔는데, 형님네가 이사 간 모양이야. 우리 형이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다니는데…….” “의과대학 다닌다면 시골에서 부자로구나. 여비 많이 가져왔니?” 사내가 세철의 팔목을 확 잡아 담벼락으로 몰아붙이면서 눈을 부라렸다.
숙모는 돈을 함부로 가지고 다녀서는 안 된다며 세철에게 전대를 만들어 허리에 차도록 했다. 세철은 그 위에 바지를 입고 다시 군 혁대를 찼다. 서울에는 깡패가 많으니까 역전 부근에서 조심하라는 숙모 말이 생각났다. “야, 왜 그래. 어머니에게 혼나려고. 옥자에게 맡겨.” 그 말에 키 작은 사내는 온순해졌다. 세철은 사내를 따라 골목 안으로 들어가다가 작은 나무 대문 앞에 멈췄다. 갑자기 여기가 마귀의 소굴처럼 생각되었다. 얼른 뒤돌아 문 밖으로 나왔다. 그때 마침 골목으로 들어서던 키 큰 사내가 발을 거는 바람에 땅바닥에 곤두박질을 쳤다.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산길을 홀로 가는데 집채만 한 바윗덩이가 위에서 굴러 내려왔다. 세철은 그것을 피하여 달아나는데도 바위는 맹수처럼 쫓아왔다. 소리를 질러도 입이 열리지 않았다. 험악한 꿈이었다. 방 안에는 불이 꺼져 있는데, 창틈으로 들어오는 달빛에 옆에 누워 있는 여자가 보였다. 세철은 벌떡 일어났다. 어쩔까 하다가 우선 방을 나가는 것이 급하다고 생각해서 얼른 문밖으로 나왔다. 꿈속에서처럼 힘을 다해 뛰었다. 큰길로 접어드는 모퉁이에 파출소가 보였다.
“사람 살려줘요!” 세철은 파출소로 들어가면서 소리를 질렀다. 경관이 고개를 들어 ‘뭐냐’는 듯이 쏘아봤다. “시골에서 어젯밤에 올라왔는데, 깡패들에게 끌려가서 짐을 다 뺏기고…….” 세철은 우선 폭행을 당한 일과 갖고 있었던 물건들과 돈을 다 털린 사실을 말했다. 경관은 세철을 나무 의자에 앉히고는 양면괘지와 철필을 꺼내 놓았다. “이름과 주소, 생년월일, 다음에 어젯밤 당했던 일을 육하원칙에 의해 말해봐, 학생.” “예, 이름은 명세철, 주소는 제주도 남제주군…….” “명세철? 이거 학생 것이지?” 경관은 책상 위 한편 구석에 있는 세철의 학생증을 보여주었다. 세철은 그제야 바지 뒷주머니를 뒤져보았다. 지갑이 없어졌다. 그런데 자기 학생증이 파출소 경관 손에 있다는 것이 이상했다. 그제야 그놈들이 모두 털어갔다는 것을 알았다.
“이건 순 엉터리군. 대질심문을 해야겠는데…….” 세철이 쓴 진술서가 엉터리라는 것이다. 경관은 아주머니에게 거짓말로 꾀어서 하숙집으로 끌고 왔느냐고 물었다. 아주머니는 고개를 흔들었다. “시골에서 올라온 처지가 불쌍해서 우리 집에서 저녁을 먹이고 그냥 하룻밤 지낸 다음에 내일, 그러니까 오늘 집을 찾아주려고 했어요.” “공도 모르고 거짓말로 아주머니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었군. 그다음 옥자, 너는 저 학생과 잤어?” “예.” “화대는 받았어?” “못 받았어요.” “아닙니다. 저는 저 여자를 모릅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세철은 그렇게 말하면서 여자를 쳐다보았다. 여자는 세철의 눈길을 피하며 먼지 낀 유리창을 쳐다보고 있었다.
서울역 파출소에서 가회동 파출소로 연락이 갔다. 가회동 파출소로부터 연락을 받은 세민은 바로 파출소로 가서 세철과 통화를 했다. 파출소를 나온 세철은 다시는 파출소를 쳐다보고 싶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그 포주와 깡패들에게 당하지 않도록 잘 처리해주는 것 같았는데, 가만히 생각하니 모두들 짜고 한 것 같았다. 저편에서 폭행으로 고소를 한 것이나, 입을 맞춰 내가 돈을 내게 만든 것이나, 파출소와 한통속이 아니고는 그렇게 처리할 수 없었다. 겉으로는 봐주는 척했으나, 결국 세철의 여비를 다 빼앗기 위한 수작이었다. 저편에서는 아무것도 손해 본 것이 없었다.
한 시간 정도 기다리자 형과 비슷한 사람이 다가왔다. 얼굴은 형이 틀림없는데, 두 다리가 말짱했다. 약간 기우뚱거리긴 했으나 전처럼 한쪽 다리가 없어 바짓가랑이를 펄럭이면서 걷던 형은 아니었다. “따라와!” 세민은 동생을 보는 순간 반가웠으나 모질게 말했다. 그제야 세철은 형을 알아봤다. 언젠가 편지에서 의족을 한다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창경원에서 내린 형은 앞장서 서울대학병원 후문으로 들어갔다. 여기가 의과대학이로구나. 형이 공부하는 학교를 구경시켜주려는 것인가 생각했다. 병원 현관으로 들어선 세민은 진료 접수 창구에서 간호원과 이야기를 하더니, 일반외과로 갔다. 세철은 의사와 형이 주고받는 말을 들으면서 성병 검사를 한 거라고 짐작했다. 갑자기 형에 대한 분노가 치밀었다. 그 깡패들보다 형이 더 미웠다. 동생의 말을 믿지 않는 형이 남처럼 생각되었다. 그동안 형은 너무 변한 것 같다. 사람들은 왜 그러지? 그 하숙집 아주머니나 그 여자도 이해할 수 없다. 그렇게 사람들 마음과 입이 한순간 변할 수 있는 건가? 지금 형도 그들처럼 보였다.
