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결전
우영수 지음 | 역사의아침
최후의 결전
우영수 지음
역사의아침 / 2013년 5월 / 465쪽 / 12,000원
등장인물 소개
정지상 - 서경 출신의 문신이자 시인이다. 묘청ㆍ백수한과 함께 동이족의 전통사상인 풍류대도를 신봉하며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유교적ㆍ사대적인 성향의 개경 세력과 대립했다. 서경을 새 수도로 삼고 금나라를 정벌해야 한다는 묘청의 난에 적극 가담하여 칭제건원(稱帝建元)을 주장했으나 결국 개경 세력의 토벌군에게 패한 뒤 참살되었다.
김부식 - 고려 중기의 유학자ㆍ역사가ㆍ정치가로 이자겸과 묘청의 난을 진압하며 고려 정계의 일인자로 올랐다. 경주 출신으로 유학과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신봉했으며, 유교적 대의명분으로 묘청의 난을 진압한 후 끊임없이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려 했다. 관직에서 물러난 후 사대주의에 입각한 역사서라 평가받는 《삼국사기》를 편찬했다.
묘청 - 승려 출신으로 동이족의 전통을 이어받은 풍류대도와 유불선을 아우르는 민중 사상을 신봉했다. 칭제건원과 금국정벌을 주장하며 서경에 신궁인 대화궁을 짓고, 고려의 수도를 서경으로 옮겨 천하통일을 이루려 했으나 그 움직임이 실패로 돌아가자 1135년 난을 일으켰다. 결국 개경 세력에 의해 반역죄로 몰려 처단되었지만, 서경천도운동은 자주 정신에 입각한 민족적 기상을 표출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인종 - 고려 제17대 왕으로 15세에 외조부 이자겸의 옹립을 통해 즉위했다. 이자겸의 난과 척준경의 숙청을 계기로 실권을 잡았으며, 묘청의 서경천도와 칭제건원론, 금국정벌론 등에 찬성했다. 하지만 우유부단한 성품 탓에 자신의 뜻을 끝까지 관철하지 못하고, 김부식 등 개경 세력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했다.
윤언이 - 고려 북방을 개척한 윤관의 아들로 호는 금강거사다. 주역에 능통했던 그는 김부식과 반목해 정지상과 한때 뜻을 같이했으나, 서경에서 묘청의 난이 일어나자 김부식의 막료로 출정해 서경을 함락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정지상과 내통했다는 탄핵을 받고 끝내 좌천되는 굴곡진 삶을 살았다.
김부철 - 김부식의 동생으로 묘청의 난이 일어나자 장기 전략책을 올려 서경성을 진압한 인물이다. 형과 함께 송나라를 동경하여 송나라 시인 소동파 형제의 또 다른 이름인 소식(蘇軾)ㆍ소철(蘇轍)을 따라 김부식ㆍ김부철로 개명을 할 정도로 골수 사대주의자였다.
임완 - 송나라 사람으로 고려에 귀화한 인물이다. 과거에 급제하고 예부원외랑을 지냈으며, 국자사업지제고에 올랐다. 천재지변이 일어나 조서를 내려 시무책을 건의하라는 인종에게 묘청의 대화궁 건설을 반대하는 장문의 상소를 올리는 등 서경 중심으로 정권이 옮겨가는 것을 극렬하게 반대했다.
칭제건원의 대의
“수고하시었소!”
인종이 최측근인 김안을 치하하고 나섰다. 종래 보기 드문 쾌활한 목소리였다.
“신이 수고랄 것까지는 없사옵니다. 이제 새 궁궐에 드셨으니 고려의 영광을 위한 폐하의 웅지를 새롭게 펴시옵소서.”“그리하리다. 고맙소!”
왕은 나이가 어렸고 거듭되는 정변으로 지쳐 있었다. 척준경의 방화로 개경의 궁궐이 잿더미가 되어버린 지 한참이 지난 후에야 마침내 서경에 대화궁 신축을 명하고 4개월 만에 완공된 대화궐(大化闕)로 들어온 오늘, 인종의 가슴은 뭔가 탁 트인 듯 시원하고 상쾌했다. 개경파들은 대화궁의 신축을 거세게 반대했다. 그러나 대화궁은 인종에겐 특별한 궁궐이었다. 묘청이 말한 대화세의 명당자리에 자리 잡은 궁궐이란 사실도, 옛 고구려의 왕성이었던 곳이라는 점도 중요했지만 무엇보다도 인종 자신에겐 논란 속에서도 자신이 결정을 내려 건축한 첫 작품이었다는 점이었다.“묘청선사께서도 수고하시었소!”
인종이 옆에 있던 묘청을 바라보며 치하했다. 누구보다도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묘청이었다.“폐하! 감축드리옵니다. 새로운 땅에 새로운 왕업을 펼치셔서 강성한 고려를 만드시옵소서.”
“물론 그렇고 말고요. 앞으로 묘청선사께서 부디 부국강병을 위한 묘책을 제시해주시오.”
인종이 배석해 있는 문무백관들을 바라보며 훈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대화궁의 완공 기념식을 벌이고 있는 건룡전은 신하들과 서경의 핵심 인사들로 발 놓을 틈이 없었다.“폐하! 오늘같이 상서로운 날 신이 한 가지 제청을 드릴 일이 있사옵니다.”
묘청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인종의 주목을 끌었다. 많은 이들이 기대 섞인 표정으로 묘청의 등장을 바라봤다. 그러나 한편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던 김부식의 얼굴은 이내 붉어지기 시작했다. “오늘 옛 고구려의 왕성에 대화궁을 다시 신축하였습니다. 이는 고려가 명실상부한 고구려의 계승자요, 고구려의 기상을 표방할 적자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묘청의 청원이 시작됐다. 김부식은 고구려를 꺼내 드는 묘청이 못내 거북했다.
“오늘 대화궁의 완공을 기점으로 해 고려가 황제국의 나라임을 천하에 공포하시옵소서[稱帝]. 태조와 광종대 이후로 끊겨 있던 연호를 지으시어[建元] 고려가 천하의 중심 국가임을 만방에 고하소서.”“불가합니다!”
묘청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김부식이 막고 나섰다.
“궁궐을 짓는 일은 내정만으로 감당할 일이기에 불가피하게 진행한 것입니다. 그러나 칭제건원은 대내외적인 상황을 살펴야 합니다. 폐하께서는 요망한 자의 요설에 현혹되지 마시고 안팎으로 나라 일을 균형 있게 살피시옵소서.”김부식의 말이 끝나자마자 수많은 신하들이 한목소리로 칭제건원을 반대하고 나섰다. 그렇지 않아도 서경파의 독주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사람들이 많았다. “누가 요망한 자라는 것이오?”
시끄러운 분위기를 뚫고 정지상이 나섰다. 일순 침묵이 흘렀다.
“나라의 기강을 새롭게 하고 천하에 으뜸인 국가임을 선포하자는 것이 어찌 요망한 말입니까?”어수선한 분위기만큼 정지상의 목소리도 날을 세우고 있었다.
“현실을 무시하고 허장성세를 부려 나라를 망하게 하거나 곤경에 처하게 하면 그게 요망한 것이지 달리 또 무엇이 그보다 더 요망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김부식이 목소리에 날을 세우며 정지상을 바라봤다.
“어찌 칭제건원이 나라를 곤경에 처하게 한다고 하십니까?”
“남으로 물러났다고는 하나 대륙엔 아직 송이 있고 북으로는 새로 일어난 여진의 금이 그 기세를 날로 뻗고 있는 상황입니다. 하필 이럴 때 칭제건원해서 그들을 자극하는 것은 화를 불러들임입니다.”“그럼 어디 한번 들어나 봅시다. 그리 주장하는 데 무슨 근거가 있을 것이 아니겠소?”
인종이 갑자기 설전 속으로 치고 들어왔다. 즉위 이래 그리 강하게 신하들의 말을 자르고 나선 예가 없었다. 김부식이 물러나자 묘청이 앞으로 나섰다.“오해가 있으셔서 그렇습니다.”
묘청이 조용한 목소리로 좌중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모두의 시선이 묘청에게로 향했다.
“그 하나는 우리가 바라보는 우리 자신들에 대한 오해이며, 그 둘은 제가 말씀드리는 칭제건원의 참뜻에 대한 오해입니다.”“자신들에 대한 오해라니……. 그 무슨 의미요?”
인종이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으며 묘청을 바라봤다.
“고려를 바라보는 우리 자신들의 잘못된 생각을 의미합니다. 지금 여진의 금이 고려를 압박하고는 있으나 외교적인 압박에 국한되고 있는 이유는 내심으로 고려를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더라도 금은 쉽게 고려를 공격하지 못할 것입니다.”“그 무슨 소리입니까? 송을 공격해 수도 개봉을 함락시키고 남으로 밀어낸 금입니다.”
듣고 있던 임완이 나섰다.
“그건 그렇지요. 그런데 송은 지금은 금에게 망해버린 거란의 요에게도 항복한 전례가 있습니다. 이는 송이 약해서 그런 것입니다.”송나라에서 귀화한 임완의 얼굴 표정이 일그러졌다. 송의 문치주의로 인해 군사력이 약화되었고, 이것이 초래한 송의 비극이었다.“그러나 고려는 다릅니다. 거란이 수차례 침략했으나 한 뼘의 땅도 얻지 못하였습니다. 또한 여진이 금을 건국하기 전에 그들의 근거지를 공격해 여진을 정벌했던 것도 고려입니다. 거란의 요와 여진의 금이 외교적으로 고려를 압박하고는 있으나 진작 싸움을 걸어오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고려가 강성한 국력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처음과는 다르게 신하들이 침묵하고 묘청의 입을 주시했다.