“형, 나 어디 하숙집 구해줘. 아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 않아.” “뭐? 하숙집을 구해달라고?” “그래. 어른들도 만나야 하고, 유원이랑 규석이랑, 난 도저히 이 얼굴로 그들을 만날 수 없어. 내가 집에 연락해서 돈을 부쳐달라고 할 테니, 하숙집 좀 구해줘. 이 상처 나을 때까지만…….” 세철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혼자 사는 것이 자유스럽다는 것을 알았다. 의대생들을 상대로 하숙을 치는 집인데, 하숙생들이 잠시 고향으로 내려가서 집 안은 조용했다. 마흔이 넘은 여자주인에게는 고3인 민철이라는 큰아들과 딸 그리고 중학생 아들이 있다. 남편은 한국전쟁 때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다. ㄷ자형 기와집에 방들이 나란히 있는데, 세철이가 그중 한 방을 두 주일 동안 쓰기로 했다.
벌렁 돗자리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는데 정 선생 얼굴과 유원의 얼굴이 나타났다. 형의 얼굴이나 고향에 계신 어머니와 할머니 모습은 떠오르지 않았다. 좀 전에는 아는 사람이 없고, 간섭할 사람이 없어서 자유롭고 한가하게 생각되었는데, 이제는 그 한가롭고 자유로움이 모두 달아나버렸다. 치료를 다 받으면 그 집으로 가야 한다.
세상으로
문학의 밤 행사장인 유원의 학교 소강당은 학생들로 꽉 찼다. 세철은 모여든 학생들을 보면서 이곳 학생들은 문학에 대한 관심도 대단하다는 것을 알았다. 2학기 때부터 학예부장으로 일하게 된 유원은 규석이와 같이 사회를 보게 되어 벗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갑자기 실내가 어두워졌다. 잔잔한 음악이 흐르더니 조명을 받으면서 한 여학생이 무대 중앙으로 나왔다. 유원이었다. 이어 규석이가 교복 차림으로 의젓하게 무대 중앙으로 나와 유원과 나란히 섰다. 두 사람은 모인 학생들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앞에 앉은 여학생들이 소곤거렸다. “쟤들은 친구 사이래. 부모님들도 다 알고 있대.” 그 소리를 들은 세철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리고 싶었다. 나란히 서 있는 유원과 규석의 모습은 볼수록 화가 치밀었다. 내가 왜 이러지? 속으로 자신을 나무라면서도 기분은 어쩔 수 없었다.
세철은 정 선생을 만나서 고향으로 내려가겠다고 말했다. 저녁 후에 툇마루에 앉아 바람을 쐬고 있는데 정 선생이 찾아와서 세철의 옆에 앉았다. 그때 순간적으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혹시 유원이와 다퉜니?” “아니에요. 제가 왜 유원이와 다퉈요?” “너를 섭섭하게 했구나. 요즈음 학교 행사 때문에 바쁘다고 그러던데…….” 정 선생도 세철의 마음을 알았다. 내려가겠다면 보내줄 수밖에 없다. 졸업하면 어차피 서울에 올라올 테니 그땐 생각도 서로가 달라지겠지.
서울역에는 호남선 11시발 열차를 타려는 사람들의 줄이 늘어서 있는데, 시계를 보니까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았다. 옥자라는 여자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 왜 그날 자기에게 거짓말을 했는지 따지고 싶었다. 문학의 밤 행사를 마친 후에 혼자 집으로 걸어간다고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그 골목에 있는 것을 보고 당황했던 일이 되살아났다. 그 여자의 슬픈 얼굴을 다시 보고 싶었다.
세철은 더욱 수척해진 옥자의 모습에 다소 당황했다. 내가 왜 이 시간에 여기 왔지? 하는 생각이 들면서 되돌아갈까 하는데, 옥자가 잡는 바람에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날 내가 여기서 아무 일도 하지 않았지? 같이 잠잔 것도 아닌데, 거짓말하고, 그리고 다 그 양아치들과 짜고 내 돈을 빼앗은 거 아냐? 난 오늘 누나에 대해서 뭔가 알고 가야 해. 내가 고향으로 내려가는 것도 다 포기하고 찾아왔단 말이야.” 세철은 준비하지 않은 말을 해버렸다. 담배를 입으로 가져가던 옥자가 멈칫하더니 세철을 멍청하게 쳐다봤다.
옥자는 문득 고향에 두고 온 남동생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집안 식구들 얼굴이 떠올랐다. 자기 때문에 매일 술만 퍼마신다는 아버지 얼굴도 떠올랐다. 눈물이 마를 날이 없는 어머니 얼굴이 떠올랐다. 여자가 손가락 사이에서 타들어가는 담배를 깡통 재떨이에 비벼 끄고는 벌떡 일어났다. “내가 왜 이 신세가 되었는지 알아? 사내를 사랑했기 때문이야. 그 잘난 사랑 때문이야. 너는 아마 어떤 계집애에게 배신을 당했겠지? 그 여자와 멀어졌거나. 그래서 나를 그 여자 대신으로 생각하고 있지. 그 여자는 올려다보기가 힘든데, 나는 내려다봐도 되니까, 그렇지? 다시는 이 바닥에 나타나지 마.” 여자는 화를 버럭버럭 냈지만 그 말 틈에는 울음기가 찐득하게 끼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