“생각해보십시오. 여진의 금이 송을 압박하고는 있다 하나 천하는 지금 대륙의 남송과 여진의 금과 고려가 삼분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남송의 문화와 경제는 성하나 문치주의에 빠져 군사력이 약하고 여진의 금은 군사력으로는 강성하나 문화적ㆍ경제적으로는 아직 허약할 뿐입니다. 이제 고려를 보십시오. 문화적으로 보나 군사적으로 보나 고려는 강국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우리 자신입니다. 거란의 침공 당시 대동강 이북을 넘겨주자고 주장했던 그런 나약한 인식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거란의 침공을 격퇴한 강국입니다.”김부식을 비롯한 유학파 신하들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그들이 따르고 있는 선배들의 잘못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아서였다.고려 성종 때 성종과 최승로의 지나친 중국화 정책, 유교화 정책은 고려의 기강을 유약하게 만들었다. 이때 거란이 침략해 들어오자 대부분의 신하들이 들고 나왔던 것이 서경 이북 땅을 거란에 양도하여 평화를 사자는 것이었다. 이지백과 서희의 강력한 반대가 없었다면 유학파 신하들은 돈을 주고 평화를 샀던 송을 따랐을 것이었다.“여진 또한 내심으로는 우리 고려를 두려워합니다. 저들을 오랫동안 지배했고 저들이 고려의 국경 안쪽에 돌 하나 기왓장 하나 던지지 않겠다며 맹서하고 9성을 찾아간 것이 바로 엊그제의 일이옵니다. 이를 명심하셔야 합니다. 우리를 나약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나약한 우리들의 정신입니다.”주위가 조용해지자 인종이 다시 물었다.
“그럼 두 번째 오해가 있다는 것은 무엇이오?”
“여진의 금을 정벌하자고 하는 것은 그것이 반드시 군사적인 정복만을 의미하지 않음에 주목해야 합니다.”“아니 타국을 점령하는 데 군사적인 방법이 아니라 하면 달리 다른 방도라도 있소이까?”
인종의 표정이 상기되어 붉어졌다.
“여진의 금이 강국이 되었다고는 하나 오래전부터 고려의 군사적 힘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금은 문화적으로 고려에 한참 미치지 못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고려가 금국을 평정하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신의 힘을 믿지 않기 때문이며 자신의 힘을 과소평가해서입니다. 폐하! 거란 침공 때 있었던 망령된 패배주의에서 반드시 벗어나시옵소서!”“말뜻은 이해 안 되는 것이 아니나 실현성이 없는 주장이옵니다.”
“그렇지 않사옵니다. 폐하!”
묘청이 미소를 지어 보이며 여유롭게 김부식을 통박하고 나섰다.
“지난번 강독했던 ‘풍류대도’가 말하는 옛 조선의 사례를 다시 한 번 더 살펴보고 현실에 적용할 가치가 있습니다.”“그 무슨 말이오?”
“고대 조선은 제정일치의 사회였다고 우리의 옛 역사가 말하고 있습니다. 조선의 통치자 단군왕검이란 이름이 이를 말해줍니다. 단군이란 하늘에 제사 지내는 사제의 우두머리를 의미합니다. 또한 왕검(王儉)이란 지상의 정치적 제왕임을 의미합니다. 이는 고대 단군왕검의 조선이 단군과 왕검이 하나였던, 즉 정치와 종교가 하나였던 국가사회였음을 의미합니다. 천하가 혼란해지자 군사적 힘을 바탕으로 한 제후의 통치력만이 주목을 받게 된 것이 오늘의 천하이옵니다. 이런 혼돈의 시대에 문화적인 힘을 바탕으로 하늘에 제사 지내는 전통을 다시 바로 세우십시오. 세상을 다스리는 데는 무력만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옛 종교적 전통을 다시 세우시어 지상의 왕이 갖고 있는 통치력과 합한다면 그것이 바로 단군왕검을 이 땅에 다시 재현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고려가 바로 그 둘을 합칠 나라라는 의미요?”
“그렇습니다. 폐하! 폐하께서 대화궁을 중심으로 하늘에 제사 지내는 풍속을 일으키시고 옛 통치체제를 복원하신다면 지상의 왕검들이 고려의 단군왕검이신 폐하께 무릎을 꿇을 것이옵니다.”“실현성이 없사옵니다. 요망한 가설입니다. 속지 마시옵소서!”
김부식과 임완이 앞으로 나서며 강력하게 읍소했다. 그러나 묘청은 물러서지 않았다.
“실례가 있사옵니다. 거란의 요와 여진의 금이 송을 점령했음에도 송을 황제국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은 무슨 연유 때문입니까? 그것은 송이 천자국임을 자부하고 있어서입니다. 이제 대화궁에 그런 전통을 다시 세우셔서 바로 그 천자국이 중국의 송이 아니라 고려임을 천하에 알리십시오.”거란과 화친을 맺은 송은 자신을 형으로, 요를 동생으로 삼았다. 그러나 송은 매년 거란에 비단 20만 필과 은 10만 냥을 바쳐야 했다. 송은 서하에도 그랬고, 금에도 돈을 주고 영토를 할양했다.***
서경파의 질주가 계속되자 김부식의 경주파는 돌파구를 찾고 있었다. 그 결과 앞세운 사람이 인종의 장인 임원후였다. 임원후는 왕실의 안위를 위해 고한다며 무릎 꿇고 피를 토했다. 정치는 균형이라고. 진실은 모습 없는 허구요 만들어진 허상이라고. 왕의 운명은 날카로운 칼날 위를 균형 잡고 걸어야 할 숙명이라고. 임원후는 부왕 예종 대의 윤관의 예를 곱씹어보라고 고했다. 여진을 정벌했던 윤관이 정치적으로 숙청당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북방을 향한 열정은 열정으로 끝나야 한다고. 열정은 이상이지 현실이 아니라고. 끝까지 살아남는 자들은 다 이유가 있다고. 열정을 태운 자들은 순간에 타버린다고. 열정이 타버리면 검은 재는 바람에 날려버린다고. 인종이 지켜야 할 것은 형체가 없는 북방의 꿈이 아니라 고려의 종묘사직이라고.김부식 또한 무릎을 꿇고 사자후를 토해냈다. 현실은 냉혹한 희생을 요구한다고. 현실을 인정하고 질서를 받아들이라고. 조선의 꿈은 오래전에 사라져버린 한낮의 꿈이었다고. 왕이 따라야 할 것은 진실이 아니라 현실이라고. 그리고 현실은 아주 조금씩 변화하는 것이라고. 그래서 먼 옛날 있었던 것은 순간 다시 잡을 수 없는 미망이라고. 꿈을 이루려면 수천 년을 기다리며 천천히 나가야 한다고.
천도의 좌절
“그게 사실입니까?”
김부식의 표정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예! 어제 묘청이 서경에서 돌아와 은밀하게 폐하를 알현했습니다.”
임원후의 목소리 또한 비장했다. 서경에서 개경으로 돌아온 묘청이 인종을 알현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득달같이 김부식을 찾아온 그였다.“서경으로 가는 날이 3일 후로 잡혔답니다.”
한참 동안 눈을 감고 침묵하던 김부식이 입을 연 것은 촛불이 반의 반쯤 타고 난 후였다.
“저들이 말한 천지개벽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황도를 서경으로 옮기고 칭제건원해서 옛 조선의 역사와 전통을 다시 세우는 것 말입니다.”“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한참을 듣고만 있던 임원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차피 마주 보고 달리던 마차가 아니겠습니까?”
비장감이 느껴질 만큼 김부식의 목소리가 굳어 있었다.
“이제는 피할 수 없게 되었소이다. 막아야죠. 폐하의 서경행을 막아야 합니다.”
김부식의 목소리엔 피할 수 없다는 운명과 해내야 한다는 다짐이 처절하게 범벅이 되어 있었다.***
수창궁을 나선 인종의 어가는 서쪽의 선의문을 향해 나갔다. 의장병으로 구성된 신기대가 앞장섰고, 그 뒤를 왕의 친위군인 용호군이 따랐다. 개경을 떠나 새로운 황도를 향해 가는 행렬답게 발걸음이 힘찼고 경쾌했다. 문신들의 행렬을 따르던 묘청과 정지상의 표정도 무척이나 밝아 보였다. 지세를 다한 개경을 떠나 새로운 서경으로 황도를 옮기는 뜻깊은 날이었다.국왕의 일행이 국자감에 다다르자 학생들이 거리 옆으로 무릎을 꿇은 채 열을 맞춰 인종을 맞이했다. 일행 중에 한 사람이 일어나 무릎을 반쯤 굽힌 채 큰 목소리로 간하기 시작했다. “폐하의 서경행을 감축드리옵니다. 지덕이 쇠한 개경을 떠나 새로운 기운이 발흥하는 서경으로 가시니 이제부터 고려의 앞날이 흥할 것입니다.”